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nnel 1. 로키
감정이 없는 나에게 ‘좋아하는 것’과 ‘좋아하지 않는 것’ 혹은, ‘싫어하는 것’과 ‘싫어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묻는다면, 대답이 매우 곤란하다. 왜냐하면 앞의 네 가지는 개념적으로 이해하긴 하지만, 감정적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나라고 하더라도, 음식의 맛정도는 느낄 수는 있다. 물론 맛이 없더라도 별다른 불평 없이 먹기는 하다마는, 아무래도 포크가 한 번 더 가거나, 숟가락이 한 번 더 가는 음식은 있게 마련이다.
“크아아......”
“후우...... 후욱.......후르릅!”
“음......”
“아 그만 좀 쩝쩝거려라.”
스벤은 내 지적에도 불구하고 아랑곳없이 그릇에 고개를 처박고 전골을 흡입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사실...... 녀석만 그렇다기 보다는, 내 주변에 앉은 녀석들 전부가 다 그랬다. ‘우리’는 다양한 출신의 녀석들이 모여 있다 보니, 어떠한 주제에 대해 의견을 말하라고 하면, 열사람이 열한가지 답변을 내놓을 정도로 단합과는 거리가 멀지만, 전골 앞에서는 민족이나 종교를 넘어서는 기적적인 화합과 대타협을 이루어 내거든.
“........크헙! 켁켁! 켁!”
“그럴 줄 알았다.”
국물이 목울대를 쳤는지, 스벤은 전골을 먹다말고 기침을 해댔다. 녀석의 얼굴은 고통으로 잔뜩 찌푸려져 있었을 뿐 만 아니라........ 심지어는 코에서 당면 면발이 기침과 함께 몇 가닥이 튀어나왔을 정도다. 얼마나 사례가 심하게 들려야 저런 사태가 벌어지는 걸까......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중에도, 녀석의 기침은 멎지 않았고, 비틀거리는 사이에 자신의 앞 접시까지 엎어버리기 까지 해버렸다. 모두의 시선이 녀석을 향했고, 개중에는 스벤을 손가락질 하며 낄낄거리는 녀석도 있었다. 녀석의 옆에 있던 나는 어떻게 했냐고? 그야 녀석의 기침이 닿지 않는 거리로 대피하는 수밖에, 뭐...... 본인 업보니 본인이 책임져야지 않겠는가?
“괜찮니 스벤?”
“켁! 크흠! 커.......아이구 죽겄네유.”
“여기 휴지 있으니까 닦고 있어.”
언제 튀어나왔는지 답답이 녀석이 재빠르게 스벤에게 와서는 스벤에게 휴지를 건네주었다. 그리고는 스벤이 휴지로 제 얼굴을 닦는 동안, 가지고 있던 행주로 녀석이 난장판 쳐놓은 걸 쓱쓱 닦아냈다. 참....... 이해가 안 되는 녀석이다. 왜 남이 저지른 잘못을 자신이 대신 수습을 하려는 거지? 스벤이 엎질러서 엉망이 된 것은, 스벤이 치우면 될 일이다. 그걸 왜 관련도 없는 녀석이 치우는 꼴이라니...... 오지랖도 이정도면 병적인 수준이지 않을까 싶다.
내가 자신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는걸 아는지 모르는지, 답답이는 테이블을 정리한 다음, 새 앞 접시에 전골을 가득 담아서 스벤에게 건네주었다. 스벤은 코에 면발이 걸려있는지 한참동안 코를 풀어댄 끝에, 빨갛게 달아오른 코끝을 훌쩍거리며 답답이에게 고맙다고 주억거렸다.
“죄송해유. 너무 맛있어서 급하게 먹느라......”
“맛있게 먹어준 건 참 고마운데, 음식은 많으니까 천천히 먹어도 될 거야. 다 먹으면 꼭 다시 달라구 하고. 알았니?”
“알았어라.”
답답이는 스벤에게 씩 하고 웃어준 뒤에 음식카트를 끌고 가버리고, 스벤은 녀석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로키성.”
“왜?”
“성은 참말로...... 조끄튼거 같어.”
“뭐 임마?”
