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가지 인생 - 43

갑과을 작성일 17.03.22 21: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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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1. 로키

 

답답이와 나누었던 일련의 대화 이후에, 나는 이리저리 퍼져나가던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나는...... 답답이가 우리와 함께 하도록 하고 싶지 않았다. 생각은 정리가 되었고, 이제 이걸 행동에 옮기는 것만이 남았다. 하지만, 단순히 답답이가 이곳에서 나가는 것만이 전부가 돼서는 안된다. 굳이 지부장이 아니더라도, 답답이는 우리에 너무 오랜시간 동안 있었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녀석은 우리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렸고, 분명...... 녀석에게 손길이 닥칠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녀석이 진정한의미의 탈출을 하려면 향후 우리의 손길이 녀석에게 닿지 않는 곳으로 녀석을 보내야 한다는 것 또한 생각해야 할 것이다. 하하...... 이럴 줄 알았다면, 찰리 말고도 휠맨들 여럿과 안면이라도 터놓을 걸 그랬다. 나와 녀석이 상대해야 하는 적은 너무 강하다, 그리고 눈이 너무 많고, 귀 또한 마찬가지다. 이런 녀석들로부터 완벽하게 벗어나려면 대체 무슨 수를 써야 하는 거지?

 

벽을 하나 넘었다고 생각했는데, 또 다른 벽에 부딪쳐 버렸다. 이번 벽은 아까와는 달리 사금파리가 박혀있어, 내 어께가 욱씬거린다. 그 상처를 부여잡다보니, 내 자신이 한없이 쪼그라들게 느껴지는 그런 벽이다. 그래, 인정할 건 인정하자. 나는 고작 히트맨일 뿐이다. 세상물정은 잘 모르고, 그저 우리라는 틀 속에서 안주하던 어항 속 개구리다. 마음만 먹으면 벗어날 수가 없는건 아니겠지만...... 그 이후가 큰 문제가 된다. 나를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지켜주면서 물가로 안내해줄 든든한 손이 필요하다. 문제는 그 손이 누구의 손이냐는 건데......

 

아아! 죄송합니다.”

아니다.”

 

내게 고개숙여 사과하며 후다닥 달려나가는 사환아이를 보며, 나는 어린아이의 손을 상상했다. 이상적으로는 어항속 개구리를 잡아 물가로 보내주는 어린아이의 손처럼 순진무구하며, 자신의 이득은 개의치 않는 손이라면 좋겠지만, 어린아이는 순진무구한 만큼,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 무조건적인 선함을 보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아무런 이유 없이 심술을 부리는 순수한 악으로서도 작용할 수 있다. 그러니, 어린아이의 순수함을 바라는 건 매우 위험한 일이겠지. 그렇다면 어른의 손이 되어야 할 것인데, 어른은...... 자신에게 이득이 되지 않으면 잘 움직이지 않는 공무원 마인드를 가지고 있다는게 문제다. 과연 한낱 개구리인 내가 어른의 손을 움직일 수 있는 미끼를 가지고 있는 걸까? 일단...... 나를 움켜쥘 손을 가진 어른이 내 주위에 있긴 한 걸까?

 

어른......이라.”

 

일단 내가 가진게 무엇일까? 내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탁월한 임무 수행 능력? 무감정에서 오는 객관성? 크로스라는 직함에서 오는 네임 벨류? 어쨌든 이런 걸 종합해 본다면, ‘라는 요원이 지지를 해주는 쪽은 이곳 라스알게티 지부에서 꽤나 유리한 정치적입지를 점유할 수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라는 상품은, 라스알게티 지부에 영향력을 끼치고 싶지만, 지금현재 상황상 그럴 수 없는 인물...... 그런 인물이 탐낼 만 하겠지. 그 사람이라면......

 

어떻게 할까요? 도장 찍을래요? 찍을 거면 당장 찍고, 생각해 볼 거면 생각해봐요. 대신에 다음에 도장 찍을 때는 직접 워터 프런트로 와서 찍으시죠.’

그래, 미친년이......있었구만.”

 

그래, 호랑이를 잡으려고 늑대를 끌어들이는 꼴이지만...... 어차피 이판사판이다.

