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소설] 불타는 인도 - WAU (15)

슬러 작성일 05.06.23 08:5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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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이튿날 아침 줄리는 늦게까지 자고 있었다. 왕자가 스칸다라에게 깨우지 말라고 주의를 준 모양이었다. 옆의 테이블에는 과일 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줄리는 과일을 먹으면서 어제 다코이트가 한 말을 머릿속으로 정리해 보았다.
줄리는 두 시간이나 걸려 기사를 타이핑했다. 이야기를 재미있게 꾸미려고 다코이트의 모습을 과장하지는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황무지에 어울리는 간결한 문장만으로 사실을 써나갔다.
그녀는 도중에 몇 번이나 손을 멈추고, 다코이트의 두목이 보여준 뜻밖의 우정이나 동지애, 싸늘한 빛을 발하고 있던 눈을 표현할 적당한 말을 찾으려고 했다. 마지막 구두점을 찍었을 때는, 문장이 마음에 들었을 때 언제나 느끼곤 하던 행복감이 가슴에 퍼졌다.
줄리는 타이핑한 기사를 큰 봉투에 넣고 겉봉에 회사 이름을 썼다. 그녀는 봉투를 구나 신에게 맡기고 왕자의 사무실로 갔다. 어젯밤 다코이트의 두목이 이야기한 테러리리스트의 동향에 대해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는 서둘러 카슈미르로 달려가려 할 것이다. 그는 나를 데려갈까?
늦게 일어나 계속 타이프라이터와 마주앉아 있던 줄리는, 그때서야 겨우 대낮이 가까웠다는 것을 깨달았다. 늦어도 좋으니 오늘 중으로 카슈미르에 갈 수는 없을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테러리스트들이 만나는 정확한 장소를 알아내고 싶었다.
줄리의 머리는 온통 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공주가 저쪽에서 달려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어머, 프리야!」
줄리는 깜짝 놀라 큰소리로 말했다.
「잘 지냈어요? 그런데, 왜 그러세요?」
자세히 보니 공주는 새파랗게 질려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줄리는 가까이 다가가 경련이라도 일어난 듯한 공주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공주의 손에는 뜻밖에도 서류가 쥐어져 있었다. 봉투에 라고 빨갛게 스탬프가 찍혀 있는 것이 줄리의 눈에 띄었다.
뒤에 있는 왕자의 사무실에 눈길을 돌렸더니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줄리는 아연해 있는 공주의 눈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이윽고 프리야는 서류봉투를 땅에 떨어뜨리고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프리야, 프리야!」
줄리는 공주의 작은 어깨를 감싸안고 달래듯 말했다.
「무슨 일이에요?」
「아, 줄리!」
프리야는 줄리의 품에 뛰어들어 하염없이 울었다.
「나는 이제 끝장이에요!」
「울지 말고 말해 봐요, 프리야.」
줄리가 긴 머리를 다정하게 어루만졌다.
「이제 그만 그쳐요.」
줄리는 프리야의 몸을 안아 일으키고 눈물로 뒤범벅이 된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어서 이야기해 봐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이제 끝장이에요, 내 인생은.」
공주가 흐느끼는 소리로 속삭였다.
「모든 것이 끝장이에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하세요? 자, 여기 앉으세요.」
줄리는 홀구석에 있는 고풍스러운 긴 의자에 공주를 앉혔다. 그리고 마루에 흩어진 서류를 주워 모았다.
「이것은 오빠의 서류죠?」
줄리는 공주 곁에 앉아 다정하게 물었다. 그러나 공주는 고개를 떨구고 훌쩍훌쩍 울고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프리야, 어서 이야기해 봐요. 틀림없이 도움이 될 거예요.」
줄리는 애써 공주를 달래려 했다.
「소용없어요.」
공주가 겨우 고개를 들었다. 뺨에는 몇 줄기의 눈물 자국이 나 있었다.
「이야기하면, 틀림없이 화를 낼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화를 내다니 당치도 않아요. 화를 내지 않겠다고 약속할 테니 안심하고 이야기해 보세요. 라르와 관계되는 일인가요?」
줄리는 넘겨짚고 물었다.
