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그 존재는 되려 데미앙에게 물었다.
"그것은 무엇인가."
"삼라만상을 만들었다 여겨지는 존재다."
"그렇다면 아니다."
그 존재는 담백하게 부정했다.
"모든 것은 '나'로부터 파생되었지만 '내가' 어떠한 의지를 가지고 만든 것은 아니니.....잠깐. '내가' 방금 '나'라고 말한 건가."
"그렇다."
"혼란스럽군. 이 존재함을 자아로 인식해본 적이 없었는데."
한동안의 침묵이 흐르고, 데미앙이 그 침묵을 깨려 입을 열려는 찰나 그 존재는 말했다.
"알고 있다."
"무엇을 말이지?"
" '네'가 누군지."
"어떻게....."
" '너'는 '오기로 되어있던 자'다."
"뭐라고?"
" '나'를 만나고, 내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고 내 소용돌이의 편린들을 이해하며 이용하다가 그리하여 '나'를 온전히 이해하게 되는 자. 그리 되기로 예정되어 있던 자."
"그게 어찌 나라는 걸 알 수 있다는 거지? 다른 사람일 수도 있잖아."
"너는 여기에 최초로 와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존재'이니까."
존재는 단언했다.
"신이라는 존재의 예정은 없으나, 나는 네가 여기에 올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은 예정의 흐름. 파생과 파생의 연결. 그러나 또한 어떻게 파생될 지에 대한 예정은 불규칙하며 누구도 알 수 없는 흐름. 그 한가운데의 한가운데에 나는 있었다. 네가 옴으로 인해 나는 자아를 가지게 되고 완전해질 수 있다는 것도. 예정 중의 하나. 예측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알 수가 없군."
"당연하지. 모든 것은 무르익지 않았으니."
존재는 계속해서 말을 쏟아냈다.
"너는 아직 여기에 온전하게 올 때가 되지 않은 기회에 오게 된 것이다. 그로 인해 나는 아직 완전해 질 수 없고 그것은 너 또한 마찬가지이지. 너는 흐름을 보고, 흐름을 읽지 않았고, 그것을 이해하지 않았다. 그것이 지금의 아쉬움일뿐."
"잠깐 기다려 줘. 무슨 말인지 알 수가....."
"너는 여기 다시 오게 될 것이다. 그 때는 나와 나눌 말이 많을 것이겠지. 너는 나의 편린을 이해하고 내 주변의 흐름을 이용할 수 있다. 그 이용은 더 많은 흐름과 파생을 낳게 될 것이며, 그것들이 온전히 너에게 이해되는 순간 너는 나와 다시 만날 것이다. 나에게는, 아마도 그리 멀지 않은 미래가 되겠지."
"내가 여길 다시 오게 된다고?"
"그렇다. 때문에 너는 돌아가야만 한다."
존재로부터 강한 오오라의 줄기들이 뻗어나오며 데미앙을 밀쳐냈고, 그 따스하게 감싸는 느낌을 편하게 받아들이며 데미앙은 존재로부터 멀어져 갔다.
"더 괴로워하고, 더 찾아 헤매라. 그리하여 흐름을 이해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다."
그 존재의 마지막 말을 들으며 데미앙은 눈을 감았다. 몸이 어디론가 떠내려가는 기분이었다. 곧이어 고통스런 격랑에 휩쓸려 몸이 뒤틀리는 듯한 느낌이 데미앙의 온몸에 전해져 왔다.
하지만 데미앙은 눈을 뜨지 않았다. 길고 좁다랗게 되어, 마치 아기가 나오는 산도 같은 느낌의 가늘고 긴 통로를 온몸으로 비벼가는 듯한 움직임만 반복했을 뿐.
"무슨 일이.....벌어지는 거지....."
다이슨의 입에서 멍한 말이 새어나왔다. 다른 사람들은 말하는 것조차도 잊은 상태였다.
대지와 공기와 그 속의 모든 존재를 유린하던 카오스의 덩어리들이 더이상 확장되지 않고 점차 한 곳으로 응축되기 시작했다. 뭔가에 빨려들어가고 우겨넣어지는 모습이 느릿느릿 진행되다가 어느 순간 급한 물살을 탔다. 그리고 그것들이 어느 정도 걷히는 그 중심에, 아직 데미앙이 버티고 서 있었다.
하늘은 전에 없이 청명했고, 피를 튀기던 웅덩이들도 거짓말처럼 잠잠했다. 어떤 물질인지 감조차 잡을 수 없는 회색빛 재로 화한 수많은 시체더미들의 사이로 몸을 일으킨 팔크람은 로카치오를 부축해 앉은 채로 그 광경을 넋을 놓은 채 지켜보고 있었다.
응축되고 응축되던 카오스 덩어리들은 데미앙의 손 안으로 빨려들어가듯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윽고 데미앙의 손 안에서 작은 공만한 크기가 되었다. 작은 공은 구슬이 되었고 구슬은 마침내 알아볼 수도 없는 점이 되어 데미앙의 손 사이로 작은 여명을 비추며 사라졌다. 기도하는 모습으로 데미앙은 그것이 사라지기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데미앙이 눈을 떴을 때는 훔족의 하전사 몇몇들과 성의 병사들 몇몇들도 잿더미 시체 속에서 몸을 추스르고 있을 때였다. 모든 전장의 존재들은 그 광경을 보며 넋을 놓느라 전투의 의지조차 상실한 꼴이었다.
그리고 그 상황은 훔족의 지휘관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몸을 일으켜 상황을 보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처음엔 몰이해가, 다음엔 그것이 가져다주는 공포가 그의 온몸을 휘감았다. 그것을 억지로 이겨내려는 듯 그는 고개를 흔들고 곤봉을 흔들었다. 그리고는 크게 소리를 한 번 질렀다. 그러나 훔족의 하전사들은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정신이 아니었다. 아무도 그에게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데미앙은 훔족위 지휘관을 보면서 자세를 편하게 풀고 일어섰다.
"우리는 싸우지 않아야 한다."
데미앙이 한 쪽 손을 내밀어 그를 제지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눈앞의 존재에게 적의를 있는 힘껏 드러내며 돌진할 뿐이었다. 팔크람은 지친 몸을 이끌며 데미앙을 도우려 했지만 슈파스는 어디 파묻혀있는지 보이지도 았을 뿐더러, 몸 또한 맘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제기랄!"
팔크람이 체념과 긴장을 뒤섞은 채 훔족의 지휘관이 달려가고 있는 것을 바라보고 있던 순간. 훔족의 지휘관이 휘두른 곤봉이 데미앙의 내뻗은 손과 머리 위로 떨어지는 것이 느리게 보이는 순간.
소리조차 들리지 않은 채로 일은 일어났다.
곤봉이 갑자기 먼지처럼 푸석거리더니 재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 재가 데미앙을 덮어씌웠다.
그런 데미앙의 모습은 겨우 일깨워놓은 지휘관의 전투의욕마저 산산조각을 내어 버렸다. 그는 뒷걸음질쳤고, 끝내는 넘어지는 걸 데미앙은 쫒아갔다. 그가 공포감에 휩싸여 팔로 얼굴을 가렸다.
하지만 그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가 팔을 내렸을 때는 눈 앞에 데미앙의, 일으켜주려는 의도가 분명한 손이 있었다.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