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소설] 불타는 인도 - WAU (14)

슬러 작성일 05.06.23 08:5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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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차는 울퉁불퉁한 길을 힘겹게 달렸다. 싸늘한 바람이 스며들어 발이 시렸기 때문에 줄리는 다리를 시트에 올려놓고 한쪽 구석에 움츠리고 앉았다. 희미하게 비쳐 뜨는 달빛을 통해 시계를 보니 새벽 2시였다. 아그라를 떠난 지 두 시간쯤 지났는데 뉴델리는 아직도 먼 모양이다.
택시는 왕자의 메르세데스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느리게 달리고 있었다. 지금쯤 왕자는 미친 듯이 화를 내고 있겠지. 아니면 자존심이 상해 있을까? 줄리는 아직도 그가 자기를 이용하려고만 하고 있는지, 아니면 마음으로부터 사랑하고 있는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가 지금 쫓아오지 않을 거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가 왕비를 혼자 호텔에 남겨 둘 리도 없고, 더구나 잠자리를 같이 하기가 싫어 도망친 여자를 자존심이 강한 왕자가 쫓아올 까닭이 없다. 줄리는 위에 걸치고 있던 코튼 재킷을 벗어, 추위 때문에 감각이 마비된 다리에 감았다.
차가 낡아서 편안치가 않았고, 신경이 곤두서서 눈을 잠시 붙이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줄리는 어느 틈에 사치스러운 생활에 익숙해진 자신을 깨닫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저러나 왕비에게는 뭐라고 핑계를 대야 하지? 봄베이에 있는 기자로부터 긴급전화가 걸려왔다고 할까? 하지만 어떤 핑계를 댄다고 해도, 다시는 궁전에서 신세를 질 수 없을 것이다. 편집장에게는 호텔에 있어야 기사를 쓰는데 유리하다는 구실을 대야지. 웨스가 그 말을 믿어 줄지는 의문이지만... 이 이상 왕자와 가까이 있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그대로 아그라에 있었다면 지금쯤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줄리는 멍하니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운전사가 가끔씩 내뱉는 불길한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마침내 운전사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브레이크를 힘껏 밟았다. 택시의 차체가 기울어지면서 한참을 미끄러지다가 겨우 정거했다.
줄리는 앞좌석에 몸이 부딪쳤다. 무슨 일일까? 다리에 감았던 재킷을 치우고 창을 열었다. 창으로 몸을 내밀어 보니 앞쪽에 바리케이트 같은 것이 있었다. 그리고 길가의 도랑에서 검은 그림자가 뛰어나와 차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줄리는 깜짝 놀라 문을 닫고 낡은 시트에 똑바로 고쳐 앉았다. 심장은 터질 듯이 크게 고동치고 있었으나, 머리는 위험이 바로 눈앞에 닥쳤는데도 냉정하기만 하다. 줄리는 스스로도 놀랐다. 이상할 정도로 정신이 맑아져 자기가 처해 있는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강도가 다가왔다. 줄리가 문을 열어 주지 않자 그들은 심하게 문을 마구 흔들었고 결국 낡은 차체에서 문이 떨어져나갔다. 강도들은 더러운 손으로 줄리를 차에서 끌어냈다. 줄리는 침착하게 강도들과 맞섰다. 눈초리가 예리하고 거칠게 생긴 강도들이 반원형을 그리듯이 그녀를 빙 둘러섰다.
뉴델리에서 흔히 본 거지들보다도 더 더러운 옷차림의 사나이들이었다. 머리에도 누더기를 감고 있었다. 어째서 인도 남자들은 머리에 항상 천을 두르고 있는 것일까? 얼굴은 가리지 않았으나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운전사도 그들에게 끌려나와 길가에서 호 주머니 검사를 당하고 있었다.
「돈이라면 있어요.」
줄리는 애써 냉정하게 말했다. 패스포트와 돌아갈 비행기표는 궁전에 두고 왔기 때문에 여기서 몽땅 털려도 큰 지장은 없을 것이다. 제일 가까이 있던 사나이가 줄리의 백을 낚아챘다. 그는 잠시 백 속을 뒤지다가 마침내 지갑을 찾아냈고 그가 두툼한 지폐 뭉치를 꺼내 보이자 그들은 요란하게 떠들며 기뻐했다.