「라르라고요!」
프리야의 예쁜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런 사람, 보기도 싫어요! 그는... 거짓말쟁이였어요! 줄리, 믿어지지 않겠지만... 그 사람은 나를 아무렇게도 생각지 않고 있었어요. 사랑한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에요!」
공주는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은 눈으로 줄리를 쳐다보았다.
「그래요?」
그날 찬드니 차크에서 공주를 바라보고 있던 사나이의 눈이 줄리의 머리에 떠올랐다.
「그가 무슨 짓을 했길래요?」
공주는 몹시 흥분하고 있었으나, 긴 침묵 끝에 괴로운 듯 모든 것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일단 말문이 열리자 계속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발단은 프라카슈 다스가 궁전으로 찾아오는 데서부터 비롯된다.
프리야는 오빠가 택한 약혼자를 보고 첫눈에 그가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훌륭한 가문에서 자란 탓인지 명랑하고, 기품있고, 관대하고... 그런 그와 이야기하고 있으려니, 남의 눈을 속여가며 만나고 있던 애인이 갑자기 초라하게 생각되었던 것이다. 애인의 매력은 외면적인 것밖에는 없다고 생각되었다.
프리야는 프라카슈와 헤어져 자기 방에 돌아갔을 때, 자기가 지금까지 혼자 연극을 해왔다는 것을 깨닫고 아연해졌다. 그래서 기도실로 가서 제단에 향을 피우고, 그녀의 수호신인 여신에게 기도를 드렸던 것이다.
결국 프리야는 라르 데라르와의 관계를 끊고 프라카슈 다스와 결혼하려고 마음을 정했다. 그리하여 왕비와 왕자, 그리고 줄리가 아그라에 가 있는 사이에 라르와 만날 약속을 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굳게 결심하면서.
그런데 라르는 공주의 마음이 변했다는 것을 알자, 그녀와 사귄 진짜 이유를 폭로했다. 그는 공주를 자기의 목적을 위해서 이용하려고 한 것뿐이었다. 그러면서 라르는 왕자의 사무실에서 어떤 서류를 훔쳐 가지고 오지 않으면 미래의 남편에게 자기네 관계를 폭로하겠다고 위협했다.
「그의 말대로 할 수밖에 없어요, 줄리.」
공주는 작은 소리로 결론을 내렸다.
「나는 오빠를 배신했어요. 하지만 줄리, 이 서류를 건네주지 않으면 그는 프라카슈 씨에게 우리 관계를 폭로해 버릴 거예요. 그 일이 알려지면 내 인생은 그것으로 끝나는 거예요! 프라카슈 씨네 집안은 유서 깊은 가문이에요. 이 일이 알려지면 그의 부모가 우리의 결혼을 승낙하지 않을 거예요. 또 소문이 퍼지면 나는 평생 결혼도 할 수 없어요.」
「전에도 그런 서류를 라르에게 건넨 적이 있나요?」
「아니에요. 그런 일은 한 번도 없었어요!」
프리야는 한 마디로 부인하고 줄리의 손에 자기 손을 얹었다.
「아, 줄리. 착한 오빠의 말을 들었어야 했어요.」
공주는 괴로움을 이기지 못해 짜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는 나를 이용하려는 사람이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고 주의까지 주었는데. 하지만... 라르가 진심으로 나를 사랑하는 줄 알았어요.」
「여자라면 누구든지 경험하는 일이에요.」
줄리는 슬픈 표정으로 머리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비관할 건 없어요. 분명히 공주의 신뢰를 배반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반대로 공주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도 많이 있을 거예요.」
줄리는 애써 프리야를 위로했다. 줄리도 같은 생각을 한 일이 있었다. 오랫동안 저널리스트 생활을 하다 보니, 정치가나 배우 또는 실업가들로부터 테이트 신청을 받는 일이 많았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유리한 기사를 써달라며 화려한 레스토랑에 초청하기도 하고, 수십 송이나 되는 장미꽃을 초라한 아파트에 보내 오기도 했다.
「그는 나를 협박하는 것일까요?」
잠시 후 프리야가 물었다.
