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소설] 불타는 인도 - WAU (17)

슬러 작성일 05.06.23 08:5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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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이튿날 아침, 줄리는 8시가 되기 전에 테라스로 나갔다. 히말라야에서 불어오는 싸늘한 바람이 사정없이 그녀의 뺨에 불어닥쳤다.
「아, 추워!」
줄리는 목을 움츠리고 몸을 떨면서 방으로 돌아 왔다. 그녀는 얼른 갈색 슬랙스와 튼튼한 등산화 차림을 하고, 흰 튜닉 풍의 블라우스 위에 부드러운 가죽 벨트를 꼭 매었다. 그리고 스리나가르 지도를 말아 손에 들었다.
그러나 밖에 나갈 결심을 굳히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제는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으나, 새벽이 될 때까지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왕자를 생각하니, 절망감 때문에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어느 정도 상황을 파악하고 있으면서도 내게 그런 식으로 행동했다. 그것은 나에 대해 애정이 없다는 증거다. 그래, 나는 완전히 버림을 받은 거야. 희망이라고는 흔적도 없어. 아무리 생각해도 내 인생에는 잔인한 운명이 가로놓여 있는 모양이다.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은 이미 아무데도 없는 것일까?
가슴이 쓰렸다. 줄리의 머릿속에 고통스런 생각이 떠올랐다.
에디도, 어머니도...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가 내 앞에서 사라져가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자이가 멀어져 가고 있다. 자이는 내가 누구보다도 사랑한 사람이었는데... 그가 진심을 알면서도 나를 버렸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나는 앞으로도 살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결코 체념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 두려움도 없이 그를 절실하게 사랑했으니, 그 정도의 용기가 있다면 사랑이 없이도 인생을 계속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가르자는 어제와 같은 배 안에서 줄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줄리는 배에 뛰어내려, 뱃전에 가로놓여 있는 두꺼운 판자에 앉았다.
「다르 호수는 얼마나 크지?」
줄리가 가르자에게 물었다.
「한 바퀴 돌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가르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2시간 정도는 걸릴 거예요. 호수를 한 바퀴 돌고 싶으세요?」
「아니, 그러기에는 시간이 좀 부족해, 그리고...」
줄리는 밝은 색깔로 채색된 관광객용 지도를 무릎 위에 펼쳤다.
「이 호수는 위험이 적을 것 같으니, 배를 집으로 이용하고 있는 사람의 집에 가 보고 싶어.」
가르자는 허리를 구부려 유선형 노를 소리도 없이 물 속에 넣었다. 이윽고 간단한 포치가 있는 나무배가 보이기 시작했다. 포치의 층계는 물 속으로 이어져 있었다. 배 양쪽에는 수면과 거의 같은 높이로 좁은 나무 널빤지가 가로놓여 있었고 그것이 복도를 대신하고 있었다.
「오늘은 학교에 가지 않았니, 가르자?」
물이 반짝반짝 빛나 눈이 부셨으므로, 줄리는 이마에 손을 대고 소년에게 물었다.
「오늘은 국경일이어서 쉬는 날이에요. 내일도 쉬고요. 모레는 학교에 가야 하니까 안내할 수 없어요. 내일은 괜찮지만요.」
「내일까지면 충분해.」
가르자는 줄리가 생각에 잠기고 싶어한다는 것을 깨닫고, 아무 말도 없이 하우스보트 사이를 교묘히 저어 나갔다. 가르자의 생각은 옳았다. 줄리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무언가 감각에 호소할 것이 없나 하여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카슈미르의 다르 호수만큼 테러리스트들에게 있어서 몸을 숨기기 좋은 장소도 없지 않을까? 지금은 피서철이므로 외국인이 많이 와도 전혀 의심을 받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배 한 척을 비는 것이 호텔에 묵는 것보다 훨씬 더 안전할 것이다. 주위의 배들도 여행객으로 가득 차 있을 테니까. 이곳 사람들처럼 이웃 배의 모습에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을 것이다.
