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가지 인생 - 92

갑과을 작성일 19.10.12 13:4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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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1. 로키

 

아이리스는 눈을 뜨지 못했다. 어찌나 지독하게 당했는지, 솔직히 말해서 지금 그녀가 눈을 떳다고 해도, 그것을 알아차릴 자신이 없을 정도였다. 아침에는 터질 듯한 벅찬 느낌을 가슴에 품으며 문지방을 밟았는데, 지금은...... 다른 의미의 느낌이 가슴에 묵직하게 얹어져 있었다.

다른 녀석들이 그녀를 수발하겠노라고 나섰지만, 그 모든 제안을 물리치고 그녀의 곁을 지켰다. 그녀가 의식을 잃은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명치가 뻐근해져갔다.

 

너도 인제 좀 쉬고 그려.”

“......”

아따 의사도 왔다 갔잖여. 좀 만 쉬고 나믄 괜잖아 질거라구.”

지금 이 사태....... 네 녀석의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

탓해서 뭐혀? 만약에 남 탓혀서 아이리스씨가 툭툭 털구 일날 수 있음, 내 남은 팔 한 짝도 뜯어가라.”

“.......”

암만 장사꾼이 뭐든 다 팔아두, 동료의 안전까지는 안 팔어야.”

늦어서 죄송합니다.”

 

, 저기 영웅 나리가 납셨군. 알 샤인이 그 잘난 낯짝을 이제야 들이밀었다. 왕도의 골칫거리 PBRC를 유치장으로 글겅이질 해간 도시의 영웅께서 이런 누추한 곳까지 납시다니, 이거 참 황송해서 몸 둘 바를 모를 노릇이다. 그런 생각은 주설과 리겔도 마찬가지였는지, 그를 바라보는 우리의 눈길은 더없이 싸늘했다.

 

아이리스씨의 일은 정말로......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

체포영장이...... 생각보다 너무 늦게나왔어요. 그게 조금만 더 빨리 나왔더라면......”

됐으니, 가서 발 닦고 잠이나 자쇼.”

..... 그래도 다행이에요. 이 일로 PBRC놈들을 일망타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

좀 씨발 눈치 더럽게 없네...... 야 이 호로새끼야 다행이라는 말을 허믄, 우덜이 춤이라도 출거 같었냐?”

 

리겔의 엄포에 알 샤인은 움찔 했지만, 자신의 할 말을 그만 둘 생각은 없는 것으로 보였다. 녀석은 비지땀을 흘리며 자신의 입장을 설명아닌 변명하고자 했고, 그 작태는 가만이 있는 나조차도 더 이상은 참을 수 없게 만들었다. 참으로...... 사람 복창 터지게 하는데는 일가견이 있는 녀석이었다. 나는 아이리스에게서 잠시 눈을 떼고, 녀석에게 다가가 멱살을 틀어잡았다.

 

수상 소감 발표는 기자들 앞에서나 하고, 여기선 좀 빠지지? 역겨워서 더는 못 들어주겠는데.”

......”

니가 거리에서는 영웅 소리 듣게 될 지는 모르겠지만, 우리한테는 그저 자기 할일 제대로 못한 무능력한 잉여새끼에 지나지 않으니까. 상황 판단은 확실히 하자고.”

...... 그래, 내 잘못이지 근데...... 그거 알아? 애초에 니들이 좆같은 짓거리만 벌이려고 들지 않았으면......!”

 

복창이 끓어 넘치게 만드는 말이었지만, 그 말 한 마디 한 마디 어디 하나 틀린 구석이 없었고, 그 말의 비수는 온전히 나의 가슴을 찔렀다. 손에 힘이 풀려 녀석을 놓아주자. 녀석은 캑캑거리며 숨을 가다듬고는

 

수사 결과는...... 검찰에 이관할 거니까, 48시간 내에 구속 영장이 청구될 거야. 그때 너희는 증인 혹은 참고인으로서 검찰에 니들이 보고 듣고 겪은 바를 이야기해야 해...... 그게 아이리스씨의 희생을 헛되게 하지 않는 길 일거다.”

