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소설] 불타는 인도 - WAU (16)

슬러 작성일 05.06.23 08:5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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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줄리는 침실의 창 앞에 있는 긴 의자에 힘없이 파묻혀 있었다. 부드러운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깊어 가는 황혼 속에서 밤순찰이 시작됐는지, 경비원 한 사람이 잔디 위를 걸어가고 있었다. 줄리는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깊은 생각에 빠져든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줄리는 머리칼을 뒤로 쓸어넘기고 관자놀이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몸과 같이 머리도 감각이 없어졌는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줄리는 멍한 눈으로 경비원의 모습을 쫓고 있었고 사나이가 시야에서 사라진 뒤에도 어둑어둑한 숲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줄리는 얼이 빠진 듯 긴 의자에 더 깊이 몸을 파묻었다.
이대로 잠들고 싶었다. 몇 백 년이건 계속 잠을 잤으면... 몇 백 년 후에도 눈을 뜨지 않았으면. 영원히 잠들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 내일 인도를 떠나야지. 그런 수모를 당하고도 지금까지처럼 일을 계속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하딩 편집장에게는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역시 저에게는 무리한 일입니다. 저는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핑계로는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나를 신임하고, 특종기사를 기대하고 있으니까.
「그까짓 것이 무엇이람!」
줄리는 저도 모르게 소리내어 말했다. 그리고 얼굴을 쿠션에 묻었다.
「자이, 당신이 미워요!」
체중이 4배나 된 것처럼 몸이 무거워 제대로 숨도 쉴 수 없었다. 지금까지의 피로가 한꺼번에 밀어닥친다. 감정에 치우쳐 서둘러 결론을 내려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으나, 지금은 이성을 찾으라고 스스로를 격려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줄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다시 미슬라 왕자를 만나기보다는 일을 버리고 인생을 포기하는 편이 훨씬 낫다는 것... 비행기 표를 구할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어쨌든 여기서 나가야 한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줄리는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심장이 큰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러나 줄리는 크게 머리를 가로저었다.
자이는 아닐 거야. 그가 올 리가 없어. 도대체 나는 지금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지금 그를 증오하고 있다. 마음을 속이고 그렇지 않은 체해서는 안된다. 그렇다. 나는 마음으로부터 그를 증오하고 있다. 그가 아니라도, 그런 일을 하면 증오당하는 것이 당연하다. 나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내뱉게 하고 그는...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줄리는 일어나서 문으로 향했다.
「줄리.」
문밖에 서 있는 사람은 미슬라 부인이었다.
「지금 바쁜가요? 잠시 방해해도 괜찮을까요? 프리야가 나갔기 때문에 말동무라도 했으면 해서 왔어요.」
「네, 들어오세요.」
줄리는 문을 활짝 열고 부인을 맞아들였다.
「일부러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은 저도... 말씀드려야 할 일이 있어요.」
어려운 문제가 새로 생겼다. 갑자기 인도를 떠나야 하는 이유를 부인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줄리는 머릿속에서 핑계거리를 찾았다.
「어서 이리 드시죠.」
줄리가 거실 쪽을 가리켰다.
「스칸다라에게 차를 가져오게 할까요?」
「아니, 괜찮아요. 이대로가 좋아요.」
왕비는 손을 가로젓고 우아하게 팔걸이 의자에 앉았다.
「밤에는 음료를 마시지 않기로 했어요. 인도의 차는 진하잖아요? 차를 마시면 잠이 오지 않거든요. 혹시 자려던 참인가요?」
왕비는 줄리가 잠옷을 걸친 것을 깨닫고 물었다.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저... 오늘은 이미 일을 끝냈기 때문에...」
줄리는 스스로도 어색한 대답이라 생각하고 얼른 덧붙여 말했다.
「방에서 저녁식사를 할까 하고요.」
왕비가 의아스러운 눈으로 줄리를 바라보았다.
「어디 기분이라도 언짢은가요? 안색이 아주 나쁘군요.」
왕비가 다정하게 말했다. 그 다정한 목소리가 줄리의 마음에 스며들어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다.
