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소설] 불타는 인도 - WAU (18) [완결]

슬러 작성일 05.06.23 08:5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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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줄리는 차가운 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가까스로 수면에 얼굴을 내밀었다. 물을 토해내면서 주위를 둘러보니, 모든 것이 시작할 때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결말이 나고 있었다.
경찰의 모터보트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달려와 급정거를 했다. 왕자가 축 늘어진 테러리스트를 경찰에 인계했다. 사나이는 목에 깊은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는 죽은 것일까? 줄리는 그 사나이가 죽건 말건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는 자신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공포가 밀려들어왔다. 무서운 위험이 사라지고 겨우 감각이 되살아났던 것이다.
「줄리! 줄리! 괜찮아요?」
가르자의 높은 목소리가 줄리의 마비된 신경을 자극했다. 그는 시카라 위에 서서 무거운 노를 꼭 붙들고 있었다. 줄리가 웃는 것을 보고야 비로소 그의 얼굴에서 걱정의 빛이 사라졌다.
「괜찮아, 가르자, 너도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미안해. 이렇게 가까이까지 온 줄은 몰랐어. 너한테 무슨 일이 생겼더라면... 사과할 수도 없을 뻔했어. 어머! 그런데, 내 카메라를 못 봤니? 시트에 떨어뜨린 것 같은데.」
「줄리는 언제나 그렇게 재기가 빠른가?」
옆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줄리는 물 속에서 얼른 방향을 바꾸었다. 뒤에서 왕자가 웃고 있었다.
기쁜 듯하면서도 조롱하는 것 같기도 한 그 검은 눈, 젖은 머리칼에서 연신 뺨으로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가 이렇게 가까이 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살려 줘서 고마워요.」
줄리는 감정을 억제하고 일부러 약간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처럼 다정하고 그리운 듯 바라보는 것이 2, 3 주일 전의 나에게는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뜨거운 생각은 순간적인 것이었다. 지금의 나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줄리는 왕자에게 등을 돌리고 가까이 있는 하우스 보트를 향해 얼른 헤엄치기 시작했다.
「잠깐 기다려!」
왕자가 곧 줄리를 따라잡았고 그의 손이 줄리의 팔을 붙들었다. 줄리가 돌아서서 그를 노려보려 했을 때, 왕자는 힌두어로 무어라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줄리는 어서 그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가슴의 고동이 점점 더 빨라지고, 숨도 쉴 수 없다. 자신이 그에게 얼마나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지 줄리는 가슴 아프게 깨닫고 있었다.
그는 무의식중에 그녀의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까운 하우스 보트의 포치에 있던 사나이가 무거운 꾸러미를 던졌다. 왕자는 테러리스트의 배에 기어올라갔고 그는 자기가 입은 것과 똑같은 두꺼운 모직 폰초를 펼쳐 보였다.
「어서 이것을 입어.」
왕자는 물에서 올라오는 줄리의 머리부터 폰초를 씌워 주었다.
「고마워요.」
줄리는 거의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말했다. 블라우스가 물에 젖어 몸에 꼭 달라붙어 흰 피부가 드러나 보였으나 줄리에게는 그것을 깨달을 여유조차 없었다. 가르자가 배를 저어 왔다. 그리고는 존경의 시선으로 왕자를 쳐다본다.
「카메라와 백을 이리 갖다 주겠니, 가르자? 여기 포치에 서 있으면 방해가 되지 않을 것 같으니까.」
줄리는 가르자로부터 카메라와 백을 받아들었다. 그런 난투극이 있었는데도 카메라는 무사했다. 수갑을 찬 테러리스트들이 머신건으로 무장한 경관들에게 포위되어 끌려가고 있었다. 줄리는 얼른 카메라를 들고 핀트를 맞췄다. 그 뒤로 한 시간 동안, 줄리는 온통 일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왕자와의 재회에 마음을 쓸 여유조차 없었다. 체포된 테러리스트 중에는 국제적으로 지명수배를 받고 있는 거물도 몇 명 있었고 대부분이 적어도 몇몇 나라로부터 지명수배를 받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주름투성이의 한 사나이가 등에 총끝을 갖다 대자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모터보트에 올랐다. 줄리는 그 사나이를 카메라에 담으면서 가슴에 블쾌감과 만족감이 퍼져나가는 것을 깨달았다. 그 사나이는 로마역 폭파사건을 계획하고 실행한 의 리더인 세르지오 오르가냐였다.
