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nnel 1. 로키
1624년 8월 14일
노릇노릇하게 익은 토스트와, 윤이 잘잘 흐르는 스크럼블 에그, 그리고 수분을 잔뜩 머금은 샐러드가 내 망막에 들어와 유혹의 손길을 네밀었지만, 나는 선뜻 잡을 수 없었다. 손만 뻗으면 잡을 수 있는 지근거리였지만, 아직 그녀의 말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리스씨의 말 대로여. 우덜은 리스크 테이커가 아니라, 리스크 매니저가 되야혀. 인자부텀은 뭘 잃을지가 아니라, 뭘 얻을지를 생각하며 행동하는 거지.”
처세술책에나 나올 것 같은 ‘지극히 옳은 소리’를 하는 주설의 얼굴은 밝게 상기되어 있었다. 클라허 타히의 실패로 알게 모르게 주눅이 들어있던 그녀는...... 그 반작용 때문인지 옆에서 보기엔 걱정스럽다 싶을 정도로 밝아보였다. 어쨋거나 그녀의 일장연설은 도저히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 나는 주변의 시선을 무릅쓰고 용기있게 토스트를 집어들었다. 스크럼블 에그와 샐러드를 얹고난 뒤에 그녀를 위해 짧게 한마디 했다.
“클라우드를 위하여.”
“아 맞다. 얼른 집어 묵어.”
주설의 말이 끝나자마자, 입맛만 다시던 답답이와 리겔도 후다닥 토스트에 고명을 얹어서 먹어댔다. 그들도 나와 같이 누군가가 총대를 매주기를 간절히 바래왔던 것 같았다. 결국은 내가 매긴 했지만......
“리스크 매니전가 뭐시긴가 되는거는 좋은디...... 그럴라믄 뭐를 어쩌케 혀야 쓰것소?”
리겔이 빵조가리를 우물거리며 질문을 던졌다.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는다고, 걱정스럽다 싶을 정도로 밝았던 주설의 얼굴이 녀석의 질문에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어찌나 그 간격이 크던지, 나는 별안간 일식이라도 난 줄 알았다.
“그것이......”
“뭐 어차피 그거야 찬찬이 생각해보면 될 일이죠 뭐. 일단 마음가짐이라도 좋게 잡은게 어디에요.”
답답이가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입을 놀려댔지만, 주설의 얼굴은 어두워지다 못해, 까맣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주설은 입맛을 잃었는지, 결국 토스트를 집어들지도 못했다.
“리겔 저놈은 눈치도 더럽게 없어요.”
“현실적인 질문이지. 마음을 긍정적으로 먹는건 좋은 일지만, 일의 성패를 두고 보자면 성공을 좌우하는 수많은 요인들 중에 하나에 불과할 뿐이거든. 녀석은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눈치 없는 것은 맞지만, 머저리는 아니야.”
내가 리겔을 두둔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답답이는 내게 세모눈을 치켜떴지만, 그렇다고 해서 녀석에게 거짓으로나마 내 발언을 철회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사실은 사실인데 뭘. 안 그래도 나 역시도 이 사업의 ‘주주’로서 주설이 성공할 수 있는 여러 방안들을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일단...... 마음가짐만 놓고 본다면, 녀석은 내 생각에 동의를 할 만한 마음의 준비가 된 것 같아 보였다.
“주설씨 머리가 많이 아프겠어요.”
“그럴거야. 실제로도 머리가 찢어지긴 했잖아?”
“그거 농담이라고 한거에요?”
“현실적인 진단이지. 어쨌거나, 우리라고 가만히 손 놓고 주설이 모든 걸 해결할 때 까지 기다릴 수만도 없는 노릇이야.”
“......생각해 둔 거라도 있어요?”
“있긴 하지...... 니 마음에는 안 들겠지만.”
내가 말을 너무 에둘러서 한 탓일까? 답답이는 집요하게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꼬치꼬치 물어댔고, 나는 몇 차례 저항을 한 끝에...... 어차피 녀석에게 말 해봤자 동네방네 떠들고 다닐 입장이 아닐테니 굳이 말해도 상관이 없다 싶어 입을 열기로 했다.
“‘그들’의 방식을 사용하자는 거지.”