「아니에요, 부인.」
줄리는 고개를 돌렸다.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러나 미슬라 부인은 줄리의 이마를 짚어 보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틀림없이 어제의 여행 때문에 피로해서 그럴 거예요.」
왕비는 걱정스러운 듯 양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시간에 아그라를 떠나다니, 당신도 여간 아니로군요.」
왕비는 다시 한번 줄리의 이마를 짚어 보고 금발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제발 걱정하지 마세요, 부인.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요.」
줄리가 애써 말했다. 그녀는 나이 든 여성에게 위로를 받자, 긴장이 조금씩 풀리고 차차 마음이 가라앉았다.
「이봐요, 줄리. 더위 때문에 몸이 약해진 게 분명해요. 금발에 흰 피부니까, 특히 더위에는 약할 거예요. 그렇지 않아도 이 더위에 익숙해지려면 2, 3년은 걸려요. 평소에는 줄리의 뺨이 장미꽃처럼 발그레했는데...」
부인은 자기 자식을 대하듯 하얀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정말 요 며칠 동안은 몹시 더웠어요.」
줄리는 이렇게 말하면서 흐느껴 울었다. 스스로도 울고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긴장된 신경이 부인의 다정한 말에 한꺼번에 풀어진 모양이다.
「아무래도 당신은 병든 것이 틀림없어요.」
왕비가 단호하게 말했다.
「자, 어서 침대에 누워요.」
줄리는 잠자코 그 말에 따랐다. 몇 분 후, 줄리는 새로 간 시트 위에 기분 좋게 누워 있었다. 마음의 아픔은 아직 가시지 않았으나, 기분은 상당히 편해져 있었다. 부인은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몹시 긴장된 줄리의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지금이 가장 더운 시기예요.」
부인이 주물러주니 목과 어깨의 응어리가 풀리는 것 같았다.
「아마 오늘은 40도 가까이 되었을 거예요. 금주 초에도 37, 8도나 되었으니까 앞으론 더욱 더워질 거예요. 6월 중순에 비가 올 때까지는 말이에요.」
부인은 일단 말을 끊었다가, 이윽고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눈을 빛냈다.
「카슈미르에 자이의 피서용 궁전이 있는데, 거기 가지 않겠어요? 당신은 뉴델리를 떠나는 편이 좋겠어요. 이달중으로 거기 가서 여름을 지내기로 해요. 프리야와 나는 이 시기가 되면 언제나 더위를 피해 거기 가곤 하죠. 자이는 여기 남아 있지만 말이에요. 사업상 여기 있는 것이 편리하다는 거예요. 카슈미르는 고원지대니까 여기보다는 훨씬 시원해요. 궁전은 히말라야 산록인 스리나가르의 다르 호수 부근에 있어요. 궁전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매우 아름다워요! 거기서도 일은 할 수 있지 않겠어요? 어떤 일인지 나는 잘 모르지만 말예요. 그리고 매일 뉴델리로 떠나는 항공기가 있으니까 필요할 때 이리 돌아올 수도 있어요.」
줄리는 약간 몸을 일으켰다.
「카슈미르라고 말씀하셨나요?」
부인은 줄리가 흥미를 나타내자 기쁜 듯이 미소짓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인도의 상류계급 사람들 중에서는 해마다 그곳에서 여름을 보내는 사람이 많아요. 정말이지 이 정도의 더위 속에 계속 있으면 몸을 상하게 돼요. 그렇게 됐다가는 제가 웨스에게 면목이 없지 않겠어요? 귀중한 손님을 맡아 놓고.」
줄리는 자조적인 웃음을 웃었다. 편집장이 부하 직원의 건강을 걱정하는 일이 있을까? 그는 병에 걸려도 좋으니 취재를 게을리 하지 말라고 할 것이 분명하다. 물론 신문기자 쪽에도 문제가 없지는 않다. 특히 해외 특파원들 중에는 프레스클럽이나 취재 과정에서 술을 지나치게 마신다. 그리고 특종을 놓치게 되면, 그 핑계로 몸이 아팠다는 구실을 대는 것이다.
