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nnel 1. 로키
1624년 10월 16일
주설은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지만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2주가 흘렀다. 아마 오늘은 그녀의 고민이 어떤 식으로든 마침표를 찍게 되는 날이리라.
‘필그림’들은 의복을 갖춰 입고 방청석에 앉았다. 검사들과 피고인, 그리고 변호인들 역시 각자 지정된 자리에 앉아 판사의 입장을 기다렸다.
“판사님께서 입장하십니다.”
법정 경위의 말에 따라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판사는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을 했다만 피곤한 기색은 숨길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일이 때문에 판사를 두고 라스알게티 전체가 두 패로 갈라졌거든. 내가 인식할 수 있는 범위에선 PBRC에 대해선 부정적인 여론이 압도적이었지만, 그건 내가 ‘인식할 수 있는 범위’내에서 일 뿐이고..... 라스알게티 전체가 그렇다고 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운터브룩에 불을 지르는 만행에도 불구하고, 그 버러지들을 지지하는 쪽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여론에게 뭇매를 맞자, 악에 받쳐서 더욱 난장을 피웠다고나 할까? 그들은 1심 예비 공판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북부지원 앞에서 살다시피 하며 시위를 이어나갔다. 그러자 그 반작용으로 PBRC를 반대하는 집단에서도 반대 시위를 벌이더군.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상반된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대치를 이루는 기묘한 풍경이 요 2주간 이어졌다. 그래서일까? 법무아문에선 해당 판사에게 신속한 판결을 내릴 것을 요청하는 기자회견을 열기까지 했다.
이를 두고 행정부가 사법부에 압박을 가했다는 비판이 들끓었지만, 나는 그것을 나쁘게 보진 않았다. 오히려 행정부가 사법부에게 자구책을 던져줬다 생각한다. 매도 먼저 맞는게 낫다고, 시간을 질질 끈다고 해서 여론이 잠잠해지기를 바라는 건 어려웠다. 그러기는커녕, 더욱 압박이 심해질 게 분명했지. 언론들이 죄다 약이라도 빨았는지 연일 그것에 대해 보도해댔거든.
살다 살다 신문의 내용이 이렇게 천편일률적이면서도 단조로워진 건 처음이었다. 인구가 백만을 넘는 이 거대한 도시에서 별에 별 일이 일어날 테지만, 이 거대한 담론 앞에서는 모두들 힘을 잃고 뒷방에 찌그러졌다. 어느 시니컬한 사람의 말에 따른다면 이슈가 이슈를 잡아먹어버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입 가진 이들이라면 누구라 할 것 없이 신문을 놓아두고 PBRC재판에 대해 이야기 했지만 그 외의 이슈에 대해선 다들 입을 다물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노라니...... 라스알하게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사실조차도 잊어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런 상황을 타개하려면...... 판사가 어느 쪽 편의 손을 들어주든 간에, 하루빨리 결론을 내려주는 것 외엔 해결책이 없어보였다. 그리고 그것이 판사 개인으로서도, 그리고 이 도시 공동체 전부에게도 이익이지 않았을까 싶다.
“앉아주십시오.”
판사가 착석하자 경위는 우리에게 앉을 것을 이야기했고, 우리는 그에 따랐다. 판사는 서류철을 뒤져 판결문을 꺼냈다. 멀리서 얼핏 보아도 그것은 잔뜩 구겨지고 때가 탔었다. 밝은 조명이 그것을 비추는 바람에, 판결문의 윤곽이 보였는데, 거기엔 각종 수정기호가 잔뜩 붙어있었다. 선고 당일에 판결문을 고쳐야 할 정도로, 그에게는 이번 재판이 얼마나 큰 압박이 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부터 1624 고단 2602 특수 폭행사건에 대한 선고를 시작하겠습니다.”
안 그래도 정숙했던 재판정에 긴장감까지 끼얹어졌다. 답답이는 식은땀을 흘렸고, 나는 말 대신, 그녀의 뒷덜미에 흐르는 땀을 손수건으로 닦아주었다.