 

 

 

 

 

 

 

Channel 2. 아이리스

 

일이 모두 끝나고, 저는 부엌에 있는 술 한 병을 꺼내 여성숙소가 있는 4층으로 올라갔습니다. 손안에 술병이 찰랑거리며 제 손에 차가운 흔적을 남겼지만, 긴장한 탓인지 차가워진 손에는 그것이 시원한 느낌보다는 섬뜩한 느낌을 줄 뿐이었습니다.

 

, 아이리스!”

 

3층과 4층을 이어주는 층계참에서 아주머니와 마주쳤습니다. 예상은 했지만, 아주머니는 반가움 보다는 당혹감이 더 크게 느껴지는 얼굴로 저를 보며 반색하셨어요. 아주머니의 얼굴을 보니 기억이 나네요, 아주머니께선 제게 오늘 일이 다 끝나면 이야기 해주마.’라고 말씀을 해주셨지요. 전 오늘 하루 종일 워낙 많은 사람을 만나버린 탓에 그 사실조차도 기억을 하지 못했었는데, 아주머니께선 그걸 두고 하루 종일 고민하셨던 게 분명해 보였습니다. 아마, 탈수기를 돌리면서 생각에 잠기지 않았더라면, 아주머니께 비정한 마음에 대해 여쭈어 보았겠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아주머니까지 이 일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인간적인 도리로서 말이에요.

 

오늘 하루 수고하셨습니다.”

? ..... 어 그래! 너도 오늘 고생 많았어. 그런데 말이야......”

아아, 그 이야기는 안 들어도 될 것 같아요. 아주머니께서 곤란해 하실 화제라면 굳이 여쭤봐선 안되겠지요.”

 

아주머니께서 화두를 열기 전에 미리 말을 가로막아버리자, 아주머니께선 의아하다는 감정과 다행이다라는 감정이 뒤섞인 얼굴로 저를 바라보셨습니다. 아주머닌 생각 잘했다.’라는 기색으로 제 어깨를 토닥여주셨고, 저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것으로 그 보답을 대신했지요. 저는 아주머니를 보내드리고 얼른 4층으로 올라갔습니다.

 

여러 개의 문이 열을 지어있는 복도, 그리고 그곳에서 은은하게 풍기는 물 묻은 편백나무 향기....... 평소라면 마음이 착 가라앉고 몸이 이완되는 편안함을 느꼈겠지만, 지금은 오히려 몸이 딱딱하게 굳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저는 숨을 후 하고 내쉰 뒤에, 토라 방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있어요?”

, 언니! 들어오세요.”

 

토라의 허락을 받고 방에 들어가니, 그녀가 활짝 웃는 얼굴로 맞이해 주었습니다. 헐렁한 파자마를 걸친 그녀의 등 뒤에는, 언제 구해왔는지 안줏거리가 책상위에 놓여있었어요. 제가 이곳으로 올거란 걸 강하게 확신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아아, 소주를 가지고 오셨네요?”

냉동고에 있는거 한 병 가지고 왔는데...... 이걸 소주라고 하나보구나?”

, 이거 참 이게 무슨 술인지도 모르고 그냥 가지고 온 거에요? 이 언니 이거 안 될 사람이네?”

에이 뭐...... 마시고 취하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니야?”

틀린 말은 아니지마는...... 아 마침 잘됐네. 저도 언니랑 마시려고 이걸 준비했었거든요.”

 

토라가 꺼낸 건 맥주였습니다. 맥주와 소주....... 하기야 술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좋은 거 아니겠어요? 이런 생각을 하는데, 토라는 제 손에 들린 소주병을 가지고 가서는 빈 맥주잔에 그걸 조금 따랐습니다. 그리고......

 

.....? 섞는 거야?”

, 소맥이라고 하는 건데, 라스알하게 풍의 칵테일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거에요.”

그렇......단 말이지?”

