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들은 너른 평원의 한가운데로 달려 나갔다. 그 움직임을 보며 양익으로 벌려나가던 훔족의 군사 일부가 각 양익으로부터 일부가 떨어져 나와 데미앙들이 있는 곳으로 진격해왔다. 질서정연한 모습으로 보건대 이런 상황도 이미 염두에 넣고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데미앙은 군사를 멈추게 하고 로카치오에게 지시를 내렸다.
"병사들을 원형진으로 하되 뒷사람들이 앞사람을 버티게끔 진형을 갖추게. 훔족이 부딪혀 올 때 충격력이 상당할 테니까. 우리는 양익의 전방에서 그 충격력을 어떻게든 상쇄시켜보겠다."
"알겠습니다."
"내가 가르쳐준 단점은 고쳤나?"
로카치오는 대답 대신 짧은 검세를 취했고, 그 자세를 보며 로카치오가 연습을 열심히 했다는 것을 전달받은 데미앙은 미소를 지었다.
"보람이 있군."
팔크람은 눈을 잠시 감고 호흡을 가다듬은 후 앞을 노려봤다. 거대한 먼지의 안개 속에 다가오고 있는 훔족의 그림자 다수를 보며 그의 피는 옛날의 전장을 다시 떠올리고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환희라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였다. 데미앙이 팔크람의 어깨를 잡으며 물었다.
"기뻐보이는군."
"이를 말인가."
"내 신호에 같이 움직이세."
"말만 하라고."
병사들이 원형진을 급하게 갖추는 새 훔족의 진군속도는 더 빨라지고 있었다. 마른 침을 삼키며 병사들은 공포감을 최대한 억누르고 있었다. 서로가 밀어주고 있는 어깨를 통해 널을 뛰고 있는 심장의 고동이 땅의 울림보다 더 크게 전달되어 오는 걸 느끼며 그들은 방패와 병장기들을 움켜쥐었다.
훔족의 걸음 기준으로 100여 보 정도까지 그들이 다가왔을 때, 데미앙은 팔을 쳐들며 함성을 질렀다.
"우와아아아아아!"
그 함성을 모든 병사들이 같이 질렀지만 훔족의 발소리에 묻혀버릴것만 같았던 그 때. 데미앙이 팔크람에게 신호를 내렸다.
"지금!"
데미앙과 팔크람이 양옆으로 동시에 튕겨나가며 훔족의 정면으로 쇄도했다. 검과 창이 동시에 번뜩이며 허공을 찢는 순간, 훔족의 머리 몇이 같이 허공을 허우적댔다.
검과 창과 마력이 정면에서 부딪히며 충격력을 줄였음에도 훔족의 진격력은 생각만큼 줄어들지 않았다. 용케도 둘의 공격을 피한 훔족의 일단이 병사들에게로 향했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곤봉을 휘두르며 진형으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충격을 막아라!"
방패를 부여잡으며 로카치오는 소리쳤다. 곧이어 훔족의 곤봉과 몸체가 그들에게 쇄도하는 순간, 방패를 잡은 자들은 둔중한 울림과 지독한 흔들림을 맛봐야 했다. 하지만 뒤에서 촘촘히 기대주고 있는 전우들로 인해 가까스로 막아낼 수 있었다.
그 때를 노려 로카치오는 외쳤다.
"지금이다! 공격전환!"
방패가 치워지면서 검과 창이 일제히 쇄도해 훔족 30여 명의 몸체로 달려들었고, 그 몸체들은 고스란히 꿰뚫려 서 있는 채로 생을 마감했다. 뒤이어 오는 훔족들에게 그 30여 구의 시체는 자연스럽게 울타리가 되어주었다. 로카치오는 훔족의 시체에서 가이스나드를 비틀어 빼내고, 뽐어져 나오는 녹색 피를 고스란히 맞아가면서도 다음 지시를 내렸다.
"난전!"
원형으로 둘러쳐진 시체의 울타리를 기점으로 병사들은 조금씩 전진하며 병장기를 휘둘렀다. 그러나 훔족은 여전히 막강한 상대였다. 그들이 곤봉을 휘두를 때마다 명치 께를 직격당해 피를 토하거나 뼛조각, 내장들을 흩뿌리며 날아가는 병사도 있었고, 투구를 썼어도 머리가 바람 빠진 고무공처럼 짓눌려 터지는 병사도 있었다.
난전이 거듭되면 될수록 병사들의 수는 줄어들어 가는 것 같았지만, 그것도 초반의 일이었다. 점점 병사들에게서 대적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솟아오름과 함께, 로카치오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도움이 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서너 명이 뭉쳐서 한 놈을 대적해라! 저들은 대각선으로 휘두르기를 잘 하지 못한다! 사각을 노려서 옆구리나 다리를 노린 후 명줄을 끊어라!"
백귀3연대 출신의 저력이 여실히 쏟아져 나오는 순간들이었다.
양익의 포위망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다이슨은 기계와 함께 활 부대를 대기시켰다. 성벽 위의 통로로는 활부대가 배치를 마쳤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기계와 돌무더기들이 준비를 마쳤다.