“피고인 데네브는 1624년 8월 31일 블라우 브룩에서 인종차별 집회를 하는 도중, 에바 테펠리나를 집단으로 폭행하였다고 검사측에서 주장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에바 테펠리나에 대한 집단 폭행이 이루어졌다는 증거, 또는 증인을 검사측에서는 제시하였으나, 증인이 증언을 번복하는 일로 인하여, 신빙성이 탄핵받았습니다. 한편 재판 중 피고인의 폭로로 인해, 검찰과 기사단이 심문과정에서 억압적인 수단을 사용하였음이 밝혀져, 심문조서 역시 증거로서 효력을 상실하였습니다. 따라서, 에바 테펠리나의 전치 10주의 부상이 실제로 집단 폭행에 의한 것인지, 혹은 단순이 시위중에 일어난 사고인 것인지를 명확히 판단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형법 제 261조의 ‘특수폭행’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답답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녀의 손에는 땀이 흥건했고,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또한, 변호인 측에서 제시한 이제까지 PBRC라는 단체에서 주관한 시위들의 사례들을 보았을 때, 이들의 시위가 ‘인종차별’이라는 반사회적인 기치를 내세웠음은 인정하나, 폭력적인 수단을 사용하여 공공의 안녕과 질서에 직접적인 위협을 끼칠 가능성이 명확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5조 2항의 ‘집회 및 시위의 금지’는 성립할 수 없습니다.”
내 손을 잡은 답답이의 손의 떨림이 점점 커졌다. 나는 그녀를 슬쩍 바라봤다. 그녀는 어금니를 꽉 물고 있었다.
“한편, 이들의 시위로 인해 ‘The Cloud’의 시설 및 집기 일부의 파손의 경우에는 검사측에서 제시한 증거가 인정받았습니다. 다만, 형법 제 366조의 ‘재물손괴’, 형법 제 368조의 ‘특수손괴’ 형법 제 369조의 ‘중손괴’의 경우에는 하나의 행위로 인해 발생한 ‘상상적 경합’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형법 제 40조 ‘상상적 경합’에 의거하여, 세 개의 조항 중 가장 중한 죄에서 정한 형으로 처벌해야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피고인이 형사처벌 경험이 없는 초범이라는 점, 그리고 피고인이 깊이 반성하고 있다는 점이 참작되어 감형의 요소가 되었습니다. 주문하겠습니다. 본 재판부는 피고인 데네브를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한다.”
선고가 끝나자마자, 고요하던 재판정이 순식간에 시끄러워졌다. 법정 경위는 일어나서 사람들을 진정시키는 동안, 판사는 도망치듯 재판정을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리겔의 입에서......
“이런 개새끼들!”
욕설이 터져나왔다.
Channel 2. 아이리스
1624년 10월 16일
‘필그림’들은 침통한 얼굴로 법정 밖으로 나왔습니다. 진짜로 얻어맞은 것은 아니지만...... 뒤통수가 계속해서 얼얼한 것 같았어요. 이게...... 가능한 일인가요?
마음은 침통했지만, 세상은 그런것에 큰 관심이 없었던 모양이었습니다. 법원 밖에서는 PBRC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환호성과 ‘우리는 승리했다.’라는 피켓이 넘실거리고 있었거든요. 누군가의 불행이...... 누군가에겐 행복이 되는 것이 세상사라지만...... 그 문장의 잔혹성을 저는 온몸으로 받아내야만 했습니다.
안그래도 귀가 먹먹해지는 환호였지만, 저희 뒤로 데네브가 걸어나오자, 사람들의 환호성은 더욱 커졌어요. 뭐랄까..... 이곳 일대가 터져 버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고 할까요? 데네브는 사람들을 향해 손가락으로 브이 표시를 해 보였고,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습니다. 그래요...... 그는 우리의 패배를 딛고 승리를 쟁취한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저희를 걱정해주시는 분들이 이렇게 많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데네브! 데네브! 데네브! 데네브!”
“감사합니다. 오늘 같이 날이 쌀쌀한데도 이렇게 모이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데네브! 데네브! 데네브! 데네브!”
“법과 정의는 승리했습니다. 사회도 우리의 투쟁을 인정해 줄 것입니다! 이 사회를 맑고 깨끗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 도시에 빌붙어 살아가는 악한 해충들을 우리는 더 이상 참고 넘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데네브! 데네브! 데네브! 데네브!”