「아마 그럴 테죠. 하지만, 걱정할 것 없어요. 얼마든지 대처할 방법이 있으니까요.」
줄리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지만 라르는 아주... 지독한 사람이에요, 줄리. 그것을 왜 진작 깨닫지 못했는지 모르겠어요. 소름이 끼쳐요. 그 비웃는 듯한 말씨, 그 잔인스런 표정! 그는 정말 악질이에요. 하지만, 그의 말을 듣지 않으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프리야는 다시 흐느끼기 시작했다. 줄리는 공주를 위로하려고 했다. 그녀는 공주의 고통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인도 여성에게 있어서 결혼은 매우 중요한 뜻이 있다. 어떤 이유가 있든지 결혼을 하지 않으면, 죄를 지은 것 같은 중압감을 느끼는 것이다.
자식을 낳지 못하는 여성은 존재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인도 여성에게 있어서는 사내아이를 낳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목적이며 기쁨이다. 그러니 미혼여성의 인생에는 목적이 없다.
종교상의 이유로 독신생활을 하지 않는 한, 여성 독신자가 설 땅은 없다. 성직에 있지 않은 독신 여성은 남의 이목을 속여가며 부모의 집에서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줄리는 이러한 사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공주가 라르 데라르의 명령에 복종한 것을 탓하지 않았다.
그런데 라르는 이 서류를 어디에 사용하려는 것일까? 기업 스파이일까? 그는 기업의 비밀을 손에 넣고 왕자를 협박할 생각일까? 그가 무엇을 노리는지 확실히 알면 대처할 방안이 나올 수 있을 텐데... 다만 그가 불법행위에 가담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프리야.」
줄리는 공주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내 말을 잘 들으세요. 염려할 것 없어요. 잘 해결될 테니까요. 무슨 서류를 가지고 나왔어요? 라르가 어떤 지시를 하던가요?」
「저... 극비라고 쓰인 서류를 가져오라고...」
공주는 계속 흐느끼면서 대답했다.」
「그래서 나는 극비라고 쓰인 파일을 모조리 가지고 나왔어요. 또 그는 오빠의 공장과 회사의 위치를 알 수 있는 지도도 필요하다고 말했어요. 그래서 지도도...」
「그러나저러나 왕자님은 왜 이토록 중요한 것을 찾기 쉬운 곳에 두었을까요?」
줄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궁전은 엄중하게 경비되고 있어요. 그래서 도둑이 들 리 없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공주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대답했다.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굳이 깊이 숨겨 둘 필요가 없었겠군요. 어쨌든 서류를 원래의 위치에 갖다 놓아야 하겠어요.」
「어머, 줄리! 그것은 안돼요! 그런 무서운 일을!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요?」
프리야는 두려운 듯 홀 쪽을 바라보았다.
「오빠와 해리가 지금 어디 있는지 모르세요?」
「평소 같으면 일을 하고 있을 시간이에요.」
줄리는 얼굴이 빨개졌다.
「하지만, 어제는 늦게까지 일을 했으니까... 나도 새벽녘에야 잠을 잤어요.」
줄리는 더듬거리면서 설명했다. 그러나 프리야는 자신의 문제에 골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이상 깊이 물으려 하지 않았다. 줄리는 자신의 어리석은 행동을 고백할 필요가 없어져서 안심했다.
「내 말을 잘 들으세요, 프리야. 지금 곧 방으로 돌아가 모르는 체 하고 계세요. 내가 몰래 서류를 갖다 놓을 테니까요. 라르에 대해서는 나중에 상의하기로 해요. 파일이 있던 곳이 어디죠?」
줄리는 프리야를 그녀의 방으로 보내고 왕자의 사무실로 들어가 신중히 문을 닫았다. 시계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줄리는 발끝으로 살금살금 서류함 쪽으로 걸어갔으나 두꺼운 융단이 깔려 있어 발소리는 나지 않았다.
라르가 무엇을 노렸는지 봉투 속을 들여다보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오후의 이 시간에 누가 사무실에 올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빨리 서류를 제자리에 두는 것이 상책일 듯싶었다.
