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가지 인생 - 101

갑과을 작성일 21.06.07 01:5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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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는 깜짝 놀랐지만, 정작 당사자는 뭔 일이 있었냐는 듯, 제 몸의 눈을 털고는 우리를 올려다보았다.

 

“다들 남밭에서 뭐하는거래요?”

“남…...뭐?”

“아니 남밭이 뭔지 모르오?”

 

소녀는 자기 발 아래를 거칠게 가리켰다. 자세히 보니, 눈 속에 파묻혀 잘 보이지 않았던 상추잎들이 눈에 들어왔다. ‘필그림’들은 자신들이 한 행동에 우왕좌왕 했다. 심지어 알샤인은 균형을 잃고 그대로 나자빠졌다. 그 모습을 본 소년은 끌끌 혀를 찼다.

 

“급새바람도 안불었는데 없는 비얄에 강중백히니 애가 말라 죽겠네.”

 

그래도 나름 대륙 이곳저곳을 앞마당처럼 누볐던 나조차도 도저히 알아듣기 힘들었다. 하지만 소녀가 화가 났다는 것, 그리고 그 원인이 우리에게 있었다는 것은 확실했다. ‘필그림’들은 소녀의 손짓발짓을 보아가며 조심스럽게 상추밭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꼬마야, 여기 근처에 마을이 있다던데, 안내해 줄 수 있니?”

“마을이야 있기는 한데…….”

 

소녀는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 짐짓 땅바닥을 긁으며 의뭉을 떨었다. …. 소박한 말투에 허름한 옷으로 덮고 있었지만, 능구렁이를 열댓마리는 뱃속에 담아두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나는 녀석의 비지니스 전략에 남몰래 혀를 찼지만, 주설은 그런 것 따위는 예상 했다는 듯, 주머니에서 지폐뭉치를 척 하니 꺼내보였다. 소녀는 혹시나 무를새라 휙 채가고는 앞장을 서서 필그림들을 인솔했다. 

 

“내 마침 집에다 잿노리를 두고왔으니 마카 따라오래요.”

 

소녀를 따라 한참을 걸었다. 눈들이 얼어 길이 미끄럽고, 우리는 가끔 허우적거렸지만, 소녀는 가끔 뒤를 돌아 우리를 쳐다볼 뿐, 손을 잡아준다거나, 허방다리를 알려준다거나 하는거 없이 이 눈길을 휙휙 날아다녔다.

 

“와 씨….… 쟤는 발에 날개라도 달았나?”

“그러게 말여. 나도 나름 산좀 탄다 싶었는디, 어우…….”

 

주설도 흐르는 땀을 닦으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소녀가 데리고 간 곳은 골짜기에 취락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마을이었다. 산속의 마을이라고 해서, 운터브룩의 쓰레기 산을 연상할수도 있겠지만, 그것과는 결이 달랐다. 쓰레기 산에는 도시의 모순과 사람들의 절박함이 안개처럼 흐르고 있었다면, 이 마을에는 투박함 속에 의지가 묻어있었다.

 

“다녀왔어요.”

“잉? 남밭에 벌써 다녀왔나?”

“손님 델고 왔어요. 손님!”

“손님?”

 

집안에는 곧 쪼그라들 것 같은 노인이 아궁이에 고개를 쳐박고 있었다. 그는 소녀의 말에 고개를 들어 우리를 바라보았다.

 

“여기는 어터오셨소?”

“안녕하셔유?”

 

주설은 비지니스용 미소를 지어보이며 집안에 들어갔다. 노인은 그녀의 허물없는 태도에 움찔하긴 했지만, 딱히 제지를 하지는 않았다. 소녀는 나름 몰래 한답시고 주머니에서 돈뭉치를 슬쩍 꺼내 노인에게 보여주었다. 노인은 그 모습에 역정을 내며 소녀를 타박했다.

 

“지지바가 또 작패질하네. 내가 손님들 오믄 거러지 맹키로 하지 말랬지 않나.”

