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갑전기 헤로스 외전 - 쥬마리온 (9)

NEOKIDS 작성일 12.04.20 11:5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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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가 전시체제로 들어가면서 모든 물자의 흐름은 제한되었다. 칼레아 시청은 모든 재정을 풀어 물자를 사들였고, 일단 피난해야 할 노약자나 아이들에게는 제국금화를 일정량 지급했다. 물론 다른 곳에서 자리를 잡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한 금액이었지만 그거나마 줄 수 있는 상황이라도 감지덕지해야 했다.

나머지 남자들은 모두 성의 방책을 강구하고 방어책을 세웠다. 시 외곽의 집들을 무너뜨려 신속한 진군을 힘들게 만들었고 2차 도랑에는 송곳같은 말뚝과 해자들을 박고 위를 땅처럼 위장해 완벽한 함정으로 만들었다. 일반적인 공사인 것처럼 위장하느라 제약이 어느 정도 있긴 했어도, 시의 인원 모두가 달라붙자 시일을 꽤 잡아먹을 그 일들은 일시천리로 진행되었다.

그런 3일 후, 피난민들부터 이동시켜야 할 날의 아침이 밝았다.

노인과 부녀자들이 제각기 수레나 보따리를 들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피난민임에도 그들의 발걸음은 힘찼고, 사랑하는 연인들은 모두 저마다 지킬 보장이 없는 약속들을 하며 머리카락이나 반지들을 주고 받았다.

그런 한 편으로 팔크람은 한 쪽에서 민병대를 조직하느라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그의 명성은 칼레아 시의 여러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었고, 그가 붉은 갈기 여관의 주인이라는 사실에 놀라움과 흥분을 감추지 못하면서 그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개중에는 마치 전쟁을 다 이기기라도 한 것처럼 들떠있는 자도 있었다. 훔족의 표식이 이제 100케타 정도까지 다가왔다는 정보도 돌았다. 육안으로 그들이 그것을 세우는 것이 보였다고도 했다.

데미앙은 그런 와중의 한 켠에서 피난민들의 행렬을 훑어보고 있었다. 혹시나 메리니와 버니가 가고 있나 싶어서였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보아도 애들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함을 느끼면서도 자신이 잘 보지 못했겠거니 하고 다시 여관으로 돌아온 데미앙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했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느낌이었다.

데미앙의 방문이 벌컥 열린 것은 그 때였다.

"뭐해요, 여기서?"

메리니가 청소도구를 들고 떡하니 버티고 서 있는 모습을 보고 데미앙은 눈을 휘둥그래 굴렸다.

"너.......너?"
"내 이름도 벌써 까먹었어요? 메리니 윌킨슨! 자, 이불이랑 물건들 좀 챙겨야 하니까 나가주세요."
"피난 간 거 아니었냐?"
"하아....."

메리니가 한심하다는 듯이 데미앙을 바라보았다.

"버니를 데리고 갈 수 있는 데가 어딨다구요. 거기다 여긴 나름 정이 들기도 했고."
"하나같이........죄다......."

데미앙이 고갤 숙이고 중얼거리는 걸 제대로 들으려던 메리니는 데미앙의 서슬에 깜짝 놀라버렸다.

"왜 이렇게 멍청한 인간들 뿐이냐고!"

데미앙은 급히 챙길 것을 챙기고 일어나서 메리니의 손목을 붙잡았다.

"가자."
"어딜요?"
"피난가자고. 버니는 내가 챙겨서 데리고 갈 테니까, 같이 빨리 가자. 아직 늦지 않았어."
"싫어요."

메리니가 딱 잘라 말하며 데미앙의 손을 뿌리쳤다.

"안 가요."
"말 들어!"
"싫다구요!"

메리니가 소릴 질렀다.

"안갈 거에요. 칼레아 시를 지킬 거라구요."
"네가 뭘할 수 있다고 그래!"
"많아요!"

메리니는 데미앙을 맞쏘아보며 말했다.

"부상자 치료, 잡다한 물건들 옮기기, 밥 나눠주기, 얼마든지 할 수 있다구요!"
"그게 문제가 아냐! 이 도시가, 성이 흔적도 없이 쓸려버릴 거라고!"
"상관없어요!"

메리니는 굽히려 하지 않았다.