Channel 2. 아이리스
1624년 8월 14일
“‘그들’의 방식이요......?”
“거봐, 내가 네 마음에 들지 않을거라고 했지?”
로키군은 엉덩이를 툭툭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벤치에 앉아있는 저를 내려다보았어요. 마침 동녘에서 남녘의 궁창을 가르는 태양빛이 그의 머리에 드리워져, 저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기 어려웠습니다.
“아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말은 안했어요. 다만...... 어떤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냐에 따라서 마음에 들지 여부가 달라지겠지만.”
“들어도 비슷할거야.”
로키군의 의견은 이랬어요. 현재 PBRC의 주요한 타겟은 ‘이민자’들이고, 그들의 행보에 비해 수비대는 지나치게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게 그의 문제 인식이었습니다. 그 사이에서는 이득을 얻기가 어려울 뿐 더러, 이득을 얻어도, 감수한 위험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었죠. 두 집단 사이에 끼어있는 입장에서 최대한 이득을 끌어내려면......
“그 둘이 갈등하고 반목하도록 만들어야지.”
“이간책을 하자는 건가요?”
“비슷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수비대가 사태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자는 거지.”
“어떻게요?”
“그거야......”
로키군은 뜸을 들이다가...... 별안간 홱 하고 제 옆에 앉더니 제 옆구리를 사정없이 찔러댔습니다. 이게 무슨 장난질인가 해서 처음에는 그의 손을 뿌리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손이 저를 피해 옆구리를 집요하게 파고들자 저도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어요. 저도 모르게 치켜 올라간 제 손이 로키군의 뺨을 치려는 순간......
“이렇게 벌집을 들쑤셔 놓으면...... 수비대라고 손 놓고 있진 못하겠지.”
“......”
로키군은 제 손을 잡아채고는 이렇게 말을 했어요.
“아니..... 그걸 굳이 이런 식으로 설명해야 하는 거에요?”
“추상적인 말 보다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보여 주는 게 더 기억에 남는다고 하니까.”
“음......”
그의 말을 듣고 보니, 일견 일리가 있기는 했습니다만, 저는 그가 아직 모든걸 말했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그의 말을 들었을 때, 저는 ‘그럴 법 하다.’라는 생각만 했을 뿐, ‘기분나쁘다.’라는 생각은 일절 들지 않았거든요.
Channel 1. 로키
답답이는 자신도 따라가겠다고 우겼지만, 나는 주설과 함께 가게나 잘 돌보고 있으라고 한 뒤에 리겔을 데리고 The Cloud를 나섰다. 녀석에게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 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지만, 나를 선뜻 따라나선 것에서, 어느 정도 짐작하는 바가 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언넘 부터 조질 것이냐?”
“건물 철거할 때는 기둥부터 들어내는게 법도지.”
마침 시기적절하게 오늘은 토요일이었다. 일주일 중 단 하루, 녀석들이 기고만장하게 날뛰는 날이고, 그것은 그만큼 그들이 주변에 대한 경계심이 느슨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런 ‘축제의 날’에는 사람 한두 명쯤 사라져도 티 나지 않을 테지.
늘 그렇듯, 집회는 커먼브룩에서 시작되었다. 라스알게티를 상징하는 백색과 순혈을 상징하는 적색이 반반 어우러진 그들의 표식들이 서서히 거리에 몰려들어오기 시작했다. 벤치에 앉아서 그 모습을 보노라니 문득 비 오는 날 물어름에 서 있으면 이런 느낌이 들까 싶었다. 커먼브룩이 거대한 강이라면, 뉴 빌리지 쪽의 지류, 운터브룩 쪽의 지류, 로열퓨너럴 쪽의 지류에서 하얗고 붉은 물들이 이곳을 향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거든. 음..... 그렇게 말해놓고 나니까, 내 비유가 조금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의 지류들이 합류하는 것을 본다면...... 아마 나는 자연의 압도적인 스케일에 경탄을 할 지언정, 이토록 속이 메스꺼워 지지는 않을 것이다. 저 풍경을 물어름으로 비유하기엔 자연에게 미안했다. 저 풍경에 대한 생생한 묘사를 위해 적절한 워딩을 사용하자면
“이방인을 쫓아내고 더러운 피 정화하자!”
“더러운 피 정화하자!”