어제 오후, 줄리는 테러리스트들의 회의에 관해 생각하면서 카슈미르의 지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관광객이라면 누구나 카슈미르의 골짜기를 여행해 보고 싶을 것이다. 등산을 하는 사람이나 고행자가 아니라면, 이곳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산악지대에는 가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골짜기 중에서도 스리나가르는 가장 중요한 도시이고, 숨어 있기 좋은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반란모의를 인적없는 산 속에서 하는 시대가 아니다. 현대는 도시 쪽이 더 안전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도시 게릴라라고 부르고 있지 않는가. 다코이트의 두목이 스리나가르가 제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고 시간이 별로 없기 때문에 줄리는 스리나가르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일생일대의 도박이지만, 그럴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가르자, 여행객에게 자기 배를 빌려 준 사람들을 알고 있니?」
줄리가 물었다.
「물론이에요! 전부 알고 있어요. 손님들에게 모피를 팔고 있으니까요.」
「배를 빌려쓰는 사람은 부부가 많겠지?」
가르자는 젓던 노를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글쎄요, 그런 것 같아요. 인도에서 오는 사람은 대개가 그래요.」
가르자는 인도라는 나라가 마치 카슈미르와는 다른 나라인 것처럼 말했다.
「외국에서 오는 사람도 그럴지 몰라요.」
「가르자, 나는 리포터야. 신문기자 말야. 무슨 뜻인지 알겠어? 신문은 알고 있겠지?」
「알고 있어요. 여기도 신문이 있어요.」
「영어로 된 신문 말이냐?」
「아니에요. 울두어로 된 신문밖에 없어요.」
「응, 그래? 통역을 좀 해줄 수 있겠니? 신문사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니? 네 도움이 필요해, 가르자. 배를 젓지 않아도 좋으니까, 내 부탁을 들어 줄 수 없을까?」
줄리는 테러리스트에 대한 것을 취재하러 왔다는 말을 하고, 언어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가르자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소년은 승낙했다. 이웃 사람들을 만나 지금 어떤 사람들이 배를 빌고 있는지 조사해 보겠다고 약속했다.
가르자는 배 주인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호별방문을 하는 세일즈맨이기도 하므로 정보 수집자로서는 아주 적격이었다.
줄리는 다시 말을 이었다.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은 여러나라 사람들이 섞여 있는 그룹이야. 그리고 여자보다도 남자를, 그리고 테러리스트들은 다른 여행객보다 배 안에 틀어박혀 있는 일이 많을 거야. 진짜 여행객들 속에 섞여 관광이나 쇼핑을 하면 발각될 위험이 적을지는 몰라도, 그것 역시 어느 정도의 위험은 따를 테니까. 그리고 어두워진 뒤에 움직이는 배에 대해서도 주의해야 돼. 사례는 충분히 해줄께.」
줄리는 호기심에 가득 찬 소년이 실망하지 않을 정도의, 그러나 낭비가 될 정도는 아닌 액수를 이야기했다.
줄리는 배의 위치에 주의를 기울였다. 여행객들이 타는 배는 다르 호수에 물을 흘려보내고 있는 제람 강의 넓은 하구 부근에 집중되어 있는 듯했다. 물론 테러리스트가 카슈미르에 집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쉽지 않으리라 생각되었다. 이 부근은 시골인데다가 워낙 토착민들의 결속이 강하므로 외국인이 있으면 눈에 띌 것이다.
또 하나의 가능성은, 관광객이 많이 모이는 공공장소에서 회의가 열릴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한 시간 후, 줄리는 호수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샨크라차드야 사원 입구에 있었다. 첫눈에도 이곳은 테러리스트의 회담장소로는 알맞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스리나가르와 다르 호수의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이 바위 위의 사원은, 집회를 열기에는 너무 장소가 좁아 보였다.