“아 그러고보니, 지금 저기에 그들이 보이는군요. 너무 뭐라고 하진 맙시다! 오늘같이 기쁜 날 승자로서 배려는 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의 조롱에 사람들은 웃음을 터뜨렸고, 그들은 우리를 토닥여주었습니다. 정말...... 지옥에 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의 신념이 짓밟히고 모욕당하는 이 상황에서 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마치 죄인처럼 황급히 이곳을 떠나는 것 밖에 할 수 없는 현실...... 마치 2000여 년 전, ‘아드님’이 자신을 올려다보며 비웃던 사람들 속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엘리 엘리 사박다니’라고 비통하게 외쳐야 했던 것이 시간이 지나 저에게 그대로 오버랩 되는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비웃음과 조롱을 뒤로한 채 법원 정문을 나서려는데 알 샤인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10월 중순이라는 계절이 무색할 정도로 땀을 흘리고 있었어요. 지금의 판결에 그도 큰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나 봐요. 그는 더듬거리며 ‘이건 1심 판결에 지나지 않는다. 검사가 항소를 한다고 했으니, 2심에선 분명 실형을 받을 것이다.’라는 요지의 말을 하려고 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말을 끝마칠 수 없었어요. 2심이라는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리겔이 그를 무지막지한 힘으로 후려갈겨버렸거든요.
“2심? 좆까는 소리 헌다.”
리겔은 씩씩거리며 가버리고, 로키군도 그 뒤를 따랐습니다. 주설씨는 그에게 뭐라도 말을 걸어야 하나 하고 머뭇거리다...... 결국 그를 외면하는 것을 선택하고, 마지막으로 저만 남았네요. 저는....... 그를 부축해 주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제가 대신 사과할게요. 다들 너무나 흥분한 상태라.......”
“.......아닙니다. 사실 잘못은 법에 있는 거에요. 99명의 죄인은 놓쳐도 1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지 않겠다는 사법의 대 원칙 때문에...... 방금 한 명의 죄인을 눈앞에서 놓쳐버린 거겠죠. 죄송합니다. 저희가 더 잘 수사하고, 꼬투리 잡히지 않게 했어야 했는데......”
“저는 잘 할 거라고 믿어요. 물론 나머지 사람들도 지금은 흥분했지만 머리를 식히면 분명......”
“그래요 분명 이해해 줄 날이 오겠죠. 하지만 오늘 일은...... 저희 책임이 큽니다. 죄송해요......죄송해요.....”
연신 미안하다는 말을 주억거리는 그를 보면서....... 아직은 희망이 남아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사람이라면, 분명 진실을 밝힐 수 있겠죠. 지금은 그들이 승리했지만......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고, 거짓은 진실을 가릴 수 없듯이....... 인내하고 노력하면 언젠가는......
저는 알 샤인씨와 헤어지고 ‘필그림’들과 합류했습니다. 구트 그라스에서 블라우 브룩까지 이어지는 여정에도 우리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두 한 번은 믿어볼라구 혔는데...... 인자는 안되겄다.”
“어쩌려구요?”
“하샤신 허구...... 계약서 작성 혀야쥬.”
“그게...... 최선이에요? 한 번 더 그들을 믿어야 하는거 아닐까요? 검사도 항소 했잖아요.”
“법은...... 너무 느려유. 그 느려터진 발로는 날아댕기는 나쁜 자석덜을 죄다 놓치고 말거유. 괴물을 잡을라믄....... 괴물이 되는 수 밖에 없어유.”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The Cloud’로 토라가 들어왔습니다. 그녀는 짐짓 안타까운 척 했지만...... 얼굴과 목소리와는 달리, 그녀의 몸가짐은 더없이 기쁜 기색을 숨기지 않고 있었습니다.
“소식 들었어요. 결국은 일이 그렇게 되어버렸군요.”
“법이란걸론 해결이 안 되는 일이 많은 거 같네유.”
“그 빈 공간을 메우는게 바로 ‘우리’죠. 사람이 어떻게 평생을 착하게 살기만 할 수 있겠어요? 가끔은 나쁜 일도 하고 그런거지. 더러운 일은 우리에게 맡기시고. 주설님은 영광만 취하면 되는겁니다.”
“그려두...... 막상 일을 치를라니 쪼깐 망설여지긴 허네유.”
“아무래도 ‘우리’랑 거래를 하는데 심리적 저항이 없을 순 없겠죠. 거칠고 사납다고 알려져 있으니...... 하지만 ‘우리’는 대륙 그 어느 누구보다도 이성적이에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어떤 수단을 사용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적절하게 사용하거든요. 일단 한 번 써 보시죠. 뒤탈 걱정이 있다면 걱정 마시고요. 저희는 마음만 먹는다면, 애초에 존재조차 하지 않게 만들 수 있습니다.”
“.......”
주설씨는 토라의 이야기를 듣고는 이마를 짚어 한참동안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리고.