그리고 체포된 테러리스트 중에는 여자도 두 사람 있었다. 테러리스트들을 실은 경찰의 모터보트가 가버리자, 두 구의 시체가 운구되었다. 두 경관에게 질질 끌려가는 시체는 무수히 탄환을 맞아, 거의 얼굴을 식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줄리는 고개를 돌렸다. 도저히 카메라에 담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중에 경찰의 시체 안치소에서 촬영해야지...
한 시체는 목 둘레에 가느다란 핏자국이 나 있었다. 부은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는데,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었다...
아 그렇다. 라르 데라르! 마지막 경관이 테러리스트의 배에 뛰어올라, 뒤쪽 포치에서 모습을 감췄을 때의 일이 머리에 떠올랐다. 데라르는 중요한 집회에는 참석도 하지 못하고, 멍청히 망만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때 그 경관이 달려들었던 것이다. 그 결과 이런 모습이 되다니...
카슈미르 경찰서장과 이번 공격을 지휘한 군대의 사관이 하우스 보트에서 나란히 나왔다. 줄리는 앞으로 다가가 신문사의 신분증명서를 내보였다. 이런 경우에는 자기 이름이 널리 알려질 것이므로, 대부분의 사람은 쾌히 인터뷰를 받아들이기 마련이다. 두 사람도 얼른 승낙했다.
그때 왕자가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뒤에 몇몇 사람을 거느리고 있었다.
「미슬라 왕자와는 아는 사이십니까, 미스 코넬?」
경찰서장이 의자에 앉으면서 줄리에게 물었다.
「이번 사건에는 미슬라 왕자의 도움이 컸습니다.」
줄리는 가만히 끄떡이고 질문을 시작했다.
「미슬라 왕자는 어떤 방법으로 경찰을 도왔나요?」
서장의 말에 따르면 왕자의 명령을 받고 이 부근을 감시하던 정보부원이 테러리스트의 하부조직에 잠입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2주일 전, 그 사나이가 테러리스트들이 하우스 보트를 빌 거라고 연락을 취해 왔던 것이다. 줄리는 펜을 놀리던 손을 멈추고 왕자를 쳐다보았다.
그런 단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나한테는 아무 말도 안해 주었군요!
줄리는 속으로 나무랐다. 왕자는 부드러운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줄리는 얼굴을 붉히고 다시 노트로 시선을 돌렸다. 군대의 사관은 공격이 감행되었을 때 하우스 보트 안에서 일어난 일을 자세하게 이야기했다.
맨 먼저 망을 보던 데라르가 사살되었다. 밤 사이에 속속 모여든 테러리스트들은 객실에 있었는데, 왕자의 부하가 미리 창문을 열고 커튼을 걷어 놓았다. 앞의 창문으로 두 사람, 또 선미에 이어지는 문으로도 머신건을 가진 경관이 몇 사람 들어갔다.
테러리스트들은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무기를 버렸다. 도망치려고 한 사람 중의 하나는 독일인으로서 줄리도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으나 결국 총격을 받아 죽고 말았다.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은 줄리의 배에 뛰어들었던 사나이다.
다시 몇 분 동안 질문을 한 뒤, 경찰서장과의 인터뷰를 끝냈다. 줄리는 두 사람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가까이 있던 부하 직원에게 두 사람 이름의 정확한 철자를 물었다.
내일이면 경찰의 공식발표가 있게 되겠지. 이제는 한시 바삐 이 기사를 웨스 하딩 편집장에게 보내는 일만이 남았다. 뉴욕과는 몇 시간의 시차가 있으므로, 지금 곧 보내면 내일 아침 조간에 실릴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이 기사가 조간에 실린다면, 전세계 대 신문사의 아시아 특파원 사이에는 난리가 날 테지... 악을 쓰러뜨리고 선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이 사건은 누가 뭐래도 뉴스 가치가 충분히 있는 것이다. 테러리스트의 국제적인 네트워크에 큰 타격을 가했으므로, 서방측 자유주의 국가들은 크게 안도하겠지. 이 기사는 세계적인 통신사를 통해 전세계로 퍼져나가게 될 것이다.