스벤이 보여준 뜻밖의 도발에 대응을 하려던 차에, 토라가 스벤 옆에 턱하니 걸터앉았다. 녀석의 그릇에는 전골의 건더기가 수북이 쌓여있었다.
“아침부터 거하게 폭죽을 터뜨리셔?”
“아...... 잘 잤는가?”
“그럼, 아침메뉴가 전골이란 소식 듣고 부리나케 달려 나왔지 뭐.”
“근데 넌 뭐 이리 고기가 많이 쌓여있냐?”
“아이리스 언니가 많이 남았다고 양껏 가져가라고 하더라구. 그래서 어명대로 했지.”
“크흥!.......으응.......크......”
스벤은 토라의 등장에 얼굴이 시뻘개져서 정신을 차리질 못했다. 안그래도 어눌한 녀석이 당황까지 하니 정말 가관이 아닐 수 없었다. 뭐 토라는 전혀 신경도 안 쓰는 눈치지만, 스벤 녀석은 토라가 ‘거북해 하지 않도록’ 최대한 소리를 죽여 가며 코를 풀었다....... 그런다고 코푸는 소리가 어디가나? 토라는 스벤의 행동을 보고 꽤나 답답했는지 녀석에게 한 소리를 했다.
“야 스벤, 그렇게 한다고 우리가 너 코푸는 걸 모르겠니? 눈치 보지 말고 그냥 확 풀어버려.”
“어......응 그려. 그럼 염치 불구하고 실례하겠구먼.”
마침내 결재를 받은 스벤은 밝은 얼굴로 마음껏 코로 트럼펫을 불어댔고, 나와 토라는 그런 녀석을 보며 어께를 으쓱했다. 말은 주고받지 않았지만, 아마 같은 생각을 한게 아닐까 싶다. 그 생각이라 함은...... ‘그래, 저래야 스벤이지.’였을 테지.
“어제 아이리스 언니랑 술 한 잔 했다면서?”
“소문 빠른건 알고 있었지만....... 넌 임마 코나마저 풀어.”
스벤의 눈초리를 무시하면서 나는 토라에게 어제 저녁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 해 주었다. 술동무를 해달라는 답답이녀석의 부탁, 막주를 마시던 좌판, 그리고...... 감정이 없으니 체면이랄 것은 생각하지 않는 게 당연지사였지만, 무슨 까닭인지 답답이 녀석이 부린 행패에 대해서는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리고 뭐?”
“뭐...... 그냥저냥 이야기 좀 하다가 들어왔지 뭘.”
“이야기만 늘어놓기엔 너무 늦게 돌아왔던데......”
“니가 내 애인도 아니고 뭘 그런 걸 꼬치꼬치 물어.”
“.......”
토라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가...... 다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흠, 내 말의 뭔가가 녀석의 심기를 거스른 모양이구먼. 그래도 녀석같이 감정조절을 잘하는 녀석이라면...... 굳이 신경쓸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이고 너무 이바구에 몰두하는 거 아니어유? 그러다 전골 식겄어유.”
“그래......먹자고, 먹어. 이게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
“안 먹고 뭐하냐?”
“아, 그래 먹자. 먹자고.”