그러나 불리한 조건에서 세계를 여행하는 것이므로, 때로는 병에 못 이기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므로 병에 걸려 취재를 할 수 없게 되지 않는 것이 우수한 저널리스트의 최우선의 조건인 것이다. 지금이 인생에 한번밖에 없는 기회일지도 모른다. 줄리의 가슴 속에 프로 근성이 고개를 쳐든다. 일단은 단념하고 인도에서 떠날 결심을 했으나, 지금 특종이 앞에서 손짓하고 있다.
다코이트의 두목이 카슈미르의 스리나가르에서 5일 후 테러리스트 모임이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왕자의 도움이 없다면 취재는 어려울 것이다. 그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카슈미르에 가는 것을 단념하고 미국에 돌아가 일상의 생활을 계속할 수도 있다. 그리운 나라가 된 이 인도에서의 추억을 고이 간직한 채... 일, 편집장, 뉴스룸의 동료들... 지금까지는 그것만으로 만족해 왔기 때문에, 앞으로도 그 세계에서 즐겁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왕자는 내 사랑을 엉망으로 짓밟아 버렸다. 이대로 그냥 미국에 돌아간다면, 일마저도 그에게 짓밟히는 결과가 된다. 그래, 난 결코 그렇게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아.
「왕자님은 가시지 않나요?」
줄리가 다짐하듯 물었다.
「자이는 바빠서 시간이 없어요.」
부인이 대답했다.
「거기서는 외부와 연락을 취하기가 아주 어려워요. 전화나 텔렉스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아요. 거기서는 일에 대한 지시를 일일이 내리기 어렵다는 거예요.」
줄리는 테러리스트 집회에 공격을 가하기 위해 왕자가 직접 카슈미르에 갈 필요가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는 이미 몇 주일 전에 믿을 만한 정보원을 카슈미르에 보내 놓고 있다. 그리고 지금쯤은 경찰도 움직이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것도 부족하여 군대까지 출동했을지도 모른다.
「오늘 오후, 자이가 프리야를 데리고 나갔어요.」
부인이 말을 이었다.
「요즘에는 프리야의 마음이 제법 가라앉아, 자이의 청을 받아들였어요. 난 정말 기뻐요. 전에는 자이와 같이 외출하는 것이 그 아이의 가장 큰 즐거움이었기 때문에...」
부인은 옛날을 생각하고 가만히 미소지었다.
「어디 갔을까요?」
「글쎄, 자세히는 모르지만 아마 일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요. 자이는 가끔 공장을 방문해서 공장장과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거든요. 아마 2, 3일 후에야 돌아올 모양이에요.」
프리야를 데리고 갔다면, 테러리스트 사건과는 관계가 없을 것이다. 줄리는 생각에 잠겼다.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면 왕자와 마주치지 않고 카슈미르에 갈 수 있을 것이다. 거기서 취재하고 기사를 쓴 뒤 그대로 뉴욕으로 돌아간다면...
왕비는 내일 아침 떠나면 어떻겠냐는 줄리의 제안에 두말없이 찬성했다. 이 시기에는 언제나 여름 궁전에 가기 때문에, 저쪽에서는 항상 맞을 태세가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부인이 방에서 나가자, 줄리는 국제전화를 신청했다. 호출전화가 걸려왔을 때 줄리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시끄러운 벨 소리에 눈을 뜬 줄리는 어둠 속에 손을 내밀어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줄리, 들리나?」
하딩 편집장의 희미한 음성이 멀리서 들려 왔다. 직접 편집장과 대화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에 깜짝 놀랐으나, 줄리는 뉴델리를 떠나 여름 궁전에 가게 되었다는 것을 간결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연락이 필요할 때를 위해 여름 궁전의 전화번호와 텔렉스 넘버를 가르쳐 주었다.