 

 

 

 

 

 

 

Channel 1. 로키

 

생각을 마쳤으면, 그것이 식기 전에 바로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나는 창가에 어스름이 내려앉자마자, 옷가지를 챙겨입고 방을 나섰다. 1월의 찬 공기가 가슴팍을 감쌌지만, 그런건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라스알게티 역까지 걸어서 15, 그 거리를 걷다보면, 알아서 몸이 덥혀지지 않겠는가? 다만, 내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나의 이런 행적이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을까 하는 것뿐이다.

 

나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해 가면서 계단을 내려갔다. 가끔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 기분이 좀 거슬리지만....... 이정도 소리에 누가 알아차릴까 싶다.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그렇게 조심해서 내려가다 보니, 어느덧 현관이다. 현관 옆에는 요원들의 이름이 적혀있는 우편통이 놓여져 있었다. 한때는 이곳에 빽빽한 이름이 적혀져 있었으며, 그곳에 각각 의뢰장이 들어있었지만, 지금은 견출지 위에 검은 안료로 X자가 그어져 있거나, 노란 리본이 걸려있었다. 지금 내 우체통은 어쩌냐고? 뚜껑을 열어보았지만, 그 안은 텅텅 비어있었다. 아무래도 시국이 뒤숭숭하니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나는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열고, 지부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산능선을 타고 올라오는 산바람을 맞으며,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을 내려가야 한다. 그곳을 내려가서.......

이거 대단한 유다 나셨구먼.’

“........”

 

오랜만에 머릿속의 수다쟁이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요사이 매우 조용해서 그 존재조차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그 사이에 심통이 났는지, 내 가슴에 콕콕 박혀오는 말을 날을 세워 하는 모양이다.

 

나는 신의 존재를 믿지는 않지만, 지금은 믿고 싶기도 하네, 세상에...... 펜릴이 이러려고 너를 구했다고 생각하면, 자괴감 들고 괴로울걸?’

“........”

남의 목숨 발판삼아서 살아남았고, 최소한의 양심이 있다면, ‘우리를 위해 뭔가 기여가 되는 일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

이봐, 너는 나고 나는 너야. 이제 와서 감정이 없는 척 입을 다물어 봐야. 내가 속아줄 거 같아?’

“......”

 

불리한 일에 직면했을 때, 인간은 세 가지 행동양식중 하나를 선택한다고 한다. 첫째는 그것에 맞서는 것, 둘째는 이를 참는 것, 마지막은 회피하는 것. 나는 두 번째 양식을 선택했다. 묵묵히 듣지만, 그 말에 따라 움직일 생각은 전혀 없었다. 참는 것 말고는 답이 없다. 이 수다쟁이 녀석이 지쳐 나가떨어질 때 까지.....

 

내 마음을 후벼 파는 수다쟁이의 창과, 그것을 막아내는 내 모르쇠의 방패가 마음속의 혈투를 벌이는 동안, 어느덧 나는 라스알게티 역의 플랫폼에 올랐다. 역시나 이곳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시체안치소와 다름이 없었다. 무감각한 얼굴로, 그리고 구부정한 자세로 열을 지어 서 있는 사람들의 군상. ‘파이낸셜 스페이스에서 신간도서를 소개하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걸어 다니는 시체였었나? 그게 출간된 지 얼마 안 되서 2쇄를 증보할 정도로 잘 팔려나가는 것 같았는데, 나는 시체가 걸어 다니는 초자연적인 현상에 열광을 하는 이러한 트렌드를 보면 어처구니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외부인인 나의 시선에선 걸어 다니는 시체’, 그건 초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17세기 현대인의 자화상을 자학하듯이 그려낸 것 같거든.

 

그딴 현학적인 생각을 하면 내가 하는 말이 들리지 않게 되는가보지? 그게 참아내는 거 같아? 틀렸어. 니가 하는 건 단지 내가 하는 말에 도.....’

 

플랫폼을 쨍쨍거리며 울리는 소리와 함께 열차가 들어왔고, 나는 수다쟁이의 말을 무시하며 인간 면발 속으로 내 몸을 던졌다.

 

 

 

 

 

 

 

 

Channel 2. 아이리스

 

.......”

“.......”