Channel 2. 아이리스
운터브룩의 별명은 ‘타운 라스알하게’입니다. 그만큼 라스알하게 출신의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다보니 이곳은 라스알게티보다는 라스알하게의 지방색이 많이 반영되어있지요. 그 대표적인 게 ‘세시풍속’이라고 불리우는 그들의 연례행사, 그리고 ‘속담’이라는 그들의 구전지식이랍니다. ‘속담’이라는 것에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 대부분인데요, 그중에 하나가 바로 ‘노루잡은 몽둥이는 3년을 우려먹는다.’라는 겁니다. 이 속담은, 앞서 아주머니와 이야기했던 ‘납일’이라는 걸 알면 그 사연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납일이라는 건 라스알하게 사람들이 날자를 헤아리는 기준으로 12월 1일에 해당하는 날이랍니다. 연말의 시작으로 보기 때문에 각 가정에서는 제사를 지내거나 집안을 청소한다고 해요. 그 뿐만 아니라, 납일의 ‘납’은 라스알하게 특유의 문자인 ‘엽’이 변형된 거라고 합니다. ‘엽’이라는 글자는 사냥을 의미한다고 하지요. 그래서 납일에 가정의 남자들이나 아이들은 산이며 들이며를 다니며 사냥을 한다고 합니다. 그때 잡은 고기가 맛있다나요? 아이들은 대개 참새를 잡고, 남자들은 떼지어 노루사냥을 한다지요. 그런데 노루는 숲의 나라라고 일컫어지는 라스알하게에서 조차도 잡기는커녕 보기도 힘든 동물인지라...... 사냥이 쉽지는 않다고 합니다. 그런 어려운 사냥감을 잡았으니 그걸 잡은 몽둥이는 여러 시간동안 자랑거리가 되겠죠. 뭐만 하면 ‘내가 몇 년 전에 이 몽둥이로 노루를 잡았다니까?’라며 거들먹거리는 모습을 웃음거리로 삼는게 이 ‘속담’의 시작일 겁니다.
그런데 노루고기라는 건, 저도 이번기회에 처음 먹어보았지만 정말 맛있었습니다. 아니....... 맛있다는 말은 너무 단순하고 추상적인지라 제가 느낀 그 맛을 올바로 전달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거 같네요. 무슨 말을 해야 이 고기의 맛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까요? 음...... 일단 고기가 정말 부드러웠어요. 그렇다고 흐물흐물하게 무너지는 것도 아니고, 적당히 탱탱했어요. 혀 위에 맴도는 느낌은 놀랍게도 달았어요. 정말 놀라운 일이죠. 전골에 꿀이나 설탕 같은 건 절대 탄 적이 없었는데 말이에요. 그리고 고기에서 우러나오는 기름은...... 고소한 풍미가 느껴졌지만, 국물을 마시면 기침이 나올 정도로 칼칼했어요.
이런 맛있는 고기 덕분인걸까요? 오늘 식사는 유난히 사람들의 손길이 분주해졌던 것 같아요. 한 번 퍼갈 때 엄청나게 퍼가기도 했지만, 그 많은 양을 게눈 감추듯 먹어치우고는 또 달라며 손을 내밀더라니까요. 이럴 줄 예상하고 아주머니께서 고기를 넉넉하게 장만하긴 했지만, 정말 다들 걸신들린 것처럼 달려드는 통에 부족해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 정도였습니다.
“많이 장만하길 잘 했지?”
“그러게요.”
“노루고기는 얼마를 생각하든 그 이상을 준비해야 하는 법이야.”
“그것도 속담이에요?”
“곧 될 예정.”
“속담의 창시자와 함께 할 수 있다니...... 이거 참 영광이네요.”
“이때다 싶지?”
“그런데 다들 너무 열심히 먹는데요?”
“신기하지 않니? 고향도 입맛도 생각하는 것도 제각각인 녀석들이 전골 앞에서는......”
아주머니는 전골그릇을 꺼내들었고, 저희도 자리에 앉아서 전골을 국물하나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먹어치웠습니다. 아까 설명이 장황했는데, 참 복잡하게 설명했네요. 그냥 맛있습니다. 꼭 드셔봐야 해요. 두 번 드시면 더 좋고요.
“저기...... 아주머니.”
“왜? 더 줄까?”
“그게 아니라요......”
아주머니에게 이 말을 꺼내야 할지, 솔직히 고민이 되었습니다. 고민이 되는 까닭은, ‘그것’에 대해 아주머니가 알려주시지 않을 것 같다는 것이 첫째이고, 둘째로는 아주머니가 ‘그것’에 대해 알고 있는게 있을지 의문이라는 것이거든요. ‘그것’이 뭐냐고요? 바로...... ‘비정한 마음’이죠. 하지만....... 로키군은 ‘비정한 마음’에 대해 더 알려줄 것이 없는 것 같고, 칠성이 역시 ‘비정한 마음’이라면 기겁을 해대니 그 아이에게서도 별로 기대할 것이 없고...... 그렇다면 남은 사람은 아주머니 뿐 인걸요.