「지금 어디 있지?」
「아직 뉴델리에 있어요.」
줄리는 다코이트를 만났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그 두목이 테러리스트에 대해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고 했다.
「왕자도 같이 가나?」
「아니에요. 왕자는 여기 일이 바빠요.」
국제전화였기 때문에 줄리는 큰소리로 말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하딩 편집장은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저널리즘의 세계에서 살아 온 편집장은 예리한 직관력을 가지고 있었다. 줄리는 순간 자신의 심정이 탄로난 것 같아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너무 위험한 것이 아닐까, 줄리?」
편집장이 겨우 말했다.
「나한테 필요한 것은 기사야, 죽은 특파원의 몸을 이 손으로 안는 것은 질색이라구. 줄리, 부디 조심하도록 해.」
편집장은 또다시 충고했다.


비행기가 착륙태세를 취하는 소리에 줄리는 눈을 떴다. 창밖에는 세계 제일의 높은 산맥이 솟아 있었다. 부인의 이야기에 따르면, 히말라야 산맥은 320km의 길이로서 세계에서 제일 높은 산 여섯 개 중 네 개가 이 산맥에 있다는 것이었다.
트랩을 내려 공항 로비로 가는 도중, 줄리는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하늘을 향해 치솟은 눈에 덮인 봉우리는 구름에 가려 있었고, 능선의 초원에는 작고 노란 꽃이 만발해 있었다. 심호흡을 하니 상쾌한 공기 때문에 가슴이 시원해졌다. 인생은 아름답고,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그래, 가슴속의 깊은 상처만 아니라면...
「어쩐지 여기 오는 순간부터 안색이 좋아진 것 같군요, 줄리.」
부인은 상기되어 있었다.
「정말, 여기 오기를 잘했어요?」
여름 궁전에서 차가 마중 나와 있었다. 줄리는 호기심에 가득 찬 눈으로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뉴델리는 이국적인 느낌이 들었으나, 이 스리나가르는 별천지와 같았다. 스리나가르는 주도(州都)이기도 하고 규모도 작지 않았으나, 여기 사는 사람들의 모습은 뉴델리 시민과는 아주 달랐다. 찌들지 않은 싱싱한 표정, 날렵한 몸놀림, 당당한 걸음걸이는 대도시와 전혀 다른 느낌이 들었다.
길 바로 옆에 있는 논에서는 농부들이 소를 부리며 일하고 있었다. 차는 별로 보이지 않았고 상자 모양의 3륜차 택시가 가끔 눈에 뜨일 뿐이었다. 그 택시를 타면 아무리 멀어도 차비가 2루피밖에 안된다는 것이었다.
「이 부근에는 농가가 많은가요?」
줄리는 시트에 깊숙이 몸을 묻으며 미슬라 부인에게 물었다.
「네, 그래요. 이 근처는 카슈미르 계곡의 일부예요.」
부인이 설명하기 시작했다.
「스리나가르는 골짜기의 심장이라 일컬어지고 있어요. 히말라야 산맥과 카라콜룸 산맥이 이 지방을 비스듬히 가로지르고 있기 때문에 경작할 만한 토지는 적지만요.」
줄리는 원시적이면서 힘이 넘치는 주변환경을 둘러보면서 마치 왕자의 모습과 흡사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 놀라운 자연 속에서 그를 보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었다. 줄리의 가슴은 후회로 가득 차 있었다.
「왕자님은... 아니, 돌아가신 주인께서는 인도가 독립하기 전에 이곳을 다스리고 계셨나요?」
줄리가 다시 질문했다.
