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 10 - 전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NEOKIDS 작성일 14.11.17 23: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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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칼 폴라니, 책세상, 2002
경제 결정론을 모든 인간 사회에 적용하려는 노력은 망상이나 다름없다. 사회 인류학의 연구에 의해, 사용하는 생산 도구가 사실상 동일하다 해도 그 생산 도구들에 조응하는 제도는 다수라는 것이 밝혀졌다. 시장이라는 제도가 인간적 유대를 멧돌에 갈아 셀렌산으로 부식시킨 듯한 특징 없는 획일성으로 몰아넣기 전에는 제도를 낳는 인간의 창조성이 결코 멈춘 적 없었다. - p41
19세기 사회사는 이중적 운동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진짜 상품에 대해서는 시장적인 조직 방식을 확장해나가는 과정이, 허구적 상품들에 대해서는 그것을 제한하는 과정이 나란히 나타났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시장이 전 세계로 퍼져나갔고 시장에 나오는 재화의 양은 엄청나게 늘어났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일련의 법령과 정책의 연결망이 노동, 토지, 화폐에 관한 시장의 활동을 저지하기 위해 만든 강력한 제도들로 통합되었다. - p67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무엇보다도 먼저 대외 정책의 문제이다. 금본위제의 실패에서 보았든이, 사적 기업이라는 경제 운영 방법이 파산했던 곳도 바로 이 대외 정책의 영역이며, 사적 기업이라는 방법에 집착한 나머지 현실적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는 곳도 대회 정책의 영역이다.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단순한 하나의 신조에 바탕을 두고 있다. 대외적인 구매와 판매, 대부와 차입 그리고 외환 거래가 벌어지는 단위는 개인들로서, 마치 그들 모두가 같은 나라의 국민인 것처럼 상정하는 것이다. '대외 경제'는 이로써 사적 개인들 간의 문제가 되고 시장 메커니즘음 만국의 대외 경제를 저절로 '균형에 이르게' 해주는 거의 기적에 가까운 힘을 갖는 것으로 신뢰받는다. 이러한 유토피아적인 관념은 현실에서 반드시 무너지게 되어 있으며, 실제로 무너지고 말았다. -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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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던 중 인상적으로 접한 두 가지의 상황이 떠오른다. 
첫번째는 요즘 미생이 한창 인기라는 것. 미생에 나오는 대사들이 마치 명언집처럼 돌아다니고 있다. 대중들이 감명을 받는 것이야 어제 오늘 일은 아니지만, 그 감동의 밑바탕에 어떤 근저가 소용돌이 치고 있는가를 생각해볼 때, 미생은 사실 양면적인 부분이 존재한다고 느꼈다. 자본주의로 가속화된 사회 자체에서 소모되는 것을 찬양하는 반면과, 그 이면에서 희생되어버린, 노동 바깥에 존재하는 인간의 모든 것들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며 그것에 대해 지적하려는 반면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부분은 윤태호 작가의 인터뷰를 통해, 작가 자신도 이 양면을 인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두번째는 찰카닥 베스트에 걸려있는, 청춘페스티벌에서 김영하 소설가가 건강한 개인주의를 주장하는 강의였다. 
왜 이 책과 함께 그 두 가지 상황이 인상적이 되었는가. 그것은 이 책을 읽으며 든 인상과도 무관하지 않기 떄문이다. 첫번째 상황의 일정부분은 폴라니가 훨씬 이전에 예견했었던 악화된 상황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고, 두번째 상황은 이상주의에 대해서 느끼고 있는 부분이었다. 
칼 폴라니는 사회주의자다. (벌써 누군가들은 부들부들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푸훕) 그의 저서와 이론에서 핵심적으로 보고 있는 것은, 시장에 의한 자체조정 체제라는 것 자체가 이미 유토피아적인 것으로 실현될 수 없는 이상에 불과한데, 이를 현실로 보고 나선 자본가들이 많으며, 따라서 사회가 컨트롤할 수 있었던 경제라는 관계가 역전되어 경제가 사회를 좌지우지하는 현실이 되고, 그것은 인간과 노동의 사물화를 불러올 것이라고 주장하던 점이다. 이 부분은 거의 예언처럼 맞아떨어졌다. 이런 발언과 그의 이론들에서의 인간적인 부분을 보호하려는 시각들 때문에 그의 이론을 언급하는 진보층이 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보수는 또라이이고, 진보는 헛똑똑이다' 라는 명제를 새삼 생각해보게 되기 때문이다. 
