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소설] 불타는 인도 - WAU (13)

슬러 작성일 05.06.23 08:5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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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잠시 후 줄리가 아침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으로 들어서자, 마침 미슬라 부인이 그곳에서 나오고 있었다. 줄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30분이나 지체한 것이었다. 그렇게 값진 선물을 받은 것은 난생 처음이었기 때문에 눈이 멀 정도로 기뻤으나, 그토록 귀한 것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자기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었다.
「어머, 줄리.」
미슬라 부인이 반가워하며 얼굴을 빛냈다.
「나는 벌써 식사를 했어요. 하지만 프리야는 방금 들어왔고, 자이도 곧 올 거예요.」
그때 등뒤에 인기척을 느낀 줄리가 돌아보자, 자이가 거기 서 있었다. 베이지 색 반소매 셔츠에 블루진 차림이었는데 샤워를 하고 나왔는지 검은 머리에 물방울이 맺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는 평소와 달리 무척 여유가 있어 보인다. 줄리는 할말을 잊고 망연히 서 있었으나, 왕자는 여유만만하게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일찍 일어났군. 어젯밤엔 꽤 늦었었는데.」
「네, 잠을 잘 잤으니까요. 그런데 자이...」
「그 말은 할 필요 없소.」
왕자가 줄리의 말을 가로막았다.
「카드에 쓴 그대로야. 그 이상 아무 뜻도 없소. 감사할 필요도, 걱정할 필요도 없소. 줄리를 오해하고 있던 것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야. 어머니, 안녕히 주무셨어요? 그리고 프리야도?」
왕자는 어머니와 누이동생에게 예의바르게 인사를 하고 나서, 줄리를 위해 흰 등나무 의자를 끌어내어 앉혀 준다. 그리고 자기도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이렇게 아침부터 당신을 만나니 기쁘군요, 줄리.」
왕비가 지나칠 만큼 큰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일을 쉬나요?」
「네, 그럴 생각이에요.」
「그럼, 잘 됐네요! 딴 예정은 없겠죠? 만일 예정이 없다면 다 같이 할 수 있는 일을 해보려구요.」
부인이 미소지었다.
「어머니께 맡기겠어요.」
자이는 이렇게 말하면서 줄리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냈다.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있습니까, 어머니?」
미슬라 부인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을 나갔다. 줄리는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줄리는 직접 그의 손이 와 닿은 듯이 가슴이 설레었으나, 애써 그것을 숨기고 프리야에게 말했다.
「기분은 어때요, 프리야?」
그러나 프리야는 창백한 얼굴로 아래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그녀는 미래의 남편이 될 사람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줄리는 어젯밤의 일에 너무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기 때문에 프리야의 일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안녕하세요?」
공주는 이마를 찌푸린 채 그렇게 중얼거렸을 뿐, 줄리와 오빠로부터 얼굴을 감추듯이 몸을 숙인 채 침묵을 지켰다. 포크로 음식을 뒤적일 뿐 입에 대려 하지 않는 모습은 정 말 애처로웠다.
줄리는 몇 번이나 프리야를 대화에 끌어들이려고 했지만 공주는 쏟아질 듯한 눈물을 겨우 참는 것이 고작이었다. 도저히 대화를 나눌 상태가 아니었다. 그래서 줄리는 그만 그녀와의 대화를 단념하고 말았다. 식사가 반쯤 진행되었을 때, 드디어 젊은 공주는 긴장의 실을 끊었다. 프리야는 크게 몸을 떨고 흐느끼면서 접시를 밀어놓았다.
「먼저 실례하겠어요.」
그녀는 울음 섞인 소리로 말하고 식당에서 뛰쳐나갔다. 줄리는 가엾은 공주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누이동생이 저토록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왕자의 심정은 대체 어떨까? 줄리는 머뭇머뭇 시선을 돌려 맞은편에 앉아 있는 자이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검은 눈동자에는 후회의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자이... 아무것도 느끼는 것이 없나요?」
저절로 나무라는 투의 말이 나왔다.
「나는 후회 따위는 하지 않아.」
왕자는 엄한 목소리로 딱 잘라 말했다. 그리고는 토스트 접시를 줄리 앞으로 밀었다.