아그라에서 추억에 남을 만한 물건을 사기 위해 평소보다 많은 돈을 가지고 왔던 것이다. 혼자 뉴델리로 돌아갈 결심을 했을 때는, 여분으로 돈을 많이 가져온 것을 다행이라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택시비도 없는데, 그래도 이 운전사는 날 뉴델리까지 데려다 줄까? 다코이트는 지폐를 세어 보고 다시 백을 뒤졌으나, 별로 값진 물건이 없다는 것을 알자 자기들끼리 상의하기 시작했다. 자주 고속도로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을 보니, 다른 차가 오지 않나 경계하고 있는 듯했다. 경찰이 악명 높은 노상강도 집단 때문에 고속도로 순찰을 강화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강도들은 언제까지나 물러갈 생각을 않고 있었다.
돈을 빼앗았으면 달아날 일이지 왜 저렇게 머뭇거리고 있을까?
줄리는 강도에게 폭행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인도에서는 강도보다 폭행이 더 무거운 죄가 되니까.
이때 의견이 일치되었는지 강도들이 조용해졌다.
「마담.」
그들의 대표가 가까이 다가왔다.
「우리와 같이 갑시다.」
사나이가 줄리의 손을 잡았다. 줄리가 큰소리로 외쳤다.
「뭐라구요? 돈을 다 빼앗았잖아요? 도대체 그 이상 무엇이 더 필요하죠? 이 손 놔요!」
처음으로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또 한 사람의 사나이가 다가와 줄리의 나머지 손을 붙잡았다. 택시 운전사는 자유롭게 되자 쏜살같이 달려가 운전석에 타고는 시동을 걸었다.
「기다려요!」
다코이트의 한 사람이 위협하듯 운전사에게 말하자, 택시는 날아가듯이 사라졌다. 줄리는 다코이트에게 잡힌 채 하이웨이 한가운데에 홀로 남겨졌다. 그녀를 구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도망칠 수단도 이젠 전혀 없다...
줄리는 두 팔을 다코이트에게 꼭 붙잡히고 있었으나, 이번에는 저항하지 않았다. 아니, 안 한 것이 아니라 할 수가 없었다. 또 저항한다 해도 승산이 전혀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위엄을 갖추고 냉정을 잃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강도들이 길가에서 벗어나 황무지 쪽으로 걷기 시작했을 때에도 줄리는 잠자코 따라갔다. 강도들은 줄리를 데리고 건조한 평원을 묵묵히 행진해 나갔다. 되도록 빨리 하이웨이에서 벗어나고 싶은지 빠른 걸음으로 걸었는데 줄리는 넘어지지 않고 따라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들은 당장 줄리에게 해를 끼치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들에게는 어떤 목적지가 있고, 그리로 향해 걷고 있는 듯 싶었다. 줄리는 가슴에 절망감이 치솟는 것을 느꼈으나, 단념하지 않고 방향을 확인해 두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비록 달빛이 있다고는 해도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평평한 것 같던 지면도 도랑과 기복이 있어서 걷기가 힘들었다. 그들은 이 사막과도 같은 황무지에 익숙한 듯 가끔 방향을 바꾸면서 계속 걸어갔다. 줄리는 완전히 절망에 사로잡혔다. 가령 다코이트한테서 풀려난다 하더라도, 이렇게 멀리까지 왔으므로 도저히 혼자서는 하이웨이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 택시 운전사가 경찰에 신고를 했으면 좋으련만... 하지만, 그것은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코이트에 대한 것을 경찰에 신고한다면, 그는 틀림없이 다코이트의 보복을 받게 될 것이다.
그 운전수가 자기 위험을 무릅쓰고 남을 도우려 하지는 않겠지. 운전사가 입을 다물고 있으면, 내가 지금 다코이트에게 잡혀 있다는 것을 이 세상에서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왕자는 내가 몰래 인도를 떠난 줄 알지도 모른다.
줄리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나는 이대로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는 걸까?
