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nnel 1. 로키
언제나 새벽별 보며 돌아온다는 주우의 부인의 말처럼, 새벽같이 나갔던 주우는 밤이 되고 한참이 지나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비록 그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피곤에 절어있는 그의 얼굴이 그의 하루가 결코 녹록치 않았다는 걸 우리에게 대신 설명해 주는 것 같았다.
“......안자구 있었슈?”
“뭐...... 주인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데 먼저 자는 것도 예의가 아닌거 같아서 말이야.”
“식사는 했어요? 당신 부인이 당신 오면 먹으라구 음식을 해놨던데.”
“이잉...... 회의 끝나구 주막에서 국밥 한 그릇 먹었쥬.”
그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래도 메뉴가 궁금했던지 식탁에 앉아 보자기를 열어젖혔다. 보자기엔 김치며 갈비며 각종 음식들이 윤기를 흘리며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공복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꽤나 매력적인 메뉴가 아닐수 없었지만, 그는 김치를 쭉 찢어 갈비에 돌돌 만 뒤에 한입 가득 베어 문 것이 다였다. 그는 입맛을 쩝쩝 다시며 보자기를 덮었다.
“우리 마누라헌티 미안허다구 혀야겄네......”
한참을 보자기를 바라보던 그는, 자신의 뺨을 몇 번 때리더니 우리를 평상으로 안내했다.
“별이 참 곱쥬?”
“네. 라스알게티하고 프로하기온에 살아봤지만, 이곳만큼 별이 예쁜 곳은 없었던 것 같아요.”
“처자두 여러 군데 떠돈 거 보니...... 사는 게 제법 퍽퍽혔겄슈.”
그는 하늘에 별을 보며 회의의 결과를 이야기 해주었다. 결론은 유예였다.
“성제덜이 당신 말에 일리가 있다구 생각혔슈. 당신덜은 당장에는 못 믿을 사람이지만...... 그렇다구 마냥 풀어줄 수도 없다구 말여유.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이, 까딱하다가는 모가지 달아날 역적질잉께....... 그러니 우리가 당신들을 곁에 두고 통제하는 것이...... 맞는 거 같다는 거쥬.”
주우의 말에 답답이의 얼굴은 성냥처럼 확 밝아졌다. 그도 그럴 것이다. 여지껏 자신의 목소리를 내본 적이 없던 사람이 처음으로 용기를 내어 한 자신의 주장이 먹혀들었으니...... 그 심정이 오죽하랴 싶었다. 답답이는 내 손을 잡으며 방방 뛰었다가...... 우리를 보는 주우의 얼굴에 얼른 손을 놓고 딴청을 피웠다.
“뭐 일이 그리 되었으니께, 무위도식을 허긴 그렇구...... 여서 일을 좀 하셔야겄슈. 우덜이 뭔 일을 허는지 지켜보고 싶다고 혀긴 혔는디...... 여기 무릉에는 규칙이 하나 있어서......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라는 거가 있쥬.”
“......”
“이게 우리의 조건인디...... 괜찮겄슈?”
“뭐...... 나도 계산은 확실히 하는 쪽이라. 그쪽이 더 신간 편할 것 같은데. 너는 어떠냐?”
“저도 괜찮아요. 오히려 제가 그 말을 하려고 한 참인걸요. 근데, 몇 가지 물어볼게 있어요.”
“말허슈.”
“제가 당신한테 준 브로치...... 그거 당신이 원하던 것이 맞던가요?”
“아, 그건 다행이 맞았슈. 덕분에 우리도 내부의 메시지를 늦지 않게 받을 수 있었네....... 그 덕분에 우리 성제들이 당신들을 조건부로라도 받은겨유.”
“하하, 운이 좋았네요. 아 근데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그 와중에 조건이유? 뭐...... 말혀봐유.”
조건이라는 말에 주우의 얼굴에 순간 짜증이라는 감정을 나타내는 근육의 궤적이 나타났지만, 그는 놀라울 정도로 자신의 감정을 조절해 최대한 정중한 어투로 그녀에게 되물었다. 물론...... 그의 입장에서 ‘최대한’이었던지라, 어투 속에는 짜증의 여운이 살짝 묻어있긴 했다.
“라스알하게의 식민사에 대해 알려주었으면 해요.”
“잉? 뭔 소리유 그게?”
“전 학교에서 라스알하게가 식민지로 된 과정에 대해서 배운 적이 있었어요. 하지만...... 그건 정복자의 관점에서 해석된 거라고 생각해요. 기왕 당신들과 함께 하게 되었는데, 당신들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려면......”
“우덜의 입장도 들어봐야 한다...... 이거 맞남유?”
“이해가 빠르네요.”
“진실을 알고자 하려면, 양쪽의 입장을 들어봐야 하는 법이지.”