 

토라가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맥주 글라스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제법 비장한 분위기를 연출해 보이려고 한 것 같은데, 그녀에게 정말 미안하게도 술기운 때문인지 그런 토라의 모습을 보노라니 눈치 없이 웃음이 실실 새어나오려고 했습니다.

 

한 방 더...... 갑니다!”

!!”

우와!!”

 

토라의 손에 들린 맥주 글라스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테이블을 때리고, 글라스에는 엄청난 양의 거품이 왈칵왈칵 쏟아져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생명수가 바닥에 더 떨어지기 전에 토라는 재빠르게 제 손에 글라스를 건넸고, 저는 입을 바싹대고 거품을 정신없이 흡입했습니다.

 

어때? 기가 막히지?”

읍읍! !”

히히히히. 내가 봐도 참 기가 맥히게 잘 탄단 말이야.”

 

토라의 말은 반박할 바가 없는 사실인지라, 저는 무의미한 의성어를 내는 걸 포기하고 술을 마저 들이키기로 했습니다. 목구멍으로 감칠맛 나는 액체가 꼴딱꼴딱 넘어가는데 제가 거기에 대고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언니 술 진짜 잘 마신다.”

....! 그래? 난 저번에 로키군하고 술 한 잔 할 땐 정말 못 마신다 싶었거든.”

아아 그래? 무슨 술 마셨는데?”

막주라고 했던가? 뽀얀 술 있잖아. 쌀로 만들었다고 하는 거 같던데.”

아아, 그거? 그건 그럴 법 해. 맛있어서 꼴딱꼴딱 마시다 보면 한방에 훅 가는 술이라구. 시한폭탄 같다고 할까?”

그러고 보니까. 처음에는 맛있다고 먹어 댔던거 같긴 하네. 와 근데 그거 먹고 그 다음날 머리가......”

누가 안에서 두드리는 거 같았지?”

응응...... 이 술도 그래?”

그런 편?”

하하, 내일 난 죽었네.”

그럼 뭐......”

그럼 뭐?”

먹고 죽어야지 뭐.”

맞다 맞아! 먹고 죽어!”

 

토라와 저는 서로를 마주보며 깔깔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 진짜, 머리가 제 목에서 떨어져 나와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 같았습니다. 핑핑 돌기도 하고, 귀에서부터 웅웅거리며 울리기도 하고, 하지만 그 기분만큼은 정말......뭐랄까. 그래요. 최고였어요! 괜히 아무것도 아닌데 웃음이 나오고, 기분이 좋아지고, 세상 모두가 저와 함께 웃어주는 것 같은 그런 기분, 토라의 마음이 제 마음이고, 제 마음이 토라의 마음인 것 같은 기분. 다시 경험하지 못할 정말 최고의 기분을 이렇게 좋은 사람과 함께 나눌 수 있다는 건 최고의 경험인 것 같습니다.

 

제가 흥에 겨워 실실거리는 동안, 토라는 또 다시 맥주 글라스에 소주와 맥주를 따랐습니다. 발개진 토라의 얼굴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 정도로 예뻐 보였습니다.

 

 

, 숙녀 여러분, 잔 안에 젓가락을 담가주세요.”

!”

그리고.... 다른 손으로 다른 젓가락을 잡아주세요! 풋 유어 찹스틱 온 유어 핸드!”

좋고!”

때려!”

 

 

 

 

 

 

 

Channel 1. 로키

 

커피 마실래?”

 

늦은 시간에, 뜻밖의 방문이었을 테지만 도로시는 이 모든 걸 예상하고 있었던지 응접실의 테이블에는 두 개의 머그잔이 놓여있었다. 나로 말하자면 그닥 마실 기분이 아니기에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녀석은 그런 나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두 개의 머그잔에 커피가루와 물을 그대로 부어버렸다. 그래....... 내가 이 녀석에게 뭘 바랬던 걸까?

 

어쨌거나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잔이 내 앞에 놓여졌고, 커피를 따라준 이는 끙하는 신음소리를 내며 소파에 앉았다.

 

뭐 너 같은 종류의 인간을 앞에 두고 교장선생님 훈화 말씀 같은 걸 해버리면 칼을 맞을지도 모르니,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도록 하자고. 여긴 무슨 일이야?”