제가 말을 삼키는 모습이 영 못마땅했는지 아주머니는 눈가에 주름을 잡으며 저를 바라보셨습니다. 그럼에도 제 입은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고, 저는 말을 뱉었다가...... 삼켰다가를 답답하게 반복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참의 그러한 밀당 끝에 백기를 든 건 아주머니였습니다.
“답답해 죽겠네. 뭔데 그래?”
“그게.......”
“에헤이. 이 사람이...... 자꾸 그렇게 나오면 정말 짜증난다고. 너답지 않게 왜 그래?”
“...... 비정한 마음.”
“응?”
“저번에 로키군에게서 ‘비정한 마음’에 대해서 들었어요. 근데 그 사람은 그것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주지 않더라고요. 혹시...... 제게 ‘비정한 마음’에 대해서 알려주실 수 있으세요?”
“.......”
아주머니는 제 말에 당혹스러운 얼굴이 되어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셨습니다. 로키군도 그렇고, 칠성이도 그랬고...... 다들 ‘비정한 마음’이란 말만 들으면 다들 저런 식으로 반응을 하니 이젠 새로울 것도 없었지만, ‘대체 그것이 무엇이기에 다들 저렇게 한결같은 반응을 보이는 걸까?’하는 호기심이 들더라고요.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비정한 마음’에는 뭔가가 있다는 그런...... 분명 위험하겠지만...... 알아갈 만한 가치가 있을 거에요.
“왜...... 그거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거니?”
“제가 왜 이곳에 왔는지 아시잖아요.”
“그게, 로키씨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네. 그럴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제 말에 아주머니는 한숨을 쉬며 두 손을 깍지 끼었어요. 내색하지 않으려 애를 쓰시는 것 같았지만, 아주머니의 두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지요. 역시 로키군이나 칠성이 때와 마찬가지로, 아주머니에게도 ‘비정한 마음’이라는 건 적잖이 껄끄러운 화제인 게 분명했습니다. 아주머니의 고민을 가볍게 해드릴 요량으로, 제가 알고 있는 내용을 더 말씀드리려 했지만, 아주머니는 제 손을 잡으며 저를 말리셨어요. 그리고는 불안한 얼굴로 주변을 살펴보셨습니다. 다들 전골에 정신이 팔려 저희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아주머니는 제게 다가와 조그마한 목소리로 귀엣말을 하셨어요.
“일단 오늘 할 일이 다 끝나고 천천히 이야기 하는 게 어떨까?”
“네. 알겠어요.”
“오늘 일 다 끝나면 내 방으로 오렴.”
Channel 1. 로키
식사를 마친 뒤에 잠깐 눈 좀 붙일겸 하여 내 방에 올라갔더니, 방에는 웬 불청객이 와 있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쥐새끼처럼 몰래 들어왔네. 깡 좋다?”
“날씨도 좋던데 벽두부터 너무 딱딱하게 나오는거 아니야?”
도로시는 경고의 의미가 담긴 내 발언을 콧방귀조차도 뀌지 않고 맞받아쳤다. 온몸을 모포로 둘둘 만 주제에 ‘좋은 날씨’라니, 녀석은 듣는 이로 하여금 꼬투리를 잡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화법을 구사하는 것 같다. 그래...... 잊어버렸던 것 같았는데 다시 한 번 상기하게 된다. 이 녀석은 상당한 미친년이었지. 막아봐야 뚫고 들어오고, 떨쳐 내봐야 더 달라붙는 이 녀석에게 해법이란 건 존재하지 않기에, 나는 더 이상의 논쟁은 그만두는 것을 선택하고, 녀석에게 자리를 권했다.
“무슨 일로 여길 다 왔냐?”
“마일리지 쌓으러 왔지.”
“......뭐?”