그리고 건물이 아주 간소하여 숨을 만한 곳도 없다. 줄리는 원형 건물의 높은 돌층계를 올라가 안으로 들어갔다. 사프란 빛의 헐렁한 천을 걸친 승려가 신의 상징인 큰 금속제 시바 상 앞에 앉아서 경전을 읽고 있었다. 승려는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 사원은 2천년도 더 된 옛날, 위대한 힌두교의 성자인 샨카라가 세운 것이라고 한다.
그토록 오랜 세월이 지난 건물 안에 있자니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줄리는 지금 이 사원에 살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은 승려에게 다시 한번 시선을 보냈다.
저 사람도 시간을 초월해서 과거로부터 존재하는 위대한 선인의 영혼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줄리는 정신적인 충만감을 경험하고 그 사원을 나왔다. 이번에는 가르자의 도움을 빌어 스리나가르의 혼잡한 공장지대를 걸어 보았으나, 지나가는 여성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한두 사람 만나기는 했지만, 그 여자들은 머리 꼭대기에서부터 베일을 쓰고 있었다. 그러다가 키가 큰 남성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사냥꾼과 같은 차림을 한 검은 머리의 남성... 줄리는 심장이 튀어나올 듯이 놀랐지만 그것이 왕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줄리는 안도를 했는지 실망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후 줄리는 가르자를 통역으로 상아 상점 주인과 노점상을 상대로 대화를 나누어 보았으나 큰 성과가 있었다고는 할 수 없었다. 말수가 적은 상점 주인들의 입을 열게 하려고 사들인 기념품으로 줄리의 백만 가득 찼다.
「외국인들이 모여서 회의한다는 소문을 듣지 못해나요?」
줄리는 이런 질문을 수없이 던졌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파키스탄 국경을 넘어 습격해온 게릴라들의 기억이 너무나 생생했던 모양이다. 그들의 입을 열기 위해 돈까지 주어 보았으나 역시 별로 성과가 없었다.
신문사에도 가보았다. 그러나 거기서도 별 수확이 없었다. 줄리는 가르자에게 통역을 부탁하여, 잿빛 벽으로 둘러싸인 좁은 방에 있는 신문기자에게 테러리스트에 관한 취재를 해보았으나, 그 기자는 그저 멍청하게 입만 벌리고 있을 뿐이었다. 언어가 통하지 않기 때문에 그가 하는 일은 자세히 알 수 없었으나 아마도 그는 정부가 발표하는 정보를 그대로 기사화할 뿐, 테러리스트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것이 없는 모양이었다.
줄리는 앞서 찾아갔던 경찰이 다시 한번 방문했다. 그녀는 말단에 앉아 있는 젊은 경관에게 1백 루피짜리 지폐 한 장을 쥐어 주고,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주면 2배의 돈을 주겠다고 해 보았다.
그날 밤 줄리는 호수에 떠 있는 궁전의 테라스에서 가르자가 오기를 초조히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검은 수면을 바라보고 있으려니까 어느 틈에 생각은 왕자한테로 가 있었다.
왕자는 아직 아무 연락도 해오지 않았다. 직접 도와주는 않더라도 오해했던 잘못을 반성하는 뜻으로 힘이 되어 줄 수는 있지 않을까? 가령 경찰이 테러리스트에 대해 어떤 대책을 세우고 있는지, 어떤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지, 그 정도의 정보는 제공해 줄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왕자에게 사과할 마음이 있을 거라고 믿을 만한 이유는 하나도 없다. 줄리는 새삼스럽게 그런 생각을 하자 우울해지는 마음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줄리는 신경질 적으로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그에게 왜 그토록 마음을 빼앗겼을까. 부질없는 생각으로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게 될 것인가? 지금까지는 어떻게 되었든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나버렸는데...
레온 칼버트의 집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웃고 떠들던 밤, 다코이트에게까지 친절했던 그 사람, 비밀의 화원에서 아담과 이브처럼 나란히 누워 있던 그와 나...
줄리는 주먹을 꼭 쥐고 그런 생각들을 떨쳐 버리려고 했다.