내가 답답이의 말을 거들어주자, 답답이는 내 손을 슬쩍 잡았다.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할 수도 있는 작은 손짓이었지만, 내게는 ‘나를 지지해주어 고맙다.’라는 의미로 해석이 되는 행동이었다. 나는 녀석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 우리가 그러는 동안, 답답이를 보는 주우의 얼굴의 결이 조금은 달라졌다. 피로로 굳어버렸는지 근육의 궤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눈빛이 조금은 누그러뜨려진 것 같았다.
“역적질 허기 전에는 라스알게티인들을 솔찬이 접하긴 혔는디...... 샥시같은 이는 첨이유. 내가 본 라스알게티 놈덜은 죄다 우리 벗겨먹을 생각만 혔지. 우리 야그에 귀를 기울일 생각을 허는 놈덜은 아예 없었슈.”
“모든 라스알게티 사람들이 그러진 않아요. 당신들은 들으면 기가 차다고 비웃을지 모르지만....... 라스알게티인들은 스스로 ‘자유’를 추구하고 ‘억압’을 배격하는 시민성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거든요.”
답답이의 말에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을 웃던 그는 답답이를 보자 자신의 웃음이 지나쳤다고 생각했는지 억지로 자신의 감정을 구겨넣었다.
“그려유. 뭐...... 나쁘진 않네....... 그리 혀유 그리 혀...... 그나저나 다시 일이야기로 돌아가서, 아까츰에 말혔지만...... 댁들도 일을 혀야되유. 내가 내일 출근헐 때 댁들을 맡을 사람들을 소개시켜 줄라니께, 그만 들어가 자슈.”
Channel 2. 아이리스
주우는 턱이 빠지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하품을 하더니, 자러 가야겠다며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이젠 마당에 저희 둘 뿐이었어요. 로키군도 평상에서 일어나면서 이젠 우리도 자러 가야하지 않겠냐고 말을 했습니다......만 솔직히 말해서 그다지 잠이 오진 않았어요.
“이거...... 보아하니 별로 잠을 자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어떻게 알았어요?”
“뭐...... 눈썰미가 좋은 탓 아니겠어? 자러 가자고 하니까 어께가 축 늘어지고, 몸의 무게중심이 뒤로 쏠리더군. 거기에......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얼굴이 급격하게 못생겨지던데?”
“네?”
로키군은 무표정한 얼굴로 거침없이 저를 디스하는 말을 해댔습니다. 화가 나는 건 당연하지만, 그가 이런 행동을 보일 때면...... 솔직히 말해서 정말로 헷갈립니다. 맥락을 보면 분명 장난인 것 같은데, 얼굴을 보면 세상 진지하거든요. 뭐 장난으로 못생겼다고 하던, 진지하게 못생겼다고 하던 기분이 나쁜 건 변함이 없지만...... 진지하게 못생겼다고 하면 그건 기분이 나쁜 걸 넘어서 슬퍼질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 제발, 장난이면 장난이라고 좀 티 좀 내줘요. 진지한 얼굴로 그런 말을 하면 듣는 입장에선 헷갈린단 말이에요.”
“알았어...... 진담이야.”
“하......”
정말 이 사람이...... 그는 제 반응이 재미있었는지 껄껄 웃으며 제 옆에 걸터앉았습니다...... 잔뜩 기분이 좋을 그에게 이런 말을 하긴 그렇지만, 로키군 만큼 어색하게 웃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그가 웃을 땐, 분명 입에선 웃음소리가 흘러나오기도 하고, 어께를 들썩거리기도 하지만...... 눈과 입 꼬리는 니스를 발라놓은 양 단단하게 고정되어 좀처럼 구부러질 생각을 하질 않았거든요. 마치...... 뭐랄까요? 아 그래요! 어린 애들 장난감 중에...... 그 있잖아요. 테디 베어인가? 곰 인형의 뱃속에 특정 소리를 녹음한 녹음장치를 넣어놓고, 버튼을 누를 때 마다 녹음했던 소리가 재생되도록 하는 거 말이에요. 그를 보면 그런 곰 인형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표정하게 웃는...... 그런 인형 말이에요. 물론 로키군은 곰 인형과 달리 귀여운 쪽은 아니죠...... 행동은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원래 이렇게 장난 많이 치는 사람이었어요?”
“뭐...... 나름 진지하게 산다고 하는데. 가끔 그런 소리를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참 남자들은 이상한 거 같아요. 진지할 때 진지해야 되는데. 이상하게 장난스럽게 나가거든.”
“남자들?”
“네?”
“남자들에 대해 잘 아나봐?”
그의 눈이 삐쭉하니 올라가는 걸 보면서 제 머릿속에는 문득 ‘요것 봐라?’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거...... 지금 질투하는 거죠? 그렇죠? 세상에 이젠 로키군이 질투라는 걸 다 하는 모양입니다. 간만에 약점을 잡았는데 그냥 놓아줄 순 없지요. 저는 그를 약올려줄 요량으로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뭐, 저라고 남자하나 안 만나 봤겠어요?”