「좀더 먹지 그래?」
줄리는 권하는 대로 한 조각 집어들었다. 그러나 토스트에 최고급 블랙베리 잼을 바를 때에도 프리야에 대한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왕자에게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프리야에게 연인이 있다는 것을 암시만 한다 해도 그녀의 섬세한 마음은 이내 상처를 입고 말겠지? 줄리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왕비가 돌아왔다.
「아주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
왕비는 아주 즐거운 모양이었다.
「어째서 여태 생각을 못했는지 모르겠구나. 자이, 아그라에 가서 줄리에게 타지마할을 보여 주는 것이 어떻겠니?」
왕자는 어머니한테서 줄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눈과 눈이 마주쳤다.
「연인들의 기념비 말이군요...」
그의 목소리는 만족스러운 듯했다.
「좋습니다. 어머니. 거기에 가도록 하지요.」
「하지만, 나는 할 일이...」
줄리는 거절하려고 했다.
「줄리, 제발 그러지 말아요.」
왕자가 줄리의 손을 잡았다.
「계속 일만 했으니까, 조금은 쉬는 것도 좋지 않겠소? 내일 밤에는 돌아올 수 있을 거요. 그리고, 이런 점도 있어.」
왕자가 뜻밖의 말을 했다.
「테러리스트들이 아그라에서 회의를 열지도 몰라. 타지마할은 언제나 관광객들로 붐비는 곳이니까 남의 눈을 속이기에는 아주 적당한 장소거든.」
「하기는 그렇군요.」
줄리는 생각해 보았다. 아그라는 델리와 가깝기 때문에 교통이 편리하고, 타지마할에 가는 관광객 틈에 섞이면 외국인 테러리스트라도 쉽게 몸을 숨길 수 있을 것이다. 그 리고 델리에서의 취재는 지금 벽에 부딪쳐 있다. 그러니 직접 거기에 가면 어떤 단서라도 입수하게 될지 모른다.
결국 저널리스트란 자기가 어디에 있건, 다른 장소에서 큰 사건이 일어나지 않나 하는 불안에서 해방될 수 없는 것이다. 특종이란 지금 자기가 떠난 장소에서 일어날지 모르고, 또 떠나기를 단념한 장소에서 일어날지도 모른다.
한 시간 후, 검정 메르세데스는 2차선밖에 없는 좁은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아그라로 가는 길이었다. 차안은 서늘하고 기분이 좋았다. 차창을 통해 키 작은 나무로 뒤덮인 북인도의 평원이 보였다.
인도는 인구가 많은 나라인데, 아무도 없는 평원이 계속되고 있다니 이상스럽게 여겨졌다.
「이 경치를 보고 있으면 미국 서부의 대평원이 연상되는군요.」
줄리가 옆에 앉은 미슬라 부인에게 말했다. 왕자는 왕비를 사이에 두고 저쪽에 앉아 있었다. 프리야는 이 여행에 동행하지 않았는데 줄리만은 그 이유를 잘 알 수 있었다.
「저렇게 누르스름하고 잿빛이 감도는 숲은 서부에서도 많이 볼 수 있어요. 도중에 브린다반에서 잠시 쉬어 갈 생각이에요.」
부인이 말했다.
「작은 마을인데 뉴델리와는 전혀 분위기가 달라요. 힌두교의 신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신인 크리슈나가 태어난 곳이지요. 브린다반에는 그밖에도 유서 깊은 곳이 많아 가보면 즐겁기도 하고 도움도 될 거예요.」
줄리는 브린다반에 도착하기 전에 밖에 나가 손발을 펴보고 싶었다. 메르세데스처럼 넓고 편안한 차에 타고 있어도, 인도평원의 여행은 역시 단조롭고 피로했다. 손수레와 버스, 말과 낙타가 끄는 왜건과 자주 만나기 때문에 운전사인 구나 신은 좁고 울퉁불퉁한 길을 천천히 운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어째서 뉴델리와 아그라 사이의 길을 넓히지 않는지 모르겠군요.」
줄리는 문을 열어 주는 운전사에게 어리석은 질문을 했다.