“계약서 가지고 오셨쥬? 도장 찍쥬.”
Channel 1. 로키
토라는 도장 찍힌 계약서를 확인한 뒤에 누가 훔쳐갈 새라 서류철에 얼른 챙겨 넣었다. 그녀는 주설과 악수를 나누었다.
“서로 돕고 함께 성장합시다.”
“......잘 부탁드려유.”
“아 그리고 이거.”
주설은 그녀에게 명함을 건네주었다. 그 모습을 보노라니, 몇 달 전 스테반 로스차일드가 그녀에게 명함을 주던 것이 겹쳐 보이는 듯 했다.
“이건 ‘우리’의 VIP고객들께 드리는 거에요. ‘우리’와 접촉해야 할 일이 있으면, 어느 도시에 가셔도 이 명함을 보여드리면 됩니다. 이쑤시개부터 유통망까지 ‘우리’가 드릴 수 있는 모든 것을 제공 받으실 수 있을 거에요.”
“사은품 치곤 지법 과분한 거 같은디......”
“그러니까 VIP고객용인 거겠죠?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아 그리고 첫 의뢰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뻔한 질문이었지만, 그래도 명시적으로 받는 것이 낫겠다는 듯, 그녀는 주설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녀로서는 명확히 한다고 던졌지만, 주설에겐 그 질문을 받은 것이 가장 고민이 되는 부분이었나 보다. 마음은 굳게 먹었다지만, 막상 그 마음을 현실로 이루어내야 한다는 것이..... 그리고 그것이 그녀의 말 한마디면 된다는 것이 그녀의 마음에 저항감을 일으키는 모양이었다.
“그...... 그넘덜.”
“아 예. PBRC들 말씀이신거죠?”
“대장 넘을 잡아다가 열루 델구 오실 수 있어유?”
“오...... 데리고 온다고요? 살려서요?”
“잉...... 그넘 대갈빡은 지가 직접 조져야겄어유.”
“아무래도 거대 집단의 리더를 데리고 와야 하는 만큼, 저항이 만만치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럼 나머지는......”
“잉. 죽이든 살리든 맴대루 혀유.”
“알겠습니다. 고객님. 조금 건방지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여기서 제언 하나 드려도 될까요?”
“제언......?”
“네, 아무래도 이곳으로 데리고 와서 단죄를 할 시엔 이곳에 그들의 더러운 피가 묻게 될테니..... 저희가 잔챙이들을 정리하고, 대장만 남겨두겠습니다. 그곳에 가셔서 직접 처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여러모로 그림이 그편이 더 나을 것 같은데요.”
“.......”
주설은 골똘이 토라의 말을 곱씹었다. 그리고
“좋아유. 그렇게 혀유.”
Channel 2. 아이리스
토라가 돌아간 지 한참이 지났지만, 주설씨는 한참동안 웃음기 없이 창문을 바라보기만 했어요. 몸도 마음도 완전히 지쳐버렸지만...... 우리 ‘사장님’이 저렇게 번민에 잠겨있으니, 마음놓고 쉴 수도 없는 노릇이었지요. ‘말 할 수 없는 고역’이 이런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쩌그 주사장. 일단은 우덜도 죄다 지쳤으니께, 쪼깐 쉬는 것이 어쩌겄소?”
“잉......? 아 그려. 얼렁 가서들 셔.”
“아따, 명함 몇장 받드만, 사장 다 되브렀네잉. 시상에 어떤 정신 빠진 것덜이 사장이 얼굴 찌푸린채루 버티고 앉았는디, 니는 고민해라 나는 쉬것네 하것소?”
“나는 신경 쓰지 말구...... 그냥 쉬어유.”
그녀가 우리를 향해 손사래를 치자, 리겔은 머리를 벅벅 긁더니 ‘에라 모르겠다.’하며 자기 방으로 올라가버렸어요. 저와 로키군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다가, 이때다 싶을 때에 응접실 밖으로 나갔습니다.
“고생 많았다. 별 일이 다 있었지?”
“아니에요...... 그냥 마음에 남아있던 빚들을 이번 기회에 모두 청산한 것 같이 후련한걸요?”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르겠다...... 참 세상 일 모를 노릇이군. 얼굴 붉히고 떠난 이들과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로키군은 머리를 절레절레 젓고는, 제게 얼른 올라가서 씻으라 하곤, 그 역시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어요. 리겔이 그러했듯이, 그도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올라갔습니다.