줄리는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는 남자들을 뒤에 두고 배의 포치로 나갔다. 왕자도 뒤따라 포치에 나오려 했으나 사관이 붙들었다. 줄리는 왕자와 사건 이야기를 나눌 생각은 없었다.
원고를 보내고 나면 다시 왕자와 만날 일도 없을 것이다. 그의 궁전에서 떠나, 두번 다시 왕자 생각을 않고 살아가게 되겠지. 가르자도 이제는 학교에 가야 할 것이다.
줄리는 경찰의 보트를 빌어 타고 궁전에 돌아가기로 했다. 다행히도 선대(先代)의 왕자가 열렬한 아마추어 카메라맨이었기 때문에, 궁전에는 훌륭한 암실이 있었다.
미슬라 부인은 텔렉스와 마찬가지로 암실도 자유롭게 사용하도록 배려해 주었고, 소형 팩시밀리는 뉴욕에서 가져왔기 때문에 남의 손을 빌지 않더라도 사진을 곧 본사에 보낼 수 있다. 줄리는 한 시간 반에 걸쳐 텔렉스로 기사를 본사에 보냈다. 인도에 온 목적은 완벽하게 이루어졌다.
그녀는 잠시 동안 손을 키에 얹고 멍청히 앉아 있었다. 오랫동안 조금씩 쌓아올린 노력이 이제야 보답을 받게 된 거야. 테러리스트 회합은 저지되고, 그들은 체포되었다. 내가 쓴 기사는 전세계에서 읽힐 것이다!
그러나 끝나고 보니 허탈감만이 엄습해왔다. 기사는 오늘 아침의 극적인 사건부터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치밀한 조사로 얻은 사실을 시간을 소급해 가면서 써나갔다. 그 중에서도 특히 그녀는 테러리즘의 속성을 강조했다. 국제적인 테러 단체의 하부 조직원들은 라르 데라르가 프리야를 교묘히 조종했듯이, 전세계에서 여러 사람을 조종하고 있다.
이러한 그들의 수법을 사람들에게 경고하는 것은 최선의 방지책이 될 것이다. 줄리는 취재의 결과를 모두 문자화시키자 스스로 대견하여 흡족한 기분에 젖어들었다. 이윽고 줄리는 텔렉스의 스위치를 끄고 책상에서 일어났다.
며칠 동안 긴장되어 있던 마음이 갑자기 풀려 어쩐지 우울한 생각마저 들었다. 지금까지는 일 때문에 정신이 없었으나, 일이 끝나자 가슴에 큰 구멍이 뚫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제부터 인생을 다시 시작해야 할 것 같은 착잡한 심정이었다. 줄리는 자기 방으로 돌아가자 압달의 아내에게 따뜻한 식사를 부탁했다.
그리고 식사가 나오기 전에 얼른 샤워를 하고, 다르 호수의 물로 더러워진 머리를 샴푸했다. 그녀는 시원스런 라벤다빛 선드레스로 갈아입고 식사를 한 뒤 노트를 한 손에 들고 밖으로 나갔다. 복도를 한참 걸어간 곳에 안뜰이 있었다.
내일 있을 경찰의 발표에 대비하여 요점을 정리해 두고자 나무 그늘의 벤치에 앉았으나, 하도 경치가 아름다워 그쪽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노트를 땅에 놓고 나무줄기에 기대고 있자니 바위틈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고 바로 옆에서는 공작이 주둥이로 날개를 쪼고 있었다. 새벽의 긴장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줄리는 차차 정신이 맑아졌다.
다음 취재는 무엇이 될까? 아마 제네바 회담이 될지도 모른다.
하딩 편집장의 말에 따르면 다음달에 그 회담이 열릴 것이라고 했다.
「방해가 안될까?」
왕자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으려 하고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그가 말을 걸어왔다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줄리는 노트를 주워 벤치에 올려놓고, 고쳐 앉으면서 웃는 얼굴로 돌아보았다.
왕자와는 되도록 애매한 가운데 헤어지고 싶었다. 그리고 그에게서 바보 취급을 당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당당해지고 싶었다.