희생......?”

그래, 그래야 그놈들이 법의 심판을 받지.”

법이라..... 잣이나 까 잡수라고 해. 심판은 우리가 직접 할 거니까.”

 

 

 

 

 

 

 

Channel 2. 아이리스

 

눈을 뜨자 낯익은 천장이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시야가 매우 좁긴 했지만, 로키군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저를 지켜보고 있다는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어요. 저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에는 수심이 가득했지만, 그 수심에 잠겨있는 바람에, 제가 눈을 떴다는걸 미처 알지 못했나봐요. 하하 이거 참 얼마나 두들겨 맞았길래 이런 코미디 아닌 코미디를 만든 걸까요?

 

목을 가다듬어 제가 깨어났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지만, 바싹 말라붙은 목젖은 일하기를 포기했는지 힘을 아무리 들여도 가르랑거리는 가래끓는 소리만 만들어내더군요. 짧은 순간이지만, 식물인간이 이런 심정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손을 움직이고 싶어도 까딱할 수 없고, 소리를 지르고 싶어도 지를 수 없는 비참한 상황...... 온몸이 보이지 않는 끈에 의해 꽁꽁 묶여있는 기분이었어요.

 

혼자서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하느라 낑낑대는 동안, 알 샤인씨가 들어왔습니다. 배갯속에 머리를 파묻고 있는 바람에 정확하게 들리진 않았지만, 그는 우리 필그림들에게 사과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건...... 영 좋지 않은 반응을 이끌어낸 것 같았습니다. 그들은 그 말을 시작으로 격렬하게 입씨름을 벌였고, 결국 로키군이 그의 멱살을 잡으며 손찌검을 하기에 이르렀죠. 로키군이 그를 두들겨 패는 동안, 그는 윽윽 거릴 뿐,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안했다고 보는게 더 맞을 것 같아요. 온힘을 다해서 두들겨 패는 쪽과, 손도 들어올리지 않고 두들겨 맞는 쪽의 처연한 대결은, 의외로 로키군의 패배로 귀결이 난 것 같았습니다. ‘다 때렸냐?’라는 알 샤인씨의 말에, 로키군은 그의 얼굴에 침을 뱉는 것으로서 실랑이가 끝이 났거든요.

 

알 샤인씨는 한참동안 씨근거리고서도 자기 할 말은 끝까지 하더군요. 잘 들리진 않았지만...... 대충 얻어들은 언어의 파편을 조합해보자면 너희한테 두들겨 맞고 깨지는건 오늘이 마지막이다.’라는게 그의 요지였던 것 같습니다. 또 귀를 기울여보니 다른 말도 들리네요. ‘허튼 짓 할 생각 마라.’ ‘우린 너희를 지켜볼 거다.’ 그리고 ‘PBRC는 법에 따라 벌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요.

 

혼자만의 싸움을 벌이는 동안 이런 다이나믹한 일이 벌어지더군요. 저는 한참동안 시행착오를 겪은 뒤에,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원체 몸이 상했으니, 몸을 일으키는건 잠시 유보하고, 제가 움직일 수 있는 최소한의 근육이라도 수습해야겠다는 거에요. 별다를게 있나요? 아까 잔뜩 말라버린 목젖 말이에요. 저는 그들이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최대한 혀를 굴려, 바싹 말라버린 입안에 침을 고이게 만들었고, 그걸 소리없이 꿀떡꿀떡 삼켰습니다. 다행이 제 노력이 통했는지 목젖에 습기가 돌면서 가래끓는 소리는 잦아들고, 그 빈자리에 인간의 언어를 뱉을 수 있는 공간이 채워졌습니다. 이윽고 알 샤인이 방문을 쾅 닫고 나가는 그 시점에, 드디어 제가 꿈꾸던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애는...... 괜찮아요?”

? 어어? 깨어났냐?”

진작에요......”