저도 응접실 문앞에서 마냥 궁상떨 수만은 없었던 터라, 방에 올라가 옷을 갈아입고 씻으러 욕탕에 들어갔어요. 뜨뜻한 물에 몸을 담그니 온몸이 노곤노곤해졌습니다. 하아...... 오늘 재판만 잘 됐다면 노래라도 흥얼거릴 수 있을 것 같이 온도가 좋았는데 말이죠...... 아쉬움이 참 커요. 주설씨가 번민에 찬 눈으로 창밖을 바라봤던 게 조금은 이해가 되려고 합니다. 판사의 판결이 머릿속에 맴돌고 있을거에요. 그리고...... 불안감이 들었겠죠. ‘홧김에 지르긴 했지만, 하샤신과 손을 잡는 게 맞는 걸까?’ 하고요.
주설씨의 번민에 대해 생각을 하노라니, 또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어요. 알 샤인씨죠. 리겔의 무지막지한 주먹에 얻어맞고도 그는 한 마디도 하지 못했습니다. 주설씨가 번민하고 있다면...... 알 샤인씨는 자책하고 있겠죠. ‘자기가 조사를 제대로 했더라면......’하고 말입니다.
두 사람은 조금 닮은 구석이 있어요. 나름의 이상이 있고, 그걸 이루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지만..... 뜻밖에 시련을 만나, 그 이상에 상처를 입었다는 거에요. 주설씨는 홧김에 저지르긴 했지만,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 자신의 이상을 꺾어버리는 행동을 선택 했다면...... 알 샤인씨는 어떤 행동을 선택하고 있을까요?
Channel 1. 로키
1624년 10월 17일
다음날이 되었지만, 주설은 여전히 꽁한 얼굴 근육을 풀 생각은 전혀 없어보였다. 리겔이 얼러도 보고, 목청 높여 뭐라고 해보기도 했지만, 주설은 그러거나 말거나 망부석처럼 창밖을 바라보기만 했다. 결국 리겔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프라이를 우걱우걱 씹었다.
“니미 아조 쇠고집도 저런 쇠고집은 첨 보는 구만.”
“시장이 반찬이라고 저러다가 말거야.”
나의 장담이 무색해지게, 그녀는 음식에 손도 대지 않았다. 그녀의 이마 오른편을 노랗게 물들이던 햇살은, 정 가운데를 지나, 왼편을 붉게 물들이는 동안, 주설은 단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다. ‘저대로 죽은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말 다했지 뭐.
“아따 쫌 묵어야!”
“......”
그 와중에 지극정성인건 리겔 뿐이었다. 그는 더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그녀를 질질 끌고 와서 어거지로 의자에 앉히고는 스푼에 담긴 스프를 그녀의 입에 들이밀었다. 주설은 완강히 입을 열지 않으려했지만, 하루를 꼴딱 굶은 그녀와, 애초에 근육질의 몸을 가진 그 사이에는 완력 상 큰 차이가 있었다. 녀석은 그녀의 입을 억지로 벌리더니 그대로 스프를 입에 쑤셔넣었다. 주설은 사래가 들었는지 콜록콜록 기침을 했다.
“좀 내비 둬!”
“내비 두긴 지미.”
녀석은 다소 거칠다를 넘어서, 과격하게 주설의 입에 먹을 것을 억지로 우겨넣었다. 결국 녀석의 성화를 이기지 못한 주설의 먹을 걸로 가득찬 입에서 ‘내가 알아서 먹을라니까 그만 좀 내비 두쇼!’라는 말이 나오고서야 이 촌극에 끝이 났다.
“아오..... 사장 다루기를 이렇게 억척스럽게 허는 넘은 너밖에 없을거여.”
“어쩌겄는가? 그럼 신주단주 뫼시듯 허다 굶겨 죽이라고야?”
주설은 자신을 노려보는 리겔 덕분에 꼼짝도 못하고 밥을 먹어야만 했다. 녀석은 주설이 마지막 스프 한 방울까지 싹싹 비우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세모눈을 풀고 그릇을 치웠다.
“고맙구먼.”
“고용인 헐 일 혔네. 글고 꽁짠줄 알았소? 자네가 나헌티 일 갈켜준다고 하지 않았는가? 아직 부기는 띠도 않헜구먼 선상님이 숟가락 놀라브먼 쓰것소.”
공연이 딴청을 피우는 리겔의 말에 주설은...... 쓴 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말에 자신이 발목잡히는 상황이 적잖이 우스웠던 모양이었다.