「나를 증오하고 있겠지?」
왕자는 작은 안뜰을 가로질러 장식이 된 손난간 쪽으로 걸어왔다. 그는 난간에 팔을 올려놓고 줄리를 돌아다보았다. 블루진과 데님 셔츠로 갈아입은 그의 검은 머리는 아직도 젖어 있는 듯했다. 왼쪽 뺨에 작은 상처가 두 군데 나 있었다.
「그래요. 저는 화가 나 있어요. 하지만 걱정할 것 없어요.」
목구멍이 점점 죄어드는 것 같았다. 그에게는 아무말도 않기로 결심했었는데, 분노가 저절로 터져나왔다.
「프리야한테 이야기를 들었겠죠? 내가 그 서류를 훔친 게 아니란 말을. 그런데도 당신은 하우스 보트의 정보를 알려 주지 않았어요! 나는 남김없이 정보를 제공했는데도 말이에요. 결국 나는 당신한테 배신당한 거예요.」
「솔직히 얘기해서, 나는 줄리가 그것을 발견하기를 원치 않았어.」
왕자의 검은 눈동자가 그녀의 푸른 눈을 똑바로 바라본다. 줄리는 그를 처음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내가 일에 성공하는 것을 결코 불쾌하게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 아직 내 정체를 의심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저널리스트로서의 내 능력에는 경의를 나타내고 있다. 줄리는 분명히 그것을 깨달았으나, 배반당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말아. 사실은 그게 아니야. 내게 변명 할 기회를 주겠소?」
「아니에요.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아요.」
줄리는 일어났다.
「내일 인도를 떠나겠어요.」
왕자가 줄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제발 내 말을 들어 봐, 줄리.」
그의 손이 따뜻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 목소리에 다정함이 깃들어 있기 때문에 그랬는지 알 수 없었으나, 카슈미르에 온 이후 그녀의 모든 행동을 지배하고 있던 엄격한 자제심이 갑자기 풀리고 말았다.
지금까지 좋은 기사를 쓰겠다는 일념에서 감정을 억제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거절당해 왔다는 고독감이 격렬하게 고개를 들어 마음을 둘러싸고 있던 방어벽을 산산이 무너뜨리고 말았다.
줄리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 왕자의 침실에서 그 일이 있었던 날 이후, 줄곧 억눌러 왔던 격하고도 괴로운 슬픔이 한꺼번에 치솟아 가슴속이 산산조각났다. 줄리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죠?」
줄리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처럼 나를 따돌리다니 말이에요.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면서 ...」
왕자의 얼굴이 고통스러운 듯 일그러졌다.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줄리.」
왕자는 줄리의 어깨에 올려놓은 손에 힘을 주었다.
「정말 내가 잘못했소.」
감정이 한꺼번에 폭발해서 한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줄리는 그의 팔이 허리에 감기는 것을 깨달았다. 왕자는 줄리를 부축하듯 감싸고 안으로 들어갔다. 줄리는 그의 긴 다리가 리드미컬하게 타일을 울리는 소리를 귓전으로 듣고 있었다.
그리고 심한 오열 때문에 가슴이 아팠다. 두 사람은 어느 방으로 들어갔다. 문 옆의 놋쇠 항아리가 광택을 내고 있는 화사한 방이었다. 마루에 깔린 융단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푹신하고, 디자인도 훌륭했다.
벽에는 정성들여 수놓은 비단 태피스티리... 역대의 미슬라 왕자, 즉 민중의 영웅인 그들이 신을 찬양하는 그림이 수놓여 있었다. 인도의 태양처럼 빛나는 순금으로 만들어진 등신대의 상이 방의 네 구석에 놓여 있었다. 네 개의 팔을 가진 상과, 금 코브라를 목에 감고 있는 상, 줄리가 홀에서 본 호랑이보다 훨씬 더 큰 호랑이의 박제가 뒷발을 든 채 발톱은 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눈처럼 흰 표범의 모피가 희게 빛나는 침대 옆 마루에 펼쳐져 있다.