“틀린 말은 아닌데...... 어떤 놈이냐?”
“왜요?”
“한 번 사람을 품었으면 끝까지 책임을 져야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위험한 존재를 세상 밖으로 풀어 놓은 거냐고 묻고 싶어졌거든.”
“......하?”
그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에 가까웠지만...... 그 의도는 명백해 보였습니다. 이 사람은 저를 또 놀리고 있는 거에요. 아이고 내가 바랄 걸 바래야지...... 로키군은 제가 약이 올라 씩씩거리는 게 즐거웠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저를 마주보았습니다. 정말 할 수만 있다면 저 무표정한 얼굴을 구겨버리고 싶네요.
“사람이 증명할 길이 없다고 무작정 거짓말 하고 그러면 안 돼. 허언증으로 오해받아.”
“됐어요! 잠이나 자러가야지.”
“아 그래? 그럼 미리 팔을 풀어야겠군.”
“됐어요! 오늘은 따로 잘 거에요. 옷장 보니까 이불도 넉넉 하더만 밑에서 자요!”
“화 많이 났어?”
저는 결국 더는 참지 못하고 로키군의 옆구리를 사정없이 꼬집었습니다. 제 정의의 심판에 그는 옆구리를 감싸쥐며 비명을 질렀지만, 그 무표정한 얼굴을 보니, 동정심 같은 건 쥐구멍으로 쑥 들어가 버렸지요.
“아 진짜...... 샴푸인지 린스인지 굳이 눌러봐야 알아요? 포장지를 좀 봐요!”
“미안. 미안. 진짜 내가 너랑 친해지긴 한 모양이야. 너만 보면 너무 장난을 치고 싶어지더라고. 다른 사람한테는 이렇게 안하는데......”
“가끔은 다른 사람들한테 하는 듯이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로키군보다 한걸음이라도 먼저 들어가기 위해 있는 힘껏 방으로 내달렸고, 그 시도는 다행이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저는 장롱을 열어, 이불을 집어든 다음 그에게 던지듯이 쥐어주었지요. 그는 얼떨결에 받기는 했지만, ‘설마’라는 기색이 역력해 보였습니다.
“얼어 죽을 지도 모르니까 밖에서 자란 말은 안할게요. 대신에 침대에 올라오기만 해봐요. 그날로 옆구리에 바람구멍 나는 거에요.”
로키군은 어안이 벙벙한 채로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저는 후다닥 침대위로 올라갔습니다....... 이런 머저리.
Channel 1. 로키
1624년 5월 8일
어제 저녁에 주우는 나와 답답이를 받아주는 조건으로 우리가 이곳에 기거하는 동안 일을 하라고 말했었다. ‘일을 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마라.’라는 고색창연한 말을 인용해 가면서 말이지. 뭐, 그때 우리는 선선이 승낙을 했었다. 답답이는 거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가 ‘라스알하게 식민사를 알려 달라.’라는 부가적인 조건을 달긴 했지만 말이다. 나는 그때만 하더라도 그녀가 별 조건을 다 다는구먼 이라고 속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채 하루가 되지 않는 시간이 흐른 바로 지금...... 나는 ‘이럴 줄 알았다면 나도 조건이나 하나 더 달 걸 그랬다.’라는 후회를 하고 있다.
“거...... 인사 혀유. 꺽정이 성이유. 성은 임가구.”
“어...... 음 그래...... 안녕하쇼.”
“......”
주우가 소개한 남자는 스타일이 구리기로 유명한 라스알하게에서도 두드러지게 특이한 입성을 하고 있었다. 머리는 지난 세기에나 잘랐는지 덥수룩하니 자라있었고, 수염은 중구난방으로 삐죽삐죽하게 돋아나 있었다. 언제 씻었는지 모르겠지만 목에는 땟국물이 윤기를 내며 흐르고 있었고, 옷은....... 허허 참, 뭐라 묘사해야 할지 난감하군. 일단 보이는 대로 말을 하자면....... 마치...... 그래! 교활하다의 어원이 된 ‘활’이라는 동물이 있다면 이런게 아닐까 싶었다. ‘활’이라는 동물은 호랑이나 이리같은 맹수를 먹잇감으로 삼는다지. ‘활’이 사냥할 때는...... ‘교활하다’라는 말의 모델이 괜히 된 것이 아니라는 게, ‘활’이 먹잇감이 될 만한 맹수를 발견하면 그 자리에서 달려드는 대신, 맹수가 자신을 딱 한입에 삼킬 수 있도록 몸을 돌돌 말아버린다고 한다. 그걸 본 맹수는 맛있는 냄새도 나고, 먹기에도 딱 좋으니 씹지도 않고 그대로 삼켜버린다지. 그렇게 몸하나 상하지 않고 맹수의 뱃속에 들어간 ‘활’은 말았던 몸을 풀고 맹수의 내장을 뜯어먹어버린다고 한다. 맹수도 감각을 느끼니 고통스러워하겠지만, 때는 이미 늦어 결국 활이 몸의 모든 장기를 파먹어버리는 동안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활’은 맹수가 죽고 난 뒤에도 식사를 계속해, 종당에는 껍데기만 남기고 다 먹어치워 버린다지...... 그 뒤에, 껍데기를 쓰고 그 맹수의 행세를 한다고 한다. 다음 먹잇감을 찾을 때 까지 말이지. 남자의 스타일을 설명하는데 무슨 설명이 이리 장황하냐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겠다만, 조금 고집을 부려 마무리를 짓는다면 이 남자는 이야기의 ‘활’처럼, 맹수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는 모양새를 하고 있었거든.