가슴이 답답하고 목이 바싹 타들어갔다.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그들은 쉬지 않고 걸었고 마른 모래가 사정없이 샌들 안으로 들어왔다. 도저히 더 걸을 수가 없었다. 줄리가 무릎을 꺾고 쓰러지게 되었을 때야 겨우 행진이 끝났다. 그곳은 나직한 언덕이었고, 키 작은 나무가 일대에 무성해 있었다.
계곡 쪽으로 내려가니 모닥불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움직이고 있던 검은 그림자가 동작을 그치고 줄리를 바라본다. 그들은 괴성을 지르며 인질을 맞이했다. 가까이 다가와 얼굴을 들여다보는 사람도 있었으나 줄리를 끌고 온 사람들은 그들을 무시하고 똑바로 모닥불 쪽으로 걸어갔다.
모닥불 너머에는 무릎 위에 라이플 총을 얹고 있는 사나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깨가 딱 벌어지고, 키가 그다지 크지 않아 다부지게 보였다. 상반신은 맨살에 붉은 조끼를 걸쳤을 뿐 벌거벗은 채였고, 육체미 선수처럼 근육이 툭툭 불거져 나와 있었다.
눈을 쳐든 그 사나이는 놀라울 정도로 얼굴 생김새가 단아했다. 엄한 눈길이 줄리를 평가하듯 바라보고 있다가 이윽고 옆에 있는 사나이에게로 옮겨간다. 줄리를 데려온 사나이들은 모닥불 앞에 앉아 있는 사나이가 입을 열기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겨우 그 사나이가 입을 열었다. 문초를 하는 듯한 엄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사나이는 부하의 대답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라이플 총을 담요 위에 놓고 일어선다. 줄리보다 약간 키가 클 정도였다. 그가 무어라 한 마디 하자, 어디서인지 모르게 한 사나이가 나타나 줄리에게 방석을 권했다.
명령을 내린 사나이가 아마도 다코이트의 두목인 모양이다.
「마담, 앉으시오.」
사나이는 처음으로 웃음을 보였다. 이가 누렇게 빛났다. 줄리는 약간 안심하면서 방석에 앉았는데 사나이는 줄리가 앉기를 기다렸다가 정면에 마주 앉았다. 두 사람 중간에서 모닥불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다른 사나이들도 두목 옆에 나란히 앉았다. 인도인 특유의 요가를 하는 듯한 자세였다.
「이름을 말해 주겠소?」
사나이는 약간 딱딱한 영어로 말했으나, 발음은 정확했다.
「줄리 코넬이에요.」
「미국인인가요?」
「네.」
사나이는 약간 당황하면서 줄리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남편은 어디 있습니까?」
그 질문에 줄리는 망설였다. 자기를 지켜 줄 사람이 있다는 듯이 대답하는 것이 유리할까? 그렇지 않으면...
「남편은 없어요.」
줄리는 할 수 없이 정직하게 대답했다. 거짓말이 발각되었을 경우를 생각하니 무서워서 도저히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없다구?」
사나이가 의외라는 듯이 되물었다.
「네, 없어요.」
줄리는 분명하게 대답했다.
「미국인이니까요.」
마치 미국인이라는 것이 독신의 뒷받침이 된다는 듯한 말투였다. 사나이의 얼굴에 웃음이 퍼졌다.
「만일 당신이 인도인이라면, 당신 나이쯤 되면 결혼해서 아이가 두셋은 있을 거요.」
그는 줄리에게 보호자가 없다는 것을 알자 오히려 어쩔 줄을 몰라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 누구 집에서 살고 있소?」
줄리는 가만히 그 질문의 뜻을 생각해 보았다.
누군가가 도와주러 올 것을 걱정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럴 리는 없을 테지만, 뒤에 미국 대사관과 같은 권력이 도사리고 있는지 알고 싶은 것일까? 그는 내가 돌아오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고 경찰에 신고할 사람이 있는지 어떤지, 그것이 누구인지를 알고 싶은 것이 분명하다. 즉, 정부가 개입할 위험성이 있는지를 알고 싶은 것이다.
「이 나라에는 친구가 없어요.」
줄리가 나직한 소리로 말했다.