녀석을 가리켜 또라이년이라 부르는 건 차치해놓고, 나는 그래도 남들보다는 녀석에 대해 중립적인 태도를 견지하려 노력한다고 자부하지만, 그런 나에게 조차도 녀석에 대한 불만이 있었으니...... 그건 듣는 이로 하여금 머리가 지끈거리도록 비유를 남발한다는 것이다. 즉각적으로 그 뜻을 이해하기 어렵다면 그건 의사소통에 실패한 것이 아니겠는가. 파티 플래너도 비유를 사용한다는 점에서는 도로시와 같은 범주에 묶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파티 플래너의 경우는 우리 같은 ‘우매한’ 민초를 위해, 우리의 수준으로 다시 설명이라도 해주기라도 한다. 그런데 이 녀석은...... 우리보다 정신적으로 더 고양된 것 같지도 않은 녀석이 자꾸 어려운 말을 해대니 불만이 쌓일 수 밖에......
“마일리지! 나보고 너희들에게 신뢰를 쌓으라며, 그래서 여기 선물을 하나 준비했다고.”
도로시는 부루퉁한 얼굴로 자신의 옆에 놓여있는 상자를 신경질적으로 두드렸다. 무엇이 그 안에 들어있는지는 감이 오지 않지만, 뭔가 딱딱한 것이 들어있는지 녀석이 그것을 건드릴 때 마다 그 안에 무언가가 데구르르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지부장은 찰리를 데리고 왔으면 싶다고 한 것 같은데, 이런 선물로 때워봤자......”
“어...... 그게 말이지.”
내 말이 녀석의 의표를 찌른걸까? 도로시는 답지 않게 말을 삼키며 머뭇거렸다. 녀석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건 난생 처음인지라...... 나는 그 상자 안에 무엇이 들어 있을까하는 호기심이 들었다. 나는 도로시의 손에서 상자를 빼앗아, 그것을 살펴보았다. 도로시는 화들짝 놀라며 내게서 상자를 빼앗으려고 들었지만.......
“뭐가 든거야?”
“아 제발! 열지 마! 이따가 같이 열자고. 지금 열면 서프라이즈가 안된단 말이야.”
“서프라이즈 같은 소리하고 있네. 뭐가 들었는지 검증도 안 된 물건을 어떻게 지부장님한테 가지고 가냐?”
“위험한 거 아니라고! 진짜 내 모든 걸 걸고 말하는 거야 좀 믿어!”
“니가 가진 게 뭐가 있다고 모든 걸 거냐. 있어도 필요 없어, 안사요.”
워낙에 완력에서 차이가 나는 바람에 한참동안의 실랑이 끝에 그대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쯧...... 지부에서 쫒겨난 다음에 그냥 모든 걸 내려놓았나 보구만, 어쨌거나, 상자안에 뭔가 묵직한 게 들어있는 건 분명했다. 흔들어보니 데구르르 하는 소리도 들리는 게 크기는 그닥 크지 않은 것 같고...... 그런데 잠깐, 상자의 틈바구니 사이로 뭔가 비릿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이 냄새...... 어디서 많이 맡아본 건데? 뭐였더라......
“왁! 니미, 이게 뭐야?!”
“아 진짜 열어보지 말랬잖아!”
상자 안에는 찰리 녀석의 목이 들어있었다. 비록 깔끔하게 닦여있긴 했지만, 절단면이 완전히 엉망진창이었다. 어떤 아마추어의 솜씨인지는 모르겠지만, 목을 자르는데 꽤나 애를 먹은 것 같구먼...... 찰리의 얼굴도 잔뜩 일그러져있는 것이, 아마 녀석도 제 목이 완전히 잘리기 까지 꽤 오랜 시간을 고통 속에서 보낸 모양이었다.
내가 녀석의 목을 살펴보는 중에, 도로시는 잔뜩 삐쳐버린 얼굴로 변명의 말을 늘어놓았다.
“살려서 데리고 오려고 했는데, 얘가 너무 지랄을 해대더라고...... 온 동네가 떠나가라고 소리를 질러대는데 도리가 없더라.”
“어디에서 찾았는데?”
“라스알게티 역. 이 새끼 대담하게 프로하기온으로 째려고 했었다니까?”