그것은 이제 한갓 꿈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의 나에게는 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 다코이트의 두목 이야기대로라면, 테러리스트의 집회는 모레 열린다. 그런데 아직 장소조차 모르고 있다니... 돌층계를 내려가자, 가르자 외에도 야간 행상에 나서는 행상인의 모습이 보였다.
다르 호수의 밤은 아주 상쾌했다. 밤에는 거리가 조용하고 행인들도 드물기 때문에 호수 위의 상인들에게는 이 시간이 대목인 모양이다. 그들은 미슬라 왕자의 여름 궁전에 초대된 손님이라면 틀림없이 좋은 고객이 될 것이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줄리가 앉아 있는 돌층계 밑에 배들이 모여들었다. 줄리는 그들을 환영했다. 그녀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그들이 가져온 물건에 흥미를 나타내는 체하면서 배 안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초콜렛, 크래커, 사리, 숄, 그리고 미국식 약국에서 팔고 있는 것들도 있었다. 줄리는 행상인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걸었다.
「하우스 보트에 있는 손님들한테도 팔러 갔었겠죠? 대개 어떤 손님인가요? 여자가 많겠죠? 여자가 타지 않은 배도 있던가요? 그리고 남자들도 물건을 사던가요?」
천박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들은 동료들끼리 농담이라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물건을 사는 것은 여자들뿐이오.」
그 중의 한 사람이 대답했다. 줄리는 그들에게 오해를 사지 않기를 바라면서 웃음소리를 가라앉혔다. 하지만 그들의 농담은 줄리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왜냐하면, 그들의 말에 따르면 어느 배에나 여자가 반드시 타고 있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행상들은 모두 검은 속눈썹 속의 눈동자를 빛내면서 탐색하듯 줄리를 바라본다. 그러나 다시 고개를 든 그들의 눈에는 처음과 같은 존경의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줄리는 그들의 태도를 보고 역시 왕자의 힘이 대단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로서는 호랑이 왕자의 손님을 욕되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설사 그녀가 아무리 유혹적인 태도를 취했다 해도...
행상들은 허니문을 보내기에 알맞은 로맨틱한 장소로서는 남자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은 한 척의 배가 있더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져갔다. 얼마 뒤 가르자가 모습을 나타냈으나, 그는 특별한 정보를 가지고 오지 못했다.
순진한 소년의 얼굴에 피로의 기색이 약간 드러나 있었다. 줄리와 마찬가지로 실망한 기색이 짙었다. 오늘밤은 예상외로 장사가 바빠서 모든 배를 다 찾아다닐 수 없었다고 했다. 줄리는 내일 하루만 더 탐문해 달라는 부탁을 가르자에게 하고, 자기는 시카라를 타고 다시 한번 호수를 돌아보기로 했다.
가르자는 그 날의 보수를 손에 받아들자, 마치 기적이 일어난 듯이 기뻐했다. 줄리 역시 그의 배가 하우스 보트가 떼지어 있는 쪽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자 갑자기 피로가 엄습해왔다.
줄리는 멀리 바라뵈는 산정에 시선을 돌렸다. 산은 거뭇거뭇한 큰 덩어리와 같고, 머리에 이고 있는 눈만이 달빛을 받아 희게 빛나고 있었다. 평화로운 고요.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줄리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손을 흔들고, 오직 쉬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방으로 돌아갔다. 이튿날 밤 줄리는 더욱 절망적인 기분에 사로잡혔다.
가르자가 숙부의 직물공장으로 심부름을 가야 했기 때문에, 하루의 반 이상을 일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줄리는 시카라를 빌어 타고 대여 별장의 구실을 하는 배를 찾아다녔다. 꽤 돌아다녔으나 아직도 10여 척의 배가 남아 있었다. 신문사와 경찰서에도 다시 한번 가보고, 무골 정원에도 들러 보았다. 엄격한 이슬람교 정복자의 긍지를 나타낸 완벽한 구도의 아름다운 정원은, 테러리스트들의 회합 장소로는 알맞다고 여겨지지 않았다.
