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지야, 날도 쌀쌀하니 오들거리는데 오빠가 얼큰하게 짬봉 한 그릇 말아줄까?”
남자는 여자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짬뽕이요? 오빠 짬뽕도 할 줄 알아요?”
“그럼. 당연하지. 짜잔~~”
남자는 득의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냉장고에서 즉석 짬뽕을 꺼내어 들었다.
“피~난 또 직접 해 준다는 줄 알았네.”
“수지야, 이거 무시하지마. 오빠가 정말 맛있게 해줄게. 어디보자. 돼지고기는 있고, 양파, 표고, 느타리. 일단 국물부터 내야하니까 냉동실에 있는 멸치랑 다시마 좀 꺼내줄래?”
냉동실 문을 열자 보관용기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여자는 멸치와 다시마를 찾아 남자에게 건냈다.
“오빠. 남자 혼자사는 집 냉장고가 뭐 이리 참해요? 나 좀 무서울라고 그러는데?”
“아, 내가 좀 먹는거에 한이 맺혀서 그래.”
“응? 어릴 때 굶고 자랐어요?”
“아니 그건 아니고. 오빠가 엑스 와이프한테 좀 학대를 받고 살았거든.”
“네? 학대요?”
“응. 아니 학대 받았다는건 농담이고, 요리를 굉장히 못했거든. 그냥 못하기만 한거면 괜찮은데 이 여자가 아무튼 성의조차 없었어. 맨날 냉동 돈까스, 냉동 동그랑땡, 냉동 만두, 햄....내가 어릴때는 그런 인스턴트 음식을 엄청 좋아했었는데, 이제는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린다니까. 냉장실에 무하고 명태 잘라놓은 것도 있으니까 그것도 넣고 불 좀 올려줄래? 오빠는 베란다에서 고추 말려 놓은 것좀 가져올게.”
“그런데 오빠는 집에서 밥먹고 그랬어요? 보통 다 먹고 들어오지 않나?”
식탁에 앉아 남자가 요리하는 것을 지켜보던 여가가 말 벗을 해준다.
“특별한 일 없으면 일부러 집에 들어와서 먹었어. 하루에 한 끼 정도는 같이 먹어야 가족이라고 생각했거든. 밥도 한끼 같이 못먹을거면 일은 해서 뭐하나 이런 순진한 생각을 했었던거지.”
“네. 오빠 맞벌이 했었다고 그랬었죠? 그 언니도 엄청 피곤했겠다.”
“수지야, 내가 평생을 살면서 세계 평화에 기여를 하겠니? 아니면 국민소득 오천불을 향상시키겠니?”
“그건 또 무슨 뜬금포에요?”
“안타깝지만 내가 나의 존재를 주장할 수 있는 방법은 겨우 남을 귀찮게 하는 것 뿐이라는 말이지.”
“오빠,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이란 영화 보셨어요?”
“아니. 왜?”
“그냥요. 거기 이런 대사가 나오거든요. ‘태어나서 죄송합니다.’.”
“하하. 오늘 우리 수지 이빨이 좀 쎄다?”
“호호호. 숙녀한테 못하시는 말씀이 없으시네요? 근데 오빠?”
“응?”
“왜 헤어졌는지 물어봐도 돼요?”
“수지양. 너무 앞서가시면 곤란해요.”
남자는 커다란 스테인레스 궁중팬에 끓고 있는 국물을 수저로 휘젓다 국물을 맛 보고는 여자에게 말을 건냈다.
“수지야, 냉동실 도어에 보면 천연조미료 있거든? 그것좀 줄래?”
“이거요?”
“응. 그거.”
조미료를 건내받은 남자는 다시 의자로 돌아가 앉으려는 여자를 잡았다.
“잠깐만.”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분명히 키스였고, 남자의 혀는 여자의 입속을 맛보고 떠났다.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순간에 벌어졌던 일이라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했던 여자는 당황한 듯 얼굴을 붉혔다.
“오빠, 이게 무슨 짓이에요? 내가 지금 따귀를 날려야 하는 상황인거죠?”
“오~잠깐만 잠깐만. 내가 다 설명할 수 있어.”
“해보세요.”
“첫째로 내가 사랑을 담아 요리를 하기 위한 신성한 의식이었고, 그리고 두 번째로...”
남자는 손에 든 수저를 입에 넣어 쪽 소리를 내며 빨았다. 그리고는 그 수저로 조미료를 떠 넣으며 말을 이었다.
“요리는 이 숟가락 한 개로 다 할거거든.”
“풋”
여자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변태새끼. 그래도 귀엽긴 하네.’
남자는 그릇에 짬뽕을 담아 여자 앞에 내어 놓았다.
“먹어봐. 어때? 어때? 쥑이지? 응?”
수저로 국물을 떠 맛을 본 여자가 말했다.
“꺄~~~맛있다. 근데 오빠?”
“응”
“오빠랑 살면 엄청 피곤할거 같아요.”
“야. 야. 잠깐만. 타임. 타임.”
“응? 왜요?”
“수지야. 너의 생각을 내가 강요할 수는 없는 거지만, 말하는 타이밍이 좀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니?”
“데헷~그랬나요?”
“게다가 오빠는 지금 일년 가까이 거시기 그거 있잖아. 남녀사이에 그 좋은 그거....”
“섹스요?”
“어. 그래. 그거. 그것도 못하고 있는데. 오빠가 이렇게 너를 위해서 끓여준 맛있는 짬뽕을 앞에두고 할 얘기는 좀 아니잖아. 같이 사느니 뭐니 그런 먼 장래의 일을 이야기 하는것도 좀 뜬금없기도 하고. 그러니까 내 말은 그래도 오늘 나랑 자 줄꺼지?”
“휴~”
여자는 한 숨을 내 쉬며 남자의 눈을 바라보았다.
‘일단 승부 속옷을 입고 오기는 잘 한거 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