줄리는 프리야가 일러준 서류함을 발견하고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왕자가 깨닫지 못하기를 빌면서 재빨리 봉투를 넣으려 했다. 그러나 갑자기 등뒤에 싸늘한 것을 느끼고 줄리는 손을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줄리는 뒤에도 눈이 있나? 지금까지 그 특기를 살려 많은 일을 했겠지? 아주 신중히 들어왔을 테지만...」
눈도 목소리와 마 가지로 싸늘한 분노에 차 있었다. 줄리는 숨이 꽉 막혔다.
「어떻게 그처럼 소리도 없이 들어오셨어요?」
줄리는 억지로 말을 했으나 입속이 깔깔했다.
「홀을 돌 때 사무실 문이 가만히 닫히는 소리가 나더군.」
왕자는 줄리를 쏘아보았다.
「이 대답이면 만족스러운가?」
「저...」
줄리가 일어섰다.」
「믿어주실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그런 일을 하려던 것은 아니에요.」
줄리는 애원하듯 손을 내밀었다. 왕자는 아무 말도 없이 다가와 줄리의 손에서 서류를 빼앗았다. 그리고 재빨리 분류하며 훑어본다. 이윽고 왕자는 서류를 아무렇게나 데스크에 내던졌다.
「이런 짓을 해도 소용없어.」
왕자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준비해 온 핑계 같은 것은 말할 필요도 없어. 이 서류에는 테러리스트들이 입수하고 싶은 정보가 죄다 들어 있으니까. 좀더 자세히 알고 싶은가?」
줄리는 눈을 크게 떴다.
「테러리스트라구요? 그럴 리가... 그렇다면...」
줄리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라르 데라르가 테러리스트라니! 이렇게 가까이 있으면서도 눈치를 채지 못했다니...
「놀라는 체할 필요 없어.」
왕자가 무서운 얼굴로 말했다.
「나와 친한 사업동료의 이름과 주소, 경비원의 신분증명서, 내 공장과 오피스 빌딩의 평면도. 폭탄을 던지거나 유괴를 하는데 큰 도움이 되겠지.」
왕자가 내뱉은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줄리의 가슴을 찔렀다. 폭력을 휘두르는 것보다 훨씬 더 아팠다. 왕자의 입술엔 혐오감이 노골적으로 떠오르고, 검은 눈동자는 증오로 불타고 있었다.
그러나 줄리는 어떤 변명도 할 수 없었다. 진실을 말하려면 프리야의 경솔한 행동을 거론하지 않으면 안된다.
더구나 프리야가 테러리스트와 밀회하여 오빠를 배반하고 극비문서를 훔치려 했다는 말을 어떻게 왕자에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런 말을 했다가는 프리야는 어떻게 될까? 역시 지금은 가만히 있는 것이 상책이다. 그의 분노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냉정하게 설명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 거야.
「이 파일을 잘 간수하지 못한 나도 잘못이야. 지금까지 당신이 취한 태도로 보아 예측하지 못한 것도 아니었는데. 하지만, 당신에 대해 알면 알수록...」
왕자는 등을 돌렸다. 줄리는 그의 커다란 등을 뚫어지게 보았다.
나는 얼마나 이 사람의 마음에 들었다고 생각해 왔던 것일까? 이 사람과 친해지는 것이 내게 얼마나 소중한 일이었던가... 같이 일하고 춤을 추며 밤을 지낸 일도 있었다. 화가 났을 때조차도 그는 내 마음에 정열의 불을 지르고 있었는데...
「고맙게 여겨야 할지도 몰라.」
왕자가 돌아섰다. 그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 있지 않았고 목소리는 얼음장같았다. 오직 눈만이 감정을 전하고 있었다.
「줄리, 분명히 나는 당신의 정체를 의심하고 있었어. 그런데도 불구하고 당신에게 이끌리는 마음을 어쩔 수 없었지. 당신은 진정한 의미에서 용기를 가진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었어. 다른 남자라면 이미 속아넘어갔을 거야! 당신의 상사는 아주 유능한 스파이를 훈련시켰군. 감탄하지 않을 수 없어. 그러나 나를 속일 수는 없소. 이제 당신의 정체를 알았으니까. 이처럼 확실한 증거가 없다면... 난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할 뻔했어...」
「사랑?」
줄리가 작은 목소리로 되풀이했다.
