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 8의 부록 - 읽으며 쓴 것들

NEOKIDS 작성일 14.08.24 00: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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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0. 니체는 왜 민주주의에 반대했는가, 김진석, 개마고원, 2009

-니체가 민주주의에 반대했던 것에 대한 반대, 즉 테제와 안티테제에 관한 이야기. 그렇다면, 제목에서부터 이미, 민주주의라는 테제의 어떠한 온전성을 부각한 후 니체를 비판하는 것. 이것은 근본부터의 에러. 



321. 인간의 일생에 있어, 탈정치화는 필요하다. 여기서 탈정치화는 무지의 달콤한 상태를 계속 유지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자신이 옳다고 믿던 것, 고집스럽게 여기던 것, 온전하다고 믿던 그 인식론 자체를 떠나, 타자적으로 관조하듯, 소설가가 자신이 쓴 초고를 기억에서 지워지도록 서랍에 쳐박아두듯 그것을 잠시 접어두고 다르고 큰 틀을 보자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다시 '정치화'될 때나 혹은 새 인식적 지평을 열 때에 도움이 될 수 있기에. 

이런 면에서 볼 때 니체의 민주주의에 대한 반대는 '위험한' 것이 아니라 '유효한 요소'로 그 위치를 바꿔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의 주장 자체, 즉 정치화에 대한 그의 인식을 비판적 '구성요소'가 아닌 지배적 '테제'로 받아들인다면, 그에 대한 오독들의 문제도 여전히 상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민주주의 반대를 '테제'로 받아들인다면, 상대적으로 민주주의의 완전성과 온전성을 담보해줘야 '안티테제'로 기능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인데, 민주주의라는 사회시스템은 사회라는 것의 편의에 따라 개량되고 선택된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들이 담보하는 가치들이 사회의, 혹은 권력의 선택에 따라 훼손되거나 파기될 현실이 상존한다는 점에서는 완전성이나 온전성의 '테제'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 또한, 어쩌면 니체 자체를 통합적이 아닌 파편적으로 인식할 수 밖에 없는, 일종의 한계성에 대한 반증이 아닐까. 



322. 사랑하는 사람의 어떠한 것들이 좋다고 말하는 건 허구적인, 허언에 가깝다. 사랑이라는 것이 그렇게 조작해버리므로. 그렇게 꺼냈던 말, 그 상대의 행동, 좋았던 모든 것은 어느새 증오나 무관심, 익숙한 지루함으로 대체될 지 모를 일이다. 



326. 니체의 사상들이 자기모순적이라 한다면, 그것은 현실이라는 대상에서 파생되는 철학으로서 당연한 귀결이 아닐까. 형이상학은 아예 이러한 모순을 외면하기 위해 이데아의 세계를 만들었던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세계는 주지하다시피, 모순된 세계이기 때문이다. 항상 철학, 이념, 사상이 설파해온 대로라면 세상은 정치의, 경제의, 사회의 모순들이 생길리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것들은 발생한다. 어째서 그런 현상이 발생하는가. 


327. 현자는 세상을 바꾸는 직접적인 행동에 있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하려 해서도 안된다. 현자는 진리를 추구하고, 발견한 진리를 설파하여, 당대에 인정받지 아니한다 하더라도 후대의 변화까지 바라보며 이야기해야 한다. 


336. 니체를 읽으며 - 

절대적인 진리가 없고 확신이라는 것이 위험한 상황임에도, 인간은 확신을 하고 모순을 배격하려 한다. 

왜 그럴까?

그것은 어쩌면, 그렇게 해야만 인간이 생존할 수 있다고 믿는, 기이한 습관에서 온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왜, 어떤 경로로 그 습관은 인간에게 탑재되는가? 일단, '삶의 방향성을 잃는 것에 대한 공포' 자체만 국한하여 전제한다고 하면, 이념 진영에서의 해괴한 양태들은 모두 설명이 가능하다. 즉, 진영을 배반하고 다른 진영의 행동자가 되는 때는, 그 확신이 흔들렸기 떄문이고, 더는 그 존재에게 방향성을 제시하지 못할 때라는 말이 된다. 이 메카니즘은 좀 더 복잡한 인과성으로 일어나게 될 터인데, 그 속에는 인간의 감정 등과 같은 가변적 요소들이 포함되기 때문이리라. 

삶의 방향성을 잃어버린 공포감은 다시 방향성을 가지려는 움직임을 부추기는데, 문제는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이 스스로가 적대했던 세력들의 논리라는 것이다. 그만큼 잘 아는 것도 드물고, 또 그만큼 확신의 강고한 틀에 갇혀 있었다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때문에 진영논리를 뒤집는 관점과 행동을 하는 자들의 최대 문제점은 1. 그런 자신을 통찰하지 못하는 것. 통찰부족. 2. 알고 있다는 확신이 역전이되면서 실제와는 동떨어진 비이성과 무지의 편안함으로 빠져든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사실 '알아도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이전보다 더 '무지'해진 것이다. 그리고 그에 맞는 열정과 행동을 쏟아낸다. 


337. 삶을 통찰한다, 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이성과 감성의 불가능해 보이는 

합체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닐까. 

이런 방식은 왠지, 관점주의와 상통하는 느낌. 


339. 인간이 쉽게 빠질 수 있는 함정 - 

내일도 오늘과 같을 거라고 믿는 안일함. 하지만 오늘과 내일은 절대 같을 수 없다. '일반적'이라는 허상의 틀 속에 자신의 하루를 우겨넣느라 그것의 의미를 깨닫지 못할 뿐. 


442. 좀 더 생각의 발전. 

명제: 유명한 철학자들의 논제들은 결과적으로 그 시대의 한계에 묶여 있어 그것을 뛰어넘을 수 없다. 

넘을 수는 없다고 해도, 우리는 과거의 철학들을 통해 인간이라는 시스템의 기제들을 볼 수 있다. 그 당시의 사회상, 시대상이라는 것에서 인간은 어떻게 반응하고 생각하였는가의 모습들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것들을 바탕으로 우리는 앞으로 인간이 어떻게 반응하게 될 지를 알 수는 없는 것일까?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을 것이다. 첫째는 앞으로의 '한계'를 미리 규정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아이폰, 아이패드 같은 것이 나올거라는 말에 단 3년전만 해도 코웃음쳤던 댓글들이 있다. 둘째는 그 한계에 인간이 어떻게 반응할 수 있을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현재까지의 관념과 인식을 뛰어넘는 그 무언가가 있을 수도 있고, 오히려 더 저해된 사고방식을 가질 수도 있다. 


그 한계들이 명백함에도 철학을 해야 한다는 것은, 결국 인간과 세상의 기저를 규정해 보려는 욕망에 다름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편린들을 모아서 세상을 재조립해 보는 자유 외에는 허락된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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