 

제 말에 로키군은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 그의 어께가 가늘게 떨렸어요. 자신의 감정을 들키고 싶지 않았는지 고개를 숙였다, 하늘을 바라봤다를 한참동안 반복한 뒤에, 그는 물기어린 눈가를 닦으며 제게

 

사람이 답답해도 정도가 있어야지. 왜 이리 바보같이 구냐! 넌 진짜......”

하하...... 미안해요.”

애는 괜찮아. 어디 사는 머저리가 대신 두들겨 맞아준 덕에 뼛조각 하나 안 부러졌다.”

“.......다행이네요.”

다행? 또라이도 이런 또라이가 없구먼. 너 지금 견적이 얼마가 나온지 알기나 해?”

어쩔 수 없었어요.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알아서 움직여버린걸요.”

......”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지청구를 한참동안 늘어놓았습니다.

 

 

 

 

 

 

 

Channel 1. 로키

 

1624912

 

알 샤인의 말대로, 48시간이 다 하기 전에 구속영장이 발부되었고, 붙잡힌 PBRC놈들은 그대로 구속이 되었다. 우리는 그날 이후로 검찰청 로비가 닳아지도록 드나들었다. 사건의 당사자이자, 중요 참고인이기 때문에 조사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중요 참고인이어도 나름 급이 있어서인지, 당시 현장에 없었던 나와 리겔은 간단한 부재증명을 하는 것으로 끝이 났지만, 답답이와 주설은 현장에 있었기 때문에 사정청취를 위해 더 오래, 그리고 더 자주 불려다녔다.

 

답답이와 주설의 말에 따르면, 의외로 알 샤인과 마주치지는 않았다고 한다. 아무래도 필그림들을 호위하는 임무가 그에게 부여되어있기도 했고, 사건의 후반부에 그가 개입한 것이 다였기 때문이기도 했다고 한다. 알 샤인의 흔적은 검사가 그들에게 말했던 알 샤인 경사에 따르면......’에서나 찾을 수 있을 정도였다고.

 

얄 샤인도 이것저것 증언을 한 모양이었지만, 그것에 대해선 일절 말을 아꼈다. 하지만 사람은 언어를 사용해서만 말을 하는건 아니지. 그의 근무 태도나, 우리를 대하는 태도는 언어를 빌지 않고도 우리에게 많은 메시지를 던졌다.

PBRC의 준동은 확연이 줄어들었고, 그것은 그로 하여금 우리를 호위하는 것에 몰두하는 정도를 가볍게 만들었다. 초기에는 빡빡하다 싶을 정도로 우리에게 붙어 다녔지만, 요즘은 조퇴를 쓰거나, 외출을 하는 등, 비교적 유연하게 근무를 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나름 업무강도가 줄어든 셈이지만, 그것이 무색하도록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다.

 

물론 녀석의 입으로 그런 이유를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 이유를 설명해 주는 다른 소스들은 넘쳐났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이거 사태가 요상허게 돌아가는거 같은디?”

?”

안나, 줘 볼 테니 읽어봐라.”

 

리겔이 건넨 신문은 탑 제목에는 미궁에 빠진 수사, 진짜 실세는?’이라는 글자가 큼지막하게 적혀있고, 사진부분은 이례적으로 대형 물음표가 자리잡고 있었다. 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이번 일로 PBRC의 수뇌부가 대거 체포되긴 했지만, 실권을 가진 리더, 즉 실세는 체포망을 교묘하게 빠져나갔다는 것이다.

 

그거야 체포된 놈들 적당히 주무르면 대충 견적 나오겠지 뭐.”

아따, 징허게 악셀 때려 밟는구마잉. 쫌 더 읽어보씨요.”

 

그의 지청구에 기사를 더 읽어내려가니, 정말 사진그대로 대형 물음표가 내 머리위에 떠올랐다. 수사팀에서 피의자들에게 실세에 대한 조사를 해보니, 오히려 사안이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는 것이다. 실세에 대한 수뇌부들의 증언이 완전히 엇갈렸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거대한 덩치를 가졌다고 주장했지만, 한편으론 보통체격이나, 그 이하의 왜소한 체격의 인물이라고도 했다. 심지어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여부도 엇갈렸다고 한다. 그나마 이 중구난방으로 퍼져나가는 주장들에게서 공통점을 기적적으로 찾는다면, 그 실세라는 작자가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어서 실제 얼굴을 본 이는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뭔 만능가면이여? 그것만 뒤집어쓰면 크기고 성별이고 죄다 뒤죽박죽이 되게?”

