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2-19 글연습
그는 뭔가를 더 생각해보는 것이 힘들었다. 두통까지 함께 덮쳐왔던 탓이다. 그것은 그를 평생토록 괴롭힌 것이었다. 강렬한 햇빛에도 견디지 못하는 나약한 눈과 다친 상처들의 흔적에서 몰려오는 욱신거림. 그는 아버지보다 더욱 강한 것을 원했지만, 결국 강해지지 못하고 나이를 먹은 채 광장에 있는 자신을 마치 다른 사람 보듯 관찰하려 하는 중이었다.
널따란 광장의 어느 닳고 닳은 장식돌 위로 그는 잠시 앉았다. 가만, 사랑이란 것을 누가 말했었던가. 아아, 쇼펜하우어였지. 그는 백발에 성마른 성격의 노인을 떠올렸다. 그는 사람의 본능에 처음 주목했고 그것을 정의하려 애썼고, 그 바람에 무던히도 다른 학파의 사람들과 원치 않는 싸움을 지속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많은 면에서 옳았다. 그 자신조차도 첫 저서를 쓸 때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하지 않았던가.
생각해보면 그도 사랑을 했었다. 아니, 사랑을 했었다고 여겼다. 그녀만큼 그를 잘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반유대주의자와 결혼한 유일한 가족, 자신의 여동생마저도 그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햇빛은 더욱 강해지는 한낮이었고, 공기는 점점 뜨거워 졌다. 사람들의 말소리와 발소리, 말발굽의 달그닥거리는 소음들이 공간을 채웠다. 그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눈꺼풀조차도 다 막지 못하는 햇빛의 강렬함이 시신경을 더욱 아프게 했다.
이 고통을 피하기 위해 자신은 어디까지 도망쳐 왔던가. 더 맑은 공기와 산을 찾아다니며 종이에 수많은 생각들을 긁적거려왔던 시간들이 언제부터 이어져 왔던가. 그것을 떠올리려 할수록 고통은 그의 뇌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저서와 수많은 말들에 대해 야유하며 저항하는 당대의 머저리같은 유명인사들 같았다.
바늘로 뇌를 헤집어 놓는 것 같은 순간의 와중에도 가까스로 자신이 생각하고 적어놓은 수많은 저서와 메모들을 떠올려보았다. 그리고는 거기에 적혀있던 수많은 발견의 지점들과 지금의 자신을 비교해 보기 시작했다. 사실 그 어떤 것도, 자신의 현재 상황과는 걸맞지 않았다. 세상에 있는 모든 기준들이 다 자신을 벗어난 것 같았다. 몸은 건강하지 않았고 정처를 정해놓은 안정된 생활도 아니다. 하나 있는 여동생은 자신의 뜻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으며, 자신이 사랑한 여자는 자신과의 교제를 거부하고 더 많은 남자들과의 친교를 쌓는 세계로 나아갔다. 거기에 무엇보다도, 아버지마저 존재하지 않는 시간들을 보냈다.
그 때마다 그는 고통스러웠다. 그래도 그는 외쳤었다. 생이여 다시 한 번. 그러나 지금 한 편의 구석에서는 자신의 심연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자신이 들여다봤던 그 모습 그대로.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고통과 고통의 연속. 혼자인 그 속에서 길어올린 모든 사고의 우물물들이, 지금 이 순간의 고통을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그는 문득,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무엇이 인간의 속내이고 무엇이 인간의 진실인가. 쇼펜하우어가 빠졌던 그 허무주의의 늪을, 디오니소스적 비극이라도 살아야 할 의미가 있다고 봤던 것들이 지금 이 망할 놈의 통증들과 대체 무슨 일말의 연고라도 있단 말인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그는 자신의 무릎을 계속 매만졌다. 더 떠올려야 했다. 무언가를 더욱.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해체에 해체를 거듭하고 그 바닥까지 떨어져서 이제 더 이상 길어 올릴 것이라고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진흙더미들만 발견해버린 느낌. 그 진흙더미에 묻혀 돼지처럼 시공간을 점유하는 다른 존재들만이 눈앞에 가득하고, 쓰레기 더미 속에 있는 듯한 역겨움을 비롯해 온갖 어두운 감정들이 치밀어 올라오고 있는 그 때,
그의 눈에 늙은 말과 우악스런 마부가 보였다.
늙은 말은 우악스런 마부의 매질에 고통을 당하며 끌려가고 있었다. 그 늙은 말은 자신의 운명이 무엇인지를 아는 듯 했다. 발굽은 이미 닳을 대로 달아 편자를 더 이상 박지 못할 정도가 되었고 입에선 게거품이 가래처럼 흘렀으며 털의 윤기는 이미 동이 나 버린 지 오래된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흐릿함이 입혀진 검은색의 눈동자를 희번덕거리며, 그는 우악스런 마부의 손에 이끌려 당도할 결말을 최후의 힘을 짜내 거부하고 있었다. 우악스런 마부는 손에 든 가죽 말채찍을 쉬지 않고 말에게 휘두르며 욕지거리를 뱉었다. 그것은, 그 말은,
자신의 모습이었다.
깨달음이 천둥처럼 그의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이제 더 이상 버틸 것이 없는 것이다. 그 말이 자신이고 자신이 그 말이었다. 이제 남은 것이 생에 대한 처절한 몸부림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그는 문득 그것을 버리고 싶었다. 그것을 버리고 좀 더 깊은 심연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그 심연은 아마도 자신이 두려워했던 바로 그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어쩌면, 조금 더 새로운 세계가 있을 수도 있었다. 이 곳을 벗어나기만 한다면. 이 정신을 벗어나기만 한다면.
그 일말의 가능성을 쥐고 종이 한 장 차이 같은 한계선의 끝에 매달려, 그는 몸을 일으켜 말과 마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혈관을 통해 수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몰려왔고 한꺼번에 둑이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시신경과 두통의 고통이 더 이상 그를 삼키지 못했고, 새로운 모험에 대한 환희 비슷한 것이 그의 온몸을 휘감았으며, 그런 속에서도 틈틈이 그는 그 광장의 자신과 모든 것을 마지막으로 새겨넣어두고 작별을 고하려 애쓰며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말을 붙잡은 순간,
그는 모든 것을 놓아버렸다.
시간이 흐른 후, 사람들은 유명한 한 철학자의 정신착란을 애석해 했다. 더 시간이 흐른 후에는 그의 저서를 여동생이 맘대로 끄적여 책을 펴냈다. 그것을 받아들인 지독스런 아집의 정치가는 혼란한 와중을 틈타 나라를 손에 넣고 대륙을 전쟁의 불길 속으로 떠밀어 넣었다. 좀 더 시간이 흐른 후에는 그의 생각들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그보다 더 나아가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의 저서와 학풍이 인기를 끌었다. 마치, 나무가 뿌리를 뻗어가듯, 얽히고 설킨 시간들이 흘러갔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그의 해방된 모습을 맞이해준 사람은 어리둥절함과 겁을 집어먹은 채 채찍을 쥐고 있는, 무지에서 허덕이는 한 마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