「나는 신문기자예요. 이 말의 뜻을 아시겠어요?」
사나이는 잠자코 있었다. 줄리는 다시 한 번 설명했다.
「나는 혼자 이 나라에 왔어요. 미국 뉴욕에서 일하고 있어요. 인도에는 2, 3일 동안 머무를 뿐입니다.」
「알겠소, 마담.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당신이 어디에 묵고 있느냐 하는 겁니다.」
사나이의 음성이 엄해졌다. 그는 상상 이상으로 영어에 능숙한 것 같았다. 줄리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서툴게 굴면 크게 위험을 당할지도 모른다.
「어느 여성의 집에 있어요.」
「그 여성의 이름은?」
사나이가 다그쳐 물었다. 줄리는 입을 다물었다. 식은땀이 흐르고 공포로 몸이 떨렸다. 왕자의 얼굴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는 얼마나 노할 것인가? 아니, 귀찮은 존재가 없어져서 기뻐할지도 모른다. 내가 그의 강한 자존심을 마구 짓밟았으니까...
갑자기 무쇠와도 같은 손이 줄리의 손목을 잡았다. 연약한 손을 부러뜨리는 것은 쉬운 일이라는 듯이 그의 손에 힘이 가해졌다. 강도의 두목이 천천히 줄리를 앞으로 끌어당겼고 그녀의 작은 손이 모닥불 바로 위에 왔을 때 두목은 동작을 멈추었다. 불이 탁탁 소리를 내며 타고 있었다.
곧 줄리의 하얀 피부가 빨갛게 물들었다.
「당신이 묵고 있는 곳이 누구 집이오?」
줄리는 모닥불 너머에 있는 사나이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그녀는 상당히 나이가 많아 돈 같은 것은 갖고 있지 않아요.」
줄리는 이를 악물고 열기를 참았다. 손이 점점 불에 가까워졌다.
「어째서 돈이 없을까? 미국인을 집에 묵게 할 정도라면 돈이 많을 텐데요. 당신이 통나무집에 묵고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데.」
두목의 목소리는 정중했으나 매서운 면이 있었다.
「그녀는... 아들의 신세를 지고 있어요.」
뜨거움을 참지 못하고 줄리는 비명을 질렀다.
「그 사람의 이름은?」
사나이는 손을 더욱 불 가까이로 가져갔다.
「자이!」
드디어 줄리가 고백했다.
「자이야프라디슈 미슬라 왕자예요.」
다코이트의 두목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고 줄리의 손을 놓아주었다. 줄리는 손을 비비면서 사나이를 노려보았다. 상대는 자세를 바로잡고는 다시 세련된 태도로 돌아갔다.
「미슬라 왕자라면...」
두목의 눈이 기쁨으로 빛나고 있었다.
「아주 큰 부자죠.」
두목은 줄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무어라 지껄였다. 그러자 줄리 바로 옆에 있던 사나이가 벌떡 일어나 검은 액체가 가득 든 유리 항아리를 가지고 왔다. 두목은 손짓으로 그 액체를 손에 바르라고 지시한다. 자세히 보니 손은 별로 이상이 없었다. 하지만 두목의 지시대로 액체를 발랐더니 시원하고 기분이 좋았다.
「왕자는 지금 어디 있소?」
다코이트의 두목은 줄리가 약 바르기를 끝내자 이렇게 물었다.
「아그라에 있어요.」
말하고 싶지 않았으나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줄리는 호텔 이름까지 말하고 다시 계속했다.
「하지만, 왕자는 나를 싫어해요. 그는... 저널리스트를 좋아하지 않아요. 그러니 몸값 같은 것은 절대로 지불하지 않을 거예요. 내가 죽어도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할 거예요.」
「죽음보다 더 나쁜 일도 있습니다. 마담.」
두목이 불길한 말을 내뱉는다.
「미슬라 왕자와 이야기하고 싶은가?」
이때 약간 떨어진 곳에서 무게 있는 음성이 들렸다.
