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 아니, 그건 아닐 것이다. 죽었으면 내가 이렇게 생각을 할 수도 없겠고, 이렇게 내 몸을 만질 수도 없겠지.’
경훈은 총에 맞았던 자신의 심장 부근을 쓰다듬었다. 심장을 총에 맞았다면 피가 새어나올법도 하건만, 옷은 총에 맞기 전 그 상태 그대로였다. 그렇다면 총에 맞았을 때 느껴졌던 그 고통은 무엇이란 말인가? 정말, 아주 생생한 고통이었다.
경훈은 잊어버리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주위를 둘러보았다.
전통 초가집 같은, 흙벽으로 된 데다가 생활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 들만 있는, 사극에서나 보던 옛날 전통 초가집같은 분위기였다.
끼이익 하고 문이 열렸다.
연이 앉아 있는 걸 보고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이 말했다.
“아따, 벌서 일어나 있능교? 절므서 그런가, 체력 하나는 탕탕하구먼 그랴.”
사투리인가. 게다가 한국말. 요즘은 지방에 가도 사투리는 거의 찾아볼 수 없으니...아직 사투리의 흔적이 조금이나마 남아있는 제주도인가? 하지만 제주도는 이렇게 쉽게 알아들을 수 없는, 정말 독자적인 사투리라고 들었었는데...
경훈은 이런저런 생각 다 버려버리고, 자신을 치료해 준 듯한 그 사람에게 앉은 채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 예. 감사합니다. 덕분에 몸이 괜찮아졌습니다.”
“으흐, 감사할게 뭐가 있겠능가, 길바닥에 나부라져있던 걸 데려와서 물수건 몇 개 언저준 것 말고는 한게 없는디. 그나즈나, 이 지방 사람은 아닌가벼? 그렇게 한양말 쓰는걸 보면 말여.”
경훈은 미소를 지으며 듣다 마지막에 그 남자가 한 말에 몸이 굳어버렸다.
그러고보니, 이 남자의 복장은...역시 사극에서 보던, 농민의 삼베 옷 차림이었다. 코스프레로 이런 것을 하지는 않을 테고...
경훈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저, 저기...혹시 여기가 어딘줄 아십니까?”
“여기? 여기는, 그 뭐시냐...시냇골 아녀, 시냇골.”
“아, 저, 그 나라 이름 말씀입니다만...”
“아, 이 나라? 즈네도 조선사람 같아 보이는디, 아니더란가?”
“조, 조선이요?”
“그려, 조선.”
15초만에 벌어진 대화였다.
그리고 그 15초만에 경훈의 정신세계는 작동을 멈춰버렸다.
그가 멍하니 있는 사이, 밖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따, 그 양반, 환자를 계속 앉혀두고 뭐할 셈이여? 얼른 밥이라도 먹여야 하지 않겄수? 우리 먹을게 없다고 저런 꼬마애까지 안 줄수는 없는 일이잖소, 안 그랴요?”
꼬마?
경훈은 피식 웃었다. 여기가...조선인지, 그건 확실하게 인정 할 수 없지만, 여하튼 이 지역에서는 스무 살 청년을 꼬마애라고 부르는 모양이지?
경훈은 몸을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분명히, 척 보기에도 이 남자는 자신보다 작아 보인다. 하지만...경훈은 그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경훈은 기겁하며 남자가 비켜주자 밖으로 나와 마당의 세숫대야에 고여 있는 물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 보았다.
...꼬마애 얼굴이다. 그것도 앳괸, 열 살이나 되었음직한, 아주 어린 꼬마.
그리고 자신에게 딱 맞던 셔츠와 청바지도 축 늘어져 있다.
대체...이 어처구니 없는 상황은 뭐란 말인가.
뒤에서 그 남자가 말했다.
“오, 옷이 특이한 걸 보니...개화쟁이인가벼? 하긴, 요즘 한양은 떠들썩 하지. 예전 그 뭐시기, 무슨 돌 하나 세워놔가지고 양선洋船은 얼씬도 못하게 한 게 언제적 일이라고, 이제는 그런 것들이 포에 떡 하니 정박해 있고...나라가 어찌 되려고 이러능가, 선태조폐하께서 이 사실을 아셨다면 무덤에서 살아돌아오실겨.”
