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nnel 1. 로키
몸을 다 씻고 난 뒤에, 나는 노인이 마련해준 작업복을 입었다. 노인의 배려는 참으로 고마웠지만 노인과 나 사이에 있는 신장의 차이 탓에 일단 입어보고 나니 내 꼴이 우스꽝스러워졌다. 가슴둘레는 딱 맞지만, 안타깝게도 팔 다리가 짜리몽땅한 탓에 손목과 복숭아 뼈가 오랜만에 바깥나들이를 하게 되었다. 그들이 맞는 바깥공기가 라스알하게의 그것과 같이 부드러운 것이었다면 그럭저럭 견딜 만 했을 터이지만, 문제는 이곳이 프로하기온이라는 것이지. 제대로 된 의복을 갖추었을 때는 그저 얼굴만 고통을 받으면 됐을 터였는데, 이 작업복을 걸치고 밖에 나가니 전선이 의도치 않게 팔 다리로 확대된 것이다. 그 덕분에 채 십 여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만에 내 팔다리는 붉은 상처가 돋아나기 시작했다.
“참...... 지독한 동네야.”
슬리퍼로 복숭아 뼈를 긁으면서 나는 리겔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녀석은 리어카에서 나와 베텔기오의 묘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침 정신을 차리기도 해서 생명의 은인이 바로 나라며 한껏 생색이라도 내볼까 하여 녀석에게 다가가려다가....... 생색을 내는 건 다음으로 미루는 것이 적합한 것 같다는 판단을 내렸다. 리겔 저 녀석....... 묘비를 보면서 감상에 젖어있는 것 같았거든.
리겔은 어디에서 구해왔는지, 데낄라 병을 들고 있었다. 녀석은 이빨로 뚜껑을 따자마자, 곧바로 병나발을 불어제꼈다.
“크...... 시벌 존나게 맛없네. 대체 아부지는 요걸 뭔 맛으로 드셨소? 성묘 올띠마다 마시는 거지만, 나는 당최 이해가 안가요.”
“......”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었다. 하지만 녀석은 그런건 아무래도 좋은지 다시 한 번 술을 들이킨 뒤에 입맛을 다셨다.
“저번에는 일이 있어가지구 못 왔어라. 못와서 미안허요. 그려두 지금이라도 온게 어디여? 안 그렇소?”
“......”
“아부지...... 인자서야 아부지가 그렇게 원하는 시상이란 게 온 모양이요....... 뭐 그 덕에 지는 확실히 좆된거 같기는 허요. 그려도 뭐...... 아부지 탓 할라는 건 아녀라. 아부지는 아부지의 삶을 골른거고, 지는 지의 삶을 고른거 아니겄소. 그리고 그 대가를 치르는 거고......”
“마피아는...... 때려 쳤소. 정확히 말하믄 팽당한거긴 허지만, 하 시벌...... 묵고 살자고 별에 별 짓을 다 혀봤는디 악셀을 끝까지 밟아보니 막창이여라. 사는 게 뭔지 참말루 닭 찌찌살 마냥 퍽퍽하구마잉.”
“......”
“그려두 너무 걱정은 마씨요. 나 근자에 스카웃 제의를 받아브렀당께요? 야그 들어봉께로 일신 떳떳하게 살믄서 세금도 내는 일인갑디여. 나가 존심에 걷어 차버리긴 혔는디, 까짓거 팽당허기도 혔겄다. 무릎한번 꿇고 가믄 받아는 주지 않겄소?”
“......”
“나가 보니께 사업허는 사람 같던디, 암만혀두 요 쪼깐한 도시에서 머물거 같지는 않구, 지켜는 봐야 쓰겄지만 밖으로 멀리 출장을 갈 수도 있을거 같습디여. 그라믄 나가 여그에 없어버리니께....... 아부지가 엄니랑 동상 좀...... 잘 돌봐 주씨요. 기왕지사 지켜줄라믄 거 관 뚜껑 열구 나와서 혀주면 좋겄다만...... 여건 넉넉지 않음, 맘만이라도 응원혀 주쇼.”
“잉 알것네. 안심허구 다녀와라잉.”
“히익!”
언제 왔는지, 묘지 관리인이 그의 뒤에서 빙그레 웃고 있었다. 리겔은 물론이고 나도 화들짝 놀랐지만, 노인은 리겔 몰래 나를 향해 손가락을 입술위로 올렸다. 뭐 나까지 지켜보고 있었다는 걸 알아버린다면, 리겔의 자괴감이 더욱 커질 것이 분명해서...... 결정적으로 옷을 빚졌으니 잠자코 그가 시키는 대로 하기로 했다.