“아아아! 그만해요!”

 

노인은 소녀의 머리에 꿀밤을 먹이고는 돈을 뺏어서 주설의 손에 쥐어주었다. 노인은 그녀에게 연신 고개를 수그렸다.

 

“내가 손녀아라구 하나 키우면서 거러지 짓거리 하지말라구 했는데. 아가 말을 안듯소. 미안하요.”

“아이고 아녀유. 괜잖아유. 지가 산속에 길을 잃었는디 마침 손녀분을 만났어유. 마침 잘 됐다 허구 길 안내를 부탁혔는디 맨입에 할 수 있겄어유? 그래서 안받는다는걸 억지로 쥐여준거니 너무 타박 마셔유.”

 

주설과 우리는 한입으로 손사래를 쳤다. 노인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소녀를 흘겨보더니, 돈을 자기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 모습에 답답이가 쿡 하고 웃었다가 아닌척 고개를 딴 데로 돌렸다.

노인의 안내를 따라, 우리는 나름 사랑방이라고 할 만한 곳으로 들어왔다. 벽은 황토가루가 부스스 떨어지고, 바닥에는 지푸라기 멍석이 깔려있었지만, 바깥에 덜덜 떨던 것에 비교하면 궁전이나 다름 없었다.

 

“먹잘건 없지만 많이 먹어보래요.”

 

노인은 김이 펄펄나는 국을 꺼내왔다. 안에는 각종 채소들이 푹 고와져 있었고, 군데군데 하얀 반죽들이 들어있었다. 우리는 국을 보자마자 새삼 배가 고팠다는 것을 깨달았고, 정신없이 고개를 쳐박고 국과 건더기를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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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는 투박했지만 친절했고, 우리는 덕분에 나름 안락하게 몸을 녹일 수 있었습니다. 허기가 해소되고 몸이 따뜻해지자 강팍했던 마음에 여유가 찾아왔지요. 노인은 입맛을 쩝쩝 다시는 우리를 보며, 빙긋 웃었습니다.

 

“식사 하셨으니 한 잔 하래요.”

“아 네네 감사합니다.”

 

아궁이에 걸린 찻주전자에는 메밀냄새가 몽글몽글 피어올랐어요.

 

“워대서 오셨대요?”

“아 저희는 라스알게티에서 왔습니다.”

“아이구 도회지서 이런 구서케 오느라 음매나 고생이래요.”

“사실 뭐……. 그동안은 기차로 오느라 고생이랄 건 없었는데.”

“아 그랗게 보니끼니 여는 열차역이랄 것두 없는데 어터 오셨대요?”

 

노인의 말은 알아듣기 어려웠지만 대충 우리는 눈치로 요지를 때려맞췄고, 알샤인씨가 우리를 대신해 사정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잘 가고 있던 열차에 갑작스럽게 눈사태가 덮친 일, (이유를 설명하자니 도저히 믿기 어려울 것 같아) 운이 좋아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열차는 돌아갔지만 우리는 이 곳을 넘어야 하기 때문에 돌아가지 않고 이곳을 도보로라도 돌파하기로 했다는 것 까지 말이지요.

노인은 ‘필그림’들의 사정을 듣고 나서는 혀를 끌끌 찼습니다. 

 

“아니 이런 급새바람 철에 가길 어딜간다 말이요. 사람들이 그래게 할 일들이 없소?”

 

노인의 말로는 이런 겨울철에는 어딜 나갈 생각은 하지 않고 가만히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함부로 나다니다가는 큰일이 난다면서요.  하지만 주설씨는 특유의 고집을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선로가 완전히 개통되는데 4개월 남짓이 걸린다고하니, 어떻게든 그 전에 넘어야 한다면서요.

노인과 주설은 한참을 옥신각신 했지만, 결국 주설씨의 고집에 두손을 내저었습니다.

 

“가마이 보니 간데이가 음청 부었소. 장사한다구 들었는데 장사꾼이 아니라 장군감이오 그래.” 