「타지마할을 보러 가는 사람이 무척 많을 텐데요.」
「인도에서는 이 정도의 길이면 좋은 편입니다. 마담.」
구나 신은 주름 투성이인 얼굴에 활짝 미소를 띄웠다. 수염이 터부룩하고 유쾌한 눈을 가진 그는, 아무리 보아도 머리가 세지 않은 젊은 산타클로스 같았다.
「그런데다 다코이트가 밤 사이에 도로시설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거든요.」
「다코... 뭐라구요?」
줄리가 깜짝 놀라 물었다.
「다코이트요.」
차에서 내린 부인이 기지개를 켜면서 대답했다.
「이 부근에 사는 사람인데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그들은 차와 버스를 습격하고 손님들의 물건을 뺐는답니다. 밤에 이 길을 가는 사람은 대부분 그들의 습격을 받아요.」
「노상강도로군요?」
줄리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지금과 같은 시대에 아직도 그런 사람이 있다니!
「그래요. 놀라운 이야기죠?」
부인은 동의를 구하듯 줄리의 손등을 두드리면서 말했다.
「네, 하지만 믿을 수 없는 일이에요.」
「곳에 따라서는 인도가 서양보다 몇 세기나 뒤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잊은 모양이군, 줄리.」
반대쪽 문에서 내린 왕자가 두 사람의 대화에 끼여들었다.
「그러나 브린다반 마을을 보면 잘 알 수 있을 거야. 자, 갑시다.」
왕자가 줄리의 팔을 가만히 붙잡았다. 순간 그녀의 몸이 꿈틀했다. 왕자는 흰 면셔츠와 흰 바지로 갈아입고 있었다. 검은 머리와 갈색 피부가 더욱 강조되어 보였다. 뜨겁게 달아오른 거리를 걷고 있는 그의 모습은 평소보다 더욱 신비스럽게 보인다. 줄리는 양산을 쓰고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러나저러나 이 더위는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어제는 기온이 40도 가까이나 되었다. 오늘은 어제보다 더 더운 것이 아닐까?
머리는 하나로 묶었고, 조금이라도 시원해지기 위해 가슴이 깊게 팬 대담한 선드레스를 입고 있다.
도로는 몇 차례나 보수된 듯, 울퉁불퉁한 채로 한없이 뻗어 있었다. 거의 다 부서진 돌난간이 있는 벽돌건물은 폐허로 변해 있었으나, 한때는 장엄한 건물이었던 모양인지 아름답게 조각된 벽이 왕년의 화려함을 이야기해 주고 있었다. 길이 차차 좁아지더니 내리막길이 되었다.
이윽고 왕자가 걸음을 멈추었고 줄리도 따라서 멈춰 섰다. 어딘지 모르게 곰팡내가 났다. 좁은 길이 끝나는 곳에 시선을 보낸 줄리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올렸다.
막다른 곳엔 돌층계가 있었고, 그 돌층계를 내려가니 크게 굽이치는 강이 흐르고 있었다. 그 조용한 흐름은 베다의 성전을 낭독하는 목소리와 같았다. 줄리는 아름답게 합창하는 브라만 교도들의 목소리를 실제로 듣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저것이 얌나 강이지.」
귓전에서 굵직한 왕자의 음성이 들렸다.
「힌두교도들에게는 이 강은 신성한 곳이오. 경건한 신도들이 이 곳에 순례를 와서 강물로 몸을 씻는 거야.」
「이 강은 아그라에도 이어져 있어요. 그러니 타지마할에 가서도 볼 수 있어요.」
부인이 보충설명을 했다.
「저 나무는 뭐죠?」
줄리는 계단을 내려간 곳에 있는 큰 나무를 가리켰다. 나뭇가지가 사람의 팔만큼이나 굵은 나무였다. 아래에 있는 나뭇가지에는 갖가지 색깔의 헝겊이 매달려 있었다.
「내가 안내해 주지.」
왕자가 즐거운 듯이 말했다.
「저 나무에 대해서 깜박 잊고 있었군. 여기 오는 것이 몇 년만인지 모르겠어!」
「둘이서 다녀와요.」
부인이 말했다. 그녀의 맑고 리드미컬한 목소리는 이곳 분위기에 아주 잘 어울렸다.
