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광적인 환영 속에 성 안으로 들어온 후 데미앙은 다이슨을 만났다. 다이슨 자신도 무장을 한 채로 데미앙을 반겼다.
"참전하지 않으시겠다더니?"
다소 농담삼아 던진 말이지만 데미앙은 웃음조차 비치지 않고 바로 원하는 것을 말했다.
"지도를 봐야 겠습니다."
둔영에서 군사들과 팔크람, 다이슨, 데미앙은 모두 지도를 중심으로 둘러섰다. 데미앙은 미간을 찌푸리며 지도의 두 곳을 지적한 후 물어봤다.
"이 곳과 이 곳의 방어는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데미앙이 지적한 곳은 성 좌우 양측의 우회로였다.
"방어는 세지 않습니다만, 우회로가 그리 넓지 않고 도랑들이 충분히 저지할 수 있어 기본적인 방어태세 외의 별다른 것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큰일이군."
데미앙은 잘라 말하고는 지도 위에 늘어둔 훔족의 병력 표시를 하는 나무토막을 움직였다. 우회로를 몇 개의 나무토막들이 둘러싼 가운데 나머지 병력들이 그 우회로를 통과해 배후로 빠져나가는 모양새로. 그렇게 바로 중앙의 수도방향을 향해 진격하는 것으로. 그것을 본 다이슨 역시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훔족은 눈 앞의 적을 몰살시키기 전에는 절대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 않는 습성이잖소."
"지금의 훔족이 3차 대륙전쟁까지의 그 훔족이라고 아직도 생각합니까."
데미앙은 팔크람을 한 번 쳐다본 후 말했다.
"라인할트 공께서도 이미 진언했겠지만, 훔족의 지휘관도, 전술도 달라진 상황입니다. 이번에 모든 병력을 보낼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적은 수의 선발대만 축차투입을 한 걸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녀석들의 전술목표는 여기를 공격해보고 여의치 않을 경우 우리를 포위한 후 그 병력 외에는 우회해서 명백하게 제노스 제국 중앙 수도 헤라이토스로, 큰 손실 없이 향하고자 하는 겁니다."
데미앙은 지도의 도랑 부분을 가리키며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가리킨 곳은 데미앙과 팔크람이 싸우던 그 지점이었다.
"또한 이 지점을 골랐다는 것도 의미심장한 부분입니다. 도랑의 공사를 서둘러 끝낸 곳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는 거죠. 만약 그들이 이 도랑을 제대로 정찰했다면, 뛰어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겁니다. 그들이 보낸 머릿수도 1차도랑과 2차도랑 사이에서 병력들의 행동이 원활할 정도로만 보낸 겁니다."
다이슨은 신음을 흘렸다. 물론 데미앙의 말은 확인할만한 부분들이 존재하긴 했지만 지금까지는 앞뒤가 맞아들어갔다. 최악의 경우를 상정해보는 것도 지금은 필요한 법이었으나, 대비를 하기에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럼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일단은 궁수를 이 두 포인트에 지금 집중적으로 이동시켜야 합니다."
데미앙은 2차도랑과 성이 가까워지는 양 옆 우회로의 제일 좁은 곳과 가까운 성벽 망루 2곳을 골랐다.
"저 정도의 병력이면 우회한다 해도 이 곳에서는 순간적으로 밀집도가 높아지게 될 겁니다. 포위하는 병력들까지 몰려들면 더욱 그렇겠죠. 그리고 돌을 더 멀리 던질 수만 있다면...."
"그 점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일이면 완성되는 기계 2대가 있습니다. 가르바 님께서 남기신 설계도로 만들었습니다. 시간이 좀 더 많았다면 많이 만들 수 있었겠습니다만....."
다이슨의 눈짓에 타레크가 한 쪽 천막의 가림막을 제꼈다. 거기엔 비밀리에 천막을 씌워 만들고 있는 제작 공창의 천막이 모두의 눈에 들어왔다.
"페르마이어 경과 라인할트 공은 양익에서 놈들의 우회를 최대한 막아야....."
"방어적인 싸움으로는 승패가 결정될 수가 없습니다."