 

노인은 그래도 외지인들끼리 이 산을 넘는다는건 무리고, 안내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에 우리 모두는 안내를 해줄 사람이 있냐고 물었고, 아쉽게도 노인은 우리의 질문에 고개를 저었습니다.

 

“여 근처에 은광이 났다지 않소. 젊은이고 늙은이고 몸뗑이 성한 사람들은 죄다 거게가서 은캐느라 인제는 산을 넘을라는 사람이 없대요.”

“은광이요?”

“야.” 

 

할아버지는 설명을 이어갔어요. 요지를 간단하게 말하자면, 최근에 이곳 산에 은광이 발견되었고, 그것을 캐느라 사람들이 죄다 몰려가는 바람에, 마을이 크게 퇴락했다는 것이었어요. 이 촌락의 사람들은 ‘세르파’라는 종족으로 예전부터 산을 넘는 가이드로서 생활을 영위했지만, 무르짐 산맥 횡단 철도가 생기면서 기존의 생활 근간이 흔들렸고, 새로 발견된 은광 덕분에 새로운 생활 기반이 생겼다는 거에요. 하긴, 사람 목숨은 하나고, 산악 가이드나 광부나 위험하기가 매한가지라면 돈을 더 주는 쪽을 선택하는건 당연지사일거에요.

 

“그라믄 혹시 할배가 직접……?”

“예끼!”

 

할아버지는 리겔의 질문을 단 한마디로 일축해버렸습니다. 우린 꽤나 난감해졌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일정에 크게 차질이 생길 판이니까요. 가이드를 구하지 못하면 이대로 갇혀있어야 할 판이고, 4개월 뒤에 선로가 열린다고 한들, 역이 없는 이곳에 열차가 우리를 태워줄 리가 만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설씨의 고집에 따랐건만 결과가 영 파이였습니다.

 

“음…… 그런다구 이대로 손가락이나 빨 순 없쥬. 어떻게든 가이드를 구하는 수 밖에.”

“다들 은캐느라 정신이 없다는데 방법이 없지 않아요?”

“뭐……. 약간의 손해를 감수하면 되쥬.”

 

주설씨는 돈을 더 벌리는 쪽으로 사람이 몰리는 것은 당연지사라며, 은을 캐는 것 보다 더 많은 임금을 제시한다면 누구든 따라오지 않겠냐고 말했습니다만…….

그 말을 듣노라니, 그냥 어떻게든 그녀를 기차로 끌어올려서 4개월 동안 기다리는 것이 더 나았던 것이 아닐까 하는 후회가 밀려들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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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5년 1월 1일

 

“끄아아…….”

 

답답이는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했다. 그녀의 피부는 푸석푸석하고, 두 눈은 터져버린 실핏줄 탓에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뭐……. 사실 답답이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주설도, 리겔도, 그리고 알샤인도 늘어져버린 정신줄이 육신에 간당간당하게 매달려 있는 형국이었다.

 

“몇시에요?”

“여덟시 십분.”

“응? 그럼 진작에 해가 떠야 하는데 왜 아직도 안떳지?”

 

보이는 모든 것을 얼려버릴 기세로 부는 산골의 바람은, 결국 시간까지 얼려버린 것인가, 아무리 1월이라고 해도 분명 해가 뜰 것이 분명한 시간임이 분명했지만, 문 틈 사이로 햇볕은 그림자도 없었다.

 

“와 진짜 춥네……. 잠은 좀 잤어요?”

“그 질문도 벌써 열 일곱번째다.”

 

평소라면 나의 이런 지적에 답답이는 부끄러워하며 이런저런 변명을 늘어놨겠지만, 답답이의 육신을 지배한 피로 탓인지 그녀는 눈을 끔뻑거릴 뿐,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어쩌면 그게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다.

문제의 발단은, 노인의 제안에서 시작됐다. 어차피 밤이라 이동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마침 자신의 손녀가 광산에서 일하는 마을 청년들을 위해 위문품을 전달하기로 했으니, 하룻밤 이곳에서 머물다 가라는 것이었다.