어쨋거나, 나는 임꺽정이라고 소개받은 이 남자의 행색에 반쯤 넋이 나가있었지만, 이 남자는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조차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몸을 숙여 자신의 옆에서 헥헥거리고 있는 강아지를 돌보느라 여념이 없었거든. 강아지는 바닷물을 마시는 낙타처럼, 남자의 계속되는 손길을 온몸으로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그의 손길을 갈구하고 있었다. 그런 점에선...... 답답이의 냥사장이 좀 더 나은 것 같기도 했다.
“어...... 보면 알겄지만, 이 성이...... 쪼깐 낯을 많이 가려유. 못생긴 사람이 무뚝뚝허기 까지 혀서, 좀 뭣허겄지만...... 그래두 근본이 나쁜 사람은 아닝께...... 상호간에 존중만 좀 혀주면 일허는 디 불편한 거는 없을겨.”
“뭐 그건 내가 알아서 판단할 일이고...... 이보쇼. 난 당신하고 무슨 일을 하면 되는 거요?”
“......”
“아아, 지가 대신 설명 헐게유. 댁은 이 양반 허구 양,,,,,치는 일을 허면 되유.”
“양치는 일? 양치기를 말하는 건가?”
“잉 그라쥬.”
주우의 말을 듣자마자...... 누군가 내 목에 수도꼭지를 박아놓고 그걸 끝까지 틀어놓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양을 친다고? 내가? 나는 솔직히 이곳에서 일을 해야 한다고 하길래, 어느 정도는 녀석이 입에 담는 ‘혁명’이라는 것과 어느 정도 관련성이 있는 일을 할 줄 알았다. 그야, 나와 답답이는 그들이 말하는 혁명에 대해서 돕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했으니까. 그런데...... 녀석은 그에 대한 대답으로 혁명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일을 떠맡긴 것이다. 이 지방 녀석들이 배타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한 처사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 새끼가 사람을 졸로 보나...... 야, 내가 이런 말은 안하려고 했는데, 나 프로하기온의 ‘우리’ 출신이야 마. 내가 뭣도 모르고 니들이 말하는 혁명인가 뭔가를 돕겠다고 나선 줄 알아? 순순히 잡혀와 주니까. 내가 펜 대 하나 못 들어서 낑낑대는 호구로 보이디? 내가 수틀리면 니들 목에서 선지 짜내는 건 일도 아니야 새끼야. 그런데, 나 같은 A급 인력한테 이따구 일을 줘? 지금 장난 하냐?”
“아니...... 우리 사이에 쪼깐 오해가 있나분데...... 꺽정이 성은 말여.”
“야. 주가놈아.”
내가 주우를 몰아붙이고 있는데, 임꺽정이 강아지에서 손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나 나와 주우 사이를 가로막았다...... 뭐야?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데, 깜빡이도 켜지않고 마구잡이로 대가리를 들이미네? 지가 뭐라도 되는 거라고 생각하나보지? 나는 임꺽정이라는 놈을 밀쳐내고 주우를 더욱 몰아붙이려고 했다 그런데.
“......뭐하냐?”
“나가...... 지금 주우헌티 말 할 라는 거...... 안 봤냐?”
“그럼 너는 내가 주우한테 말하고 있는 거는 못 봤냐?”
임꺽정은 그 큰 눈을 부라리며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안 그래도 양치기 일을 하는 게 마음에 안 들던 차였는데, 이 녀석도 이렇게 나오는걸 보니, 우리의 생각이 접점을 만난 것 같군. 다만 암묵적으로 합의가 마친 내용을 입으로 담기 전에 어느 정도 절차를 밟아야 할 것 같군. 나는 녀석의 몸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단단한 근육이 온 목을 감싸고 있어 경동맥을 압박하는 건 어려워 보이고...... 손가락은 꽤나 굵어 보인다. 관절기를 구사하는 건 힘들어 보이는군. 헐벗은 것이나 다름없는 늑대가죽옷 아래에 허벅지가 장딴지가 잔뜩 부풀어 올라있으니...... 저기로는 칼을 박는 것도 어려워 보인다. 그럼 어디를...... 노린다?