“언젠간 존날이 오갔지?”
“잉...... 조은날 오갔제.”
Channel 2. 아이리스
1624년 10월 17일
하루를 꼬박 굶은 주설씨는 첫 끼니를 떼자마자 혼곤의 잠에 빠져버렸고, 우리는 그녀의 잠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밖으로 나왔습니다. 하늘은 벌써 낙조로 붉게 물들어있었어요.
“의외로 지극정성이다? 너?”
“.......”
로키군의 반쯤 놀리는 듯한 지적에 리겔은 담배를 물곤 딴청을 피웠습니다. 주설씨에 대한 알 샤인씨의 마음을 아는 저로선, 조금은 착잡하지만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어요. 안 그래도 꼬일 대로 꼬인 알 샤인씨의 연애전선에 먹구름이 더 드리워지는 건 아니겠죠? 리겔은 집요하게 파고드는 로키군의 공세를 더는 회피할 도리가 없었는지 담배에 불을 붙이곤 연기를 뿜으며 말했어요.
“연정은 지미. 은혜도 못 갚냐?”
“은혜라....... 이미 그런 말로 포장하기엔 너무 멀리 와버린 것 같은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돌부처 찜쩌묵을 넘이...... 나대덜 말어.”
“야 이거 봤냐? 이 새끼 완전히 얼굴이 뻘겋게 익었는데?”
로키군은 리겔을 가리키며 낄낄거렸습니다. 와...... 주설씨를 놓고 벌어지는 미묘한 신경전은 둘째 치더라도, 로키군이 그런 표정을 짓는다는 것에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칭찬이 고래를 춤추게 만든다는 것은 들어봤어도, 남녀간의 미묘한 감정선이 ‘하샤신’을 낄낄거리게 만든다는 것은 들어본 바가 없었는데...... 이래서 ‘아드님’이 공생애 동안 ‘사랑의 놀라움’에 대해서 입안이 깔깔해지도록 말씀하셨나 봅니다.
리겔은 로키군 말마따나 정말로 얼굴이 새빨개졌습니다. 홍당무가 형님한다는 진부한 소리로는 그의 얼굴 상태를 묘사할 길이 없네요. 음..... 그래요, 누가 보면 얼굴에서 피가 난다고 기겁할 지도 모르겠어요. 그런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큼 그의 얼굴은 검붉게 물들어갔습니다.
“아따, 말을 허먼 좀 들어라. 나가 까놓고 야그혀서 주사장 안 만났음, 여그서 요로코롬 크피 한잔 찌끌일 수 있겄냐? 모래바람 쳐 맞아감스로 사람들이나 줘 패고 앉았겄제. 그런 나를 갖다가 사람 맹글라고 여그까지 공짜로 델고 온 은인인디 나가 맘을 품겄냐?”
“.......그래 계속 이야기 해봐라.”
“나가 주사장을 위해서 헐 수 있는거는...... 얼렁 일 배워서 독립허는거 말구 있겄냐? 까놓구 야그혀서, 나랑 댕기믄..... 니들이 이득을 볼 리가 없제라. 얼렁 자립혀서 니들 곁에서 떠나주는게 나가 할 수 있는 최선인거고.”
리겔은 엄격하고 근엄하게 ‘이제 더 이상 왈가왈부 하지마라.’라는 얼굴로 신문을 펼쳐들었습니다. 일면은 읽지도 않고 패스할 정도로 그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지만...... 더는 캐려고 들어선 안 되겠다 싶었어요.
“으응.....? 다시 출몰한다고?”
“뭐슬?”
“뭐긴 뭐겠냐? 가면 살인마제.”
하이고 참...... 엎친데 덮친다고, 재판 시작하면서 잠잠했던 가면살인마가 활동을 재개한 모양입니다. 이번에는 와..... 그렇게 까지 한다고요? 이거 참...... 이 도시는 갈수록 흉흉해지는 것 같아 마음이 착잡해졌습니다. 무너져버린 치안, 그리고 점점 줄어드는 관용과 포용의 정신..... 높아지는 장벽...... 이 씁쓸한 상황을 달래기 위해, 더 씁쓸한 커피를 마시는 와중에, 로키군이 누군가를 향해 손을 흔들었습니다.
“어, 여긴 왠 일이냐?”
“잠깐 들를 곳이 있어서요. 아 그리고...... 운터브룩 일은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알샤인씨였어요...... 그가 대체 여기엔 무슨 일로 온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