 

호기롭게 열차에서 내렸다가 추위로 한참을 쥐어터진 우리로선, 거절하기 어려운 제안이었다만……. 이곳 산간 마을의 바람은 ‘바람’이라는 단어가 연상시키는 그런 귀여운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도 나름 이런 곳에서 살아보겠다고 이 집의 벽은 꽤나 두꺼웠고, 집안 한가운데 설치해둔 화덕은 안타까울 정도로 열심을 다해 온기를 내뿜고 있었지만, 산골을 지배하는 바람 앞에서는 그저 요식행위에 불과해 보였다.

우리 필그림들은 미약한 온기나마 쐬어보겠다고 화덕에 옹기종기 둘러앉았지만,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서글픈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바로 화덕의 불씨 보다는 바로 옆에서 웅크리고 있는 동료들의 체온이 내 몸을 따뜻하게 하는데 더 도움이 된다는 것을 말이다.

 

거의 동시에 같은 내용의 깨달음을 얻은 필그림들은 그 이후부터 어떻게든 서로에게 붙어앉으려 애를 썼다. 몸은 덜덜 떨렸고, 그 덕에 잠을 자는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졌다.

그 와중에 대단한 것은, 집주인과 손녀였다. 그들은 잠결에 배를 까며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우리에게 있어선 뼈를 박살낼 듯 한 추위가 그들에게는 먼나라의 일로 느껴지는 모양이다.

 

“잘 잤소?”

 

억겁의 기다림에도 끝이 다가온다고, 손녀는 눈을 껌뻑이며 우리를 바라봤다. 그 천연덕스러움에 혀를 내두를 새도 없이 그녀는 화롯가 옆에 걸려있는 주전자에서 물을 따라 차를 만들었다.

 

“아이 참 입벌리고 잤는지 입속이 데우 깔깔하오.”

 

소녀는 우리에게 뜨끈한 차를 건네주었고, 대답할 힘도 없는 필그림들은 말없이 차를 홀짝였다.

 

“구서케 찬밥 좀 주래요. 내 얼른 뜨세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이 알아듣기 힘든 어휘의 향연 속에도, 어찌어찌 문고리 잡듯이 소녀의 지시를 알아들을 수는 있었다. 우리는 구석에서 찬 밥 몇 덩이가 담긴 그릇을 건넷고, 그것은 화덕의 냄비 속으로 들어갔다. 손녀는 부엌에서 나물 몇가지를 가지고 와서 손질하곤 냄비 속에 던져넣었다. 이윽고 죽이 끓으며 냄새가 물큰이 피어올랐다.

 

“급한대로 요것으로 에우고 얼른 가보래요.”

“길이 먼 편인가?”

“우리같은 산꾼이야 드래미 짜는 것 보담 쉬이 다녀오겠다만…….”

 

소녀는 우리를 위 아래로 훑어보곤 고개를 저었다.

 

“정신줄 놓구 가믄 구녕에 갖다가 그대루 강중백힐거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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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5년 1월 1일

 

노인의 배웅을 뒤로하고, 우리는 광산이 있다는 ‘포토시’를 향했습니다.

 

“우리가 좀 들어줘야 할거 같은데.”

“아이 괜찮아요. 옥시기 열섬 드는 것 보담 훨씬 낫대요.”

 

소녀는 우리의 만류에도 씩 웃으며 손사래를 쳤습니다. 그녀가 그렇게까지 무리하는 이유를 알게된 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어요. 이유요? 사실 저희가 소녀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었지요. 그녀는 전혀 무리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평생을 산에서 보낸 그녀에겐, 이 모든건 무리가 아니라, 그냥 생활에 불과했던 거였어요. 소녀는 자신의 체구보다 훨씬 더 무거운 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들고는 산길을 휙휙 다녔습니다. 반면 짐이랄 것도 없이 거의 맨몸으로 가는 우리는 몇 걸음 가지 않아서 가쁜 숨을 토해내야만 했답니다.