「미슬라 왕자라면 여기 있네.」
목소리가 난 쪽을 보니 사나이의 모습이 보였다. 다코이트의 두목이 당황하여 일어서는 것을 보고, 줄리는 비로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깨달았다. 모닥불 때문에 거무죽죽한 얼굴이 잿빛으로 보였다. 줄리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일어나 그 목소리 쪽으로 비틀거리며 다가갔다.
왕자는 총으로 무장한 4명의 보디가드에 둘러싸여 있었다. 검은 황무지를 배경으로 하여 강렬한 왕자의 모습이 은빛으로 떠올라 있었다. 이때 갑자기 모닥불이 기세 있게 타올라 왕자의 아름다운 얼굴이 분명하게 보였다. 입가에 잔인하리만큼 차가운 미소를 띤 왕자 앞에서는 어떤 다코이트도 그 힘이 부족해 보였다. 20여명이나 되는 강도의 무리들이 일제히 숨을 죽였다.
「호랑이 왕자?」
그들이 저마다 중얼거렸으나, 실제로 그 말의 뜻을 줄리가 이해한 것은 나중에 설명을 들은 후였다. 그 말은 경외와 존경의 표현이었다. 줄리는 가까이 있는 남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부싯돌 같은 눈이 그녀의 시선을 받아들였다.
이윽고 엄한 얼굴이 부드러워지면서, 냉소적으로 일그러져 있던 입에 따뜻한 미소가 떠올랐다. 검은 눈동자가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그를 잘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가 이미 마음을 누그러뜨렸다고 착각할 그런 눈빛이었다. 약속을 어기고 도망친 줄리에게 화를 내야 할 텐데, 지금의 모습에서는 그런 기색은 전혀 없었다. 왕자가 손을 내밀었다.
마술이 걸린 듯 왕자 앞에 길이 열렸다. 보디가드가 머신건을 수평으로 쳐든 것을 보고 다코이트들이 물러선 것이었다. 왕자는 줄리의 옆에 와서 허리에 팔을 감고 가볍게 안아 올렸다.
「괜찮소?」
「네.」
줄리는 사실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냥 왕자의 넓은 가슴에 얼굴을 묻고 마음껏 울고 싶었다.
「이젠 괜찮아, 줄리.」
왕자의 다정한 목소리만큼 줄리를 안심시키는 것은 없었다.
「자, 앉아.」
왕자는 조금 전까지 줄리가 앉아 있던 방석을 끌어 왔다. 줄리가 방석에 앉자 어디서인지 모르게 담요가 건네졌다. 왕자는 그것으로 줄리를 감쌌다.
「훌륭해, 잘 견뎌냈어.」
왕자가 다정하게 줄리를 껴안았다.
「좀더 일찍 달려왔어야 했는데 미안해, 줄리.」
왕자는 허리를 구부리고 앉아, 화상을 입을 뻔한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빨개진 손을 잠시 들여다보고 있다가 이윽고 일어나서 다코이트의 두목과 마주 섰다.
「화상이 심하지 않아 다행이군.」
왕자의 목소리에는 불길한 예감이 들 정도로 처절한 울림이 있었다. 이렇게 무서운 왕자의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정말 두번 다시 듣고 싶지 않은 무서운 목소리였다. 다코이트의 두목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자, 불 옆으로 가시지요.」
곧 방석이 마련되었다. 두 사람은 영어로 이야기했는데, 그것이 별로 이상하지는 않았다.
인도에는 180여 종류의 언어가 있고, 방언을 합치면 700여 종류가 된다고 한다. 그 공통어가 200년에 걸친 영국의 지배로 인해 영어가 되었다니 아이러니컬한 느낌마저 들었다.
「어떻게 그토록 빨리 이 곳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까?」
다코이트가 물었다.
「그녀가 아그라에서 떠나는 것을 내 부하가 보고 있었어. 내가 호위도 없이 여성을 밖으로 내보낼 줄 알았나?」
왕자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줄리는 숨을 죽였다.
그는 부하를 통해 나를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인도에 온 뒤로 계속 내 행동을 감시하고 있었을까?