나와 임꺽정이 서로를 바라보며 공략법을 생각하는 동안, 주우가 우리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고만 좀 허슈. 우덜도 다 생각이 있어서 댁을 꺽정이성헌티 붙인 거요. 이 성은 말이유.”
“이보 주가놈아. 나가...... 씰데 없는 일로 불르지 말라구 혔냐? 안혔냐?”
“음마? 성은 또 왜 그려? 나가 입장 곤란혀지게......”
“양치기가 양을 봐야지는....... 뭔 별일도 아닌걸로 갖다가 씰데 없이 사람 오라 가라 난리여. 나가 내려와 있는 동안 말이여 쩌......그 이리 새끼덜이 양 물어 가믄 책임...... 질텨?”
“봉께로 서림이만 델구 왔구먼 뭘...... 유복이랑 오주 있으면 이리가 감히 그림자나 뻗겄슈?”
“어쨌든 마......”
꺽정이 주우에게 뭐라고 더 말을 하려고 했지만, 주우는 선수를 쳐버렸다.
“회의 결정이유.”
“...... 지기럴. 니가 그 노인장들은 진공날짜 정헐 시간에 뭣헌다구 현장 체험학습을 시킨다냐.”
그들의 대화에서 내가 소외된 것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주우 녀석이 꺽정을 누르는 것을 보노라니 왠지 고소하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입을 다물기로 했다. 뭐...... 그로인해 내가 원하지 않게 양치기 일을 하게 생기게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Channel 2. 아이리스
1624년 5월 8일
“지는 샥시네 낭군이랑 어디 좀 댕겨올라니께유. 여서 대기타구 있어봐유. 내가 말 혀놨응께 사람이 곧 올거여유.”
주우는 로키군을 데리고 집 밖으로 나가버리고, 마당에는 저만 남았습니다. 주우의 부인은 어디 있냐고요? 주우가 로키군을 데리고 나가기 한참 전부터 빨랫감을 머리에 이고 동네 우물가로 가버렸죠 뭘. 그럼 표현을 좀 바꾸어야겠네요. 마당 뿐 만 아니라, 이 집안에는 저만 남았습니다.
“아이고오.......”
저는 모처럼만에 혼자된 기분을 만끽하고자 평상에 벌러덩 드러누웠습니다. 5월의 햇살이 기분 좋게 제 얼굴을 톡톡 두드렸습니다. 어제 그저께는 여러 가지 일들로 정신이 없어 제대로 살피지 못했는데, 그의 마당에는 봄의 기운이 가득했습니다. 집의 한가운데에 커다랗게 서 있는 벚나무에는 이파리가 나오기도 전에 작은 꽃들이 피어 꽃잎을 눈송이처럼 흩날리고, 담장에는 노란 민들레가 피어있었습니다. 음..... 근데 저 꽃은 뭐죠? 나무에서 피는건 아까 언급했던 벚꽃과 똑같지만...... 꽃의 크기가 훨씬 더 큽니다. 나무는 반대로 훨씬 더 작고요. 처음 보는 꽃인데......
“흐음......”
그 꽃을 자세히 살펴보니, 꽤나 귀여운 면모를 가진 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게, 화려해 보이는 분홍색의 꽃잎에는 수술과 암술이 있는 곳에 여드름 같은 작은 반점들이 돋아나 있었거든요. 꽃만 귀여운 게 아니에요. 이파리에는...... 배냇 터럭처럼 보송보송한 털들이 돋아있어요. 이거 참 보다보니 신기하네요. 식물에도 털이 날 수도 있나 봐요. 저는 털 하면 사람을 위시한 동물들만의 전유물인줄 알았는데 제 경험이 새삼 왜소하게 느껴집니다. 아아, 생각해보니 목화꽃도 솜털로 되어있었네요. 저는 이파리의 보송보송한 느낌을 만끽하다가..... 꽃의 귀여운 모습을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꽃에 손을 가져다 댔습니다.
“지라면...... 거게에 손은 안 댈겨.”
“네?”
낯선 목소리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언제 왔는지 남자 한 명이 저를 바라보며 서 있었습니다. 송충이가 형님이라고 모실정도로 짙은 눈썹과 각이 진 턱이 인상적인 이 남자는...... 제가 이제까지 봐왔던 라스알하게 남자 중에서 가장 깔끔한 입성을 갖추고 있었어요.
“주가놈이 소개 안혔슈? 나가 이봉학이유.”
“아...... 주우님이 보냈다는 사람이......”
“잉...... 아마 나 맞을겨유.”
“아 그렇군요. 안녕하세요. 그런데 이 꽃에는 왜 손을......”
“옴마? 철쭉도 모르요? 나넌 샥시가 진달래랑 헷갈린 줄 알구 말린 것인디...... 거 꽃에 독이 있슈. 먹으면 탈도 나지만 민감한 이는 손만 가져다 대두 피부에 두드러기 올라 와유.”