 

“와……. 저거 그냥 괴물인디?”

 

멀어지는 소녀의 뒷모습에 리겔은 침을 질질 흘려가며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아이구 저 화상을 그냥…….

 

그녀는 길을 개척하고, 우리는 거기를 간신히 따라잡는 것을 반복한지도 몇 시간, 소녀는 중천에 떠오른 해를 확인하고나서야 쉬어가자고 이야기 했습니다.

우리는 완전히 퍼져서 자리에 주저앉았지만 소녀는 분주하게 땔나무를 구해와서 임시로 불을 피웠어요.

 

“입 벌리지 말래요. 창자 튀어나온대요.”

 

그녀는 우리 ‘필그림’들의 꼬락서니가 제법 우스웠는지 낄낄거리며 불을 피웠습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소녀의 말에 토를 달지 못했어요. 괜히 토달다가 토할것 같았습니다.

 

“옥시기 죽이래요. 이기 한 그릇이믄 배가 뜨세질거래요.”

 

그녀가 건넨 옥수수죽을 우리는 말 없이 먹었습니다. 그녀 말대로 배가 제법 따뜻해졌어요.

소녀는 꽤나 분주했습니다. 우리가 옥수수죽을 먹은 동안 신발을 벗어 불가에 가져가 놓고, 발을 말렸어요. 발이 마르는 동안에도 가만히 있질 않고, 짐을 정리했습니다. 저 작은 체구에서 그토록 넘치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단 것이 새삼 놀라웠답니다.

 

“포토시에 그렇게 은이 많아?”

“나야 잘은 몰르지만 서두, 이야기는 많이 들려오드래요. 길가에 채이는게 은이라구. 또 온 산이 은색이라고 하드래요.”

“온 산이 은색이라고?”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녀의 말을 종합해 보면, 포토시라는 곳은 노천 은광인게 분명해 보였습니다. 우리는 누구랄 것도 없이 주설씨를 바라봤어요. 역시나 그녀의 눈은 탐욕으로 일렁거렸답니다.

 

“그으래…….”

 

주설씨는 누가 볼 새라 눈을 모닥불 쪽으로 홱 돌렸습니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그녀의 눈은 앞에 있는 모닥불 보다 일렁거리고 있었고, 손가락은 쉴새없이 바쁘게 움직였습니다. 마치 보이지 않지만 주설씨에게만 보이는 주판을 만지작 거리는 것 같았어요.

 

“그 많은 은들은 어떻게 헌다지?”

“나랜들 알겠소? 그냥 시키는 대루 하겠지요. 반짝이는 돌맹이들 주워다가 비료포대기에 썩썩 담아가지구 감독관들 주면 끝이래요.”

“......분명 그게 어디론가 유통이 될텐디 말여.”

 

주설씨는 눈살을 찌푸렸습니다. 노다지가 있다는걸 알았지만 그것이 이미 누군가의 소유물임을 알아차렸을 때의 허탈감이 적잖이 그녀를 언짢게 만든 모양입니다. 하지만 그녀의 혼잣말은 그녀가 이대로 입맛만 다시지 않고, 상인 특유의 현실감각으로 어떻게든 해먹을 건덕지를 만들어보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담고있었습니다.

하하……. 이거 라스알게티에서 꽤나 오랜 시간을 소모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여정이 더욱 길어질 것 같은 슬픈 예감이 드는 대목이었습니다.

 

“저기 그럼 이 물건들은…….”

“이건 울 오래비한테 줄거래요…… 웃차!”

 

소녀는 어떻게든 실마리라도 얻어보려고 말을 붙이는 주설씨의 말을 잘라먹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모닥불을 끄는건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저 눈을 뿌려주면 되는 거였으니까요. 눈이야 이곳에선 지천으로 널려있으니 몇번 품을 팔 것도 없이 모닥불은 하얀 연기를 단발마처럼 내뿜고는 그대로 타다만 장작들의 잔해만 남겨놓았습니다.

