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저 여자가 뭐라고 지껄이는 거지?' 분명 잘못한 것은 내가 아니라 저쪽이다. 하지만 그 여자는 마치 자신이 무고한 피해자인 양 순진을 떨며 나에게 시비를 걸어온다. 처음에는 그저 황당함에 한마디 해 주려는 것 뿐이었다. 하지만 그 여자는 그러한 것마저 마치 내가 계속해서 그녀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마냥 교묘하게 말을 꾸며가며 나를 조롱해댄다. "씨끄러! 입닥쳐! 썅년아 난 여자도 패는 놈이야!" 상처입고 겁에질려 으르렁 거리는 짐승처럼 나는 날뛰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무고하고도 순진한 피해자를 연기하며, 그런 나를 더욱 더 조롱해댄다. 나는 통제할 수 없는 분노에 휩싸여 그녀가 앉아있는 테이블을 향해 간접적으로 분노를 폭발시키고, 주변 사람들은 주인없는 짐승을 잡아 가두듯 나를 그녀로부터 떼어낸다. 고개를 푹 숙이고 의자에 앉은 나는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은 분노에 어깨를 들썩인다. 하지만 그 순간 나를 지배하고 있던 감정은 분노가 아니다. 내가 저지른 일에 대한 대가로 내가 치루어야만 할 법적인 조치에 대한 공포와, 아무도 나의 입장을 알아주지 않는 것에 대한 억울함과,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겨우 이정도 인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해 보임으로써 느끼는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과 두 눈알을 뽑아버리고 싶을 정도의 수치감에 온몸이 떨려왔다. 그때 나와 동행하고 있던 여자가 내 앞에 있는 의자 위로 올라선다. 고개를 들어보니 그녀의 손에는 물이 가득 들어있는 500CC 맥주잔이 들려있다. 그녀가 그 물을 나의 머리에 쏟아부음으로써 표현할 경멸감. 나를 휩싸고 있는 수치심에는 차라리 그런 경멸이 위로가 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하며 다시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경멸을 받아낼 준비를 한다. 하지만 그녀는 그 물을 아주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나의 등에 흘려주었다. 거기엔 마치 어린시절 시골 큰집에 놀러갔을때 친척 누나가 해주던 등목과도 같은 포근함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따듯하고도 다정한 손길로 나의 등을 쓸어주었다. "오빠, 너무 흥분하지 마." 나는 터져나오는 울음을 가까스로 참으며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그래. 우리 나가서 좀 얘기하자." 그녀라면, 그녀에게라면 다 얘기할 수 있어. 그녀는 마치 지옥 깊숙한 곳에 갖혀있던 내게 내려온 한 줄기 빛과도 같은 구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