양익이 보아두었던 포인트까지 다가오자, 역시 진군의 속도가 느려지기 시작했다. 다이슨은 전령을 내렸다.
"공격 개시!"
처음은 활 부대의 시작이었다. 시위가 팽 하고 공기를 가르는 소리만큼이나, 화살들도 공기를 경쾌하게 갈랐다. 한 순간에 쏟아지는 수백 대의 화살에 훔족의 진군이 갈팡질팡하기 시작했다. 막는다고 했지만서도 2차도랑이라는 장애물과 산맥 언저리에서 전진을 방해하는 수목선에 걸려 그들의 진형은 미처 정비가 되지 않았다. 그 틈을 노려 다이슨은 기계의 작동을 명했다.
기계, 투석기라고는 할 수 있으나, 이것은 조금 색달랐다. 보통 예전의 투석기는 큰 돌을 던져 성벽의 파괴를 도모하는 것이라는 개념이 지배했고, 훔족이 무식하게 돌을 집어던진 것도 그 개념을 받아들인 때문이었다. 하지만 가르바가 설계한 이 투석기는 큰 돌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작은 돌들을 산탄처럼 흩뿌릴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이것은 두 가지 면에서 유용했는데, 첫째는 상대적으로 큰 투석기보다 연사가 가능하다는 점이었고, 둘째로 큰 돌이 없는 성 안에서의 농성전에 적합하다는 것이었다. 작은 돌들이라면 건물에 쓰인 것들만으로 성 안에는 산더미 같았으니 말이다. 이런 상황까지 모두 고려한 가르바의 지혜가 빛나는 설계였다.
기계가 날려보낸 돌들이 흩뿌려지면서 효과는 단번에 나타났다. 아무리 훔족이라 해도 무시무시한 운동에너지를 가지고 날아오는 벽돌을 무시할 정도로 강할 순 없었다. 화살을 맞고 뒹굴거나 머리를 얻어터지거나 사지 중 한 곳에 돌을 맞고 상태가 나빠진 놈들은 수목선 뒤로 피하기가 일쑤였고, 그 바람에 포위망은 커녕 우회조차 힘든 상황이 되어갔다.
상황을 지켜보며 다이슨은 긴장으로 미쳐 내쉬지 못했었던 숨을 한꺼번에 내쉬는 것처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훔족의 양익 진격은 소강상태로 들어가고 있었다.
한편, 1차도랑과 2차도랑 사이에서 분전하고 있던 별동대는 역시 전력의 차이를 크게 상쇄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도랑에 적을 밀어 쳐넣는 것도 점점 시체가 쌓여가면서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었고, 힘에서도 밀리고 있었지만, 훔족의 전력은 끝이 보이질 않았다.
이래서야 처음에 생각했던 적의 지휘관을 유도해 낸다는 목적은 이루기도 전에 물거품이 될 것 같았다. 이래저래 무엇 하나 맞아 들어가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을 피부로 느끼며 데미앙을 비롯한 모두는 악전고투했다.
그러나 그런 악전고투가 아예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 실제로 상당한 머릿수의 병사를 정면 부대가 없애고 있었고, 양익의 훔족 진영도 상당 부분 흐트러졌으며, 군사들의 흐름이 쳇바퀴를 돌고 있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다행인 일이었다. 중앙군이 언제 올 지 모르지만 그 때까지 버티고 남아 있을 수 있다면 역전세를 노려볼 법도 했다.
그 난전의 상황에서 팔크람이 데미앙 옆으로 다가와 어깨를 잡았고, 하마터면 데미앙은 브라이거트를 휘둘러 그를 쳐버릴 뻔 했다.
"조심하라고!"
"저길 보게!"
화를 내는 데미앙의 얼굴을 잡아 돌리며 팔크람은 어느 한 곳을 주시하게 했다. 훔족 특유의 높은 사람이 타는 가마, 그 위에 앉은 자. 훔족의 무리 한 가운데였다.
"저기까지 빛의 화살을 쏠 수 있겠나?"
"주문영창의 시간도, 거리도 무리야."
"여기서 20케타(500미터) 정도만 더 전진하면 가능한가?"
"그럴지도."
"해보겠네."
팔크람은 옆에서 달려드는 놈의 팔 하나를 두동강내면서 대답하고는 로카치오 쪽으로 달려갔다.
"로카치오, 여기서 20케타만 더 전진하세!"
"헉, 지금 헉, 제정신입니까?"
로카치오가 아직은 덜 성숙된 검격으로 훔족 한 놈의 갈비뼈 부근을 뼈째로 베어버린 후 숨을 몰아쉬며 겨우 말했다.
"전선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벅찰 지경입니다. 어떻게 20케타씩이나 더 전진을 합니까!"
"내가 전방에 서겠다. 한 놈씩 부상을 입히면 자네들이 끝장을 내보게."
"그럼 측면 공격에 약점을 보입니다."
"그래도 할 수 없어. 지금은 외길이라도 어떻게든 뚫어야 해! 적 지휘관에 빛의 화살을 날릴 수 있는 거리까지!"
로카치오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말했다.
"제길. 해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