오수가 쏟아져 내리는 하수도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다. 더러운 구정물이 굽이쳐 흐르는 중에, 합류공으로부터 각종 오물을 담은 하수들이 시도 때도 없이 쏟아지는 거지...... 물은 모이면 모일수록 스스로를 맑게 만든다지만, 이 오수들은 모이면 모일수록 각각의 더러움들이 보이는 자기주장 덕분에 치켜보는 이들로 하여금 불쾌감을 일으킨다. 커먼브룩은...... 지금 이 순간만이지만, 이 도시가 품고 있던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한데 뒤엉키는..... 감정의 배설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서민들 피 빨아먹는 쥬드들은 사라져라!”
“쥬드들은 사라져라!”
쥬드들을 흡혈귀에 비유하는 원색적인 비난구호에, 사람들은 목청을 높여 소리를 질러댔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은 이질집단의 구성원들이 내는 기괴성을 듣노라니, 몇 달 전 이 거리에서 울렸던 다른 의미의 구호가 떠올랐다. 그때도 이렇게 여러 음색의 소리가 뒤얽히긴 했어도...... 적어도 예의는 발랐단 말이지. 서로를 향해 안녕들 하냐고 안부를 물었잖아? 대체 몇 달 사이에 무슨 곡절이 있었기에 이 거리의 스탠스가 이렇게 기울어졌는지 의문일 따름이다.
“서민들의 자리 뺏는 거지놈들 사라져라!”
“거지놈들 사라져라!”
딱히 누구라고 지칭하진 않았지만, 구호를 듣는 순간, 누구를 겨냥하는 구호인지 짐작하는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라스알하게계 들을 향한 발언이겠지. 이거 참..... 아이러니 한 노릇 아닌가? 라스알하게계가 종사하는 직종은 이 도시에서 푸대접 받는 일들이다. 자기들이 하기 싫어 사람들을 불러놓고, 이제 와서 일자리를 뺏는다고 성화라니...... 그럼 라스알하게계 주민들을 쫓아내면, 지들이 그 일을 할 셈인가? 내가 볼 때는 전혀 그렇지 않을걸? 나는 이러한 비이성적인 구호를 들으며 나도 모르게 혀를 찼다.
“아따 그려두 프로하기온 치는 건들지는 않는갑다잉?”
“그러게 말이다,”
그 와중에 우리 고향을 건드리지 않는다는 점이 리겔에게 있어서는 이 불쾌한 모임에서 찾은 단 하나의 긍정적인 일면인 모양이었다. 녀석은 씩 웃으면서 팔짱을 끼고 집회가 돌아가는 모양새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하긴 뭐...... 딱히 고향에 대한 애정이 있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누군가가 내 고향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한다면 썩 유쾌하진 않을 것 같다. 이런 모두까기 상황에서 우리 고향이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에선...... 프로하기온이 그만큼 라스알게티와 한 식구 취급을 받는다는 거겠지?
“쨌든...... 조질넘은 찾았냐잉?”
“음..... 저기 연단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놈 어때?”
“아 쩌넘 말이제? 그려 그럼.”
Channel 2. 아이리스
주설씨는 제 말을 들으면서 커피잔을 호로록 비워내면서 인상을 잔뜩 찌푸렸어요. 나름 잘 젓는다고 저었는데...... 급하게 타느라 커피가 제대로 섞이지 못한 모양이었습니다.
“‘그들’의 방식이라고 혔슈?”
“네네 그렇게 들었어요.”
“흠...... 하샤신덜 방식이믄 일단 평화적인 거랑은 거리가 먼 거 같기는 헌디...... 그 치덜하구는 교류가 있어본 적이 없어가지구 뭐를 어떻게 할란가는...... 짐작이 안가네유.”
“저도 그게 걱정이에요. 뭔지 알면, 말리든 말든 할텐데. 아예 감도 안 오니까 뭐라 할 수도 없고......”
“와아아아아아!!!”
저희 둘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창문 너머에서는 폭탄이 터지듯 갑작스럽게 큰 소리가 터져 나왔어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지 궁금하긴 했지만, 함부로 커튼을 들어 올릴 수는 없었습니다. 저번에 PBRC의 행태를 겪어보니..... 저들의 날인 토요일에는 가급적이면 그들과 엮이지 않는 편이 낫겠더라구요 공연히 엮여봐야 도움이 안됐으면 안됐지 돼본 적은 없으니까요.