너한테 제안할게 있다.”

제안? 커미션 깎아달라고? 설마 나한테 커피 좀 얻어먹는 사이가 됐다고 그런 시덥잖은 요구를 입에 담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야?”

, 사람 말 좀 끝까지 잘 들으시죠. 사장님. 다 니 좋으라고 하는 소리니까.”

 

내 까칠한 대응에 꽤나 머쓱해졌는지, 도로시는 애매한 표정으로 어께를 으쓱하더니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부탁하는 입장에 본격적인 용건도 꺼내기 전에 이렇게 세게 나오면 되나 싶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미 엎어진 물인데다가, 내가 그동안 녀석에게 해왔던 태도를 일관되게 유지하는 것이 더 나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그래, 무언가를 얻어내기 위해 대화를 나누는 것도, 사람 몸에 칼을 대는 것 만큼 이나 머리를 굴려야 하는 일이니까.

 

상대에게로부터 무언가를 얻어내기 위해서는...... 그럴듯한 논리보다 감정적인 공감대, 즉 래포가 먼저 형성되어야 한다. 공감대의 종류는 다양하지만...... 내가 아는 한 가장 효과가 좋은 공감대의 소재는 바로 공공의 적이다.

 

너는 지금 목적 달성이 눈앞에 놓여있다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는데, 내가볼 때 네 눈앞에는 휠맨 총책이라는 감투보다는, 녀석의 목을 잘라버릴 칼이 놓여있지 싶다.”

“......?”

머지않아서 우리가 너희를 칠거란 이야기다.”

뭔 소리야? 찰리가 죽은 마당에, 나까지 죽으면 너희가 총책이 될 만한 사람을 찾을 수 있을 거 같아?”

찾았다면?”

? 어떤 새끼야?”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도 찾고 방법도 찾았지. 지금 지부장은 휠맨의 직영화를 추진하려고 하는 참이고, 그 계획에 적당한 인물을 찾았거든.”

“......”

 

나의 대답에 도로시는 한동안 아무 말도 못하고 멍하니 있다가, 착잡한 얼굴로 커피잔을 잡았다. 그래, 복잡할 것이다. 휠맨의 직영화는

 

결국 그렇게 할 거면 미친년이라고 욕이라도 말던가.”

 

녀석이 우리에 적을 두던 시절, 수뇌부에게 줄기차게 요구해오던 사안이었거든. 자신의 말이 부메랑처럼 돌아온 것에 대한 감회에 젖어있는 동안, 나는 녀석이 건넨 커피를 마셨다. 이 녀석의 마이페이스는 참....... 커피마저도 내가 정말 싫어하는 농도로 만들어 놓았구먼. 비록 나는 입맛만 쓸 뿐이지만, 녀석은 어떨까? 지금 나의 처지와는 별개로 도로시가 꼴좋게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커피 값은 짤짤이가 필요 없을 정도로 잘 치른 거 같네. 그런데 그걸 왜 내게 알려주는 건데? 솔직히 네 입장에서는 내가 개처럼 질질 끌려 다니는 걸 지켜보는 게 더 재미있지 않아?”

너도 알다시피 내 꼴이 이 꼴이라 재미 같은 감정은 느낄 수가 없어. 그보다, 솔직히 내 입장에서도 휠맨 총책이 바뀌어서 내게 좋을 게 없기도 하고.”

새로운 사람이...... 아이리스씨다?”

역시 눈치하나는 빠르구먼. 그래. 나는 녀석이 휠맨 총책이 되지 않았으면 한다.”

그게 제안하는 바였다라...... 대신에 너는

네 녀석이 휠맨 총책이 될 수 있도록 이렇게 제보를 해 준거지.”

좋아...... 일단 고맙다는 말부터 해야겠네. 하마터면 의기양양하게 운터브룩으로 갔다가 불귀의 객이 될 뻔 했잖아.”