「나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께. 계단을 오르내리는 건 힘겨우니까.」
「괜찮겠습니까, 어머니?」
왕자가 걱정스러운 듯 묻는다.
「저 밑에 난 길로 가시면 돼요.」
「괜찮아. 어서 가라니까, 자이. 그리고 나는 이미 저 강물에 몸을 씻을 필요도 없단다.」
「어머님은 아주 신앙심이 깊으신가 보죠?」
줄리는 한 걸음 앞서 돌층계를 내려가는 왕자의 등뒤에 대고 큰소리로 물었다.」
「프리야와 내 행복을 제외한다면, 지금 어머니가 제일 소중히 여기는 것은 정신적인 것뿐이지.」
왕자는 걱정스러운 듯 뒤를 돌아다보았다.
「걷기가 힘들지? 괜찮겠소?」
줄리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일이 있을 것 같아서 오늘은 굽 낮은 샌들을 신고 왔던 것이다.
「어째서 크리슈나가 신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신으로 여겨지는 거죠?」
줄리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나서 물었다. 왕자는 줄리를 생각해서 발걸음을 늦추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오후의 햇빛을 받으며 빛나는 강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크리슈나는 순수한 의식의 상징이지. 모든 존재를 형성하는 것 속에 침투하여 영원히 떨어지지 않는 무엇인가를 만들어내거든. 힌두교도는 일상생활 속에서 언제나 순수한 의식을 경험하려고 하고 있어. 그들은 이런 상태를 깨달음이라거나 우주의 의식, 또는 해탈이라고 부르지. 브라만은 사람이 그런 경지에 도달하면 남을 해칠 수 없다고 설명하지. 브라만이란 자연의 법칙과 완전 히 조화를 이루는 사람을 말해. 베다에는 크리슈나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씌어 있지.」
왕자는 줄리의 손을 잡고 강가로 내려갔다.
「이 나무도 그 이야기 속에 나와 있지. 어린 시절의 크리슈나는 아주 장난꾸러기였다고 해. 어느 날 크리슈나의 천상의 시녀들인 고피들이 얌나 강에서 목욕을 하고 있을 때, 그녀들의 사리를 몰래 훔쳐다 손이 닿지 않는 이 나뭇가지에 걸어 놓았어. 그 후부터 이 나뭇가지에 옷을 걸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신화가 생겼지. 그래서 지금은 누구나 여기에 헝겊을 걸어 놓고 있는 거야.」
「저도 그렇게 해보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줄리가 망설이며 물었다.
「그래, 줄리가 무엇을 원하는가에 달려 있지.」
왕자가 까맣게 빛나는 눈으로 줄리를 바라보았다. 줄리는 갑자기 옆에 있는 사람을 강렬하게 의식했다. 그가 바로 곁에 있다는 생각만 해도 마음이 몹시 흔들렸다. 저 손이 내 살에 닿는다면... 그의 감촉이 줄리의 가슴에 되살아났다.
나는 왜 오늘 그를 따라온 것일까? 타지마할이 보고 싶어서였을까? 아니면... 오늘밤에 무엇이 일어나기를 기대해서였을까?
왕자는 천 조각을 팔고 있는 남자를 턱으로 가리켰다. 줄리는 화려한 색깔의 헝겊을 골라, 발끝으로 서서 나뭇가지에 맸다. 왕자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차, 소원을 비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이윽고 왕자는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올리고 탁한 물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줄리는 드레스가 젖는 것이 싫어 바위에 걸터앉아 기다리기로 했다. 어린이들이 벌거벗고 큰 비치볼을 던지며 놀고 있었다. 와 하는 함성이 일어나고, 한 아이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공을 쫓기 시작했다.
공이 왕자 앞으로 굴러갔을 때 그는 그것을 집어 아이들 쪽으로 힘껏 던졌다.
「어머니, 아무래도 줄리를 크리슈나의 정원으로 데려가야 할 것 같군요.」
왕자는 어머니가 기다리는 곳으로 되돌아와서 그렇게 말했다.