“아따 뭐시여! 넘의 심장 떨굴 일 있소?”
“뭐라는 거여? 본께로 사춘기 소년 감성으로 지껄이고 있길래 장단 좀 맞춰 줬구만, 도와줘도 지랄이네 저놈은.”
리겔은 노인의 말에 씩씩거리며 술을 들이켰다. 하지만 노인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엄니랑 동상 좀 돌봐달라고? 니미 지켜줄 수 있으면 당장에 지 관 뚜껑부터 열어젖혔을 것이여. 사람은 죽으면 그걸로 땡이랑께?”
“아따 이 영감쟁이는 낭만이라고는 없구마잉. 곧 죽어도 좋은 말은 못해주것다 이거여?”
“원래 죽은 넘은 말이 없는 거여. 그라고 죽으믄 그걸로 끝이지만 산 사람은 계속 살아야지 않겄냐? 나가 너면 말이여...... 죽은 사람헌티 비느니, 산 사람헌티 용서를 구허는게 맞는거 같다.”
“......용서? 좋지. 근디 사람덜이 용서를 혀 줄거 같소?”
“사람이 작정허구 비는디 용서 안 하겄냐? 다만 그 전에 니를 갖다가 존나게 두들겨 패불겄제.”
“허기사 틀린 말은 아니구마잉...... 내가 마피아를 허믄서 좀 지랄을 혔어야지...... 생각 혀 블먼, 나가 어서 당장 맞아 디져도 할 말은 없겄구먼...... 미안혔소. 나가 할 수 만 있으믄 여적꺼지 깽판 친 사람덜 헌티 미안하다구 무릎이라도 꿇고 싶구먼.”
“......니가 그런 말을 헐 줄 알구......”
노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묘비 사이사이로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작심한 듯 손에 몽둥이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노라니, 나를 목욕탕으로 들여보내면서, ‘나도 나만의 해피 엔딩을 찾아봐야겠다.’라고 했던 그 의미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사죄를 헐 기회를 준비혔당께.”
“허 참......”
리겔은 자신을 쳐다보는 원한서린 눈빛을 한바퀴 둘러보고나서....... 허탈하게 웃음을 지었다.
“이거 뱉어버린 말이 있어가지고, 빼도 박도 못허겄구마잉.”
“이별 선물이라고 생각 허믄 되제...... 바느질도 맺고 끊는디, 사람 일이라고 뭣이 다르겄냐.”
묘지기는 어느새 리겔을 둘러싼 사람들을 뒤로한 채 터벅터벅 언덕길을 내려갔다. 내려가기 전에 그가 한 말은......
“사장님이 죽이진 말라고 혔으니께, 적당히 팔 다리 한 짝썩 뿌러트리는 정도만 허시요.”
Channel 2. 아이리스
민티카씨와 헤어지고 난 뒤에 숙소에 들어 때 쯤에는 벌써 땅거미가 진 뒤였어요. 저와 주설씨는 방으로 들어가 몸부터 씻었습니다. 프로하기온은 라스알하게와는 많이 달라요. 라스알하게의 싱그러운 공기 속에서는 땀을 흘릴 일이 없었지요. 그러다보니 아무리 밖을 쏘다녀도 뽀송뽀송한 상태로 잠자리에 들 수 있었지만...... 프로하기온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지요. 하루종일 모래바람을 맞고난 뒤에 그대로 침대에 누워서 잠이 든다? 아마 그런 만용을 부리게 된다면, 그 다음날에 뼈가저리도록 절절한 마음이 묻어나는 계산서를 받게 될걸요?
“하이고...... 개운지다아.”
“오늘 하루 고생했어요.”
“잉...... 아이리스씨두 고생 많았어유. 인자 여그 사업도 슬슬 마무리 단계구먼유.”
주설씨는 머리를 말리면서 침대에 턱하니 주저앉았습니다. 그녀의 얼굴은, 태양이 온 누리를 비추고 있는 동안은 절대로 볼 수 없었던 피곤함이 덕지덕지 묻어있었습니다. 아무리 대담하고, 괴짜같아도 결국 그녀도 피곤함을 느끼는 사람이었나 봅니다.