도로시는 그러면서 내게 종잇조각을 내밀었다. 피가 잔뜩 엉겨붙어있는 그 조각에는 희미한 글씨로 ‘라스알게티 → 프로하기온’이라고 써있었다. 그게 찰리의 것이라는 보장은 없지만...... 정황상 확실하겠지. 나는 표에서 눈을 돌려 다시 한 번 찰리의 얼굴을 보았다. 녀석과 함께해온 시간, 그리고 녀석이 보여준 선요원 총책으로서의 활약, 그리고 녀석이 내게 건네준 보온병 속 따뜻한 율무차가 떠올랐지만 이내 입김처럼 사라져 버리고, 잔뜩 일그러진 얼굴만 남았다. 참...... 이런 걸 허탈하다고 하는 걸까? 가슴에 구멍이 뚫린 것 같았다.
“근데 로키.”
“뭐?”
“죽여서 데리고 오면...... 지부장이 화내려나?”
“넌 그 와중에 그런 걱정만 하냐?”
Channel 2. 아이리스
식사가 끝난 뒤에, 저와 아주머니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각종 식기들을 가지고 부엌으로 들어갔습니다. 제가 그릇에 남아있는 잔반들을 잔반통에 버린 뒤에 아주머니에게 드리면, 아주머니는 빈 그릇을 미리 받아놓은 물통 안에 던져놓았습니다. 처음에는 합이 잘 맞지 않아서 설거지 하나에도 이래저래 말이 많았지만, 이제는 암묵적으로 약속이 되어있어서인지, 아무런 말이 없이도 둘이서 자연스럽게 역할분담이 되더라고요.
그래도, 평소라면 아주머니나 저나 서로를 놀리면서 잡담이라도 했을 테지만...... 지금은 저도 아주머니도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습니다. 제가 전지전능한 편은 아니라서, 아주머니가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실지는 잘 모르겠지만...... 전 지금 아주머니와 어느 이야기도 하기 어려웠어요. ‘비정한 마음’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면 아주머니는 ‘오늘 일 다 끝나고 따로 하자고 했잖니.’라며 말문을 닫아버리실 것 같았고, ‘비정한 마음’외의 이야기를 한다면 이래저래 이야기를 하겠지만, 그대로 ‘비정한 마음’에 대한 이야기가 묻혀버리고 다시는 그것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없을 것 같았거든요.
이야기를 하던 하지 않던 설거지는 시작과 함께 그 끝이 찾아왔고, 저는 마지막 그릇의 물기를 닦아낸 뒤에 선반장으로 올려놓음으로서 완전히 마무리 지었습니다. 늘 상 하는 일이지만 일은 익숙해질지언정 그 강도가 낮아지는 건 아니어서, 1월에도 불구하고 땀이 흘러내렸습니다. 그건 30년 가까이를 하루같이 해온 아주머니도 마찬가지여서 제가 손수건으로 땀을 훔치는 동안 아주머니는 시큰한 허리를 동동 두드리느라 땀을 닦을 여력도 없는 것 같아보였어요.
“자, 이걸로 닦아요.”
“그래, 고맙다.”
아주머니와 함께 땀을 식힌 뒤에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세탁실로 갔습니다. 자그마한 창문 사이로 새어나온 햇빛이 덩그라니 놓여있는 세탁기 위에 드리워져 있었어요. 지금은 비어있지만...... 멀지 않은 미래에 엄청난 양의 빨래로 가득 채워질 예정이지요. 이곳에서 있다 보니 깨달은 것인데, ‘암살자’들은 생각보다 트랜드라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첨단 기술이라고 해야 할까요? 어쨌든 최신의 문물에 상당히 민감했어요. 그 예가 바로 저기 놓여있는 세탁기겠죠. 2년에 라스타반 출신의 방직공이 막내시절 엄청난 양의 생산된 천을 빨래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어떻게 하면 한 번에 많은 양의 빨래를 처리할 수 있을지 고민과 연구를 한 끝에 이런 요물을 만들어냈다는 걸 ‘빅 스케일’에서 본 것 같아요.