「크리슈나는 고피들과 놀기 위해 매일밤 그 정원으로 갔다는 말이 있지.」
왕자가 줄리에게 설명을 계속했다.
「브린다반 사람들은 크리슈나의 모습을 직접 보기를 두려워하고 있소. 정신이 이상해질지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그래서 저녁이 되면 정원의 문을 닫아 버리는 거야. 하지만, 지금이라면 아직 닫지는 않았을 거요. 어떻게 하겠소?」
「가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군요. 벌써 머리가 이상해진 것 같아요!」
줄리는 농담처럼 말했으나, 사실은 더이상 왕자와 단둘이 있는 것이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냉정하게 대했던 때의 일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곧바로 아그라에 가도록 해요.」
미슬라 부인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보름달이 떠요. 타지마할에서는 그야말로 아름다운 달을 보게 될 거예요.」


줄리도 다른 미국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림엽서와 사진 등을 통해 몇 번이나 타지마할을 본 일이 있었다. 큰 대리석 묘는 아침해나 저녁해를 배경으로 한 것들뿐이었다. 모두 훌륭한 것들이었으나, 줄리는 실물을 보아도 그다지 감동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잘못이었다. 현실은 상상을 크게 초월해 있었으니까. 타지마할을 본다는 것은 진정한 아름다움을 경험하는 일이었다. 주위의 모든 것을 감싸는 듯한 순수한 고요를 지닌 아름다움, 그것은 인간이란 작은 존재를 훨씬 초월하여 영원에 닿아 있을 정도로 높이 솟아 있었다.
줄리는 거대한 돌문을 지나 공원에 발을 들여놓았다. 가슴이 두근거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였다. 안개가 짙게 깔리고, 검은 하늘에는 큼직한 진주와도 같은 하얀 달이 빛나고 있었다. 여기저기 샘이 있고, 나직한 나무가 우거진 공원 저쪽에 대리석이 높이 솟아 있다.
보름달이 돔을 아름답게 비추고 있고 양옆에 있는 가늘고 긴 예배탑이 구름 속에 머리를 들이밀고 있었다. 마치 동화에 나오는 성과 같았으므로 마법의 세계에 들어온 듯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왜 그러지? 갑자기 말수가 적어진 것 같군.」
왕자가 줄리를 내려다보면서 물었다. 미슬라 부인은 아그라의 호텔에서 우연히 옛친구를 만나 타지마할에는 오지 않았다. 줄리는 단정한 왕자의 얼굴을 자세히 쳐다보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것이 세상에 있다니... 가슴이 저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것이 사랑의 기념비야.」
왕자가 나직이 말했다. 두 사람은 잠자코 돌층계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 세상 것이 아닌 힘이 작용했는지 두 사람의 마음은 서로 통하고 있었다. 줄리는 지금이라면 자신도 솔직해질 수 있을 것 같았고 또한 책장을 넘기듯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왕자가 가만히 줄리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은 빨간 바위에 만들어진 가파른 층계를 올라갔는데 안에 들어가기 전에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
「뭐라고 씌어 있죠?」
줄리는 벽의 조각 앞에 구부리고 앉아 이상한 문자를 손으로 쓸어 보았다.
「글쎄... 나도 모르겠소.」
왕자는 선 채로 줄리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왕자의 손바닥에서 따뜻한 기운이 전해졌고 줄리의 가슴속에서는 자이의 품에 안기고 싶다는 욕망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이것은 이슬람교도의 무덤이라 무슨 글자인지 모르겠는걸. 아마 코란에서 인용한 글일 테지.」
「이것을 만든 사람은 인도인이 아닐 테죠?」
줄리가 일어서자 왕자가 그의 허리를 팔로 감았다. 마치 두 사람은 연인 사이 같았다.
「무갈 제국의 제3대 황제 샤 자한이 황비 마할을 위해 지은 것이지. 사랑하는 아내의 이름을 따서 타지마할이란 이름을 붙였다더군.」
「그 아내는 어떤 여자였을까요?」
「아마도 줄리 같은 여자가 아니었을까?」
「세상에!」
줄리가 기쁜 듯이 웃었다.