 

“으으….. 귀불알 얼겠소. 대충 에웠으면 일어나래요. 전번처럼 여버리 맨키로 갈기바람 맞다 낯바닥 삐끼지 싫음 서둘러야 할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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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산 한복판이었지만 눈의 하얀색과, 은의 하얀색을 구별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소녀의 말은 틀림이 없었다. 눈이 흩날리는 산중에서, 포토시의 탁한 하얀색은 멀리서도 보였다.

 

“여게부텀 포토시래요.”

“응 그런거 같다.”

 

우리는 눈을 헤치며 포토시 입구를 지나 천천이 걸어올라왔다. 일단 길이 험한 것도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숨쉬기가 너무나도 힘들었다. 머리는 띵하고 헛구역질이 났다. 소녀는 목적지에 다 왔다는 생각에 신이나서 치달리다가, ‘필그림’들을 돌아보곤 혀를 차며 우리가 그녀를 따라잡을 때 까지 기다려주었다.

 

“아랫동네 치들은 왜서 비실거린대요? 작업장 간부도 그러드만.”

“글쎄……. 우리 기준에선 네 쪽이 대단한 게 아닐까 싶다.”

 

소녀가 우리 앞을 한참을 가면 낑낑대며 따라잡고, 잠깐 쉰 뒤에 그녀가 다시 한 번 앞질러가면 우리는 그걸 다시 낑낑대며 따라잡기를 한참 동안 한 끝에,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포토시에 다다를 수 있었다.

멀리서 볼때는 그저 은빛 산이었지만, 가까이에서 보니, 이곳은 다양한 색채를 가지고 있었다. 눈 덮인 지붕은 은밀하게 형형색색을 품고 있었고, 거리에는 말끔한 옷을 입은 시민들이 가득했다. 광업이라는 1차산업을 기반으로 삼고있는 도시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우리 모두 적잖이 놀랐고, 소녀는 마치 이 도시의 모든것이 자신의 것이라도 되는양, 뻐기는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워매……. 냄시가 나는구먼.”

“무슨 냄새?”

“아따 눈치가 없구마잉. 돈냄시 몰……으윽!”

 

기운을 차린 리겔이 농지꺼리를 하려다가 코를 틀어막았다. 아니나 다를까 역한 냄새가 훅 끼쳐왔다. 모두들 리겔을 따라 코를 막았지만 이미 늦어버린 터라, 콧속으로 냄새가 파고들어왔다. 가만…… 이거 어디서 많이 맡아본 냄새인데……

 

“이거…… “

 

알 샤인이 심상치 않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그래, 비하적인 의미가 담겨있긴 했지만, 부정하긴 어렵다. 해시시의 냄새였으니까. 알샤인에게서 눈길을 피하며 나는 냄새의 출처를 확인하기 위해 주변을 살펴봤다. 아니나 다를까, 말쑥한 상점가의 진열장에 말린 대마가 걸려있었다.

 

“마약굴이여 뭐여?”

 

알 샤인은 미처 공무원 물을 다 빼지 못한 티를 내며 상점가로 걸어갔다. 그의 표정은 사뭇 비장해보이기 까지 했다. 하기사 왕도에선 금지하는 물품이 이렇게 백주대낮에 여보란 듯이 걸려있으면 전직이든 현직이든, 공무원으로서 도저히 못본척 하고 넘어갈 수가 없을 것이다. 알샤인은 진열장을 살펴보다가 무언가를 보곤 소스라치게 놀랐다.

 

“야 이건…….”

“오매 저거를 여그서 다 보네잉.”

 

알 샤인이 가리킨 것은 말린 나뭇잎 이었다. 일단 녀석의 표정이 심상치 않은 것으로 보아, 대마 못지 않게 공무원의 심기를 거스르는 물건임이 분명했지만, 안타깝게도 녀석의 감정에 온전히 공감할 수 없었다. 일단…… 나도 처음 보는 거였거든.하지만 ‘필그림’모두가 알샤인의 놀라움에 물음표를 띄운건 아니었다. 리겔은 어께너머로 알 샤인을 지켜보다가 그 역시도 놀랍다는 듯한 얼굴로 턱을 매만졌다.