으윽...... 저 귀여운 꽃에 그런 지독한 면모가 있을 줄이야. 제가 진저리를 치면서 손을 떼니, 이 남자는 껄껄 웃으며 품속에서 장죽을 꺼냈습니다.
“근디 봉께로...... 도시에서 온 양반인갑네잉...... 맞쥬?”
“아...... 네 맞아요. 그건 어떻게 아셨어요?”
“왜 몰것슈...... 철쭉이 뭔지도 모르고 만질라구 하는거 보면 딱 도시 여자구먼......”
이봉학이라죠? 이 남자는 장죽에 담뱃잎을 잔뜩 우겨넣은 뒤에 그것을 깊이 빨아들였습니다. 이윽고 그의 온몸에서 매캐한 담배냄새가 풀풀 풍겨나기 시작했지요.
“그나저나 곱게 생긴 처자가...... 취향이 상당히...... 독특허시네유.”
“네? 취향이요?”
“주가넘이 그러던디? 사냥을 좋아 헌다구?”
“......네?”
“이잉? 주가넘이 소개시켜준다는 거 아녔슈?”
“아니 그거 말구요.”
“주가넘이 그러던디, 샥시 헌티 사냥 알켜 달라구.”
이봉학씨의 말을 끝으로...... 우리 둘은 한동안 말이 없어졌습니다. 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우리 둘 사이에 지독한 오해가 있었다는 것에는 생각을 같이하는 것 같았어요. 저와 봉학씨 사이에 있던 주우가...... 장난질을 친 것이 분명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걸 도저히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지요. 그걸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제 입에서
“주우 이 호로 자석을 그냥......”
봉학씨의 입에서 걸쭉한 욕설이 튀어나왔지만, 저는 그의 언사에 대해 지적하거나, 비난의 눈길을 보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표현에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저는 그가 가진 생각에 대해서는 100% 동의하거든요.
“주가놈 어디갔슈?”
“로키군하고 같이 산으로 가던데요?”
“흐미...... 꺽정이성한티루 가버렸구먼유. 그 짝두 제법 시끄러워졌겄는디......”
봉학씨는 장죽을 털고, 새 담뱃잎을 채워 넣은 뒤 다시 불을 붙였습니다. 그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두눈을 감고 담배의 향기를 음미했지만, 그의 표정은 아까와 달리 착잡해보였어요.
“그...... 샥시 낭군은 성격이 워뗘유?”
“음......”
“무난허진 않은갑네...... 클나겄는디유? 꺽정이성이 요즘은 많이 자중혀두 한번 야마 돌면......”
“무서운 사람인가요?”
“뭐...... 요즘은 좀 잠잠하쥬. 본인이 노력두 허구......”
그 사이에 다 피웠는지 봉학씨는 새로운 담뱃잎을 또 채워 넣었습니다. 하지만 담뱃잎을 채우면 채울수록, 그의 표정은 그에 비례해서 점점 더 어두워지는 것 같았어요. 대체 주우는 무슨 생각으로 우리를 이렇게 골탕 먹이려는지 점점 더 알 수가 없어졌습니다.
“쨋거나, 주가넘이 뭔가 생각허는기 있으니까 저렇게 혔겄쥬...... 실없는 넘, 아비 덕 보는 넘이라구 다들 놀리긴 혀두...... 갸가 하넌 일은 에지간허믄 옳게 굴러가니께유...... 분명 그넘이 샥시를 사냥꾼으로 맹글라구 허는 것두 뭔가 이유가 있어서 그럴거여유.”
“으......응? 그럼 저는.”
“일단 지두 부탁받은 게 있으니께....... 일단 갈켜는 줄게유. 근디 이게 워낙 심든 일이라...... 심들믄 언제든지 그만둬두 되유.”
“......”
Channel 1. 로키
주우의 배웅을 뒤로한 채, 나는 임꺽정을 따라 산으로 올라갔다. 그의 개 ‘서림’이 앞장을 섰고, 임꺽정은 그 뒤를, 나는 후미에서 그 둘을 따라갔다. 우리 둘이서 무슨 대화를 나누었냐고? 글쎄,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첫 인상을 서로 가진 사람들끼리 대화를 나누어봤자 서로 욕지꺼리 밖에 할 게 없지 않을까? 내가 임꺽정의 머릿속을 갔다와보진 않았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을 했다. 임꺽정 역시 입을 열지 않는 것을 보면, 나와 비슷한 결론을 내린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볼 뿐이다.
나는 두 사람과 짐승의 뒤를 따르며 산을 오르다, 얼마나 올라왔는지 확인해보고 싶어 뒤를 돌아보았다. 내 발 아래에는 물이끼 같은 녹음이 온 산을 덮을 듯이 펼쳐져 있었다. 청산이라고 했던가? 그들의 보금자리인 이곳 말이다. 이 청산이라는 곳을 보노라니, 문득 운터브룩의 쓰레기 산이 떠올랐다. 짙푸른 녹음 대신, 식빵에 핀 곰팡이 같은 허접스런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쓰레기 산...... 분명 같은 겨레일 터인데, 어떤 이는 푸른 녹음 아래에서 자연의 혜택을 누리는가 하면, 다른 이는 매연과 쓰레기 속에서 도시의 비정함에 깔려 신음을 하고 있다. 운터브룩에 사는 라스알하게 인들은....... 자신의 고향 산천을 그리워하며 자신들 앞에 놓여있는 하루하루를 안간힘을 다해 버텨나갔던 것이겠지.