「또 공치사를 하는군요.」
「그게 아니라, 마할에게 공치사를 했어.」
왕자는 그의 버릇대로 입가장자리를 한쪽으로 약간 치켜올리고 웃었다.
「자, 어서 들어가 봐요.」
줄리는 시선을 다른 데로 보내며 수줍듯 말했다. 왕자는 어색해하는 줄리를 보고 큰소리로 웃었다.
「소원이라면 그렇게 하도록 하지.」
두 사람은 다른 관광객들 틈에 섞여 안으로 들어갔다. 줄리는 되도록 그를 보지 않고 건물에 온 신경을 집중하려고 애썼다. 단 둘이 있는 것이 왠지 불안하다. 밤은 이제 겨우 시작되었을 뿐인데, 지금부터 이처럼 마음이 흔들리면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지?
그들은 층계를 내려가 지하실로 들어갔다. 아치형으로 된 그 방엔 소박한 관이 둘 놓여 있었다. 황제와 황후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는 곳이었다. 눈처럼 희게 빛나는 대리석 건물 속에 잠든 연인들을 뒤로하고 공원으로 돌아왔다.
왕자는 줄리의 가느다란 허리에 팔을 감고 그녀의 보폭에 맞춰 천천히 걸었다. 이윽고 왕자는 줄리의 드러난 어깨에 손을 가져간다. 줄리는 부드러운 맨살에 그의 기다란 손이 닿았을 때, 왕자의 숨이 약간 거칠어진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두 사람은 길에서 벗어나, 밤이슬에 젖은 풀 속으로 들어갔다. 왕자는 걸음을 멈추고 줄리의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이윽고 그녀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그 동작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줄리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오늘밤은 이렇게 될 운명이었어.」
뒤에 솟아 있는 타지마할의 첨탑에 검은 구름이 걸려 있다. 줄리는 마음의 평정을 느끼고 있었다. 동화 속과 같은 이 꿈의 장소에서 겨우 진실한 자기를 발견했던 것이다. 그의 몸이 떨어졌을 때, 줄리는 넘쳐흐르는 정열로 떨고 있었다.
「오늘밤 당신에게 가도 되겠지, 달링?」
왕자는 조용히, 그러나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줄리는 잠자코 왕자를 쳐다보았다. 검은 눈동자가 신비스럽게 불타고 있었다. 마음속에서는 모순된 생각이 뒤얽히고 있었다. 그에게 열중하여 모든 것을 잊고 있을 때,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을 동시에 발견하는 일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 거지?
줄리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나는 알고 있다. 오늘밤 그가 나한테 온다는 것을...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과 마찬가지로 달빛에 비친 타지마할을 구경온 관광객들이었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문 쪽으로 되돌아갔다. 줄리는 호텔로 돌아와 커다란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어쩌다가 그의 유혹에 말려든 것일까?
타지마할의 불가사의한 분위기 속에서는 그렇게 되는 것이 극히 자연스러웠지만 나는 분명히 내 입장을 밝혔어야 했다. 하지만 그가 기대에 찬 모습으로 거기 서 있을 때, 그것은 달빛 때문이지 나의 진실한 마음이 아니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었겠는가?
줄리는 침대에서 내려와 방안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나이트 테이블이 불빛을 받아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고, 긴장하여 어쩔 줄 몰라하는 자기 그림자가 꼭두각시처럼 우습게 보였다.
이윽고 줄리는 불안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 발코니로 나갔다. 아무도 없는 풀에서 물이 가만히 출렁거리고 있었다.
나는 자이 미슬라 왕자와 잠자리를 같이할 생각이 없다. 아니 그만이 아니라, 어떤 남자와도...
그는 아직도 내가 테러리스트와 일당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버리지 않고 있다. 지난 몇 주일 동안 계속 함께 일을 해왔으나, 그는 그 마음을 변치 않고 있었다.
분명히 직업적 저널리스트로서의 내 실력을 인정해 주었고, 칼버트의 파티에 갔을 때처럼 같이 즐거운 한때를 보내기도 했다. 그래, 그는 내 능력을 인정하고 일에 협력은 해주지만, 나를 신뢰하지는 않겠다는 거야. 뿐만 아니라, 테러리스트를 체포하기 위해 나를 이용하려고까지 하고 있지 않은가...