그날 밤 줄리는 몹시 피로하여 침대에 쓰러졌다. 눈을 감자마자 쫓기는 꿈을 꾸는 바람에 놀라서 눈을 떴다.
내일은 테러리스트들의 회합이 있는 날인데...
줄리는 테러리스트들이 숨어 있는 집을 알아낼 방법이 없을까 하고 머리를 짜내 보았다. 이미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소리를 죽이고 부르는 가르자의 음성이 폭탄과도 같은 힘으로 줄리의 선잠을 깨웠다. 앞에 난 베란다에 이어진 침실 창가에 갔을 때에야 완전히 잠이 깨었다. 불꽃과 같은 새벽놀이 오른쪽 끝에 보이고, 다르 호수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푸르스름한 빛 속에서 햇빛이 흙과 물을 감싸고 있었다. 산들을 뒤덮은 소나무에서 풍겨오는 향내가 신선한 아침 공기와 섞여 기분 좋게 코를 자극했다.
가르자는 돌층계 바로 밑에 배를 세우고 앉아 줄리의 얼굴을 걱정스러운 듯이 올려다보고 있었다.
「웬일이지 가르자?」
줄리는 금발을 뒤로 쓸어넘기면서 물었다. 거의 한잠도 자지 못했기 때문에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마담 줄리!」
귀여운 얼굴의 소년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만나서 다행이에요! 빨리 오세요! 당신이 말했던 사람들을 잡으러 경찰이 다르 호수로 온 것 같아요!」
「잠깐만 기다려! 곧 갈 테니까.」
몇 분 후, 줄리는 돌층계를 달려내려가 가르자의 배에 뛰어올랐다. 검정 슬랙스에 흰 튜닉 풍의 넉넉한 블라우스를 입었으나, 벨트는 매지 않았다. 망원 렌즈가 달린 카메라를 넣은 백을 어깨에 둘러메고, 한 손에는 작은 테입리코더, 한 손에는 노트를 들고 있었다.
피로한 기색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말해 봐, 가르자! 테러리스트를 봤어?」
「아니에요. 경찰서장을 봤어요. 호수 쪽으로 가는 도중에 말이에요. 아침 시간은 낚시하기에 제일 좋은 때예요. 그건 이렇게 이른 아침에는... 뭐라더라... 참, 모터보트가 없으니까요. 그게 다니면 물고기들이 놀라서 도망가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모터보트가 보인 거예요. 서장의 거였어요. 서장은 우리 숙부의 친구라서 그 사람의 모터보트를 보면 금세 알 수 있어요.」
「서장이 배에 타고 있었어?」
「네. 그밖에도 두 사람이 있었어요. 낚시를 하는 체하고 있었지만.」
가르자는 자기 말에 무게를 얹으려는 듯 말을 끊고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그게 아니라는 걸 대번에 알 수 있어요. 낚시하는 덴 이런 배가 더 좋거든요. 그런데 일부러 모터보트를 타다니 이상하지 않아요? 게다가 모터보트가 있던 자리는 물고기가 잡히지도 않는 자리였어요. 낚시를 하려면 뱃길이 아닌 곳에서 해야 한다는 것은 풋나기들도 아는 일인데 말이에요.」
「그래서 나한테 알리러 온 거로구나?」
줄리는 어린 협력자가 대견스러웠다.
「그래요, 그래서 곧바로 달려왔어요. 열심히 노를 저어서.」
가르자는 자랑스럽게 가슴을 폈다.
「경찰이 호수에서 낚시질을 하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또 그밖에도 두 척의 모터보트가 있었어요. 저기 보이죠?」
가르자는 손으로 남쪽의 제람 강 하구를 가리켰다.
가르자의 이야기에 따르면, 서장의 모터보트는 하우스 보트가 있는 곳과 다르 호수 주요부분 사이에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경찰이 여행객이 빌려쓰고 있는 하우스 보트를 에워싸고 있는 형국이었다.