“다 왔슈.”
꺽정의 말에 생각을 멈추고 앞을 보니, 판자때기에 그들의 언어로 휘갈긴 팻말이 보였다. 그 팻말을 보니 ‘운터브룩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글씨가 씌여진 허접한 판때기가 떠올랐다.
“저건 뭐라고 쓴건가?”
“글자 모르요?”
“알지 아는데...... 라스알하게의 문자는 몰라.”
“저건...... 청석골이라고 쓴거/유.”
“청석골...... 무슨 뜻이지?”
“푸른 돌 고개란 거지 뭐 있갔슈.”
그의 말대로, 푸른 초장에 드문드문 보이는 돌들은, 들에 핀 잡초만큼이나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이끼가 낀 건가? 아니, 그런 설명이 정당화 될 수 없는 게...... 이곳은 응달이 아니었다. 운터브룩 꼬맹이들에게서 흔이 볼 수 있는 땜통자국처럼, 이곳은 녹음이 짙은 청산에서도 드물게 나무가 없는 곳이었다. 나는 굴러다니는 돌을 집어 자세히 살펴봤다. 돌은 이끼가 낀 것이 아니었다. 그 자체가 푸른색이었다.
“돌 땡이 그만 쳐다보구, 일로 와보슈. 여그가 우리 목장이유.”
임꺽정은 양들이 모여 있는 곳을 향해 턱짓을 했다. 음..... 내가 잘못된 표현을 쓴 것 같다. ‘양들’이라는 표현은 양 몇 마리에 불과할 때나 어울리는 표현이지, 지금 내 앞에 있는 엄청난 수의 양들을 표현하는 데는 스케일이 너무 작다. 그가 가리킨 것은....... 거대한 ‘양떼’였다. 서림은 양떼를 보자, 신이 나서 겅충겅충 뛰며 양떼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고서는 양떼 사이를 귀신같이 파고들어 양떼를 흩어뜨리거나 모으거나 하며 장난을 쳤다.
“개가 장난이 심하군.”
“뭐...... 모르는 이 헌티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겄구먼. 저건 양몰이를 허는거/유.”
“양몰이?”
“말로만 허먼 이해를 못 헐 수도 있으니께....... 잘 보슈. 돌어!”
임꺽정이 서림을 향해 소리를 지르자, 개가 시계방향으로 돌기 시작했다. 녀석의 질주에 겁을 먹은 양떼는 차츰차츰 간격을 좁혀 동그란 원형의 대형을 만들어나갔다.
“워뗘유?”
“이거 참 신기한데?”
임꺽정은 내 반응에 재미를 붙였는지, 몇마디 명령어를 더 했다. 서림이 그의 명령에 충실히 이행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몇 차례의 명령과 양몰이가 이어진 뒤에...... 이윽고, 거대한 양떼가 우리 앞에 반듯하게 정렬을 하였다.
“양치기는 개 없으면 개털이유.”
“내가 해도 되는건가?”
“해보슈.”
“돌아!”
“.......”
“음...... 니네 식으로 해야 하나? 돌어!”
“.......”
나는 기세 좋게 서림을 향해 소리를 질렀지만, 서림은 두 눈을 무심히 껌뻑일 뿐, 아무런 동작을 취하지 않았다. 저 망할 놈의 개/새끼가......
“원래, 사람이든 즘생이든, 먹을 거 주는 양반이 질이유.”
임꺽정은 서림에게 고깃덩어리를 하나 던져주며, 고개를 으쓱했다. 개나 주인이나...... 얄미운 건 똑 닮았군.
Channel 2. 아이리스
이봉학씨는 자신을 따라오라고 손짓을 하며 주우의 집 밖으로 나갔습니다. 저는 내키진 않았지만...... 따라가는 것 외엔 달리 수가 없기도 하여 저는 무거운 발을 질질 끌며 그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사냥을 가는 거에요?”
“허허 참...... 샥시는 성격이 좀 급 한 감이 있네유? 기지도 못허는디 날라구 드는거이.”
“아니 뭐 궁금해서 물어본거라......”
“사람 산다는 거이 자기 멋에 따라 사는 것두 멋이라...... 그렇게 맨땅에 헤딩 허는 것두 나쁘진 않쥬. 근디 지 같은 경우엔 계단을 오르듯이 한 발짝 한 발짝...... 찬찬이 가는..... 고런 스타일이라 이해 좀 해줘유.”