“워매..... 아주 사람을 잡아묵네 잡아묵어...... 이번에는 누구를 태울까유?”
“늘 그러했듯이 스테반 로스차일드씨 아닐까요? 아무래도 그쪽업계에서는 제일 핫한 인물일 테니까.”
“어쩌면 우리일 수도 있을 걸요? The Cloud에서 행패부린 자들을 제법 잡아넣었으니까요.”
“그것두 가능성이 없지는 않을 것 같기는 헌디......”
“문 열어!”
주설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급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나름 센척한다고 짐짓 여유로운 척을 하고 있던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이 일순간 얼어붙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그나마 없던 용기를 착즙기에 넣어 우려내서 한다는 행동이라는게...... 우습게도, 서로를 보며 눈만 껌뻑이는 것 정도였지요. 이런 안쪽의 애달픈 사연을 전혀 알 리가 없는 바깥에서는, 문이 부서져라 열심히 두드려대기만 하더군요.
“아 뭣허냐. 얼렁 열랑께!”
문 너머로 리겔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우리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한달음에 문앞으로 달려갔습니다. 문이 열리자마자 우리의 눈 앞으로 쑥 하고 들어온 것은......
“꺄악! 이게 뭐야!”
“소리 지를 시간 있음 언넝 받어.”
피투성이가 된 하얀 천을 뒤집어쓴 형상이었어요. 처음엔 공포소설의 한 장면과 같은 모습에 저와 주설씨 모두 기절하기 직전까지 비명을 질렀지만, 리겔은 그런건 내 알바가 아니라는 듯, 던지듯이 우리에게 그것을 건네주었습니다. 저와 주설씨는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받아들었죠.
“빈방으로 이걸 놓아둘거다.”
“.......이...... 이게 뭔데요?”
“리스크.”
“리스크?”
“읍! 으읍! 읍! 읍!”
제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얀 천을 뒤집어쓴 그것은 몸을 뒤틀며 신음소리를 토해냈습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기괴했던지....... 이거 참 오늘 밤 잠은 다 잔거나 다름이 없겠다는 강한 확신이 들었습니다.
Channel 1. 로키
주설과 답답이가 녀석을 받아드는 동안, 나와 리겔은 테이프와 헝겊으로 문이며 창문이며 틈이 보이는 곳은 모조리 틀어막았다. 리겔이 시험 삼아 방 안에서 왁하고 소리를 질러보았다. 우리의 일 처리가 제법 잘 되었는지, 녀석이 지른 소리는 메아리 하나 없이 그대로 사그라들었다.
“대체 무슨 일을 하려는 거에요?”
“리스크 매니징.”
답답이는 ‘이게 무슨 개소리냐?’라는 투로 나를 바라봤지만, 굳이 설명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백번 듣는 것 보다, 한번 보는 것이 훨씬 더 이해가 쉬울 테니 말이다. 나는 리겔이 녀석을 의자에 결박하는 동안, 각종 도구들을 준비했다. 몽키스패너, 송곳, 구리선, 아연과 구리, 그리고 황산등이 그것이었다.
“공구리는 챙겨왔냐?”
“왜? 아예 죽여 버리게?”
“그라믄 깔끔하게 죽이는 게 낫지 않겄냐? 난중에 딴 소리 혀블먼 어쩌겄어?”
“아니지, 이 녀석은 나중에 우리가 쓸 말이 될 수도 있지 않겠냐?”
나름 심도 있는 토론이었던 것 같은데, 주변의 반응은 싸했다. 답답이는 ‘무슨 소리를 하냐?’라는 것을 넘어 ‘지금 일이 심각해 지는거 아니야?’라는 얼굴이었고, 주설은 뜨악한 얼굴로 우리를 쳐다봤다 그리고...... 우리가 갓 잡아온 싱싱한 재료는...... 덜덜 떨다 못해..... 오줌을 지리기까지 한 것 같았다. 녀석이 뒤집어쓰고 있던 하얀 의복이 아래부터 서서히 노랗게 젖어들었거든.