“이제 그럼 라스알게티로 올라가는거에요?”
“그래야겠쥬? 여그서 사업할 아이템도 골랐겠다. 구매자랑두 연결됬겄다. 사업을 벌일 장소와, 함께할 사람까지 다 구해놨으니 인자 새로운 사업을 찾아야쥬.”
“그런데 주설씨는......”
“잉 뭐가유?”
“왜 리겔을 굳이 데리고 가려는거에요?”
제 질문에 그녀는 골똘이 생각에 잠기다가...... 눈이 스르르 풀렸어요. 뭔가 그럴듯한 대답이 나오길 기대했던 저에게는 정말 의외의 반응이었지요. 목이 당장이라도 떨어질 듯이 위태위태하게 졸던 그녀는 자신의 잠기운에 화들짝 놀라 눈을 번쩍 떴습니다.
“질문이 뭐였쥬?”
“왜 리겔을 굳이 데리고 가려는 거냐는 거였어요.”
“음...... 솔직히 말하믄, 별생각 없었어유. 뭐 굳이 이유를 갖다 대자믄......지랑 쪼깐 닮았잖아유. 즈그 동네서 인정 못받구 욕이나 알지게 처묵는게 지랑 판박이 아녀유?”
“단지 그뿐이에요?”
“...... 아이리스씨가 지켜본 지는 꼭 이유가 있어야만 움직이는 사람인거 같나보네유?”
“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을까요?”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마는...... 우리 삼민 속담에 이런 말이 있어유. ‘아무리 현명한 사람두 가끔은 실수를 하는 법이구, 아무리 멍청한 작자두 가끔은 똘똘한 짓거리를 헌다.’”
“그게 무슨 의미인데요?”
“이 사람은 이렇고, 쩌 사람은 저렇다구 함부로 예단하지 말라는거쥬 뭘.”
그녀의 말은 제가 이제까지 어렴풋하게 생각해왔던 사람에 대한 생각을 한방에 명쾌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래요. 단 하나의 색깔을 가진 빛도 프리즘을 만나면 일곱가지의 서로다른 색으로 분리가 되는 것처럼, 사람도 그 가죽 안에는 다양한 형태의 성향을 품고 있을 거에요. 워낙 다양하다보니, 어느 부분에서는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기 까지 하는 그런...... 라스알하게를 단순히 최근에 편입된 식민지 정도로만 생각햇던 제가 그녀와의 대화를 통해서 라스알하게에 대한 생각을 다시한번 새로이 갖게 되었습니다. 라스알하게는 라스알게티만큼이나 깊고 유려한 철학을 가지고 있었던 거에요. 그렇지 않고서야, 인간의 성향에 대한 통찰을 단 하나의 문장에 담을수 있지 않겠습니까?
제가 대화를 통해 라스알하게의 문화에 대한 생각을 고쳐먹는 동안, 이 라스알하게 홍보대사는 더 이상 졸음을 견딜 수 없었는지 하품을 하며 자리에 드러누웠습니다.
“양아치 새끼 야그는 그만허구, 인자 잡시다.”
“아아, 먼저 주무세요. 저는 로키군이 올때까지 기다리다가 잘게요.”
“로키유? 갸야 어련히 알아서 허겄쥬.”
“그래도......”
“크로스꺼지 혔으믄 알아서 떡하니 대령해 놓지 않겄어유?”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녀는 턱이 빠질 듯 크게 하품을 한 뒤에 곯아떨어졌습니다. 저도 그녀의 말대로 눈이나 붙일까 했지만..... 제 몸이 잠자는 것을 한사코 거부하는 통에 몇차례 뒤척이다가 그냥 로키군이 올 때 까지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저 또한 몸은 피곤했지만, 잠을 포기하고 나니 마음은 편해졌어요. 로키군이 올 때 까지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니 오래간만에 경전을 읽기로 했습니다.
오랜만에 읽는 경전이라, 어디를 읽어야 할지를 고민하다가...... 이런 일이 있을 때 제가 즐겨하던 방법이 있다는걸 오래간만에 기억해냈습니다. 거창한건 아니에요. 그냥 눈을 감고, 아무 페이지나 펼치는 것이거든요. 전에 읽었던 페이지가 펼쳐지는 경우도 적지 않았지만, 그때마다 그 의미가 새롭게 다가오니 손해보는 장사는 분명 아니었습니다.