왕자는 부드러운 쿠션이 널려있는 낮은 소파로 줄리를 안내했다. 그녀는 그에게 매달리듯 얼굴을 넓은 가슴에 기대고 계속 울고 있었다. 그는 잠자코 작은 몸을 안고 있었다. 이윽고 울음이 그치자, 왕자는 목덜미를 가만히 쓰다듬으면서 줄리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이제 좀 괜찮소? 그 작은 어깨에 무척 많은 짐은 올려놓고 있었군. 나는 괴로운 일이 생길 때마다 이 방에 오곤 하지. 그러면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가라앉거든.」
왕자는 줄리의 등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가벼운 손놀림이 아주 포근해서 잠이 올 정도였다.
지난 며칠 동안 얼마나 긴장되어 있었던가?
줄리는 이제야 비로소 무리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가 당신 방인가요?」
줄리가 조용히 물었다.
「응. 어려서부터 여름에는 여기서 지냈어.」
「어쩐지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방 같군요.」
그녀는 왕자에게서 약간 몸을 빼냈다.
「왜 나를 이 방에 데려왔죠?」
「옛날에...」
왕자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우리 조상이 다스리고 있던 나라 사람들은 분쟁이 일어나면, 미슬라 왕자에게 재판을 받기 위해 이리로 왔어.」
왕자는 말을 끊고 슬쩍 줄리를 곁눈질한다.
「줄리, 지금 우리는 미슬라 왕자의 눈앞에 있어.」
「하지만...」
줄리는 다시 화가 났는지 얼굴을 붉히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의 힘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던 껍질을 부수고 가슴속까지 스며들어왔다.
그러나 다시는 그의 말을 듣고 싶지 않다. 더이상 상처를 받고 싶지 않다. 두번 다시 버림을 받고 싶지 않다.
「잠깐만 기다려 줘.」
왕자가 줄리의 입술을 손으로 막았다. 그의 입술에는 자조적인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전에 내 이야기를 들어야 해.」
검은 눈동자에는 평소의 왕자답지 않게 자신이 없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좋아요.」
줄리가 양보했다.
「어서 이야기해 보세요.」
왕자는 천천히 소파에 고쳐 앉으며 시선을 태피스트리 쪽으로 돌렸다.
「왕가의 전설이지.」
그는 태피스트리를 손으로 가리켰다.
「공포, 불신, 의심에 찬 전설. 최근에도 아시아의 정치정세는 불안정해. 사람들은 모두 불안에 떨고 있어. 옛말에 이런 말이 있어. 높이 올라가면 갈수록 떨어지기도 쉽다는... 줄리는 테러리스트가 움직이기 시작할 때 뉴델리에 왔어. 저널리스트도 자주 스파이 혐의로 고발당하곤 하지. 해외 특파원이 진짜 스파이일 가능성은 꽤 희박하지만 말야.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당신이 이런 사건의 취재에 발탁된 기자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었어. 당신이 일하는 신문사가 어떤 데인지 알게 된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었어. 신문이 이런 사건을 전문적으로 취급한다는 것을 안 것은 말이야, 하지만 처음에 당신이 어머니 손님으로 왔을 때는 그런 것을 알지 못했어. 어쨌거나 당신에 대한 어머니와 프리야의 반응을 지켜보는 동안에 내가 품고 있던 의혹이 눈덩이처럼 불어났지. 당신은 너무 깊게 우리 가족 속으로 파고 들어왔어. 그것이 오히려 더 의심스러웠던 거야.」
「라르 데라르가 교묘히 프리야의 사랑을 손에 넣은 것처럼 말인가요?」
줄리가 말했다.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거로군요!」
줄리를 바라보고 있던 왕자의 눈이 갑자기 타올랐다.
「사실이야. 당신에게는 그것이 가능하리라 생각하고 있었어. 뭐니뭐니 해도 테러리스트들에게 있어서 제일 좋은 방법은 나 같은 사람의 집에 잠입하는 일이니까.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됐어. 나는 나 자신에게, 그리고 스스로의 판단에 자신감을 가질 수 없게 되고 만 거야.」
「내가 당신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는 말인가요? 당신이 내 마음을 흔들어 놓았듯이?」
줄리는 자세를 바로 하고 왕자를 쳐다보았다. 그의 고통을 알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분명히 당신은 내 마음을 흔들어 놓았소.」
그의 얼굴에 갑자기 웃음이 번졌다.
「다만, 어떤 선만은 넘지 않으려고 했어...」
그는 줄리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보고 있었다.