「경찰은 하우스 보트를 멀찍이 떨어져 포위하고 있는 모양이야, 가르자. 우리가 생각했듯이 테러리스트들은 하우스 보트 안에 있는 거야.」
줄리는 거의 소리치듯 말했다.
그녀의 가슴의 고동이 빨라졌다.
「그리로 저어 갈까요?」
가르자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아니야. 압달의 배를 잠시 이용하는 게 좋겠어. 그건 진짜 시카라니까. 그 커튼 뒤에 숨어 있으면 관광객같이 보일 거고, 아무튼 의심하지 않겠지.」
줄리는 몇 주일 전 뉴델리에서 서툰 짓을 해서 자이가 테러리스트를 놓친 쓴 경험을 되새기고 있었다.
오늘은 좀더 신중히 행동해야지. 경솔한 행동은 자신을 위험에 빠뜨릴 뿐만 아니라, 왕자의 정보부원의 계획을 수포로 만들어 버릴 가능성이 크니까.
줄리는 압달이 평소에 미슬라 부인과 프리야를 태우고 건너편 기슭에 왕래하던 궁전 전용의 시카라에 올랐다.
「저을 수 있겠니?」
줄리는 시카라보다 훨씬 작은 배의 로프를 돌층계의 놋쇠 고리에 묶고 있는 가르자에게 물었다.
「문제없어요. 난 아주 힘이 세니까요.」
가르자는 자신있다는 듯 소리내어 웃었다. 배는 천천히 미끄러지듯 기슭에서 떠나갔다. 줄리는 푹신한 쿠션에 몸을 기댔다.
호수에는 경찰의 보트가 있을 뿐 한적했다. 아무도 타고 있지 않은 시카라가 기슭에 나란히 매어져 있었다. 급습을 하기에는 더할 수 없이 좋은 기회였다. 호수의 주민들은 아직 자고 있으니까.
줄리는 안에서는 밖이 보이지만, 다른 하우스 보트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커튼을 쳤다. 그러니 테러리스트에게 발견되는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라르 데라르는 내가 저널리스트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가 내 특징을 동료에게 이야기했을 가능성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
줄리는 백에서 카메라를 꺼내 필름이 들어 있는지 두 번이나 확인했다. 손바닥에서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줄리는 관광객을 가장하고 목에 카메라를 걸었다. 카메라에는 멀리서도 찍을 수 있는 망원 렌즈가 장치되어 있었다. 줄리는 자신의 카메라 솜씨가 영 신통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해외근무를 하려면 카메라맨과 기자의 역할을 동시에 해내야 하므로, 해외특파원이란 어쩌면 자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가르자가 선미에 주저앉았다. 압달의 노는 소년이 평소에 다루던 것보다는 길고 커서 다루기가 힘든 모양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별로 서두를 필요가 없다. 시카라는 하우스 보트가 늘어서 있는 곳까지 왔다. 줄리는 그 하나하나를 주의 깊게 관찰했다. 테러리스트가 타고 있다는 단서가 필요했다.
그것만 있으면, 멀리 떨어진 곳에서 관찰만 하고 있으면 된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으나, 어떤 일이 생기건 어린 가이드의 몸에 위험이 닥치는 것만은 피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마담, 저것 보세요! 또 다른 경찰의 배예요!」
줄리는 몸을 틀어 뒤쪽 커튼 틈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가르자는 머리를 오른쪽으로 기울이고, 있는 힘을 다해 무거운 노를 젓고 있었는데 흥분과 중노동으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세 번째 경찰 보트는 나머지 두 척과는 반대편에 있었다.
「틀림없이 우리가 찾고 있는 하우스 보트는 이 줄의 끝에 있을 거야.」
줄리는 몹시 흥분하고 있었다.