“아드님이 또 비유를 하시니, 두 아들을 가진 어떤 사람의 이야기였습니다. 그 사람의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아버지, 아버지의 재산중에 제게 상속될 재산을 미리 주십시오.’라고 요구했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재산을 두 아들에게 물려주었더니, 며칠이 되지 않아 둘째 아들이 상속받은 재산을 가지고 먼 나라에 가서 재산을 마구잡이로 낭비했습니다.”
아아, 이 구절이네요. 작년이었죠 아마? 사제님께서 이 이야기 대목을 가지고 설교를 하신적이 있었던거 같아요. 그때 저는 이 구절에 대한 설교를 들으며 영혼없이 고개를 끄덕였었고, 제 옆에 앉아서 눈물을 글썽이는 형제 자매님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었는데...... 시간이 지나서 이 구절을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길다고 하면 길고, 짧다고 하면 짧은 시간이 흘렀고 그때의 저와, 지금의 저 사이에는 메꾸기 어려운 큰 간격이 생겼지요. 저는 ‘지금의 나라면 그때의 형제 자매님처럼 눈물을 글썽일 수 있을까?’하는 의문에 찬찬이 그 구절을 읽어나갔습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장신구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거라. 그리고 살찐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우리 모두 먹고 즐기자.’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여기까지가 사제님께서 말씀하신 대목의 끝이었건만....... 저는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이거 참...... 민망한데요? 분명 작년의 저와 지금의 저는 큰 차이가 있을텐데, 얄밉게도 여기에서 만큼은 놀랍게도 둘 간에 합의가 만들어진 모양이니까요. 덕분에, 앞서 말했던 제 자신이 상당히 민망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그래도 뭔가 눈물을 쥐어짤 만한 것을 찾아야겠다는 마음에, 뒷 구절을 계속해서 읽어나갔어요.
“맏아들이 밭에서 일을 하다가 집으로 돌아오니, 음악에 춤추는 듯 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맏이는 무슨 일인가 싶어, 종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종은 ‘도련님의 동생이 돌아왔고, 주인님께서 동생 분을 맞이해 살찐 송아지를 잡았습니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큰아들은 화가 나서 집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자, 아버지가 나와서 들어가자고 권했습니다. 맏이는 아버지에게 ‘제가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섬기면서 아버지의 말씀을 한 번도 어긴 적이 없는데도 아버지는 염소 새끼 하나 저와 제 친구들에게 잡아주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아버지의 재산 절반을 창녀들에게 갖다 바친 저 얄미운 녀석을 위해 살찐 송아지를 잡습니까?’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어차피 내 재산은 다 너의 것이다. 다만 네 동생은 우리가 죽은 줄 알고 있다가 살아 돌아왔지 않느냐. 잃은 줄 알았던 자식을 다시 찾았는데 그것을 기뻐하는 것이 당연하지.’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부분을 읽는 동안,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슴이 시려지는 동시에, 배 한 켠이 아려왔어요. 저는 무슨 이유인지 몰라서 어리둥절하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옷을 걷어 올려보았습니다. 역시나....... 배에는 새로운 백도가 아로새겨져 있었습니다.
“음...... 이번건 뭐라고 해석해야하는거지?”
처음 새겨졌던 백도는 그 의미가 명확했어요. 다름아닌 ‘질투’ 제게 있어 질투의 대상이었던 토라와 도로시씨의 잘린 목을 들고 황홀경 속에 잠겨있었잖아요. 그런데 이번 백도는...... 그 의미가 상당히...... 모호했습니다. 허름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열심히 이삭을 터는 동안, 백도의 주인공으로 보이는 여자는....... 짚풀 위에 몸을 뉘인 채, 느긋하게 장죽을 빨고 있었거든요.
“신분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거 같은데....... 뭐지?”
이번 백도의 난해한 의미를 해석하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어요. 뭔가 이 그림속의 여자가 저라는 것은 확실한데...... 뭘까요? 백도는 제가 살아온 삶의 궤적을 담는다고 하지만...... 저는 남들이 바쁘게 돌아다닐 동안 느긋하게 굴어본 적이라곤 없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왜 대관절 제가 저렇게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안자고 있었냐?”
“어? 왔어요? 어헛!”