이 서적에서의 그의 예언들은 맞아 떨어진 부분들이 있었다. 맞아 떨어졌다는 것은 그만큼 폴라니가 바라본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까지 변한 것이 없었다. 변한 것이 없었다는 것은 이상에 기댔다는 것이고, 현실을 외면했다는 것이다. 폴라니의 저서를 이것으로 처음 접하지만, 이 저서의 텍스트만으로 판단하자면 그는 상당한 이상주의자의 면모를 보인다. 심지어는 니체가 부정했던 종교의 문제들을 다시 끌어와 종교 속 신앙의 순기능을 역설하려 한다. 상당한 착오가 아닐 수 없다. 
그 착오는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너무나 이상적으로 본 나머지 스탈린주의와 트로츠키주의의 투쟁 문제들마저 현실을 외면한 판단을 하며 스탈린주의가 트로츠키주의를 이기고 소련이 지역적 계획경제로 다가가고 있는 부분을 칭찬한다. 진짜의 모습은 전혀 다른데도. 그러면서 외치는 지역적 계획경제로의 접근법은 공허할 뿐이다. 폴라니는 절대로 전세계적 자본주의 시장체제는 존재할 수가 없다고 이 저서에서 단언한다. 어떻게 모든 나라가 같은 상황이 되어버릴 수 있느냐며. 그러나 오호통재라. 국제적 기준이 마련됐고 인터넷이 발명되어 버렸다. 
개인적으로 이상은, 누구나 말할 수 있다. 말은 누구든 한다. 이것이 진보가 헛똑똑이가 되는 시스템이다.
김영하 소설가의 주장도 어떻게 보면 이와 맥락을 같이 한다. 건강한 개인주의라는 말은 참 듣기에 좋다.그러나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일단 가족 내에서의 교육 문제에서부터 개인의 지성적 각성의 부분까지, 사회 전체의 '건강한 개인주의'라는 부분에 대한 합의내용 같은 것까지 돌아보아야 할 일이다. 
실질적으로 돌아볼까? 10대는 텄고 20대도 텄고 30대 중반까지도 할 수가 없다. 40대 초입쯤에야 내인생은 언제까지 이꼬라지가 될까 하며 방향전환을 모색해 보는 수단까지 갈때 쯤에 가능하다. 수능적 현실, 토익토플적현실, 학점적 현실, 취직적 현실, 금전적 현실, 가족부양적 현실, 이 모든 것들을 아울러 고민하는 부분이 이 주장 이전에 이미 수립되어 있어야만 그 말의 힘이 생기고, 이런 현실들에서 구름탄 신선처럼 떨어져 나오지 않으면 불가능한 이야기다. 그러나 이 사회는 그런 일을 고립의 함정 내지는 배부른 소리로 여긴다. 김영하 소설가 조차도 이미 출판적 현실이라는 부분에 목을 매고 있지 않은가? 또 이걸 획득할 수 있는 지평이나 환경조차 자신의 입지를 위한 아집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는 인간의 욕동적 함정은 추가다. 
보수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한 번 옳은 것은 그것이 어떤 모순과 폐해를 가지고 있든 그냥 옳은 것으로 결론나는 것이다. 때문에 쌩또라이가 된다. 
이상을 현실로 만들고 싶다면, 현실을 끝까지 파헤쳐야 한다. 옳고 그름을 논하는 협소한 부위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시스템 자체의 문제들을 계속 누적시키며 모든 면에서 '통합적'으로 연구해야 한다. 어떠한 기제가, 어떠한 인간이, 어떠한 시각과 욕망이 이런 현실을 만들고 있는지를 똑똑히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문제점을 선별하고, 그에 대해 '통합적'으로 접근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사회문제를 지적하며 이런 정도의 면모를 보여주는 필자를 아직 보지 못했다. 예언아닌 예언과 우는 소리만 늘어놓는 기존의 고전학파나 신자유주의학파 경제학자들은, 이 저서의 머릿말에서 쇼킹하게 제시하는 바대로 더 뭘 기대할 가치가 없다. 혹자들은 재벌만 때려잡고 법적강제력만 제대로 실현되면 모든게 잘될 거라고 생각한다. 그 이후는? 더 좋게. 그 이후는? 더 좋게. 
아! 누구나 말은 할 수 있다. 그걸 어.떻.게 해낼 건데? 어떻게 현실상에서 실현되게 만들 건데?그 고민은 또 말잔치가 되어버릴 뿐인가? 의지만 있으면 가능하다고?


이러한 답답함이 저서를 읽는 내내 가시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의 키워드들은 건져낼 수 있다는 건 다행이었다. 폴라니가 보는 노조의 기능 부분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그것조차 인간의 욕망 기제라는 현실적인 문제를 뛰어넘는 방법론이 있어야만 가능한 이야기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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