기갑전기 헤로스 외전 - 쥬마리온 (8)

NEOKIDS 작성일 12.04.16 15: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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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바쁘게 흩어지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붉은 갈기 여관에 돌아왔을 때는 저녁의 어스름이 내려오고 있었다. 집집마다 호롱불이 켜졌고, 여느 때 같으면 하루의 일을 끝낸 막일꾼들로 북적거려야 할 여관의 1층 앞은 다이슨의 발표로 인해 또 한산하기만 했다.

"이틀째 장사를 공치다니, 나름 울상이겠군."

미소를 지으며 들어간 데미앙에게 제일 먼저 눈에 밟힌 것. 그것을 보며 어제 저녁과 같은 묘한 기분을 또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낮익은 무기. 몇 번이나 자신을 해하려 날카로운 끝을 짓쳐오던 붉은 색의 장창, 슈파스. 그것을 팔크람이 손질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 뿐만이 아니라 붉은 색의 갑주와 부츠도 꺼내 이것저것 손질하느라 일을 벌려놓은 상태였다.

"왔나?"

아무렇지도 않게 같이 사는 친구라도 맞이하는 마냥 팔크람에겐 아무런 기색이 없었다. 숫돌로 천천히 날을 갈고, 분을 뿌려 닦아내고 다시 한 번 숫돌질을 하며 농담하듯 말했다.

"역시 숫돌은 크리시나 공국 것이 제일이었어."
"무슨 바람이 분거야."

데미앙의 나지막한 말이 서늘하게 되돌아왔다. 그 기운에 팔크람은 슈파스로부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보시다시피."
"버렸던 게 아니었나?"
"애마 라크슈나가 늙어죽은 것만 빼면, 버린 것은 없지. 그것도 버렸다고 할 순 없고."
"자네 제정신인가!"

데미앙은 다가가서 책상을 내리치며 소릴 질렀지만, 팔크람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예전의 근력 같은 게 아직 남아있을거라 생각하나? 나가서 일합도 견디지 못하고 목이 떨어질게 뻔한데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거야!"

팔크람은 슈파스의 손질을 마저 끝마치고 천천히 그것을 내려놓았다.

"내 정신은 멀쩡하다네."

어디서 이야기해야 할 지 잠깐 생각하는 듯 하던 팔크람은 말을 이었다.

"나는 어릴적부터 크리시나 공국에서 기사로서 살아왔네. 말이 기사였지, 실은 전투와 피에 중독된 전사나 다름없었어. 3차의 대륙간 전쟁 중 하나를 참가했고 마지막엔 자네 나라의 부대와도 싸웠지. 자넬 친구처럼 생각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야. 전장의 그 분위기와 모든 일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네."
"이젠 그럴 필요가 없잖은가."
"그게 내 삶이었네. 거기에서만 내가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어. 그래서 가는 거야."

팔크람은 떨리는 손을 들어 데미앙에게 보여주었다.

"다이슨에게 얘길 듣고 나서 계속 이 지경이야. 두려운 게 아니라 기뻐하는거지. 몸이 벌써 반응을 하고 있어."
"나이를 먹었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 것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었냐고."
"자꾸 그렇게 말하니까 나도 묻겠네만."

팔크람이 화제를 돌렸다. 그것도 데미앙에게 가장 민감한 부분으로.

"자네가 가져욌던 그 보따리.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지."
"그건......"
"결국은 자네도 나와 같지 않은가. 젊고 힘찼던 그 때의 편린을 끌어안은 채로 방황하던 것 아니었냐고."
"자넨 여기서 정착하고 있잖은가."
"정착? 이게 정착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전투의 이야기만 들어도 기뻐 손이 떨리는 이런 내 지금 모습이?"

팔크람은 슈파스를 집어들고 일어나 넓은 공간 쪽에서 갑자기 휘두르기 시작했다. 데미앙이 팔크람의 그런 모습을 보는 것도 오래간만이었다. 언제 봐도 유려하고 멋졌던 동작. 힘은 사라졌으나 예기가 충만하여 더 날렵해진 동작들. 10년 전에 주변으로 피보라를 흩뿌리던 그 동작들이었다.

그러다 창 끝이 데미앙의 목으로 와 가까운 끝에서 멈추었다.

"자네도 어쩔 수 없어. 자네의 삶이 결국 나와 같은 길이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데미앙도 팔크람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흐른 것일까. 데미앙은 한숨을 내쉬며 창끝을 손가락으로 밀었다.

"이렇게까지 바보일 줄은 몰랐군."
"칭찬 고맙네."

자신의 방으로 올라온 데미앙은 보따리에 눈길을 고정시켰다. 지금이라도 저것을 내다버릴 수 있을 것이었다.

가르바의 말처럼,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었다. 그러자면 도망쳐야 했다. 자신이 그 답답한 귀양지로부터 뛰쳐나왔듯이, 이번엔 답답한 과거들로부터 그렇게 해야 한다는 사실을 데미앙은 알고 있었다.

꾸러미를 움켜쥐고 데미앙은 창 밖으로 그것을 던져버리려고 했다. 보따리의 묵직함이 팔근육을 당기고 짓눌렀다. 조금만 더 힘을 줘서, 그것이 저 바깥으로 흩뿌려지는 순간 모든 것은 달라질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 꾸러미는 여전히 데미앙의 발치에서 구르고 있을 뿐이었다.


다이슨은 집무실에서 돌아온 파발의 전갈을 받았다. 전갈의 내용은 심각했다. 제국 중앙의 군대가 움직이는데 드는 시간상으로는 때에 맞춰 갈 수 없으므로, 칼레아 시가 알아서 막으라는 내용이었다.

다른 시에 청한 도움에 대한 대답 내용도 한결같이 내용들이 제 코가 석자인 것 뿐이었다. 제국이 탄생한 지 10여년, 아직은 신생이라면 신생인 국가였으나 속은 떡고물에 대한 관심과 안정된 체제 속에서의 기득권 지키기로 썩어있었다.

다이슨은 온갖 미사여구로 치장된 화려한 겉봉의 편지들을 다시 훑어보았다. 제국의 시민으로서 충심을 다해 보위하고 방어하라는 둥, 초개같이 목숨을 버려 황제폐하의 명예를 높이라는 둥, 도움될만한 문장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지경.

다이슨은 편지뭉치들을 구겨쥐곤 전부 쓰레기통에 집어쳐 넣은 후 담뱃대에 불을 붙였다.

피어오르는 담배연기 사이로 그의 결심은 굳어져 갔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일이기도 했기에, 그는 담배를 서둘러 피우고는 다시 편지를 썼다. 현재 칼레아 시의 시민들 중 피난해야 할 자들을 각 도시로 보낼 것인데 그동안의 처리를 요망한다는.

그것만이라도 다른 도시들이 받아들이기를 희망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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