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

엉덩이를씰룩 작성일 12.10.29 18: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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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필요해요”

그래서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길을 걷는다.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면서.

그것에 맞아 살해되어서는 안 되겠기에.

나는 다리힘이 풀렸지만 저 멀리 보이는 불빛을 향해 계속 걸었다. 파티용 양복은 이미 너덜너덜해져 있었고 나는 탈진 직전의 상태였다. 나는 두려움에 떨며 나를 이렇게 만든 여자를 떠올렸다.

그녀는 꽤나 매력적이고 천진난만한 아가씨였다. 나는 파티에서 그녀를 발견하고 그녀가 나의 일곱 번째 애인이 되기에 적합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내 예상대로 어린 그녀는 아직 사교계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었고 이렇게 순진한 여자를 꼬시는 것은 나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곧 나는 그녀에게 열렬한 사랑고백을 받았고, 나는 친구들에게 젊고 아름다운 새 애인을 자랑할 수 있었다.

다른 여자에게도 그래왔듯, 나는 그녀와 사귄지 3개월 즈음이 되자 그녀에게 흥미를 잃어버렸다. 나는 그녀와 만나는 횟수를 줄였고 변한 나의 마음을 눈치 챈 그녀는 나를 향해 몇 번이고 애절한 편지를 보냈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짜증이 나서 답장을 보내지도 않다가 그녀가 집안일에 매우 미숙하고 특히 사과를 매우 못 깎던 것이 떠올라 ‘너는 사과를 너무 못 깎아. 이게 내가 너를 싫어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야.’ 라고 답장을 보내버렸다.

그녀는 그 편지에 충격을 받았는지 몇 개월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친구들은 나에게

“이번에 또 한 건 했군, 미스터 카사노바. 그런데 조심하라고. 요즘 자네에게 원한이 있는 여성들이 자네 심장을 도려내려고 칼과 접시를 가지고 다닌다는 말이 있으니까.”

하고 웃으며 나를 놀렸다. 나는 어깨를 으쓱 하고는 다른 여자를 찾아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여느 때처럼 파티를 마친 후 마차를 타고 집에 돌아오는 중이었다. 그런데 마부가 자꾸 이상한 숲 방향으로 마차를 몰았다.

비오는 날 밤, 나는 무서운 기분이 들어 마부에게 욕설을 하며 마차를 돌리라고 했지만, 마부는 묵묵부답이었다. 결국 깊은 숲속까지 들어가고 나서야 마차는 멈춰 섰다. 나는 두려움에 떨며 마차 문을 쳐다보고 있었다. 문이 열렸다. 비가 오는 가운데 망토를 둘러쓰고 있던 마부는 번개와 함께 얼굴을 드러냈다. 바로 얼마 전에 내가 차버렸던 그녀가 접시와 칼을 들고 눈앞에 서 있었다.

“나는 당신이 필요해요.”

나는 괴성을 지르며 뒤도 안돌아 보고 도망쳐버렸다. 한참을 미친 듯이 달리고 나서야 나는 가까스로 한 불빛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거의 탈진한 상태로 오두막에 도착해 문을 두드리자, 인상 좋고 덩치 큰 나무꾼이 나왔다. 대단한 근육을 지닌 그가 나를 보고 깜짝 놀라더니 일단 안으로 데려가 몸을 녹이게 했다. 그가 준 스프를 먹고 힘이 좀 나서, 나는 그에게 미친 여자에 관해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나무꾼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허, 아무리 그래도 귀족이신데 그런 짓을 하셨을 라고요. 다른 사정이 있지 않을까요?”

라며 되도 않는 소리를 했다. 나는 화가 나서 그에게 뭐라고 하려는데 누군가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놀라서 나무꾼의 눈치를 보았다. 나무꾼이 ‘여기 올 사람이 없는데…….’ 라는 표정을 짓자, 나는 겁에 질려 구석에 있던 더러운 잡동사니들 속에 담요를 두르고 숨어버렸다. 꼴사납긴 하지만, 미친 사람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데다가 보통 인간의 몇 배가 되는 광기의 힘으로 순식간에 내 심장을 도려낼 수도 있는 것이기에 나는 겁에 질려 숨을 수밖에 없었다.

나무꾼은 머리를 긁적이더니 문을 열었다. 아! 나는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고개를 숙이고 담요를 더욱 깊이 눌러썼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그 나무꾼이 여자를 혼쭐내거나 내쫓는 소리가 들리지 않고 오히려 이야기 소리와 나무꾼이 크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저 나무꾼이 여자와 같이 미쳐버린 것이 아닌가, 둘이 사실 작당하고 나를 죽이려 하는 것이 아닌가 하며 별 별 걱정을 다 하고 있는데, 나는 불시에 나무꾼에게 잡혀버렸다.

그가 소리를 죽이고 나에게 온 것이다. 나는 눈앞에 칼과 접시를 들고 있는 그녀를 보고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나무꾼은 바둥거리는 나를 꽉 붙잡고 진정하라고 했고 내가 살아남으려고 온갖 몸부림을 치는 때, 그녀는 그녀의 품 안에서 사과를 꺼냈다. 그리고 조용히 사과를 깎기 시작했다.

내가 상상하지도 못한 일이 눈앞에서 일어나자 나는 그 상황에서도 그 모습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뚝 뚝 흘리며 사과를 깎았다. 그녀가 6개의 토끼모양 사과조각들과 남은 사과심 하나마저 예쁘게 접시 위에 올리고 나서, 그녀는 주저앉아 주체할 수 없이 울음을 터뜨렸다.

이해가 안 되는 상황에 너무 놀라 내가 가만히 그녀를 보고 있자 나무꾼이 나를 풀어주고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을 죽이려 한 게 아니라, 사과를 못 깎는다고 헤어지겠다는 당신의 편지를 보고, 직접 가면 당신이 안만나줄테니 몰래 준비한 이벤트라 하더군요. 오랫동안 준비해 온 것이라 비가와도 결행한 것인데,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무꾼은 미소를 지으며 눈을 찡긋 하더니 내 등을 밀었다. 나는 그제야 가까이서 그녀의 애처로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몇 번이고 칼에 베인 잔 상처들이 있었다. 나는 어쩔 줄 몰라 하다 울고 있는 그녀를 안아주었다. 그녀의 울음이 점점 줄어들었다.

이후 나와 그녀는 다시 사람들 앞에 연인으로 나타났다. 나는 더 이상 다른 여자를 노리지 않았고, 그런 나의 변화에 친구들은 놀라워했다. 친구들이 변한 이유를 물을 때면 나는 그저 좋은 여자를 만나서 그렇지 뭐, 라고 둘러댔다.

나는 종종 그 나무꾼에게 장작을 사러 사람을 보냈다. 그때마다 심부름꾼은 그의 감사인사를 전했다.

결혼 이후, 아내가 어린 나이에도 집안일을 잘하고 무엇보다 사과를 예쁘게 깎아 칭찬의 소리가 자자했던 것은 좋은 일이었지만, 어쩌다 그녀가 칼과 빈 접시를 들고 올 때면 내가 소스라치게 놀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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