기사를 보아하니, 구속시키는 것도 일정 기간이 있는 모양인가 본데 큰일이야. 기사 내용이 맞다면 구속 기한은 14일 밖에 안된다는데? 이러다가 간신히 잡은 놈들을 속절없이 풀어줘야 할 판이다.”

지미,..... 허여멀건헌 넘이 법 타령을 존나게 혀 쌀 때 눈치를 까야 썼는디......”

근데 구속기간이 끝나면 어떻게 되는거지?”

 

 

 

 

 

 

 

Channel 2. 아이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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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되긴 뭘 어떡혀유. 그냥 풀어주고 재판 받게 허는거쥬.”

 

주설씨는 그것도 모르냐는 얼굴로 저를 바라봤습니다. 저를 바보 같다는 시선으로 보는 그녀의 손에서는 샌드위치의 내용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입가엔 소스가 잔뜩 묻어있었어요.

 

조심해요.”

아이고 이런...... 손이 한 짝 뿐이라.”

 

저는 그녀의 손에 달라붙은 소스와 채소를 떼어주고, 소스로 허옇게 뜬 그녀의 입가를 닦아주었어요.

 

풀어주고 재판을 받는다고 하면...... 어떤 바보가 재판에 나오려고 하겠어요?”

...... 정신 똑바로 박힌 놈이믄 나오긴 나올걸유? 피의자가 재판에 안나온다는건 지 방어권을 포기헌다구 허는 거거든유.”

방어권이라...... 그게 뭔데요?”

방어권이 별거겄슈? 나는 죄가 없다는 걸 증명할 권리를 말허는거쥬. 인생사 셀픈디 지 밥그릇 지가 챙기는거 아니겄어유? 안나오믄 지만 손해니께 결국은 나올 수 밖어 없는거쥬.”

근데 그건 정신이 똑바로 박힌 사람에 해당되는 거 아니에요?”

뭐 시한부 선고 받았다그나, 아님 대그빡 굴려두 좆된게 확실허다 허믄...... 안 나올 수도 있겄네유. 다만.”

다만?”

공소를 유지혀야 하는 검사들은...... 쪼깐 쫄리긴 허겄네유. 까딱하다간 개망신 당하게 생겼는디.”

검사들이요?”

. 안그러겄슈? 글겅이질 헌다고 혔는디 잡아 노니까 죄다 즈그 주인도 못알아보는 피래미들 아녀유. 그 바람에 실세란 넘은 특정도 못혀서 법정에는 넣지도 못 헐거구. 오매, 양반은 못되네.”

 

우릴 향해 다가오는 알 샤인씨를 발견한 그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습니다. 그녀는 손에 들린 샌드위치를 집어던지고 후다닥 냅킨으로 자신의 얼굴을 닦았어요.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이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와...... 어긋나버리는 알 샤인씨의 파편화된 행보가 안타까운 콜라보를 이루는 것 같았어요.

 

조사는 잘 마치고 오셨습니까?”

아 네 뭐......”

 

알 샤인씨는 주섬주섬 서류더미를 서류가방에 쑤셔박으면서 피곤한 웃음을 지어보였습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지독한 격무에 시달리고 있는 모양이었어요.

 

“The Cloud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아녀유. 보아허니 나쁜 넘들 잡아가둘라고 정신 없는거 같은디 지들끼리 알아서 갈게유.”

그래도......”

그리고, 기사단 분들의 도움 덕택에 요샌 PBRC넘덜도 함부로 까부질 않으니 호위 없어도 되유. 당분간은 나쁜넘덜 뿌리 뽑는데 집중해 주셔유.”