「경찰은 마지막 순간까지 모습을 숨기고 있으려 할 거야. 그들은 테러리스트가 행동을 시작할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거라구. 서로 무전으로 연락을 하면서 말야.」
줄리는 다시 하우스 보트를 차례로 관찰해 나갔다. 배는 점점 더 장식이 훌륭한 큰 것으로 바뀌었다. 줄리는 자기가 찾는 것에 가까워진다는 것을 직감했다. 테러리스트 중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리더는 부유한 집 태생이 많다고 한다.
그러한 사람이 있다면 호화스런 큰 배를 비는 것쯤은 어렵지 않겠지.
하우스 보트의 평평한 지붕에 움직이는 사람이 있다. 지붕 위에 있는 사람은 아마도 배 주인인 듯했다. 손님의 아침 샤워를 위해 큰 물통 밑에 장작을 쌓고 있는 모양이었다. 또 다른 사나이가 나타나 사다리를 올라갔다. 그는 나지막한 지붕의 손난간 너머로 줄리가 타고 있는 시카라를 의심스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는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벌리려다가 그만두고 등을 돌렸다.
뭣 때문에 그럴까?
줄리는 쿠션에 기댄 채 사나이가 사라진 언저리를 자세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시카라는 다른 배로 접근해 갔다. 그런데 그때 테러리스트에 대한 공격 작전이 개시되는 모양이었다.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으나, 막상 눈앞에 전개되고 있는 움직임에 마음이 위축되었다. 손발이 부들부들 떨리고 입속이 바싹 말랐다.
줄리는 어린 가이드를 위험에서 구하려고 선미로 뛰어나갔다.
이대로 가면 적의 품으로 곧장 뛰어드는 것이나 다름없다... 위험하기 짝이 없어!
갈색 폰초(한 장의 천으로 된 외투. 가운데 구멍을 뚫고 머리를 내놓게 되어 있음)를 입은 사나이가 옆에 있는 배 사이에 가로놓였던 좁은 널빤지에 기어올랐다. 곧 다음 사나이가 그 뒤를 따르고, 계속 사나이들이 뒤를 이었다.
무거운 폰초가 배를 스치는 소리만이 들릴 뿐, 그들은 바람처럼 움직였다. 사나이들은 자동 소총을 들고 있었다. 줄리는 미친 듯이 손짓하여 가르자에게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가르자는 곧 노를 던지고, 줄리가 앉아 있는 바로 뒤의 좁은 공간에 몸을 숨겼다.
작은 몸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이미 마지막 사나이가 하우스 보트의 선미에 오르고 있었다. 배의 창은 열려 있고 커튼이 바람에 하늘거린다. 처음에 옮겨 탄 세 사나이는 배 안에서 모습이 보이지 않도록 납작하게 엎드려 선미 쪽으로 기어간다. 한 사나이가 처음 타고 있던 배의 지붕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아마 이제는 목욕물을 끓이는 체하지 않아도 된다는 신호를 보내는 모양이었다. 배의 주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과 그 동료는 지붕 뒤쪽에서 기관단총을 들고 이웃한 하우스 보트 뒤쪽, 포치에 가까운 쪽을 겨냥했다.
다시 무장한 두 사나이가 나타나 앞의 포치와는 먼쪽을 조준했다. 이 대각선 공격 방식은 스와트라 불리는 미국의 특수 부대가 사용하는 방법이다. 건물의 전후좌우를, 서로 자기편을 쏘는 위험을 범하지 않고, 한 사람씩 커버하는 방법이다.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줄리는 그 광경을 생생하게 잡기 위해 카메라를 조작하려고 했으나 마음대로 잘 되지 않았다.
바야흐로 맹공격이 시작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조용한 아침 호수 위에 줄리의 시카라는 떠 있었다. 주위는 불길할 정도로 고요하기만 했다.
줄리는 쿵쿵거리는 심장의 고동을 느끼면서도 맹렬한 스피드로 셔터를 누르기 시작한다. 무장한 사나이들은 하우스 보트의 측면에 있는 창을 포위하는 위치에 자리잡았다. 선두에 있던 사나이가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자 사나이들은 열려 있는 창 앞으로 머신건을 휘갈기면서 차례차례 방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머신건 소리가 아침의 정적을 깨뜨려 놓았다.