매우 조그마한 조각 기사였던지라 그냥 ‘신기하네. 그런데 누가 사기나 할까? 그냥 사람 손이 더 나을 것 같은데?’라고 가볍게 생각하고 넘겼던 그 물건을, 이렇게 실제로 눈으로 보게 될 줄이야...... 실제로 세탁기라는걸 사용해보니 편리하긴 편리했습니다. 빨래를 집어넣고, 흐르는 물을 받아놓은 다음에 위에서 페달을 밟기만 해도 빨래가 되더라니까요. 세상에 이렇게 기술이 발전했을 줄이야. ‘20년 뒤에는 사람이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는데도 집안일이 뚝딱 완성되는 날이 올 거다.’라는 말도 마냥 허풍이 아닐 거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에요.
어쨌거나, 세탁기가 비어있으니 채워야겠지요. 저희 둘은 세탁기 옆에 놓여있는 바구니를 챙겼습니다. 하나는 붉은색, 다른 하나는 푸른색으로 칠해놓았는데요. 붉은색은 남자들의 빨래를, 푸른색은 여자들의 빨래를 챙기기 위함이랍니다. 라스알하게의 철학에 따르면 남성은 뜨거운 기운과 관련이 있고, 여성은 차가운 기운과 관련이 있다고 해요. 아마 성별에 따른 바구니의 배치도 그것을 따른 일종의 전통이 아닐까 싶습니다. 뭐 누가 어디를 가지고 가느냐는 딱히 정해놓지는 않습니다만, 어쩌다보니 하루단위로 번갈아가면서 다른 바구니를 집어가는 게 불문율 같이 되었어요. 그런 점에서 오늘은 제가 붉은 바구니를 집어 들었답니다.
물 칠이 잘 된 편백나무 계단을 오르다보니 어느새 3층에 도달했습니다. 이곳은 남성 요원들의 숙소 층이지요. 이곳은 제 주관적인 기준에서 매우 묘한 곳인데, 물 칠된 편백나무의 향기와 남성 특유의 시큼한 땀 냄새가 뒤섞여 아주 묘한 분위기를 연출한답니다. 그 냄새를 의식치 않고 작업을 하다보면 약간 몽롱해지는 기분이 들거든요. 이상하게도 그 향기의 창조주들은 그닥 그 냄새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게 아이러니겠지만......
“스벤, 들어가도 되니?”
“누님이어유? 저가 시방...... 예 들어오셔유 옷 다 입었슈.”
스벤은 채 마르지 않는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하하...... 요원들 사이에선 스벤이 숨만 쉬어도 ‘역시 스벤이다.’라는 말을 버릇처럼 하곤 합니다. 처음엔 ‘왜 다들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걸까?’라는 생각이었는데요, 요즘 들어서는 그 까닭을 조금씩 알아가는 것 같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어느 상황에서 ‘역시 스벤이다.’라고 말을 하는지 그 타이밍을 알아간다고 해야겠네요. 대체 어떻게 옷을 벗길 래 러닝셔츠가 문설주 위에 걸려있어야 하는 걸까요? 제가 까치발을 디디며 문설주 근처에서 낑낑대자 스벤은 미안한 웃음을 지으며 러닝셔츠를 집어 제게 건네주었습니다.
“미안해유, 벗는다고 벗었는디 좀 과격했는가 보네유.”
“그래...... 뭐, 다음에는 꼭 바닥에 던져주었으면 고맙겠어.”
어디보자........ 러닝은 챙겼고, 겉옷은 의자위에 걸려있고, 양말은...... 음 액자사이에 껴있어서 그림인줄 알았네요. 으음...... 그런데.
“스벤, 팬티는 어디에 두었니?”
“아 그거요......? 그건 쫌.......”
스벤이 곤란하다는 얼굴을 해보입니다. 이런 이런...... 이 상습범이 또.
“스벤, 다른 건 몰라두, 팬티는 날마다 꼭 갈아입어야 된다니까? 너 자꾸 귀찮다고 안 갈아입으면.......”
“미안해유, 근데 그게...... 오늘은 중요한 날이라 꼭 입어야 할 것 같아서유. 알잖어유, 그게 지 베스트 팬틴거.”
스벤의 ‘베스트 팬티’론에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습니다. 참 재미있는 아이에요. 그래서 모두가 핀잔을 주지만 누구하나 미워하지 못하는 거겠지요. 스벤의 농에 그 순간만큼은 ‘비정한 마음’도, ‘도로시씨’도 모두 잊을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