데미앙은 다이슨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적들은 반드시 전면에서 양분되어 우회할 겁니다. 지휘가가 누구이든 간에 느슨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 우리에겐 절호의 기회이자 잘만 하면 지휘가까지도 제거할 수 있는 기회죠. 결과적으로, 우회의 흐름을 끊고 포위를 와해하면서 적을 교란하는데 최상의 포인트는 여기입니다."
다이슨은 데미앙이 지도에서 짚은 지점을 보며 눈을 부릅떴다. 그 곳은 칼레아 성의 바로 정면, 훔족이 집결해있는 곳과는 최전방인 위치였다. 그것도 성밖 주위의 건물들이 무너진 지점에서 바깥이었다.
"여기로 간다는 건 자살이나 다름없소! 중앙에서 오는 군사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전멸할 게 뻔하오! 적의 병력들이 여기서 역진을 해오면 고립된단 말입니다. 거기다 추가병력을 주려고 해도 누가 지원을 하려 하겠소!"
"일단, 한 명 지원하겠습니다."
누군가 나서는 바람에 데미앙을 비롯한 모두는 그를 돌아보았다. 그는 로카치오였다.
"두 분과 함께 싸울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면 큰 영광이겠습니다."
로카치오는 제법 경직되고 잘 훈련받은 군인처럼 자세를 잡고 말하고 있었다. 다이슨은 그에게 물었다.
"자네는?"
"저는 전 백귀3연대 7대대 소속, 현 민병대 제3부대장 로카치오 필레오니스라고 합니다."
"보낼 수 없네."
다이슨의 딱 부러지는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로카치오는 계속 말을 이었다.
"미천하나마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들을 필요도 없네. 죽으라고 보낼 수는 없어."
"죽기를 원하고 있다면 어떻습니까."
"뭐라고?"
다이슨의 눈썹이 꿈틀댔지만 로카치오는 주눅들지 않았다.
"제 나름대로 무인이라 자부하며 살아왔습니다만, 저 역시 무인으로서 죽을 자리는 고르고 싶습니다. 그리고 지금 상황과 크게 상관은 없는 얘기입니다만....."
로카치오는 데미앙의 눈을 한 번 보면서 말을 이었다.
"페델리니 총리대신의 개들이 온 것은 몇몇 분은 아시리라 믿습니다. 페르마이어 경과 싸운 것을 봤는지 그들이 접근해서 꼬치꼬치 캐묻고는 거액을 줄테니 자신들과 일해보지 않겠냐고 하더군요. 물론 그 놈들은 싸울 생각도 안하고 피난민들에 섞여 도망갔습니다만."
로카치오의 말에 둔영의 분위기가 순간 얼음덩어리처럼 되어버렸다.
"미천한 것이 입에 풀칠이나 해보자고 싸움터를 전전해 왔습니다만, 예전의 제국은 이런 식의 지랄이 판을 치는 곳은 아니었습니다. 백귀3연대에 있으면서 제가 배운 건 그런 협잡이나 정치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죽을 자리를 잘 골라라, 하는 거였고 전 그 자리가 여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현실은 결국, 누군가의 희생 없이는 아무것도 안되지 않습니까. 그걸 제가 했으면 좋겠다는 것 뿐입니다."
여전히 경직된 자세로 말을 마친 로카치오는 쉬어 자세로 돌아갔고, 다이슨은 지도에 눈을 고정한 채 생각을 해보는 눈치였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이 작전은 다이슨 시장님이 허락하든 하지 않든 할 것입니다."
팔크람 역시 데미앙의 눈짓에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없군."
다이슨은 짧게 항복선언을 한 후 지시를 내렸다.
"지금부터 지원병을 모으게. 라인할트 공이 맡고 있던 군사의 지휘는 내가 직접 나서겠다. 되도록 상황을 여기서 들은대로 정확히 알려주어야 한다. 페르마이어 경과 라인할트 공이 최선두에, 나머지 지원병은 로카치오 부대장의 지휘 하에 움직인다. 두 분과 부대장은 진형과 지휘의 상세한 부분을 내게 전달해 주시오."
다이슨의 말에 모두는 고개를 끄덕이고 각기 바쁜 걸음으로 둔영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