줄리는 몸을 움츠렸다. 목구멍이 막혀 침도 삼킬 수 없었다.
놀라 외치는 소리, 부딪치는 소리, 외마디 비명, 신음소리와 어울려 계속 뿜어대는 머신건의 연발음... 하우스 보트의 앞쪽 문에서 한 사나이가 허리를 구부리고 뛰어 나왔다. 풋볼의 쿼터백과 같은 자세로 포치를 가로지르려 했을 때, 옆 배의 지붕에서 탄환이 비오듯 쏟아졌다. 그러나 사나이는 재빨리 몸을 피하고, 살짝 고개만 들어 수면으로 시선을 보냈다.
그 눈이 줄리의 눈과 마주쳤다. 잠시 후, 사나이는 마침 테러리스트의 배 앞쪽 포치 바로 옆에까지 와 있던 시카라에 뛰어들었다. 너무나 놀란 나머지 줄리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카메라가 시트 위에 떨어졌다. 줄리는 빨리 배에서 뛰어내리라고 가르자에게 외쳤다.
이때 또다른 사나이가 표범처럼 날쌔게 포치에 나타나는 것이 보였다. 뛰어들었던 사나이가 넘어진 줄리를 거칠게 일으켜 세울 때 작은 사카라는 뒤집힐 듯이 크게 흔들렸다.
사나이는 줄리의 팔을 등뒤로 돌려 잡고 자신의 방패삼아 몸을 가렸다. 이때 또 다른 충격으로 배가 크게 흔들렸다. 그 순간 테러리스트의 몸이 공중에 떴다.
줄리는 일어나려고 했으나 한쪽 다리가 이상하게 뒤틀려 몹시 아팠다. 앉은걸음으로 간신히 옆으로 비껴 앉는 순간, 테러리스트의 무릎이 그녀의 가슴을 짓눌렀다. 은빛으로 번쩍이는 나이프가 보였다. 줄리는 크게 흔들리는 배에 벌렁 넘어져, 쉰 목소리로 소리질렀다. 있는 힘을 다해 사나이를 뿌리치려 했다.
싸늘한 죽음의 공포가 엄습해왔을 때, 갑자기 테러리스트는 괴로운 신음소리를 토했다. 나이프가 줄리의 눈앞에서 정지했다. 나이프를 든 테러리스트는 움직이지도 못하고, 자기를 기습한 상대를 노려본다.
자이!
왕자가 갈색 폰초를 나부끼면서 테러리스트와 싸우고 있었다. 억센 오른손이 나이프를 든 테러리스트의 손을 잡고, 왼팔은 그의 목을 감고 있었다. 나이프는 줄리의 바로 목에까지 다가와 있었으나, 마침내 왕자가 빼앗아 들었다.
「이걸 놔! 놓지 않으면 이 여자의 목숨이 없어!」
사나이의 눈은 생기를 잃고 있었으나, 입으로는 여전히 끔찍한 협박을 하고 있었다.
왕자의 팔근육이 긴장했다. 줄리는 망연히 머리 위에서 흔들리 왕자의 팔근육을 쳐다보고 있었으나, 이윽고 천천히 나이프가 멀어져 갔다. 줄리는 왕자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는 테러리스트와 마주 노려보고 있었다. 눈동자가 검은 불길이 된 것 같았다. 그리고 이제 나이프는 테러리스트의 가슴을 겨누고 있었다.
사나이는 증오에 찬 눈으로 왕자를 노려보다가 별안간 왕자의 손을 뿌리치고 비틀거리면서 뒷걸음질치다가 줄리의 팔을 덥석 잡았다. 그녀를 인질로 삼는 것이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손에는 힘이 없었다. 때를 놓칠세라 왕자가 사나이에게 달려들었고 그 순간 배가 심하게 흔들려 세 사람은 뒤엉켜 호수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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