「기쁘겠지?」
왕자는 미소를 띄웠으나 그것은 증오와 경멸의 미소였다. 이윽고 그의 입에서 천천히 미소가 사라졌다. 줄리는 왕자를 처음 대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가 나를 사랑했다고? 다코이트로부터 나를 보호해 준 것은 자이 미슬라 왕자 그 사람이 나를 사랑했기 때문이라는 말인가? 그때 줄리에게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경비원...」
줄리는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젯밤 아그라에서 제가 도망쳤다는 것을 보고한 그 사람들은 저를 염탐하고 있었나요? 아니면 지켜주고 있었나요?」
왕자가 무서운 눈으로 줄리를 노려본다.
「뻔하지 않겠소? 지켜주고 있었어. 내가 어리석었지... 당신이 이 궁전에서 지내게 된 이후, 그들은 당신 가까이 있으면서 당신의 안전을 지키고 있었어. 어머니와 누이동생에게도 마찬가지지. 나는 내 것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라고 말한 것을 잊지 않았겠지, 줄리?」
왕자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아, 줄리! 지금 이런 상황에서도...」
그는 데스크에 있는 서류를 손으로 가리켰다.
「당신이 내 사람이기를 원하고 있어.」
이제 줄리는 분명히 깨달았다.
나는 이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 그 사랑은 궁전에 온 그날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 갈색 피부를 한 지적이고도 매력적이며 위엄있는 왕자를 온 영혼과 온몸으로 사랑한다.
줄리의 마음을 점령하고 있던 소중한 에디 브라이스의 위치에 지금은 왕자가 있었다. 에디는... 아주 훌륭하고 좋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와 지낸 나날은 사랑의 서곡에 지나지 않았다. 왕자에 대한 지금의 마음은 아주 크고 완전한 것으로서, 지난날의 사랑 때문에 위협받지는 않는다.
틀림없이 그때의 나는 미숙했었고 지금은 진실한 사랑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줄리는 눈앞에서 자기를 내려다보는 사람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벅찼다. 그를 사랑한다고 깨달은 순간, 줄리의 인생은 완벽한 것이 되었다. 순수하고 소박한 기쁨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자이 미슬라 왕자를 사랑하다니,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야!
「그런 눈으로 나를 보지 말아!」
왕자는 성난 나머지 목소리를 떨었다.
「연극은 집어치워!」
「연극이 아니에요. 그리고 저는 테러리스트나 그밖의 어떤 사람을 위해서도 서류를 훔치려 하지 않았어요.」
줄리의 목소리도 떨렸다. 그러나 그것은 분노 때문이 아니라, 갑자기 눈뜬 왕자를 향한 뜨거운 사랑 때문이었다. 그리고 줄리는 이제야 비로소 발견한 더없는 행복을 그와 나누어 가졌으면 하고 원했다.
「저는... 가겠어요. 이번 일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이야기하겠어요.」
줄리는 걷기 시작했다.
「지금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어.」
왕자는 줄리의 앞을 가로막고 이를 악물어 말한 뒤 줄리를 자기 쪽으로 돌려세웠다. 그의 눈이 순간 가늘어졌다. 왕자는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줄리의 몸이 뜨거운 생각으로 떨리는 것을 왕자는 분명히 깨달았다.
「그렇군, 적어도 그 부분만은 거짓말이 아닌 모양이군.」
정연한 얼굴에 싸늘한 분노가 퍼져나갔다.
「당신은 내 것이 되기를 원하고 있어, 영광이오! 당신도 경험이 풍부하겠지만 나도 당신 못지 않아, 틀림없이 만족할 수 있을 거야.」
왕자는 줄리의 손목을 잡고 성큼성큼 방을 가로질러 가서 문을 발로 걷어찼다. 밖은 짧은 복도였다. 그리고 왕자는 막다른 데에 있는 방문도 발로 걷어차 열었다.