 

“이게 뭔데?”

“코카잖어.”

 

녀석의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알샤인이 왜 그렇게 소스라치게 놀랐는지 그 곡절을 깨달을 수 있었다. 뒷골목의 속담에 ‘남녘의 대마, 북녘의 코카’라는 말이 있는데. 해당 지역에 주로 자라는 두 마약성 작물을 두고 만들어진 것이라 전해진다는군.

둘은 식물에서 전래되었다는 것 말고는 공통점이라곤 하나도 없다. 대마에서 만들어진 ‘해쉬시’는 복용자를 쿨다운 시키는 반면, 코카에서 비롯된 ‘코카인’은 복용자를 흥분시킨다고 한다. 중독성의 경우는 ‘코카인’이 ‘해쉬시’의 몇배가 된다고 하던데……. 리겔 역시도 한때 마피아에 몸을 담았던 만큼 그 작물에 대해 어느정도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무래도 이번에두 파인가 싶다.”

“왜?”

“왜긴 왜여. 하늘에 태양이 두개가 뜨것냐?”

“되지도 않게 비유하지 말고 확실히 말하자?”

 

답답이의 퉁박에 리겔이 울그락 푸르락 해지자, 알 샤인이 대신 나섰다.

 

“도시 하나를 두고 마약 카르텔이 둘씩이나 달라붙었다는 거지요. 어떻게 보면 그 두 세력을 아우를 만큼 이곳에 돈이 넘쳐난다는 것도 되겠지만……. 사람 욕심에 끝이 없다는게 문제일 겁니다. 분명 서로가 서로를 찍어내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을거란 이야기에요.”

“아……. 야, 너도 이렇게 좀 확실하게 말하라 이거야. 알겠어?”

“.......”

 

 

 

 

 

 

 

Channel 2. 아이리스

 

알 샤인씨의 뒷목을 잡게 만드는 마약 소굴을 뒤로하고, 우리는 소녀와 함께 포토시 은광을 향해 다소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어요. 앞장선 소녀의 발걸음이 빠른 것도 있었지만, 솔직히 마약굴과는 가급적 엮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한 몫 했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나름 성직에 한 발 걸치고 있다는 이유가 제 발걸음을 무겁게 만들긴 했지만……. 아닌건 아니에요. 마약굴은 아닌 겁니다.

 

그래요, 마약자체도 문제지만, 문제의 핵심은 마약이 가져다주는 부, 그리고 그것을 쥐고서 놓을 생각이 없는 카르텔의 탐욕에게 물어야겠지요. 로키군과 함께 ‘하샤신’들울 피하기 위해 프로하기온으로 몸을 의탁했던 날들이 떠올랐어요. 그곳에서 조용히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소일을 삼았고, 그로인해 나름 보람도 얻었지만…… 대차대조표를 따져보면 적자를 면치 못할 날들이었어요. ‘호랑이를 피하려고 늑대굴로 들어간다’라고 할까요? 그곳에는 하샤신도 하샤신이었지만, 카르텔들이 악질적인 일들을 벌이는 통에, 사람들이 숨도 제대로 못쉬고 살고 있었지요.

 

그러고 보니, 이곳은 프로하기온과 많이 닮아있는 것 같았습니다. 부가 모이고, 활기차지만, 음습한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어요. 눈 덮인 프로하기온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계절과 기후는 정 반대인데, 그림자는 하나같았어요.

 

점심시간이 되었는지, 은광의 입구에는 광부들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얼굴은 흙과 땀이 뒤섞여 얼룩덜룩해 보였습니다. 그들은 얼굴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피곤함을 닦아내려는 듯, 연신 얼굴을 소매로 훔쳤어요. 노력이 무색하게, 그들의 소매춤이 왔다갔다 할 때마다 얼룩이 더 번지는 통에, 얼굴 꼴이 말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들은 계속해서 얼굴을 닦아냈습니다.