 

따뜻해 보이지만, 차가운 선을 그어버리는 그녀의 의중을 알아차린 걸까요? 자신의 행동이 인정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을 듣는 알 샤인씨의 얼굴은 시들한 푸성귀 같았습니다. 그는 조그맣게 조심해서 가세요.’라고 주억거리곤 우리에게서 서서히 멀어졌습니다.

 

너무 차갑게 대하는거 아니에요?”

..... 이정도 밀어놔야, 오기가 생겨서라두 아득바득 땡길라 그러지 않겄어유? 기사단 내근직을 고스톱으로 딴게 아니라믄 그 정도 악바리는 있어야쥬.”

 

 

 

 

 

 

 

Channel 1. 로키

 

리겔이 준 기사를 찬찬이 읽어내려가다보니, 며칠사이에 여론의 방향이 확실히 바뀌긴 바뀌었다는걸 느꼈다. PBRC의 악행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기사에 조차도 중간중간 아니 이놈들이?’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그들의 입장을 옹호하는 뉘앙스의 내용이 교묘하게 들어가 있었다면, 요사이 언론에서는 PBRC는 무저갱 속에서 영원히 불타올라도 성이 차지 않을 천하의 잡놈이 되어있었다. 그들의 입장에선 쓸모있는 장난감이 망가진 셈인 모양인가보지? 이민자들에 대한 은근한 증오를 조장하는 기사들은 점차 잦아들고, 그 빈자리를 경제정치문제가 대신해나갔다.

 

광기의 폭풍이 잦아들고, 점차 정상을 찾아가는 셈이지. ‘그들로서는 아쉬운 상황일 것이다. 혼란중에 장난질을 치는건 그들의 특기니까. 하지만 어딜가도 또라이는 존재하기 마련이다.

 

워매, 그놈새끼가 또 다시 일을 쳤어야?”

가면살인마?”

..... 이놈시키 한동안은 잠잠 하드만..... PBRC가 조용하니께 역주행을 허고 지랄이네.”

 

또라이 일정량 보존의 법칙이 있지. 어딜 가도 또라이는 존재하고, 그걸 피해서 다른 곳으로 가도, 거기에도 또 다른 또라이가 또아리를 틀고 있다. 만약, 새로운 곳에 갔을 때 또라이의 그림자도 비치지 않는다면? 자기 자신이 또라이라는 것......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 만큼이나 시대를 관통하는 이 법칙을 저 자식은 몸으로 증명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번 활동을 지켜보노라니...... 뭔가 이전과는 다른 뉘앙스가 느껴졌다. 이제까지 읽어본 기사에 따르면, 녀석은 쾌락 살인마의 범주에 속한다. 쾌락이라는 단어가 붙어서 마약쟁이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겠는데, 쾌락도 나름 수준이 있거든. 이놈은...... 뭐랄까 플라토닉한 쾌락을 추구하는 것 같았다. 왜 그런 생각을 하냐고? 내가 지켜봤을 때 이놈은 나름의 기준이 있는지, 범행을 하는 일시와 장소, 대상이 일정했다. 시간과 장소 그리고 대상이 맞는 놈들만 죽여왔거든 이런 놈들은 살인을 뭐랄까...... ‘건물을 짓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미적 기준에 따라서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올리는 것. 그래서 답답이와 대화를 나누면서 반쯤 장난으로 녀석의 모습을 프로파일링 해 봤을 때, ‘철저히 계획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왕도의 성벽만큼이나, 면도칼 하나 들어갈 틈 없는 철두철미한 타입...... 그래서 답답이가 거리의 아이들을 동원해서 가면 살인마를 추격할 때 잡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근데 이번은 좀 달랐다.

 

그려? 난 잘 몰겄는디? 그냥 사람 아무나 잡아 죽이는거 아녀?”

. 그점이 이전과는 다르다는거다. 이전에는 나름의 기준이 있었거든. 살해 시각, 살해 장소, 살해 대상이 정해져있었어. 근데 요사이 벌어지는 일을 보면....... 뭔가 중구난방하단 말이야. 마치......”

되는대로 죽여 버린다?”

또는 화풀이라도 하듯이.”