「아니에요.」
부인은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미슬라 가문 사람 가운데서 남편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여기에다 여름 궁전을 지었어요. 카슈미르를 다스리고 있던 마하라자 왕의 허락을 받고... 마하라자 왕도 힌두교도였죠. 카슈미르는 힌두교의 성지예요. 힌두교의 가장 오래 된 사원은 이 스리나가르의 언덕 중턱에 있어요. 그리고 히말라야에는 위대한 성자와 현인이 많이 살고 있어요. 아주 오랜 옛날부터 말이에요. 옛날 이슬람교도와 힌두 교도가 이 근처에서 큰 싸움을 벌였어요. 이처럼 아름다운 자연이 증오 때문에 수라장이 됐다는 생각을 하면 슬픈 일이지요.」
부인은 괴로운 듯이 말했다. 줄리는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왕자는 미슬라 부인만큼 경건한 힌두교도는 아니었으나, 그 사람이라면 이 변경에 있는 산들의 순수한 가치를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줄리는 그가 자연의 정신적 가르침을 일상생활에 되살리고 있는 것을 몇 번이나 목격해 왔다. 왕자가 인생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있는 것은 종교의 가르침에 충실해서라기보다는 그의 의식 깊은 곳에 뿌리내린 미슬라 가문의 정신에서 연유하는 것이리라.
「저기를 봐요!」
미슬라 부인이 큰소리로 말하는 바람에 줄리의 생각이 중단됐다.
「저것이 우리 궁전이에요.」
차가 멈췄다. 줄리는 왕비가 가리키는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반짝반짝 빛나는 푸른 호수에 흰 대리석 건물이 떠올라 있었다.
「제 눈이 어떻게 된 것이 아닐까요?」
줄리는 미소를 띠고 왕비를 돌아다보았다.
「아니면, 궁전이 정말 떠 있는 건가요?」
「작은 섬 위에 세워져 있어요. 아름답죠?」
부인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카슈미르에 오면 언제나 마음이 편해져요. 여기서 여름을 보내는 것을 난 아주 좋아한답니다. 자, 어서 가요. 시카라가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몇 명의 남자가 다가와 번쩍거리는 메르세데스를 둘러선다. 줄리가 차에서 내리자 찬탄의 눈길이 그녀에게 돌려졌으나, 그들의 시선은 별로 노골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가끔 부끄러운 듯이 줄리에게 눈길을 보내면서 작은 소리로 무어라 수군거렸다. 줄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라는 말뿐이었다.
저 사람들은 나를 왕자의 애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사실이 그렇다면 얼마나 좋을까...
줄리는 터무니없는, 하지만 자신에겐 몹시 괴로운 생각을 가슴속에 숨겼다.
「압달!」
미슬라 부인이 외쳤다.
「다시 만나서 반갑구나.」
왕비에게 이름을 불린 사나이가 공손히 앞으로 나와 인사를 한다. 압달은 돌계단을 내려가, 헝겊 닫집이 있는 작은 배를 기슭 쪽으로 끌어당겼다. 줄리는 그의 부축을 받고 작은 배에 올랐다. 왕비는 맞은편 자 리에 먼저 앉아 있었다. 압달은 배를 기슭에서 밀어낸 뒤 자신도 뛰어올라 노를 잡았다. 작은 배가 호수로 미끄러져나갔다.
「이것이 시카라예요, 줄리.」
왕비가 말했다.
「물 위의 택시라 생각하면 될 거예요. 이 호수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어디 갈 때마다 이것을 이용해요.」
「호수에 사는 사람이 달리 또 있나요?」
왕비는 대답 대신 오른쪽을 가리켰다. 줄리가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평평한 지붕의 배가 여러 척 늘어서 있었다.
「여기가 다르 호수예요. 이 호수에는 저 배를 집으로 삼고 사는 사람이 있어요. 배를 빌려주는 사람도 있구요. 전세계에서 찾아오는 관광객에게 호텔 대신 빌려주기도 해요.」
압달은 세상에 태어난 때 노를 손에 쥐고 나온 것이 아닌가 착각될 정도로 능숙하게 노를 저어 나갔다.
이윽고 배가 궁전이 있는 기슭에 닿았다. 기슭에 있는 돌층계는 직접 궁전의 테라스에 이어져 있었다.