어쨌거나 준비는 마쳤고,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 리스크 매니징을 위한 우리의 의지만이 작금의 사태에 유일한 변수가 될 것이다. 나는 녀석이 뒤집어 쓴 의복을 조금 찢어, 그 속에서 손을 꺼냈다. 저항이 있었지만, 두 사내의 완력을 이길 수는 없었다.
“자, 잘 들어. 나중에 결정을 해야겠지만, 아직은 네 목숨을 뺏을 생각은 없다. 고맙지?”
“......살.....살려줘.”
“흠..... 말귀를 잘 못 알아듣는 것 같은데. 처음이니까 놀라고 당혹스러울 수는 있어. 그 정도는 우리도 충분히 이해할거야. 하지만...... 이런 식의 상황설명이 두 번은 반복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말 잘 알아들었지?”
“.......살려줘요.”
“이거...... 안 되겠는데?”
나는 리겔에게 신호를 보냈다. 리겔은 작업 판에 놓여 있던 송곳을 집어, 녀석의 손톱 사이로 쑥 밀어 넣었다. 녀석의 입에서 ‘흡!’하는 신음소리가 흘러나왔지만, 리겔은 그것만으론 만족할 인물은 결코 아니었다.
“끄아아아아아악!!!”
손잡이를 꾹 누르자, 마치 맥주병에서 뚜껑이 퐁 하고 튀어나오는 것처럼 녀석의 손톱이 튕겨져 나왔다. 녀석의 입에서 나온 비명소리가 내 귓전을 강하게 찔러댔다. 짐작컨대 자신의 신체적 고통을 표현함과 동시에, 주변에게 도움을 청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그렇게 했겠지만...... 녀석의 입장에서는 매우 유감스럽게도 첫 번째 의도는 달성할지언정, 두 번째 목적은 결코 달성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신들 미쳤어요? 대체 지금 뭘 하는 거에요!”
“말했잖아. 리스크 매니징이라고.”
“아야 내 말 들리냐?”
“......”
“들리냐고 이 씨펄 새끼야.”
“예.....예 예!”
“하여간에, 때레야 말을 들어요. 아야, 나넌 아까 갸 맹키로 점잖게 할 생각은 1도 없으니께. 아까처럼 손톱 뽑히기 싫으믄 싸게 싸게 대답을 혀야 할 것이여. 알겄냐?”
“......”
“내 말이 고까우면 아까처럼 개기믄 되는거여. 손발톱 합쳐 열아홉 개 남았응께, 그때꺼정 잘 개겨보드라고.”
“아..... 아닙니다!”
“근디 왜 아까는 대답을 안 혔냐?”
“그게......끄아아아아아악!”
두 번째 손톱이 허공을 향해 날아오르고, 녀석의 고개가 푹하고 꺾였다. 그는 어떻게든 자신의 남은 손톱을 지키기 위해, 주먹을 그러쥐려고 무던히 애를 썼지만, 나와 리겔이 그 꼴을 보고만 있을 리가 있나, 주머니에서 단도를 꺼내 그대로 녀석의 손등에 박아 넣었다. 녀석의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리겔이 녀석을 온통 들쑤셔놓았으니, 이젠 내가 나서야 할 타이밍인 것 같다.
“어때? 제법 고통스러웠지?”
“......”
“고통스러웠냐고 물었잖아.”
“아, 아닙니다!”
“아이고, 깡이 제법 좋네. 하긴 이정도 깡은 있어야. 우리도 준비한 보람이 있지. 안 그래?”
“아니......그게 아니라.”
“고통스러웠다고?”
“네! 네! 그렇습니다!”
“알았어. 장난이야. 너무 그렇게 쫄지 말라고. 우리는...... 네놈한테 물어볼 게 몇 가지 있어. 그거에 대해 충실하게 대답을 해주면 우리도 이 정도 선에서 끝을 낼 작정이야. 알아들었지?”
“네! 넵! 말씀 하십쇼.”
“일단...... 첫 번째 질문.”
Channel 2. 아이리스
로키군과 리겔은 문자 그대로 ‘무자비하다’싶을 정도로 그 사람을 고문했어요. 그의 오른손 손톱을 모두 뽑으면, 왼손의 손톱을, 왼손의 손톱이 모두 뽑혀나간 뒤에는 오른발과 왼발로 대상을 바꾸었어요. 피가 튀고 비명소리가 귀청을 찔러댔지만 그들은 앞서 언급한 두 개의 부산물로 쌓아올린 자신들의 잔혹극을 그만둘 생각이라곤 일절 없는 것 같았습니다.