남자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리고 그의 말로 인해, 자신은 확실하게 조선으로 왔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다.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그로 인해 대원군의 통상수교 거부정책은 물러가고 외래문물 수용.
이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로 추리해 볼 때, 현재는 1876에서 1905년 사이인 것으로 보인다. 나라를 빼앗겼다는 말은 하지 않았으니.
“대체...내가 어째서 여기에 서 있는거지...?”
경훈은 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분명 미국 애리조나의 시골 마을에 있었다. 거기서 거짓 거래를 통해 마피아 조직원들을 쓸어버렸고. 하지만 어떻게인지 그들은 다시 살아나 나를 죽였다. 믿기지 않지만. 그리고 일어나보니 조선 후기, 대한 제국 성립 직전으로 와 있다...이건...무슨 꿈이지?’
경훈은 자신의 뺨을 꼬집었다. 아프다. 꿈은 아닌 것이다.
경훈의 인상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하지만 얼굴은 아이의 귀여운 얼굴. 아무리 인상을 찡그려도 투정부리는 걸로 보일 뿐이다.
계속 뒤엉킨 머릿속을 정리하려는 경훈의 귓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얘야, 씻지 않아도 되니까, 얼릉 밥먼저 먹구 할거 하려무나. 우리는 밭일하러 가야하니께.”
경훈은 몸을 돌려 자신이 뛰쳐나왔던 방 안으로 발에 묻은 흙을 옆에 있던 걸레로 대충 닦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중년의 부부도 뭐라 하지 않고 경훈이 들어오자 장지문을 닫았다.
반찬은, 전형적인 시골의 반찬이었다.
경훈은 머릿속이 뒤엉켜있어 멍하니 바라보며 먹지를 않자, 중년의 부부는 난처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한양사람한테는 이런 밥이 어울리지 않능가. 닭이라도 잡아오지 그랴.”
“그를까요, 한창 클 나인데 이런 것 먹고 잘 클랑가, 얼른 잡아온당게요.”
자신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자 반찬이 맘에 들지 않아서인줄 착각하고 있는 중년의 부부.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가정인데 자신 때문에 닭까지 잡다니. 경훈이 아무리 파렴치하고 얼굴에 철판을 두른 인간이라도 이런 때는 자신의 처지만 생각해서는 안된다. 고의로 그런 것은 아니지만.
경훈은 서둘러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예요. 반찬을 본 게 아니라, 다른 생각을 하느라...저는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건 가리지 않고 먹으니까,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드립니다.”
그는 숟가락을 들어 밥을 떠 입안에 집어넣었다.
자신이 먹던 것과는 비교할수 없는, 푸석푸석한 보리밥.
게다가 반찬은 산나물 여러 종류와 간장 한 종지.
하지만 경훈은 마음이 푸근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여기로 오기 전에 살아왔던 20여년 동안 느끼지 못했던 훈훈함.
이 부부들은 자신이 먹는 것을 보고 기뻐하며, 밥을 덜어 자신의 밥그릇에 넣고 있다.
분명히 밭일을 하다 온 거라고 했지. 그럼 훨씬 더 배고플텐데, 어디서 떨어졌는지 모르는 자신에게 자신들의 식사를 아낌없이 대접해주는, 인정.
경훈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식적이지 않은 진정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 것도 모른 채, 한국에서 자신의 안위와는 걱정 없이 학비만 보내주던 부모보다, 이 사람들이 훨씬 더 부모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경훈과 두 중년 부부의 입가에는 식사가 끝날 때까지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p.s. 죄송합니다-_- 컴백기간이 너무 길었죠=-= 에, 밀리터리 소설로 쓰려고 했던 당초 계획과는 달리, 다시 퓨전물로;; 밀리터리는 아는 게 없는지라, 가장 자신있는 분야로 하려고 합니다. 먼치킨이 될 지, 아니면 약골소설이 될 지, 많이 봐주세요오~. 이젠 목표도 생겼으니, 꾸준히 연재해나가겠습니다. 허접작가 [알퀘누님], 물러갑니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