줄리는 배에서 내려보고 깜짝 놀랐다. 마치 동화의 나라에 와 있는 기분이었다. 히말라야 산록의 호수에 떠 있는 궁전에서는 중세의 분위기가 풍기고 있었다. 궁전에서 시중드는 궁녀들의 소근거리는 소리, 칼을 내리치는 날카로운 소리, 칼이 부딪치는 소리, 싸움에 져서 포로가 된 적의 왕비가 도망치려고 하는 발소리...
이런 소리들이 지금도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궁전은 결코 음산하거나 음침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밝은 햇빛이 내리쬐는 푸른 수면 위에, 많은 시카라가 분주히 내왕하고 있었다. 놀러 가는 것일까, 아니면 일을 하러 가는 것일까?
노가 수면 위로 나올 때마다 은빛 물보라가 튀었다. 물가에서는 아이들이 환성을 지르며 뛰놀고 있었다. 기도를 드리고 있는 노인의 모습도 멀리 보였다. 그 너머에는 히말라야의 산들이 길게 누워 있었는데 인적이 없는 춥고 황량한 땅에는 성자가 산다고 한다. 산은 무척 높았으나, 손을 내밀면 눈을 이고 있는 산정이 잡힐 것만 같이 선명했다.
「이제 그만 들어가요, 줄리.」
왕비의 노래하는 듯한 목소리가 줄리의 꿈속으로 들어왔다.
「저 여자는 압달의 아내예요. 그녀가 방으로 안내할 거예요.」
방에 짐을 풀고 잠시 휴식을 취한 줄리는 여름 궁전의 탐험을 시작했다. 작은 정원에는 아름다운 돌로 쌓은 멋진 전망대가 있고, 화려한 빛깔의 공작이 무거워 보이는 날개를 펼치면서 우아하게 걸어다니고 있었다.
줄리는 황금빛 인도의 신상(神像)과 건조한 공기에 적당히 습기를 뿜어 주는 샘가를 지나 안뜰을 가로질렀다. 우연히 들어선 방에는 왕가의 사치스러움을 단적으로 표현한 실크와 울의 수직 융단이 깔려 있었고, 나직한 소파와 쿠션이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그밖에는 가구다운 가구가 없었다.
천천히 걸어가다가 큰 호랑이 박제와 부딪칠 뻔했는데 왕방울 같은 눈은 굶주림을 나타내고 있는 것 같아 섬찟했다. 줄리는 아시아의 신비에 매료되고 있었다. 자이의 조상은 집단적으로 공격해오는 적이나 질투심 많은 이웃에게 생명과 재산의 위협을 덜 받는 여름이 되면, 이곳에 와서 한가로이 즐거운 한때를 보냈던 것이다.
그러나저러나 줄리는 이처럼 장려한 궁전은 처음 보았다. 마치 자이를 위해 세운 궁전 같았다. 줄리는 기둥이 많은 베란다로 나가 멀리 보이는 풍경을 바라보았지만 마음속으로는 타는 듯한 호랑이 눈에 갈색 피부의 단아한 얼굴을 가진 사나이를 생각하고 있었다.
「마담! 마담!」
누군가가 다급하게 줄리를 불렀다. 줄리는 발코니에서 몸을 내밀었다. 밑에 있는 작은 배에서 한 소년이 줄리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소년의 얼굴은 인형처럼 귀여웠다. 눈은 카슈미르 지방 사람 특유의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머리는 검고 곱슬곱슬했다.
「당신은 누구예요?」
히말라야 산록의 호수에 떠오른 궁전이 자아내는 신비적인 무드에 완전히 취해 있던 줄리는, 하마터면 인도의 전설에 등장하는 젊은 크리슈나 왕이 나타난 것으로 착각할 뻔했다. 크리슈나 왕은 이 소년과 비슷한 나이에 그려졌던 것이다.
「나는 가르자라고 해요.」
새로운 꼬마 친구는 그 한 마디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지, 곧 배에 실려 있는 가죽 제품을 보여 주었다.
「이것을 사지 않겠어요?」
「그 베스트가 참 예쁘구나.」
줄리는 큰소리로 말하고, 흰 모피가 달린 부드러운 새끼양 베스트를 가리켰다.