5분 후, 줄리는 하룻밤을 지낼 짐을 챙겨 백에 넣고 어깨에 멨다. 그리고는 졸린 듯한 도어맨의 눈앞을 살짝 빠져나왔다. 정면으로 거절할 용기가 없다면 도망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밤중에 택시를 잡아 뉴델리까지 가기란 생각했던 것처럼 그리 간단하지가 않았다.
호텔 현관 앞에 있는 택시 정류장에는 구식 차 몇 대가 정거해 있었다. 운전사들은 모닥불 주위에 둥그렇게 원을 지어 담요를 덮고 잠들어 있었다. 줄리는 제일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을 흔들어 깨웠다.
「네, 마담.」
운전사는 잠시 동안 무슨 일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있었으나 이윽고 줄리가 손님인 것을 알자 큰소리로 대답했다.
「아침에 모시러 가겠습니다.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아, 이 호텔입니까? 알겠습니다. 아침 8시 정각에 현관 입구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지금 곧 부탁하고 싶어요.」
줄리가 다급하게 부탁했다.
「늦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부탁해요. 팁을 많이 드릴께요.」
운전사가 부시시 일어나 졸립다는 듯이 눈을 비볐다. 모닥불을 둘러싸고 잠들었던 운전사들이 하나 둘 눈을 뜨고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아침에 주셔도 됩니다.」
운전사가 좋아하며 말했다.
「돈은 아침에 주셔도 좋습니다. 마담.」
「아침까지 기다릴 수 없어요!」
줄리는 신경질적으로 외치고 다른 운전사를 돌아보았다.
「지금 뉴델리에 갈 분 안 계세요? 요금을 2배로 드리겠어요.」
한 사람이 막대로 불을 쑤셨다. 갑자기 불이 높게 피어오르면서 사나이의 얼굴을 비춘다.
「지금 가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 사나이가 말했다.
「다코이트가 나타날지도 모르니까요.」
「다코이트? 아, 노상강도 말이군요.」
줄리는 미슬라 부인의 말이 생각났다.
「네, 그래요.」
사나이가 심각한 낯으로 머리를 끄떡였다. 그리고는 다른 운전사도 그렇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그들은 누더기와 같은 담요를 어깨까지 끌어올리고 다시 잠을 자려고 했다. 줄리는 망설였다.
아그라에서 다른 호텔을 찾든지, 당장 뉴델리로 가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왕자만 만나지 않을 수 있다면 어떤 일이라도 할 작정이었다. 다른 호텔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며 핑계를 생각하다가 아침에 왕자를 만나는 것보다는, 지금 뉴델리로 돌아가는 편이 훨씬 나을 것 같았다.
프런트에 메모를 남기고 뉴델리로 돌아가야지. 테러리스트에 대한 정보가 들어왔기 때문에 급히 돌아가게 되었다고 적어 놓으면 될 것이다.
「요금을 3배 드릴께요.」
줄리가 외치듯이 말했다. 어떤 위험을 당할지 모르지만 오늘밤 왕자를 만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제가 가죠.」
이렇게 말한 것은 초라한 옷차림의 여위고 보잘것없는 사나이였다. 잿빛 수염이 그를 더욱 초라하게 보이게 했다. 몸에 결함이 있는지 일어나는 것조차 힘이 드는 모양이다. 줄리의 가슴에 또 다른 불안이 치솟았다.
이 운전사가 무사히 뉴델리까지 데려다 줄 수 있을 것인가? 하긴 이 사람은 강도도 불쌍하게 여길 정도야.
동료들은 저마다 인도 말로 그를 만류하려 했으나, 그는 단호한 어조로 동료들의 입을 침묵시켰다. 그에게는 꼭 돈을 벌어야 할 까닭이 있는지, 동료들은 더이상 그를 만류하려 들지 않았다. 차는 예상한 대로 다른 어느 차보다도 낡은 것이었다. 줄리는 실망을 감출 수 없었으나, 가슴의 불안을 떨쳐 버리기라도 하듯 필요이상으로 힘차게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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