두목은 옳은 이야기라는 듯 연신 머리를 끄떡였다. 그 후 두 사나이는 인도의 최근 정세에 대해 마치 친구처럼 홀가분하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줄리는 붉게 타오르는 모닥불을 쬐면서 두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이미 충격은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러나 캠프 전체는 여전히 긴장이 감돌고 있었다. 보디가드들은 총을 쥔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다코이트는 에 대해 길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줄리는 핸드백이 없는 것을 안타까워 하면서 사나이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언제나 백에 넣고 다니는 소형 테이프 리코더만 있다면 이 대화를 빠뜨리지 않고 녹음할 수 있을 텐데... 어쨌거나 이 대화를 기사로 작성할 수 있도록 머리에 잘 기억해 둬야지. 이 기사는 일요판에 실을 수 있을 것이다.
지난 며칠 동안 이렇다 할 기사를 보내지 못했으므로, 조금은 명예회복이 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미슬사 왕자님, 왕자님은 가난한 사람의 편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놓인 처지를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들의 입장은 아주 미묘합니다.」
다코이트의 두목이 말했다. 그는 사나이다운 체격을 갖추고 있었으나, 왕자와 마주앉아 있으니 아무 것도 아니었다.
「왕자님은 종업원들에게 높은 급료를 지불하고 종업원의 자녀들에게 교육을 받게 하고 계십니다. 왕자님의 직물공장과 철강공장의 노동환경은 아주 훌륭해서 외국의 정부고 관이 오면 인도정부가 안내할 정도지요. 또 왕자님은 땅을 갖지 못한 농민들에게 땅을 주시고...」
왕자가 태연히 있는 것을 보고 다코이트는 큰소리로 웃었다.
「가련한 다코이트가 이런 일에까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 이상합니까?」
「자네들에게는 자네들 나름의 의견이 있겠지.」
왕자가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서 이야기를 계속하게.」
줄리도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역시 왕자는 괜찮은 사람이야...
줄리는 기뻤다.
빈부의 차이가 극심한 인도에서, 노동자 계급에게 이토록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달리 없지 않을까?
줄리는 황홀한 눈으로 왕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윤곽이 뚜렷한 단아한 얼굴에 모닥불의 불길이 음영을 던지고 있었다. 줄리는 그가 이 캠프에 모습을 나타냈을 때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조금 전의 그는 복수에 불타는 악마와 같았다. 내 눈은 한순간 그의 모습에 사로잡혔지. 그때의 심정을 무어라 표현하면 좋을까? 생명이 불어넣어진 듯 마음이 뜨거워지고, 눈이 확 떠지는 느낌이었다.
줄리는 그에 대한 생각을 분명히 하고 싶었으나, 한편으로는 그렇게 하는 것이 두렵기도 했다. 그에 대한 마음은 미묘하게 변화하고 있었다.
나를 오해하고 책망할 때의 그는 밉지만, 그래도 그를 신뢰하는 마음은 날이 갈수록 더 커지고 있다. 나는 그를 사랑하는 것일까?
줄리는 담요를 몸에 꼭 감았다.
그럴 리가 없다. 진심으로 신뢰해 주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지? 에디의 경우는 어떠했던가... 그러고 보니 요즘에는 그를 생각하는 일이 뜸해졌다. 그를 잊어버리고 싶은 것일까? 그 착하고 다정했던 에디 브라이스의 자리에, 정열과 위험이 가득한 자이 미슬라 왕자를 바꾸어 놓으려 하고 있는 것일까?
「시간이 별로 없어.」
왕자가 말했다.
「결론을 내리는 것이 좋겠네. 자네가 원하는 것을 말해 주게.」
보디가드가 왕자의 말을 뒷받침하듯 라이플의 안전장치를 풀고 다가왔다.
「이미 아시고 계시는 것을 되풀이할 것밖에 없습니다.」
다코이트의 두목은 많은 대중 앞에서 연설하는 정치가 같았다.
「어떤 사람은 지금의 정부가 쓰러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불만을 조장하고, 정부에게 해를 끼치는 파업과 데모를 선동하고 있습니다. 저 자신도 그들과 횡적인 유대를 맺고 있습니다.」
두목은 왕자에게 충성을 맹세하듯 두 손을 높이 들었다.