로키군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그의 옆에는 뜻밖의 손님이 있었습니다. 어디서 잔뜩 두들겨 맞고 왔는지, 그의 얼굴은 짓뭉개져있었고, 옷에는 피와 침으로 범벅이 되어있었어요. 얼굴로는 도저히 그가 누구인지 알 도리가 없었지만, 그의 정수리에 걸려있는 새빨간 머리카락은, 그가 리겔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습니다.
“씻기는건 내가 할테니까, 치료는 네게 맡기마.”
“예 알았어요.”
Channel 0. Finale
1624년 7월 29일
리겔이 눈을 뜬 것은, 그날로부터 이틀이 지난 뒤였다. 솔직히 그 많은 사람들에게 곤죽이 되도록 두들겨 맞았으니 하루 이틀 더 곯아떨어져도 비웃음거리가 될 리는 없었건만, 녀석의 육신은 그마저도 용납할 수 없었던 것 같았다. 로키가 녀석의 정신이 온전히 돌아왔는지 확인하기 위해 몇가지 질문을 던지는 동안, 아이리스는 주설의 방에 가서 그녀를 데리고 왔다.
“몸은 좀 워뗘?”
“턱주가리가 나간거 같구먼, 아따 까딱혔다가는 고대로 묫자리 알아볼 뻔 혔네. 고맙소잉.”
녀석의 대답에 아이리스는 물론이고, 로키도 놀라워했다. 불과 며칠 전만 하더라도 그들에게 개새끼 씹새끼 못하는 소리가 없던 녀석이 지금은 그런 녀석이 맞았나 싶을 정도로 주설에게 깍듯하게 대하고 있지 않은가? 아이리스는 ‘저게 무슨 일이래요?’라는 표정으로 로키를 바라봤지만, 그로서는 그녀가 납득할 만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냥 녀석의 단순한 변덕정도로 생각할 수 밖에......
“듣자허니 댁덜이 샤울라 패밀리를 개작살을 내놨다고 허던디, 맞소?”
“뭐...... 다들 좆밥 찌끄레기던데 뭘.”
“이 씨벌럼이.”
“고만혀.”
발끈한 리겔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주설이 로키와 리겔 사이를 가로막았다. 다시 한 번 놀랍게도 주설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리겔은 씨근덕거리면서 고분고분하게 자리에 앉았다. 그 모습을 보노라니 뭐랄까...... 곰과 조련사의 모습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로키헌티 고마워 혀. 다 죽어가던 니를 여그로 델고 온겨.”
“.......잉 알겄네. 고맙소잉.”
“뭐...... 그래 알면 됐다.”
“근디, 인제 앞으론 어떻게 할겨?”
“뭘 말여?”
“앞으로 어떻게 살거냐 이거지.”
“......”
주설의 질문에 리겔의 이마에 굵은 핏대가 올라왔다가...... 그의 한숨과 함께 살거죽 속으로 얌전히 들어갔다. 그는 침대에 드러누워 천장만 바라보았다.
“어쩌긴 뭘...... 니들이 내 직장 다 작살내놓고 장래를 왜 묻는디?”
“니 빼고는 다덜 해피앤딩이 됐으니께 이러는거여. 우덜은 니 동생허구 계약을 맺었거든. 인자 니 동생을 위시한 철도 노동자덜은 우리 삼민상단 소속이여.”
“아따, 호랑이가 방 빼부리니 옳다구나 허구 고 자리를 고대로 차지혔구마잉?”
“어차피 누군가는 차지헐 자리 아녀? 그라믄 그나마 좋은 사람이 차지 하는게 맞는 겨.”
“허......참.”
“인정할건 인정혀. 인자는 너그 아부지가 기다려온 시상이 열린겨.”
“그 시상이 열리믄서 내 시상은 작살이 나브렀제. 그라믄 한번 새로운 시상 공기나 쐬봐야겄소.”
“그건 안돼요.”
녀석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지만, 그런 그를 아이리스가 뜯어말렸다. 그들은 그녀가 왜 그를 말리는지 그 맥락을 알고 있었지만, 이틀 동안 잠만 자온 리겔로서는 그녀의 행동이 도통 이해가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세모눈을 뜨고서 ‘왜 내 갈길을 니가 막냐?’는 식으로 몰아세웠지만, 아이리스는 요지부동이었다. 여기서부터는 자신이 나서야겠다고 생각했는지, 로키는 리겔에게 지금까지 있었던 일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다.