정말 고맙다는 인사는 휠맨 총책이 되고나서 하는 것도 늦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도로시는 커피잔을 거칠게 내려놓으면서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녀석의 눈은 내가 아직 알지 못하는 감정으로 인해 일렁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 감정이란 게 대체 무엇일까 하여 녀석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니....... 눈시울 쪽이 꽤나 상기되어있었다. 이런 경우라면..... 어떤 장르의 감정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몰라도, 그 강도가 제법 심하여 녀석의 몸이 반응을 보일정도로 컨트롤 하기 어려울 정도라는 것 정도는 깨달을 수 있었다.

 

아이리스씨는 살려두기 어려울 거 같아.”

“......뭐 이 새끼야?”

하늘에 태양이 두 개가 될 순 없는 법이지. 그녀를 살려두어도, 니들이 그녀를 내세워서 내목을 자르려고 달려들지 않으리라고 보장할 수 있어?”

“......”

 

내색은 되도록 하지 않으려 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녀석이 이런 식으로 나오리란 건 내 예상 밖이었다. 정말 종잡기 힘든 녀석이구먼, 어떨 때 보면 이게 그 미친년이 맞나?’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영리하게 구는가 하면, ‘잠깐이나마 그런생각을 했던 내 눈이 잘못된 건가?’싶을 정도로 이상한 방향으로 튀겨나가 버리니까...... 아니, 내가 실수를 한 걸지도 모르겠다. 도로시년이 이런 변수 투성이인 녀석인 건 진작에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변수가 내게 유리하게 작용하겠지.....라고 근거 없는 낙관론으로 내 스스로 자충수를 두어버린 것일지도......

 

말로인해 방향이 틀어졌으니, 역시 말로서 방향을 원래대로 돌려야 한다. 그렇다고 무작정 말을 하기보다는 생각을 하고 말을 해야 한다. 상황이 어려워지긴 했지만, 분명 극복하지 못할 것은 아니다. 내가 했던 전략이 실패로 돌아갔다면, 이를 수습하기 위해선 다른 전략을 써야 할 것이다. 가만......내가 어떤 대화전략을 사용했더라? 그래, 녀석의 관심을 끌기 위해 불안감’ ‘공포감이라는 것을 이용했었지. ‘공공의 적이라는 소재를 통해서 말이야. 그런데 그 전략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가? 그래, 내가 의도한 공공의 적은 지부장이었다. 그런데 이 귓구멍에 귀지가 가득 찬 것 같은 머저리같은 년이 내가 가리키는 지부장이라는 달 대신에 답답이라는 손가락만 바라보니 이런 일이 생겨 버렸다.

 

그렇다면 답은 명확하지, 이 손가락만 보는 머저리의 머리통을 잡아서라도 달을 보도록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Channel 2. 아이리스

 

마지막에 마지막 잔을 입에 털어놓고 나서야, 우리 둘의 파티는 끝이 났습니다. ‘시작은 미약했으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라는 말이 있었지요? 술자리의 시작은 즐거움이 함께했지만, 그 끝은 지끈거리는 머리와, 울렁거리는 속, 그리고 갱신하기 어려운 몸만 남은 것 같았습니다. 그건 토라도 마찬가지였는지, 그녀는 머리를 거칠게 긁으며 그대로 바닥에 드러누워 버리더군요.

 

저는 몸을 기울여, 멍한 얼굴로 천장을 바라보는 토라씨의 얼굴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녀의 붉은 망막위로, 천장의 등불의 불빛이 켜켜이 쌓이고 있었습니다. 참 여자가 여자를 두고 이런 말을 하기는 민망하지만, 정말 언제 어느때고 그녀의 얼굴은 정말 예쁜 것 같습니다. 이런 예쁜 거죽의 이면에는 어떤 생각이 소용돌이 치고 있는 걸까요?

 

아이리스 테펠리나.”

?”

기록당시 연령 23, 현재 시점으로 24. 가족사항, 양어머니인 토리스토아 테펠리나 외 양남동생 1명이 있음. 이스트 민스터 교구의 고아원에서 자라고, 현재 그곳에 수녀로서 재직중. 최종학력 대학교 재학 중. 전공 교육학.”

...... 그런걸 어떻게.”