그곳은 왕자의 침실이었다.
「안돼요! 지금은 싫어요!」
줄리가 필사적으로 외쳤다.
「싫다고?」
왕자가 잔인하게 말했다.
「이미 게임은 끝났어. 서로 솔직해지는 것이 좋지 않을까? 당신은 처음 계획대로 몸을 바쳐 정보를 손에 넣게 됐어. 나는 결코 거짓말은 하지 않아.」
왕자는 의미있는 시선으로 줄리를 내려다본다.
「어쨌거나 당신도 나만큼 즐길 수 있을 거야.」
왕자는 그녀를 커다란 침대에 쓰러뜨렸다. 검정색 담비 모피는 깨끗하고 촉감이 좋았다. 넓은 마루에는 크림색 융단, 벽은 흰 대리석, 흰 방에 고풍한 검정 가구가 배치되어 있었다. 왕자의 방은 흰색과 검은 색으로 통일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서 검정 대리석 커피테이블에 있는 큼직한 주황색 꽃병이 특히 돋보였다.
「옷을 벗어, 줄리.」
왕자는 줄리에게 명령하고 나서 자기도 니트 셔츠를 벗고 허리띠를 풀었다. 줄리는 고조되어 가는 정열과 싸우면서 그의 탄력 있는 육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 대한 사랑을 자각한 지금, 줄리는 그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마음을 사로잡아 온 그를 향해 타오르는 감정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그의 것이 되고 싶다! 그렇다. 나는 그의 것이 되기를 원하고 있다!
줄리의 전신은 그칠 줄 모르는 욕망으로 격렬하게 떨고 있었다. 왕자는 그런 줄리의 모습을 보고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벨트가 마루에 떨어졌다.
「내가 도와주지.」
왕자가 침대에 앉자 그 무게로 매트리스가 내려앉았다. 그는 익숙한 솜씨로 줄리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으나, 빨간 레이스가 달린 속옷에 손이 닿기 전에 순간적으로 동작을 멈추었다. 안타까워 견딜 수 없게 된 줄리가 몸을 틀었다. 그는 그런 줄리의 모습을 보고 어깨를 들먹이며 웃었고 천천히 줄리가 입은 것을 모두 벗겼다. 두 사람은 태어날 때의 모습 그대로 검은 담비 모피에 드러누웠다.
「아...」
왕자는 줄리를 껴안고, 마치 깨어질 것을 다루듯 그녀의 금발을 쓰다듬었다.
「당신은 아름다워. 줄리.」
「이런 모습의 저를 상상한 적이 있으세요?」
줄리가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매일 밤 상상했어, 달링. 그 비밀의 화원에서 하나가 되던 날 이후, 밤이 그렇게 길고 고통스러운 것인 줄은 몰랐어.」
왕자의 손이 깃털처럼 가볍게 줄리의 살에 미끄러졌다. 줄리는 새롭게 열린 감각의 세계 속에서 떨고 있었다. 그의 손놀림이 어서 그의 것이 되었으면 하는 줄리의 기다림에 불을 질렀다.
왕자도 냉정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숨결도, 심장의 고동도 흩어져 있었다. 격렬한 전율이 줄리를 엄습했다. 줄리의 마음은 이제 비로소 그를 향해 활짝 열렸다. 그녀의 사랑은 가볍게 떨고 있는 날씬한 몸을 통해 그에게 전해졌다. 찬란하게 빛나는 사랑이, 그 사랑의 근원이 되고 있는 사람과 하나가 되려 하고 있었다.
「자이!」
마침내 줄리가 외쳤다.
「자이, 사랑해 주세요! 지금 당장 사랑해 주세요!」
왕자는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줄리를 느닷없이 밀쳤다.
「어째서 지금 당장이지, 줄리?」
그의 말에서 거짓된 감미로움이 느껴졌다. 그러나 황혼빛 속에서 보는 그는 이 세상 사람으로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멋졌다.
「어째서 지금이지?」
왕자가 되풀이해서 물었다.