샤울라 패밀리의 궤멸과 함께 철도 노동자들은 월차,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반차까지 써가면서 마피아 사냥을 나섰다. 물론 총독부에서 사적인 복수를 막는 포고문을 내리긴 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사냥은 음성적으로 그리고 집요하게 이루어졌다. 리겔의 가족이야, 아버지의 후광과, 그것을 이어받은 딸의 활약상 덕분에 화를 면할 수 있었지만...... 사람들은 리겔까지 용서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버기스 서지에서 당한걸로 모든게 퉁쳐질 거란 생각은 그만 두는게 좋다는거다.”
“.......”
리겔은 멍하니 있다가, 얼굴을 찌푸려가며 웃음을 터뜨렸다.
“허 참, 씨펄럼들 인자 지들 시상 열렸다 이거구마잉.”
“정확히 말하믄, 내 시상이기도 한거여. 아까두 말 혔듯이 카르텔의 빈 자리는 나가 접수혔으니......”
“그래서 나헌티 바라는 것이 뭐시오?”
“맘 같아서는 다시 한 번 노동자들 앞에 던져주고 싶지만, 그건 니들 가족 가심에 두 번째 대못을 박는 일이 될것이니...... 호의를 베풀까 혀.”
“호의......?”
“잉..... 나넌 인자 삼민상단의 상단주로서 새로운 시장을 개척 할라구 혀. 근디 그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겄어? 프로하기온의 카르텔 마냥 각 지역의 맹주덜이 똬리를 틀고 있을겄디....... 모난돌이 정으로 뚜들겨 맞는다구, 새로운 시장을 열려믄, 프로하기온에서 겪은 것처럼 충돌은 생길 수 밖에 없겄지.”
“그려서? 나보고 뭘 어쩌라고?”
“내 수행원이 되라 이거여. 단순히 경호원이 되라는 것이 아니라, 내 수족이 되어, 새로운 시장을 개척허는디 아이템이나 아이디어까지 제공하라 이거여.”
“수행원이라......”
“기본급은 경호원 수준에 준하게 주겄지만, 니가 사업에 기여를 허게 되믄, 기여한 만큼의 커미션을 띠줄 거여. 어차피 돈 쓸디도 없을텐디, 그걸 너그 가족들헌티 보내주믄 가족들 생계에 도움이 되지 않겄냐?”
“.......”
“그게 니 가족에 대한 속죄가 될겨.”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여? 나넌 사업맹키로 먹물쟁이덜이 허는 일은 아는 바가 없는디?”
“그러니까 호의지. 나두 무능한 수행원은 달고 댕길 생각은 전혀 없어. 내 밑에서 일하믄서, 사업에 대한 걸 배우라 이거여. 대그빡이야 터지겄지만, 니도 언젠가는 니 이름달고 사업하나 혀야지 않겄냐? 기왕 이리된거 세금내구 떳떳하게 살아보라 이거여.”
“......”
침묵 속에서 리겔은 이불깃을 만지작거리며 한참을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듯 했다. 그럴 만 한 것이, 주설의 제안이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평생을 주먹하나 믿고 살아온 그에게 ‘머리쓰는 일’로 새로 시작하라는 것이...... 그건 문자 그대로 ‘뽕나무 밭이 바다가 되는 것.’ 만큼이나 엄청난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 분명했다. 리겔은 이불깃이 찢어지도록 만지작거리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언제부터 출근하면 되겄소?”
리겔의 말에 주설은 만족스럽다는 듯 한 웃음을 터뜨렸다.
“진작에 헌다구 시원허게 말하지 뭘 그렇게 시간을 끈겨? 오늘부터 출근하면 디야. 월급은 한 달 뒤부터 줄 테니까, 일단은 찬찬이 배워보드라고.”
“뭐여 그럼? 지금은 수습이라 이거여?”
“그럼 첨부터 실전부터 들어가리? 찬찬이 지켜보믄서, 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지켜봐야. 그래야 니두 니 사업을 구상할 수가 있는 거여.”
주설씨는 자리에서 일어나 제게 리겔의 턱을 고쳐달라고 말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리스는 안수기도를 하기 위해, 그의 턱에 손을 가져다 대려고 했지만, 리겔은 고개를 저었다.
“돼얐소. 어차피 며칠 있으면 괜찮아 질것이고,..... 나넌 기억력이 썩 좋지 않아서, 얼른 나서버리믄 금방 잊어버릴 거여.”
“그럼...... 안한다 이거에요?”
“잉, 며칠 불편하게 살믄 되겄지 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