"나같은 애가 어디 가서 뭘 할 수 있겠어요. 다시 빈민가에서 몸이나 팔 수밖에 없겠죠. 아저씨한테 몸판 것도 밥이나 먹고 살려고 눈 딱 감고 한 번 했던 짓이에요. 스케루니 할아버지가 그런 사정 알고 돌봐주지 않았다면 난 완전히 쓰레기 창녀가 됐겠죠. 약값도 다른 도시는 엄청 비싸단 말이에요. 여기 아니어도 죽는 건 매한가지라구요! 우리 버니는......버니는........"

메리니의 목소리가 메어갔고 눈에선 구슬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데미앙은 어떤 말도 더 이상 할 수 없었고, 메리니는 힘차게 눈물을 팔뚝으로 슥슥 닦아낸 후 침대의 이불을 챙겼다.

"빨리 챙겨서 성 안의 민병대에 갖다줘야 해요. 안도와줄 거면 비켜요."
"버니는 어딨어."
"성 안으로 아저씨들이 옮겨줬어요."
"약은?"
"다이슨 시장님이 챙겨준 것이 있긴 한데, 그 약은 특별한 거라서 재고가 많이 없다고 했어요. 2일 정도 분량 밖에......"

메리니는 입을 다물고 이불과 침대 매트리스의 홑청만 열심히 걷어냈다. 그렇게 한 곳으로 걷어놓다가 한 켠에 있는 데미앙의 보따리를 보며 다가갔다.

"아저씨 거에요?"

데미앙이 대답하지 않는 사이 메리니가 덥석 손을 댔고, 데미앙은 버럭 소릴 질렀다.

"만지지 마!"

그 서슬에 놀란 메리니의 손이 보따리 귀퉁이를 잡아당겼고, 그 보따리가 풀어지면서 내용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순백의 갑주. 정성들여 세공한 제노스 제국 특유의 문양 위로 수많은 흠집들이 나 있었다.

얇은 철판을 세 개 덧댄 후 섬세하고 강한 체인메일을 깔고 그 위에 질긴 가죽을 덧댄 후 다시 얇은 철판으로 마무리한, 제국을 통틀어 세 개밖에 만들어지지 않은 갑주. 가슴받이를 비롯한 모든 부위에 똑같은 공법이 사용되어 가벼우면서도 에지간한 가이스나드의 일격 따윈 우습게 튕겨내버리는 갑주, 스팅거스였다. 하나는 스승 길가메쉬가, 또 다른 하나는 제국 황제 헤르게니아 1세가 가지고 있는.

그리고 어깨 쯤에는 그 위에 황제가 친히 새겨준 황제의 인장문양과 글귀가 있었다.
-제국의 힘, 그 자체인 자-

그 갑주를 둘은 한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아저씨.....제국군이었어요?"

메리니가 말하는데도 데미앙은 무시하고 보따리를 다시 주섬주섬 여몄다. 메리니는 재차 캐물었다.

"제국군이었냐구요."
"옛날에.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다."

메리니는 데미앙의 서슬과 무시에도 가만히 데미앙을 지켜보며 머뭇거리고 있다가, 데미앙의 옷깃을 붙잡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진 모르겠지만......"
"서투르게 위로하려고 하지 마라."

데미앙이 밀어내려는 데도 불구하고 메리니는 붙어있었다.

"이런 말 한다는 거 염치없고 그렇지만....."

메리니의 목소리가 울먹거리고 있었다.

"우리 버니를 지켜주세요.......부탁이에요......."

메리니는 데미앙의 등 뒤에서부터 와락 껴안았다. 셔츠 등 부분을 적셔오는 촉촉한 눈물의 기운. 데미앙은 그것을 느끼면서 눈을 질끈 감았다. 한동안의 시간. 메리니는 퍼뜩 떨어져서는 이불을 챙겨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창밖의 풍경은 다들 메리니처럼 그렇게 분주하고도 살풍경했다. 세간살이를 부수고, 살아온 집을 부숴 길을 막고, 휘날리는 먼지와 파편들로 도로는 아수라장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데미앙은 양손에 마법력을 돌려보았다.

한 쪽에서는 검은 기운이, 한 쪽에서는 히얀 기운이 마치 증기처럼 솟구쳐 올랐고, 데미앙은 물끄러미 자신의 그런 양 손을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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