「어디서 가져왔지?」
「우리 아빠는 사냥꾼이에요.」
소년이 대답했다.
「이것은 지난 겨울 아빠가 산에서 잡은 거예요. 엄마와 누나가 가죽을 벗겨 코트와 베스트, 또 모자도 만들어요.」
줄리는 그 베스트를 샀다. 가르자는 정직했다. 상상 이상으로 많은 돈을 받을 수도 있었으나, 소년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 때 줄리의 머리에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문득 내려다보니, 가르자는 어른처럼 진지한 눈으로 줄리는 쳐다보고 있었다.
「가르자, 스리나가르에 안내해 줄 만한 사람이 어디 없을까?」
소년은 가만히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그러더니 안내자가 되면 많은 보수를 받을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는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두 사람은 이튿날 아침 8시에 같은 장소에서 만날 약속을 했다.
가르자가 작은 배를 저어 사라지는 것을 보자, 줄리는 갑자기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역시 미슬라 부인에게 전문적인 가이드를 소개받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르자에게는 무언가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기민하고 영리해 보였다. 소년다운 호기심과 다할 줄 모르는 에너지를 가진 그는, 이상한 것에 흥미를 나타내는 관광객을 유혹하는 직업적인 가이드보다는 훨씬 더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더구나 소년은 영어에도 능숙했다. 줄리는 뉴델리에서 힌두어를 좀 공부했으나, 카슈미르 지방의 언어는 울두어였다. 줄리가 알고 있는 한, 테러리스트 집회를 취재하는 저널리스트는 달리 없는 것 같았다. 다코이트의 두목 이야기가 확실하다면, 집회가 열리기까지는 아직 사흘이 남아 있다.
왕자가 그 정보를 경찰에 통고했다면, 경찰도 어떤 행동을 개시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특파원들도 이리 몰리겠지... 저널리스트는 언제나 경찰의 움직임에서 눈을 떼면 안되지만 경찰도 정보가 새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한편 테러리스트에게 조금이라도 눈치채이면 모든 것이 허사가 될 것이다. 신문기자, 특히 해외 특파원은 집단적으로 행동하는 일이 많다. 그러나 줄리는 뉴델리에서 다른 신문사의 특파원과 그다지 친밀하게 지내지 않았다. 이번과 같은 경우, 저널리스트들이 몰려왔다가는 모처럼의 특종 기사를 얻지 못하게 될 가능성도 있다.
줄리는 이번 취재의 성공이 초래할 결과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계속 왕자와 같이 일을 해왔다. 하지만 그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된 지금, 내가 없으면 너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는 만족감을 그에게 결코 줄 수 없다. 줄리는 입을 꼭 다물었다. 이것이 마지막 일이 된다면, 어떤 일이 있어도 이번 취재를 성공시켜야 한다.
잠시 후, 줄리는 조용한 안뜰의 벤치에 앉아 스리나가르의 지도를 살피고 있었다. 이때 복도에서 인기척이 있었다. 누군가가 달려오고 있다.
「어머, 프리야!」
줄리는 일어나서 달려오는 공주를 꽉 껴안았다.
「언제 왔어요?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요.」
「나도 그래요!」
젊은 공주는 환한 얼굴로 줄리를 바라보며 기쁜 듯이 웃었다.
「어머니도 깜짝 놀라셨어요! 아, 줄리! 모든 일이 잘 됐어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어떻게 됐죠? 이야기해 주세요.」
줄리는 공주를 앉히고 자기도 옆에 앉았다.
「오빠가 어제 나를 여행에 데려간 것은 알고 있죠?」
줄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줄리, 오빠는 훌륭한 분이에요.」
프리야는 기쁜 듯이 눈동자를 빛냈다.
「오빠는 아주 친절해요. 내 걱정을 해주고... 그래요, 오빠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나도 전부 이야기했어요.」
「라르에 대한 것도 말했다는 건가요?」
줄리는 깜짝 놀랐다.
「네.」
프리야가 방긋 웃으면서 대답했다.