“뭐여? 벌써 다 뽑아브렀네잉? 그라믄 인저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가 볼까잉?”
“아직 시작도 안했는데 벌써 다음으로 넘어가야 되는거야?”
로키군은 못내 아쉬웠는지 입맛을 다시다가....... 저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저를 바라본 순간 그의 눈빛이 번뜩였어요. 그 나름대로 괜찮은 생각이 떠오른 것 같은 기색이긴 한데......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몰라도, 눈빛을 보노라니 꺼림칙한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아 마침 잘됐네. 야. 기도로 이 녀석의 손발톱들을 치유할 수 있지?”
“......네? 그건 왜.....”
“그래야 손발톱을 또 다시 뽑을 수 있을 거 아냐.”
우와..... 세상에 사람의 탈을 쓰고 그런 생각을 하다니, 이건 악마들조차도 절레절레 고개를 저을 법 하지 않을까 싶었어요. 지금의 로키군을 보노라니, 제가 그동안 모래벌판에서 성을 쌓아올리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에 대해서 ‘완벽히’ 알 수 있다면...... 그를 미워해야 할지, 용서해야 할지를 결정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로키군도 제 생각에 동의를 해줬고, 제가 그를 이해할 수 있도록 나름 잘 협조해줬다고 생각해요. 몇 달의 시간동안 그와 함께 하면서...... 그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아는 면이 많아졌다고 생각했는데...... 로키군이라는 사람에 대해 알아갈수록 일반적인 ‘하샤신’들과는 달리 그래도 조금은 인간적인 구석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그걸 저한테 부탁이라고 하는거에요?”
지금 제 앞에 서 있는 이 괴물은 대체 누구일까요?
“저보고..... 당신들의 잔혹극에 동참하라 이거잖아요. 지금 내가 뭘 생각하고 있는지 알기나 해요? 할 수만 있다면 이따위 문짝 당장에 걷어차고 당신들을 수비대에 고발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에요. 사람목숨 알기를 찌꺼기 여기듯이 하는 사람하고 같은 공간에 있는 것 조차도 소름이 끼친다고요!”
“......”
로키군은 대답대신 저를 똑바로 쳐다보기만 했습니다. 저도 이대로 우유부단하게 있을 순 없다는 생각에 그의 눈길을 피하지 않고 똑똑히 응시했어요. 그 타는 듯 한 붉은 눈동자 너머로 제 얼굴이 비쳐보였습니다. 저를 바라보는 이 남자는 지기럽고 심지어 그것을 뒷받침하는 신체적인 강함도 겸비하고 있었지만, 그 불타는 눈동자 속에 갇혀있는 이 여자는..... 고집은 셀 지언정, 그걸 뒷받침 할 만한 어떤 근거도 없었습니다. 어쩌면 제가 이렇게 이 남자에게 맞설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제가 엄청난 특권을 가진 거나 다름없을지도 모르겠어요.
“주설씨 뭐라고 말이라도 해봐요. 이런 미친짓을 가만히 둘 작정이에요?”
“어.....그게유.”
저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주설씨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주설씨는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제 눈길을 슬쩍 흘렸어요. 그 모습에 ‘뭐야?’하는 생각이 순간 들었는데, 뒤따르는 그녀의 말이 제게 아까의 의문에 확신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잔인한 방법인거는 맞는디...... 그래두 암만 생각 혀 봐두. 지금 이 방법보담 ‘효율적인’방법은 없는 건 사실 아녀유?”
“아니 그게 지금......”
“우덜은 시간이 별로 없어유. 언넝 쇼부칠거 치고 담 단계루 넘어가야 혀쥬. 그럴라믄...... 다소 과격해두 쓸 수 있는 방법은 다 동원해봐야 헌다 싶네유.”
“......”
말문이 턱 막혔지만, 머릿속은 더없이 맑아졌어요. 이젠...... 이곳에 더 볼일은 없는 것 같아요. 이런 미친 짓거리에..... 몸을 던질 만큼, 저는 미치지 않았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