「저는 천한 다코이트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무도 해치지 않고 가난한 사람으로 평생을 지내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이상의 생활은 원치 않습니다. 그들을 위해 게릴라가 될 생각은 없습니다. 그리고...」
다코이트는 솔직하게 말했다.
「게릴라 활동은 몹시 위험합니다.」
「언제부터 그들과 연락을 취하고 있나?」
왕자가 엄한 눈으로 상대의 얼굴을 쏘아본다. 줄리의 생각으로는 다코이트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다코이트가 목소리를 떨구었다.
「테러리스트들이 가까운 장래에 국제적 회합을 갖는다는 것은 알고 계시겠지요?」
「그것이 언제, 어디서 열린다는 말인가?」
「거기에 대답하면 제 자유와 제 부하들의 안전을 보장해 주시겠습니까?」
다코이트가 말했다.
「나를 상대로 거래를 하자는 말인가?」
왕자의 목소리는 싸늘했다.
「알고 있는 것을 말해!」
다코이트가 어깨를 으쓱했다. 줄리는 그를 믿고 싶었다.
「카슈미르에서 5일 후에 열립니다.」
「카슈미르의 어디?」
「자세한 것은 모릅니다.」
다코이트는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말을 계속했다.
「제 생각에는 스리나가르 근처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하지만 확실치는 않습니다.」
왕자는 만족스러운 듯 쿠션에 몸을 기댄다.
「좋아, 그 정도면 충분해. 나머지는 내가 조사하겠네.」
왕자는 일어나서 손을 내밀었다. 다코이트도 일어났다. 그는 왕자의 태도에 놀란 모양이었으나, 왕자의 손을 잡았다.
「이 여자분이 왕자님의 손님인 줄 알았다면 이런 짓은 하지 않았을 겁니다. 왕자님은 우리들 민중의 편이니까요.」
「자네를 의심하지는 않겠네. 내가 위험한 적이라는 것은 자네도 잘 알고 있을 테니까.」
왕자는 유머를 섞어 가며 싸늘하게 말했다. 다코이트가 머리를 숙였다.
「잘 알고 있습니다. 호랑이 왕자님. 테러리스트들에게는 그들의 계획이 탄로났다는 것을 말하지 않겠습니다.」
「자네가 목숨을 소중히 여긴다면 알리지 않는 것이 좋겠지.」
왕자는 그 말을 남기고 줄리한테로 돌아왔다.
「오랫동안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빨리 돌아가고 싶겠지만 여기 있던 가치는 있겠지?」
왕자는 허리를 굽혀 줄리의 몸을 감싸면서 말했다. 줄리는 왕자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그들을 벌하는 편이 좋았을까?」
왕자는 줄리를 부축하고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줄리의 안전이 더 중요해. 나머지는 경찰이 할 일이지. 그러나 줄리가 원한다면...」
「아니에요.」
줄리는 방긋 웃으며 왕자를 쳐다보았다.
「이상하다고 생각하시겠지만, 나는 어려서부터 노상강도가 좋아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요.」
왕자는 귀엽다는 듯 줄리의 머리를 살짝 쥐어박는다. 두 사람은 잠시 아무 말도 않고 걸었으나, 이윽고 줄리가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웃기 시작했다.
「뭐가 그렇게 우습지?」
왕자도 따라서 웃으며 물었다.
「아까 그 사람은 아무도 해치지 않는다고 말했죠? 그때의 표정이 너무나 티없고 성실해 보였기 때문에, 하마터면 그의 말을 믿을 뻔했다구요. 그가 악명 높은 강도인데도.」
두 사람은 함께 소리내어 웃었다. 그리고 보디가드의 호위를 받으며 둑으로 올라갔다.
「이 근처에서 랜드로버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왕자는 황폐한 대지에 올라서자 사방을 둘러본다.
「줄리가 없어졌을 때, 이런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해서 뉴델리로부터 불러들였지. 보디가드가 무전으로 우리 위치를 가르쳐 주었을 텐데...」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놓이는군요. 또다시 먼 거리를 걸어야 하나 해서 속으로 걱정하고 있었어요.」
왕자가 선드레스에 샌들 차림인 줄리를 내려다본다.