「하지만, 오빠는 아주 다정했어요.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어요. 동정심이 많고... 그래요, 쌀쌀하지가 않았어요. 그래서 갑자기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아시다시피 오빠는 정치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어요. 그 힘을 이용해서 나를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내가 고백을 했을 때도 오빠는 별로 놀라지 않았어요. 뿐만 아니라, 놀랍게도 라르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어요! 라르는 당신이 취재하고 있는 테러리스트의 일당이라고 하더군요. 무도회가 있던 날 밤, 나를 만나러 궁전 뜰에 왔다가 궁전에 폭탄을 장치했던 모양이에요. 오빠의 사무실에서 서류를 훔치라고 했을 때, 그는 본심을 드러냈어요. 오빠는 잠자코 있었지만, 언제나 내 신변에 신경을 쓰고 있었대요. 오빠는 테러리스트가 집이나 회사에 잠입할 것을 알고 대기하고 있었다는 거예요. 그들은 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대요. 이상한 이름이기는 하지만.」
공주는 소녀다운 결벽성을 드러내며 얼굴을 찌푸렸다.
「왕자님에게... 그 서류에 대찬 이야기도 했나요?」
「네, 모두 다 이야기했어요. 어떤 식으로 훔치고, 어떻게 당신한테 들키고, 또 어떻게 도로 갖다 놓았다는 것을 모두 이야기했어요. 하지만, 내가 라르에게 그 서류를 넘겨주었더라도 라르는 아무 일도 못했을 거래요. 오빠의 부하가 처음부터 계속 라르를 감시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오빠는 도리어 라르를 감시하면서 도움이 될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다고 했어요. 라르는 얼마나 몹쓸 사람인지 몰라요! 어쩌다가 내가 그런 사람을 사랑하게 됐을까요? 오빠는 그가 테러리스트라는 것을 알고, 역으로 이용하고 있었던 거예요.」
공주는 깊은 생각에 잠기며 덧붙였다.
「어떻게 해서 이야기할 생각이 들었죠?」
줄리가 물었다. 자기 목소리인데도 아주 먼데서 들려오는 소리 같았다.
왕자는 그 극비문서를 훔친 것이 내가 아닌 줄 알았으면서도 아무 말도 해오지 않는다... 미안하다는 말조차도.
마음 어딘가에서 작은 희망의 실이 뚝 끊어졌다.
그가 나를 사랑했다는 것은 역시 거짓이었어. 나는 마치 철없는 소녀처럼 그의 말을 믿고 있었던 거야. 줄리를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 그 말에 나는 속았던 거야. 그에게는 적을 정복하겠다는 본능이 있을 뿐이다. 분명히 한 번은 나를 정복했는지 몰라도 두번 다시 그렇게 되지는 않을 거야.
「오빠는 이제 아무 걱정도 할 필요 없대요. 그리고 자기가 택한 약혼자가 내 마음에 들어서 기쁘다고 말했어요.」
프리야는 부끄러운 듯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곧 아이가 생기면 정신없이 바빠질 거라고 하더군요.」
프리야는 어린아이처럼 들떠 있었다.
「오빠는 프라카슈 씨를 아주 좋아해요. 내가 결혼하게 되면, 그를 사업의 파트너로 삼겠다고 했어요. 결혼에는 이제 아무 장애도 없을 거라고 오빠가 보증해 주었으니 나는 이제 안심하고 시집가게 됐어요. 오빠는 약속을 어기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줄리, 오빠는 모든 것을 다 용서해 주었어요!」
공주는 감격하여 소리쳤다.
「나는 지금까지 정말 나쁜 누이동생이었어요.」
그녀는 힘있게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오빠는 상대방은 프로니까 제가 말려든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하며 위로해 주었답니다. 나는 이제 가슴을 펴고 프라카슈 씨와 결혼할 수 있어요. 그런 훌륭한 사람과 결혼할 자격이 없는 여자인데도요. 줄리 난 정말 행복해요.」
「정말 잘 되었어요, 프리야.」
줄리는 겨우 이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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