 

제 신상정보를 줄줄 읊어대는 토라의 말에 화들짝 놀라 토라에게 물어보았지만, 토라는 여전히 멍한 얼굴로, 하지만 망설임은 없이 제 신상정보를 암송해댔습니다.

 

정치적 성향은 중도우파로 여겨지나, 최근 철도 민영화에 반대하는 집회에 참가한 것으로 미루어 정치적 성향에 변화가 있을 것으로 판단됨. 최근 양어머니의 사망 이후, 양어머니가 몸담은 바 있는 수도원을 찾았으며, 그곳에서 엘라이라는 수사에게 모종의 교육을 받은 바 있음.”

토라 너......뭐야?”

놀랐어?”

 

두 번째 질문이 나오고 나서야, 토라는 등불에서 눈을 떼고 저를 바라보았어요.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멍해보였지만, 문자 그대로 멍하다는 것 보다는, 등에 서리가 떨어진 것 같은 차가움을 느끼게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1116일 이후로 한풀 꺾이긴 했지만, 한때는 벽에도 우리의 귀가 걸려있었다고. 거기에..... 아무리 중요한 요원이 신세를 졌다는 명분이 있다고 해도, 명백히 부외자인데, 우리라고 뒷조사 한번 안 해봤겠어?”

그럼......”

맞아. 언니에게 이런 말을 하는건, 언니가 문자 그대로 털어도 먼지하나 안 나오더라.’라는 결론을 내렸었기 때문이야. 하지만..... 어디까지나 내렸었다.’라는 거지. 적어도 난 그래.”

무슨 말이야? 지금은...... 아니란거야?”

, 언니가 이곳에 온 목적 자체는 별로 문제될 게 없었지만, 그로부터 파생된 제 2의 목적이 문제였어...... 나와 왜 술을 마시러 왔는지 다 알아버렸거든.”

“.......”

내가 말했지? 이면이란 놈에 신경 쓰지 않으면 그놈이 언니 등에 칼을 꽂아버린다니까. 알고 있겠지만, 그 이면이 슬슬 언니에게 손을 뻗치기 시작하고 있어.”

언니가 뭘 알고 싶어 하는지 잘 알아. 하지만 내가 이런 말을 할 정도면, 그 호기심이 언니를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몰아넣을지 짐작되지 않아?”

...... 그럴거 같네.”

언니 앞에는 두 개의 선택지가 있어. 빨간색 좋아해? 파란색 좋아해?”

글쎄......”

그래, 무턱대고 말해봐야 선택을 기대하긴 어려울거 같으니, 제대로 이야기 할게, 빨간색을 선택하면 언니는 위험을 무릅쓰고 진실을 목도하는거야. 그리고 이면에게...... 잡아먹히겠지. 파란색을 선택하면.”

나는 안전해지겠지? 진실이란 것을 묻어두는걸 전제로 하고 말이야.”

맞아.”

...... 나는 네가 진단했던 대로 진도 우파였어. 그런데, 철도 민영화 집회가 나를 많이 바꾸어 놓았지.”

그렇구나......”

 

토라는 웃음 섞인 한숨을 쉬었습니다. 아마, 토라는 제가 이런 답을 하리란 걸 알고 있던 것 같았어요. 그래서일까요? 그 웃음 속에는 어쩌면 내 짐작에 하나도 어긋남이 없지?’라는 조소의 냄새가 감돌았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집어넣어 그곳에서 네모난 카드를 하나 꺼냈습니다.

 

나라면.”

 

토라는 저에게서 눈을 돌려 다시 한 번 등불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녀의 빨간 망막에 비친 등불이 일렁거렸습니다.

 

이 카드키를 가지고 절대 지하로 내려가지 않을 거야. 그리고 거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지 말든지 절대로 궁금해 하지 않을 거라고.”

고마워.”

하나 더, ‘땅 속으로 들어가서 보라. 마음가짐을 바로하면, 숨겨진 돌을 찾을 수 있을지니.”

“.......그게 무슨 말이야?”

아 몰라. 언니랑 술을 너무 마셨나봐. 졸리네....... 언니 이제 우리 푹 자자. 자고 내일 아침에 함께 눈을 뜨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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