「줄리, 나는 당신을 이용하려고 한 것은 아니야. 나는 오히려 내가 당신에게 이용당하는 것이 아닌가 해서 두려워하고 있었지.」
그녀가 대답을 않자 왕자가 말을 이었다.
「어쨌든 나는 당신을 믿고 싶다는 마음과 싸우고 있었어. 공교롭게도 당신을 의심해야 할만한 사건이 잇따라 일어났어. 테러리스트가 창으로 고개를 내밀고 당신을 보던 밤이 그 좋은 예지. 또 나는 프리야가 유괴당하지 않도록 부하에게 그녀를 감시하게 했는데, 그의 보고에 따르면 당신은 무도회가 있은 다음날 찬드니 차크에서 프리야와 그 애의 보이프렌드를 만났다고 하더군.」
「어머, 까맣게 잊고 있었어요!」
줄리가 외쳤다.
「아그라에서 어머님과 공주에게 경호원을 딸리게 했다고 했을 때...」
「당신에게도 그렇게 하고 있었어, 달링...」
「그랬었군요.」
그녀는 먼 곳을 보는 듯한 눈을 했다.
「그때 당신이 라르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야 했어요. 그렇다면 그날, 프리야를 감싸며 서류를 되돌리려는 무모한 짓은 하지 않아도 좋았을 텐데요.」
「그날... 그것은 테러리스트들이 제일 원하는 서류였어. 줄리, 그 일 때문에 당신에 대한 인상이 얼마나 나빠졌는지 알아? 하지만 그때도, 당신을 손에 넣기 위해서라면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도 좋다는 생각까지 했소.」
왕자가 시선을 들었다. 그 얼굴은 당시의 일을 생각하는지 표정이 험악했다.
「그때 사실 나는 당신과의 관계를 끊어야겠다고 생각했지. 당신에 대해 품고 있던 감정을 더이상 억제할 수 없게 되어 있었어. 하지만, 당신과 영원히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아무 희망도 없다는 것을 알았어...」
그는 힘없이 두 손을 쳐들고 어깨를 으쓱했다. 줄리는 가만히 왕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림이 있어야 할 장소에 하나하나 천천히 끼워 맞춰져 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 비밀의 화원에서 나를 자기의 것으로 만들었으면서도 마음이 변한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그 이튿날 왕자의 사무실에서 나간 남자가, 내가 찬드니 차크에서 라르 데라르와 만났다는 것을 왕자에게 보고한 것이 분명하다.
줄리는 또 왕자가 받은 교육을 생각해 보았다. 그는 어떤 목적을 갖고 접근해 오는 사람을 믿지 말라는 교육을 아버지에게서 받았다. 어려서부터 받아 온 가르침이 이제는 그 몸의 일부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날, 나를 멀리하기 위해 거절한 거로군요?」
줄리가 불쑥 말했다.
「사실이야.」
왕자는 줄리가 지난날의 회상에 잠겨 있는 것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줄리의 말을 들은 왕자의 눈에 안도의 빛이 떠올랐다. 줄리는 자기도 모르게 왕자의 얼굴에 손을 가져가 날카로운 턱의 선을 만졌다.
「그러면 어째서 하우스 보트에 관한 것을 가르쳐 주지 않았죠? 그때는 이미 저에 대한 의심이 풀려 있었을 텐데요.」
줄리의 시선은 수염을 막 깎은 그의 턱에 머물러 있었으나, 이내 그의 눈과 마주쳤다. 그녀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왕자의 검은 눈동자는 뜨거운 정열을 숨기려고도 하지 않고 있었다. 왕자는 손등으로 턱을 괴고, 마치 정열을 줄리에게 전해줄 힘이 자기에게 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은 듯, 단정한 얼굴에 만족스런 표정을 띠었다.
「당신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기 위해서였어.」
왕자는 줄리의 푸른 눈동자를 바라본 채로 말했다.
「너무나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야. 당신의 안전이 걱정스러웠어... 지금도 물론 그렇지만.」
「하지만 저는 기자예요, 자이.」
그녀가 대꾸했다.
「현장에 접근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그것이 제 직업이니까요.」
「이젠 당신을 이해할 수 있소.」
왕자가 대답했다.