...... 완전 미친놈아녀?”

원래 미친놈이었어. 예전엔 100정도 미쳤다면 지금은 한...... 115정도?”

신문 읽고 있었냐?”

 

주설이 우리의 대화에 끼어들면서 의자에 몸을 뉘였다. 꽤 오랜시간 조사를 받고 왔지만, 녀석의 얼굴은 퍽 밝아보였다.

 

인자 넘덜도 정리됐겄다. 사업혀야지.”

 

 

 

 

 

 

 

Channel 2. 아이리스

 

주설씨는 전략을 새로 수정해야 한다는걸 인정했습니다. PBRC와 기사단의 대립구도속에서 우리의 이득을 취하고자 하는게 이전의 전략이었다면, 지금의 상황은 그런 전략을 수행하기 어려워졌잖아요. 대립을 하기도 전에 PBRC는 자신의 목을 졸라버리는 멍청한 짓을 택해버렸고, 둘은 대립을 하기 어려울 정도로 역학관계가 허물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데에는, 로키군이 기사단에 잠입해 들어갔을 때, 기사단 창고에서 기사단의 유품을 찾지 못한 것도 한 몫을 했습니다. 이해하기 어렵지만, 기사단에는 기사단의 유품이 없는거에요.

 

인자는 기사단에 볼 일이 없는거지. 이전엔 두 마리 토깽이를 동시에 잡을라고 혔다믄...... 인자는 우덜이 잡을 수 있는 토깽이 한 마리라도 잡아야겄어.”

그래서 무슨 사업을 할거에요? 백화점 사업을 계속 할거죠?”

아녀유. 로스차일드씨 야그도 있고 허니, 굳이 구매력 적은디서 백화점 사업을 하는건 에런거 같어유 대신에.”

 

그녀가 꺼내든 새로운 카드는 공원이었어요. 의외의 카드에 우리 모두 어안이 벙벙해졌습니다.

 

공원.....? 너무 뜬금없는 거 아녀 주사장?”

공원은 공원인디, ..... 이제까지 알던거랑은 종류가 쪼깐 달러.”

 

그녀가 생각한 공원은 이랬어요. 걷고, 구경하고, 앉아서 쉬는 공원이 아니라 체험하는 공원을 만들자는 거였어요. 체험하는 공원.....? 그게 뭘까요?

 

일종의 주제를 정해놓고, 거기에 따라서 체험하는 장소를 마련허는거쥬.”

뭔가 흥미롭긴 한데. 뭘 체험시킬지 대 주제는 정해놨냐?”

. 정해놨지. 라스알하게의 문화를 주제로 헐겨.”

“.......?”

생각혀봐라. 요 며칠사이에 신문덜이 뭘로 두달 가까이 짖어댔는지.”

“PBRC.”

“PBRC만 찌껄인게 아니지. 갸들이 누구를 괴롭혔냐? 우리 라스알하게계 이민자덜을 괴롭힌거 아녀. 요 두 달간으로 여그 왕도에선 라스알하게를 모르는 넘덜이 한명도 없게 되어버렸다 이거여. 시상에 이런 어마어마한 광고효과가 어디있겄냐?”

 

완전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그래도 그 말을 곱씹다보니 일리가 있기는 해요. 그녀는 완전 역발상으로 문제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범인의 눈으로는 잡아내지 못하는 부분을 그녀의 눈은 잡아챈 것입니다.

 

“PBRC건으로 왕도 사람덜은 우리 운터브룩 사람들에 대해서는 크든 작든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을거라 이거여. 불의가 판치는걸 눈 감아버린거 아녀. 이때 그들헌티 면죄부를 주는거지. 와서, 돈 쓰는거. 그거만큼 간단한 속죄가 어디있겄냐.”

...... 솔직히 기발한 접근방법이란건 부정할 수 없지만, 한철장사로 끝나는거 아냐?”

거서 중요헌 것이 체험 내용이여. 일단 속죄허는 맴으로 왔다마는, 생각보다 재미있으면 어쩌겄냐? 또 오고싶게 맹그는건 우리 일인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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