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갑전기 헤로스 외전 - 쥬마리온 (13)

NEOKIDS 작성일 12.05.02 14:5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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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침 아무도 없는 우물가에서 녹색의 피로 물든 망토와 스팅거스를 벗어놓고, 망토부터 빨기 시작하고 있는 데미앙의 등 뒤를 누군가 호되게 쳤다.

"저리 비켜요."

메리니가 큰 나무통을 들고 온 채 싱긋 웃고 있었다. 데미앙의 손에서 망토를 낚아챈 메리니는 나무통에 그걸 집어넣고 물을 붓기 시작했다. 데미앙은 입맛을 다시며 한쪽 옆으로 비켜서는 주저앉아 브라이거트에 묻은, 절어서 굳으려는 피를 닦아냈다.

"훔족의 피란 건 이렇게 생겼군요."
"식욕을 떨구기엔 제격이지."

물이 어느 정도 부어지자 곧장 메리니는 통 안으로 발을 담궜다. 치마를 들춰 잡아 허옇고 쪽 고른 다리와 허벅지가 드러났다. 데미앙은 잠시 그 다리를 응시하다가 메리니가 고개를 홱 돌리자 바로 검에 눈길을 떨구었다.

"은근히 빠지질 않네."

메리니는 망토를 지근지근 밟아대기 시작했고 데미앙은 조심스럽게 타박을 던졌다.

"살살 좀 해. 비싼 거야."

메리니의 투덜거림과 발길질이 더 심해졌다. 그러다 문득 메리니의 동작이 완전히 멈췄다. 그덧도 모른 채 데미앙은 브라이거트의 손질에 열심이었고, 고개를 숙인 채, 머뭇거리다 메리니는 결심했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저, 때가 됐는데 생리가 안 나와요. 헛구역질도 나오고."

데미앙의 검을 닦던 손이 나무토막처럼 굳어버렸다. 왠지 이불을 걷어갈 때부터 미묘하다 싶은 행동들이 한꺼번에 떠올라 미릿속을 휘저었고, 메리니의 등을 보면서 데미앙은 입을 벌린 채 할 말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그 돌아선 등에 아무 것도 해줄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가 검을 내려놓고 고작 내뱉은 말이 이랬다.

"나란 놈은......어디까지 바보짓을 해야..."

그런 데미앙의 면상에 물이 끼얹어졌다. 메리니가 손으로 뿌린 것이었다.

"그래도 잔인하게 내 애 맞냐 따위의 소리는 안해서 다행이네요."

한동안의 침묵이 흘렀다. 데미앙의 얼굴과 메리니의 손에서 물방울이 투명하게 빛나면서 떨어져 내렸다.

"또 싸우게 되면......"

메리니는 다시 등을 돌리고 입을 열었다.

"반드시 살아돌아와야 해요. 이거는.......그래, 명령이에요."

데미앙의 속에서 뭔가 울컥했지만, 그래서 메리니를 가서 으스러지게 껴안고 싶었지만 데미앙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더 이상의 희망도, 달콤함도 나중에 자신이 살아돌아오지 못했을 때 더 큰 아픔의 기억이 되어 남을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던 탓이다.

"따르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데미앙은 다시 검을 갈기 시작하며 말했다.

"최우선으로 고려할께."


위험을 알리는 소리들이 시끄러워 진 건 데미앙이 스팅거스에 묻은 피를 닦아내고 정비까지 마친 상태였다. 서둘러 갑옷을 걸치고 성벽 위로 향했을 때는 많은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며 그 광경에 놀라고 있을 때였다. 데미앙도 순간 그 광경을 보며 외쳤다.

"모두 성벽 아래로 내려가!"

사람들이 앞다투어 성벽 아래로 내려가 성벽 위의 통로들이 완전히 비어 버리기도 전에, 얼마 지나지 않아 바람을 휭 하고 가르는 무시무시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들리자마자 성벽으로부터 진동과 굉음이 들려왔고, 돌조각들이 온 사방으로 튀었으며, 큰 돌이 그냥 통째로 떨어지기도 했다.

훔족의 병사들이 돌덩이를 던지고 있는 것이었다.

훔족의 병사들은 짝을 이뤄 돌을 던지고 있었는데, 두어 명이 그냥 물건 들어 던지듯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오고 있었고, 성벽의 외곽은 그런 돌의 충격력에 조금씩 깨져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돌에 맞아서 처음으로 인명피해가 나오기도 했다. 돌에 깔려 으스러진 시체조각들이 여기저기로 흩뿌려졌고, 절망의 비명과 공포의 절규가 성 여기저기서 울려왔다.

그 공격이 잠깐 뜸한 틈을 타서 데미앙은 성벽 위로 올라가 상황을 다시 보았다. 중앙의 일부는 던질 돌을 다시 준비하고 있었고 양익의 군사들은 점점 산개의 범위를 넓히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 상황을 다이슨도 목격했던지 다시 진형을 갖추라는 전령이 떨어졌다. 데미앙은 그 움직임이 무슨 뜻인지 금방 알아챘다. 자신의 예측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었다.

서둘러 달려갔을 때 데미앙의 눈에는 적어도 200여명의 지원병들이 모여있었다. 민병대는 철저하게 골라냈음에도 흡족한 수준은 아니었다. 다들 데미앙과 팔크람의 위력에 반한 호전적인 자들일 뿐 오랫동안 실전을 겪어온 자들도 아니었다. 그나마 훈련이라는 면에서는 일반인들보다 더 나은 수준이었을 뿐.

그들은 로카치오의 지휘 아래 완전히 준비를 마친 상황이어서 다행히 훔족의 움직임에는 맞춰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팔크람도 슈파스를 고쳐잡고 이번엔 말을 타지 않은 채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왜 이렇게 늦었나?"
"말은 생략하자고."

성문을 열라는 전령을 보내고, 문이 열리기 시작하면서 훔족의 진군이 일으키는 모래먼지가 바람을 타고 입속으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할 정도였다. 지원병들의 어깨가 완전히 굳어 있는 것이 보이자 데미앙은 호령을 했다.

"몸이 굳어 있으면 일찍 죽는다! 뛰어!"

200여 명의 지원군과 팔크람, 그리고 데미앙은 그렇게 성벽 밖으로 쏟아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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