「오늘 아침에 똑똑히 보았으니까. 당신은 테러리스트에게 인질로 잡힐 뻔했는 데도 바로 그 직후에 천연스럽게 인터뷰를 했어.」
그는 빙그레 웃었다.
「그런 당신을 보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내 자신에 놀랐어.」
왕자는 줄리의 어깨를 감싸듯이 껴안고 끌어당겼다.
「여기 있으면서 기사를 쓸 수도 있지 않을까? 인도에는 소재가 많이 있어. 아니면 여행을 해도 좋아. 나는 세계 도처에 집을 가지고 있으니까 말이야. 잠시 미국에서 사는 것도 괜찮겠군. 거기서 사업을 확장할 계획도 구상중이니까.」
깊이 있는 목소리가 그녀의 대답을 재촉하듯 끝났다. 분명한 예감이 줄리의 가슴에 떠올랐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하나밖에 없다. 그때 줄리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왕자에 대한 증오가 본심이 아니라는 것을, 억지로 증오하려 했던 것뿐이다.
그가 나를 의심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자기를 지키려는 수단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그를 사랑하고 있어. 이미 어쩔 수가 없어. 그리고 그도 나를 사랑하고 있다.
줄리의 생각이 이렇게 이어져 가다가, 왕자의 목소리가 들려 퍼뜩 제정신을 차렸다.
「사랑해, 줄리. 내 말이 들려?」
「물론이에요.」
따스한 기운이 가슴에 퍼지면서, 줄리의 얼굴은 축복의 빛을 받은 듯이 빛났다.
「결혼해줘, 줄리!」
왕자는 반짝거리는 검은 눈동자로 줄리를 응시했다.
「그래요.」
줄리는 조용히 대답했고,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가 번졌다.
「받아들이겠어요.」
왕자는 와락 그녀를 끌어안고 금발을 애무했다. 그리고는 입술을 가까이 가져오면서 속삭였다.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이 순간을, 이렇게 쉬운 일인데.」
줄리는 여지껏 느껴보지 못한 깊은 애정이 샘솟는 것을 깨달으며 그의 목을 껴안고 살며시 눈을 감았다. 이렇게 멋진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다니!
「이제는 의심하지 않으세요?」
「줄리는 겨우 자유롭게 된 입술로 말했다.」
왕자는 다시 한번 키스했다.
「당신은 믿는다는 것을 내게 가르쳐 줬어. 나를 참된 인생으로 이끌어 준 거야.」
왕자는 다정히 그녀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고, 줄리는 눈을 감은 채 기쁨에 겨워 떨고 있었다. 부모의 죽음, 약혼자의 죽음 등으로 오랫동안 절망감과 버림받았다는 아픈 마음만을 안고 살아 왔던 자신에게서 왕자의 깊은 사랑이 그런 슬픔을 제거해 주었다.
새로운 인생... 사랑과 기쁨으로 넘치는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는것이다...
그의 입술이 줄리의 하얀 피부에 닿아 영원한 낙인을 남겼다. 왕자는 자기의 옷도 벗었다. 왕자의 입술이 목덜미에서 가슴으로 미끄러져간 때, 줄리는 그의 검은 머리를 꼭 안고 있었다.
격렬한 불길이 타올라 온몸이 뜨거워졌다.
「사랑해 주세요, 자이.」
줄리가 그의 귓전에 속삭였다.
「물론이지.」
왕자는 부드럽게 그녀의 가슴으로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그 전에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 주지 않겠소?」
「자이, 당신을 사랑해요, 영원히 당신만을...」
그 말이 달콤한 향기가 되어 공중으로 퍼져나갔다.
두 사람은 서로의 넘치는 사랑을 확인했다. 두 사람의 마음은 하나가 되었고 그들은 눈부시게 빛나는 황홀한 사랑의 기쁨을 동시에 경험하고 있었다.
「나를 이토록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니 믿어지지 않아요. 자이, 말할 수도 없이 기뻐요.」
잠시 후 줄리가 속삭였다.
「필요한 정도가 아니라...」
왕자는 입술로 줄리의 목덜미를 애무했다.
「당신 없이는 살 수 없소. 당신이 없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갈지 모르겠어...」
그는 다시 한번 줄리를 힘껏 껴안았다. 두 사람의 정열은 뜨거운 인도의 하늘을 향해 그칠 줄 모르고 타오르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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