「오래 걷기 위해 그런 차림을 한 것은 아닐 테지? 하지만 여기서 하이웨이까지는 별로 멀지 않아. 그들은 방향을 모르게 하기 위해 당신을 이러저리 끌고다녔을 거야.」
「방향감각이 정확한 모양이시군요.」
「물론이지. 그리고 더욱 다행한 것은 방향감각이 더 예민한 부하가 있어.」
왕자는 뒤를 돌아보고 부하 한 사람을 가리켰다.
「사냥을 나갈 때는 언제나 저 무신이라는 부하를 데리고 다니지.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어. 하지만, 앞으로는 사냥할 기회도 별로 없을 거야.」
보디가드가 횃불을 높이 쳐들었다. 이것을 신호로 랜드로버가 달려왔다. 그 차에 올라 조금 갔을 때 하이웨이가 나왔다. 하이웨이에는 구나 신이 운전하는 메르세데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줄리는 그가 열어 주는 문으로 차에 올랐다.
「어떻게 제가 있는 곳을 알았죠?」
줄리가 옆에 앉은 왕자에게 물었다. 왕자는 운전사에게 지시를 내리고, 앞좌석과 뒷좌석 사이에 있는 간막이 유리를 내렸다.
「우리 차는 줄리의 차와 별로 떨어져 있지 않았어. 잠시 달리고 있으려니 끔찍한 스피드로 달려오는 낡은 택시가 있더군. 그 차를 세우고 운전사에게 물었더니 당신이 그 차에 탔었다는 거야. 그래서 당신이 다코이트에게 잡힌 장소까지 당장 안내하라고 했지.」
「저런, 가엾어라! 하룻밤 사이에 두 번이나 혼나다니, 그 운전사도 운이 나쁘군요. 다코이트에게 돈까지 빼앗기고 말이에요. 그 운전사는 몹시 돈이 필요한 것 같았어요.」
「걱정할 것 없소. 안내한 값으로 충분한 돈을 주었으니까.」
왕자가 대답했다.
「그러니, 그 작은 가슴을 애태울 것 없다구.」
「고마워요. 돈은 내가 변상하겠어요. 오늘 일은 모두 내 책임이니까요.」
「그렇지 않아. 책임은 나한테 있어. 나는...」
왕자는 말을 끊었다. 어둠 속에서도 그가 자조적인 웃음을 띠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줄리가 나를 그토록 싫어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어. 타지마할에서 줄리와 같이 있을 때는, 줄리가 기꺼이 나를 받아들이리라 생각했는데...」
그는 알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줄리는 어둠에 감사하면서 왕자의 맡을 듣고 있었다.
그렇다. 그의 말이 옳다. 나는 그의 것이 되고 싶었었다.
「줄리, 오늘 일은 잊기로 해.」
왕자가 줄리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다른 이야기나 하지.」
「도대체 나는 몇 사람의 잠을 방해한 거죠?」
잠시 후 줄리가 느닷없이 그렇게 물었다.
「왕자님과 보디가드, 랜드로버의 운전사와 구난 신... 아, 이를 어쩌면 좋아요? 어머님은 호텔에 혼자 계시나요?」
「괜찮아. 메모를 남겨 놓았고, 또 아침이 되면 전화하겠어. 차도 준비되어 있고. 저녁에 만난 친구와 같이 돌아오실 테지.」
「제가 없어진 것을 알고 몹시 화가 나셨겠죠?」
줄리가 왕자의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음, 어머니는... 아주 화가 났었지.」
「그런데 왜 나를 도우러 왔어요? 그렇게 도망친 사람인데요. 나는 절대로 구하러 오지 않을 줄 알았어요.」
왕자의 표정은 수수께끼 같았다.
「나는 자신의 것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니까.」
뉴델리까지 가는 오랜 시간 동안, 두 사람은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늘에서는 보름달이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사막의 하늘에 빛나는 희망과도 같았다. 줄리는 왕자가 한 마지막 말의 뜻을 생각하다가, 어느 틈에 그의 어깨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차가 호랑이문을 지날 무렵, 뉴델리에는 어슴푸레한 새벽이 찾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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