「이제는 언제라도 줄리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분명해졌는데 말이야.」
갑자기 정열의 파도가 밀려나갔다. 줄리는 불과 몇c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그리운 사람의 얼굴을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저를... 사랑하고 싶지 않다는 뜻인가요?」
줄리가 머뭇머뭇 손을 내밀었다. 왕자가 그 손을 뿌리쳤다.
「그렇지는 않아, 당신을 사랑하고 싶어서 견딜 수 없어. 그 마음을 의심할 필요는 없어.」
그의 목소리는 다시 쉬어 있었다. 그는 등을 돌리고 침대에서 내려섰다.
「지금도 당신을 내 것으로 삼고 싶은 마음은 변함없소.」
왕자가 분명히 말했다. 그리고는 돌아서서 줄리의 섬세한 육체의 선을 뜨거운 시선으로 더듬었다. 순간 검은 눈동자에 깃들었던 분노가 새로운 정열로 꺼져 버렸다. 하지만 그는 곧 냉정을 되찾았고 타협을 허락지 않는 엄한 입술엔 조소가 떠올라 있었다.
「언제든지 당신을 내 것으로 삼을 수 있다면...」
왕자는 마루에 흩어져 있는 옷을 주워 입기 시작했다.
「적당한 기회에 품기로 하겠어. 하지만, 오늘은...」
그는 바지를 입고 벨트를 죄었다.
「오늘은 배신한 남자에게 사랑을 구걸하는 말을 듣는 것만으로 만족하겠어.」
「자이! 그게 아니에요!」
줄리는 필사적으로 왕자에게 매달렸다.」
「내 말을 들어보세요. 오해예요. 거기에는 말못할 이유가 있다구요.」
「그럴 테지.」
깎은 듯한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으나, 눈은 혐오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왕자는 매달리는 줄리를 뿌리치고 셔츠를 머리에서부터 뒤집어썼다. 줄리는 다시 한번 왕자에게 매달렸다.
「자이, 믿어 주세요. 정말이에요. 당신을 사랑해요!」
왕자는 단호하게 줄리의 몸을 뿌리쳤다. 줄리는 흐느껴 울면서 침대에 쓰러졌다. 그는 이런 모습을 경멸하는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의 분노는 지금의 분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검은 눈동자 깊숙이에서 빛나는 호랑이 눈과도 같은 불길은, 지금까지의 정열을 불태워 재로 만들어 놓았다.
「그만둬!」
왕자가 단호하게 외쳤다.
「두번 다시 그런 말은 하지 말아!」
그는 잔인하게 내뱉고 성큼성큼 침실에서 나갔다. 무거운 침묵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줄리는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싫증이 나서 버려진 장난감처럼. 줄리는 부드러운 모피 위에서 주먹을 쥐었다. 상실감이 그녀를 사로잡았고 황량한 허무감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검은 담비 모피 위에서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겨우 감각이 되살아난 줄리는 천천히 일어나, 침대에서 내려와 옷을 집어들었다. 무서운 아픔이 천천히 가슴을 찌른다. 재킷의 단추를 잠그며 멍청히 방을 둘러보고 있던 줄리의 눈에 사이드테이블에 있는 조각이 띄었다. 윤기 있는 백단으로 만든 작은 입상이었다. 그 디자인을 어디서인지 본 것 같았다.
그렇다. 이것은 시바의 주신(主神)이다. 4개의 손을 가진 시바신이 힌두교의 3대 신 가운데 하나라는 것은 줄리도 알고 있었다.
시바는 무슨 상징일까? 그래, 시바는... 파괴의 상징이었다.
줄리는 이것이 마지막이 될 침실의 모습을 하나하나 가슴에 새겼고 몹시 마음이 아팠다. 버림을 받고 굴욕을 당하고 거절당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처음으로 마음을 연 바로 그때, 줄리는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그렇게 비정한 보복을 하는 사람을 어째서 사랑하게 되었을까? 그는 이토록 심한 고통을 남에게 주는 사람인데.
자이, 결코 당신을 용서하지 않겠어요.
줄리가 떠난 뒤에도 은은한 백단 향기가 복도에 감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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