흠...... 성격 급하단 이야기는 처음 들어보는 지라, ‘내가 정말로 그런 경향이 있나?’하고 스스로 자문을 구해봤습니다. 삶의 여러 순간들을 되짚어 보았지만, 딱히 성격이 급하다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의 에피소드는 없었던 것 같아요. 어쨌든, 제 삶을 반추하는 동안, 우리는 나무 널빤지로 된 허접스러운 건물 앞에 다다랐습니다.
“음...... 여긴 어디에요?”
“집은 아니구유, 창고유. 지가 사냥할 때 쓰는 뭐...... 그런 걸 모셔다 놨쥬.”
문을 열기 전에 그는 스스로 머쓱했는지 입술을 비틀며 어께를 으쓱해보였습니다. 아무래도 그에게 있어서 이 곳은 지극히 사적인 공간이었던 모양이에요. 그가 머쓱해하니, 저도 조금은 어색해졌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소중한 곳을 초면인 제가 들어가도 될까 싶었지요.
“좀 허름허구 정리가 잘 안됬는디......”
“아아 괜찮아요. 저는 배우는 입장이니, 가르치는 분이 배우는 분 눈치 볼 거 있나요?”
“삼민 속담에는 ‘학생은 스승님 그림자두 밟지 마라.’라고 허긴 허는디...... 그래두 스승이란 사람이 제자 헌티 막 헐수 있나유? 제자 앞에서 떳떳혀야 갈키기도 잘 갈키는 거라.......”
그는 변명의 말을 주저리주저리 하다가, 정신을 차리려는 듯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더니 문을 열었습니다.
“어......음.......”
“많이 지저분 허쥬?”
“아니, 그것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요.......”
지저분한 것 때문에 놀란 게 아니었습니다. 얼핏 보았을 때는 정돈이 안 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자세히 보면 나름의 기준에 따라 정리가 되어있었거든요. 끈으로 된 도구는 끈끼리, 날붙이들은 날붙이들 끼리...... 뭐 이런 식으로요. 제가 놀란 건, 그 도구의 양과 종류 때문이었습니다.
“도구가 참 많아서요.”
“이잉...... 그래서 그런거였슈?”
이봉학씨는 제가 도구들을 자유롭게 살펴볼 수 있도록, 구석에 있는 의자에 앉았고, 제가 도구에 대해 물어보면, 대답을 해주는 식으로 자신 나름의 수업을 진행하기로 한 모양이었습니다. 그 덕분에 저는 자유롭게 창고의 물건을 살펴볼 수 있었어요.
“이건 뭐에요?”
“이잉, 그건 통방이유. 즘생들이 잘 다니는데다가 놓구, 여그에 먹이를 달아놓는거/유. 그럼 즘생이 요거를 먹을라구 악다구니를 치다보믄 요렇게......”
그가 나뭇가지로 통방 속에 삐죽이 튀어나온 철사를 건드리자 통방의 문이 턱하고 닫혔습니다.
“이렇게 되는거쥬.”
“아아......”
“요것도 잡을라는 동물 사이즈별루 다양혀유. 방금 보여준거는 족제비 같은 넘들 잡을라구 하는거구...... 새잡는 거는 요거/유. 훨씬 작쥬?”
“아아, 이런 크기도 있네요.”
“인간이 동물들에 비허믄 피지컬은 영 별로유. 엔간한 동물들 보다 달리기도 느리구, 새처럼 날 수도 없슈. 그렇다구 물고기처럼 헤엄도 잘 치는 것도 아니구....... 그래도 차이가 있다면 요거랑...... 요거/유.”
이봉학씨는 자신의 머리와, 손바닥을 가리켰습니다.
“나가 여태껏 살믄서, 사람 맨치로 머리가 좋은 동물은 거의 못봤슈...... 그러니 머리를 써야 하는거구. 또 사람은 유일허게 네 개의 손가락과...... 요러게 직각을..... 이루는 하나의 엄지손가락을 가진 동물이유.”
“아아..... 그렇네요.”
“그래서 딴 넘들은 못 다루는 도구라는 거를...... 만들 수 있는거/유. 개가 도구 쓰는거 봤슈?”
“못 봤죠.”
“적절한 도구와, 그걸 다루는 지혜만 있으믄...... 사냥도 별거 아녀유.”
어께를 으쓱하는 이봉학씨의 모습에서 ‘자부심’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의 집을 올 때만 하더라도 ‘내가 사냥을 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가득했지만, 이렇게 도구를 살펴보고 그의 말을 들으니...... 사냥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들었습니다.
“그럼 도구를 사용하는 것부터 알려 주시는 거에요?”
“뭐...... 또 그렇게 맨땅에 헤딩허는 것두 나쁘지는 않은디......”
“하하 진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나아가야 한다 이거죠?”
“이잉 맞슈. 일단 샥시 스타일을 쪼깐 알아야 것슈. 그래야 스타일에 맞는 방법을 알려줄 수 있는거 아니겄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