 

주설씨는 광부들을 붙잡고 물어물어서 간신히 관리사무소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손님이 왔다고?”

 

관리소장이라는 사람은 굴에서 나오는 광부들과는 달리, 얼굴에는 기름기가 줄줄 흐르는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피부는 포토시를 덮은 눈 만큼이나 하앴고, 두 개의 턱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씹고 있었어요. 광부들에 비하면 꽤나 행복한 삶을 보내고 있는 것이 분명했음에도 그의 얼굴에는 짜증이 묻어있었습니다. 얼굴에 뭔가가 묻어있다는 점에선, 그나 광부나 마찬가지였네요.

 

“안녕하셔유? 지는 삼민상단의 대표 주설이유.”

 

왠일인지 그녀는 라스알게티 때와는 달리, 자신의 고향색을 숨길 생각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그녀는 공손하게 명함을 내밀었고, 소장은 고분고분 명함을 받아들었습니다. 그는 장식장에 고이 모셔놓은 명함지갑에 그녀의 명함을 집어넣었어요.

 

“삼민상단이면……. 아! 그 라스알하게에 있는……”

“잉. 잘 알고 계시네유.”

“이야! 만나서 반갑습니다. 멀리서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을 텐데 편히 앉으시죠.”

“아녀유. 돈 벌디 찾는건디 고생이랄게 있남유.”

 

삼민상단이라는 네글자에 소장의 얼굴에 묻어있던 짜증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녹아내렸어요. 인간의 이중성을 목도하는 것이 하루이틀 일은 아니지만, 은광 입구를 나서며 얼굴을 벅벅 닦던 광부들이 떠올라서였을지는 몰라도 그의 모습이 상당히 역겹게 느껴졌습니다. 그런 제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리겔녀석은 짐짓 뻐기는 투로 주변을 둘러보았어요. 아이고 이 화상아…….

 

“라스알게티에서 소식 들었습니다. 그 콧대 높던 라스알게티 치들을 납작하게 만들었다면서요?”

“에이 뭐 별거 있남유? 그냥 돈따라 가다보니…….”

 

주설씨는 소장의 말이 부끄러웠는지 연신 주억거리고나서야 비로소 목적을 이야기했습니다. 주설씨의 이야기를 들은 소장의 얼굴이 어두워졌어요.

 

“허허, 이거 참 곤란하게 되었네요.”

“무슨 일이라두…….”

“제가 평소라면 도와드릴텐데, 최근에 이곳에서 지진이 발생하는 바람에, 광산 일부가 붕괴하는 사고가 발생했거든요. 그래서 지금 여기 인부들이 무너진걸 치우고, 구조를 하는 바람에 내어드릴 수 있는 여유인력은 커녕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구조요?”

 

소장의 말에 소녀는 화들짝 놀라서 그 자리에서 불쑥 끼어들었습니다. 그 모습에 소장의 얼굴이 잠깐 찌푸려졌다가…… 헛기침을 했습니다.

 

“어른들 이야기 하는데…….”

“아녀유. 마침 이 소녀두 자기 오래비에게 물건 갖다주러 온 참이라…….”

“허허 참! 그래 그런 일이 있었구나. 가족이 일하고 있는 곳에서 사고가 났다니 많이 놀랄 만도 하지.”

“어…… 지 오래비는…….”

“일단 이름이 어떻게 되지? 팀장님!”

 

소장이 인사팀장을 부르자 문이 열리면서 한 여자가 들어왔습니다. 며칠째 퇴근은 꿈도 못 꿨는지, 그녀의 머리는 잔뜩 떡이 져 있었고, 눈 아래는 시꺼매있었어요. 그녀는 서류뭉치를 들고 있었습니다.

 

“네 소장님.”

“여기 인원 파악 좀 해 주시죠. 얘야, 니 오래비 이름이 뭐랬지?”

“아……알비레오.”

“알비레오……알비레오……. 아! 여기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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