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 폴라니의 생각은 순진한 구석이 있다. 그의 생각은 노동계급이 잃을 것이 없기에 사회의 추동력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생각해보라. 토지, 화폐, 노동의 상품화라는 허구가 먹혔다. 그런데 노동계급이 '잃을 것이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허구가 먹히지 않을 것 같은가? 이 허구는 이미 온 사방에 만연되어 노동자들에게 프로파간다처럼 번지고 확고하게 자리잡아 두려움을 갖게 만들었다. 그 방법은 사회적 탄압에서 구매욕의 조작, 체면 의식, 매스컴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조직된다. 일례로 대중들 사이에서 중산층이란 것의 의식이 정확히 계량화 되어 있지 않은 현상을 보라. 통계학적 기준에서 중산층이라 불리기에 한참 미달되는 자들도 자신이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모습이 만연되어 있다.
-칼 폴라니의 생각 중, 괜찮다고 느낀것.
계급이익은 객관적인 역사적 상황에서 전체사회의 이익을 대표할 때에만 비로소 사회의 변화 원동력이 된다. 계급은, 그 이익이 구체적 상황에서 전체의 이익과 일치하거나 자신의 이익을 변형시켜 다른 계급의 이익까지 충분하게 포괄할 수 있을 때에만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다. --> 이 관점은 보수들이 왜 그렇게 가시적 결과에만 집착하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이또한 가치론의 메카니즘에 중요점을 찍는 현상.
-예를 들어, 어떠한 다리가 세워졌다. 그 다리를 만든 자들은 그것을 자신의 업적이라 치켜세운다. 물질로 이뤄진 결과물 자체가 업적이라는 인식론적 가치와 연결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가치의 1차원적 시각은 언제든 와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질과 업적의 연결고리를 만들어내는 가치론은 다른 가치들에 의해 파쇄되기 쉽다. 효용성과 효율성이라는 가치가 개입되면 어떻게 될까? 다리의 통행량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다리가 쉽게 낡아버려 철거비용이 오히려 더 많이 든다면?
-칼 폴라니의 논리 중 이상한 점 하나.
노동계급과 대중 자체를 두 개의 분리된 구조로 이해하고, 노동계급과 대중의 이익이 맞춰져야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두 개가 분리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사실, 정의한다는 작업은 대단히 두려운 것이다. 하나를 고착화시킨다는 것은 그 하나에 포함된 다층과 다면을 일층과 일면으로 잘라내어 가둬버린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사회란 무엇인가? 제도, 관습, 혹은 법인가? 아니다. 사회는 인간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인간들 사이의 구체적인 관계성이다. -86p
-길은 하나밖에 없다고 말하는 자야 말로 가장 신용할 수 없는 자이다.
- 칼 폴라니의 문제는 또다른 곳에 있다. 그는 니체를 읽고 좀 더 관조적이 되었어야 했다. 인간의 공동체가 이익에 결부되고, 보편적 이익의 추구로 나가야 한다는 부분까지는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근저가 일종의 신앙심이어서는 곤란한다. 실제로 신앙심이 여러 문제를 일으키는 현재가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결국 '사람'이 바뀌어야 '사회'가 바뀐다는 것이 진리이다. 북유럽의 사민주의 국가들이 이미 그것을 충분히 현실화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람'을 바꾸는 의식접근적 기술과 그 방식들이 자본주의의 방식에 잡혀먹히지 않고 '화합하여 흡수된 채' 더 다른 방향으로의 전환을 이루게끔 해야 하지 않는가. 온잔한 자본주의라는 허상도, 불완전한 자본주의라는 증오의 비판도 아닌, 제3의 길을 모색할 수 있는 방법들이 이미 충분히 우리에게 제시되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현재가 이 지경인 것이다. 이런 부분을 통사적 접근으로 돌아보지 못하는 지점들이 아쉽다.
이제부터의 인간변혁은 주도면밀하게 계산되어야 하고, 그러면서도 겉은 이전과 비슷하고 친근하게 느껴져야 한다. 그것이 지식인과 정치인, 언론인이 가져야 할 고민의 지점인 것이다.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 칼 폴라니의 또다른 아쉬운 점 하나.
기술과 기계의 발전으로 모든 것은 전세계화되었다. (인터넷!!!) 칼 폴라니의 시대에서조차도 모든 것이 그 초입단계로 들어서고 있었다. 역설적으로, 그러하기 때문에 마르크스가 또한 보편적이 되어간 것이다. 인간 자체가 북유럽이라고 다를 리 없고 미국이라고 다를 리 없는 것은, 그만큼 인간이 기반하고 있는 것들이 '유사하기' 때문이며, 자본주의 또한 그 점을 보고 발전해 왔다. 결국 마르크스가 본 것은 보편적인 것이지 부정적인 것에 대한 집착이 아니다. 그것이 어떤 사회에 가도, 다시 말해 자본주의와 인간이 존재하는 어떤 사회에 가도 벌어질 수 있는 것을 본 것이다.
- 머릿말에 혹하고 중간까지는 그럴싸하다가 이후에는 난감한.
- 떠오른 생각.
앞으로의 모든 교육과정들은 통합되어야 한다. 정치학, 경제학, 자연과학, 심리학, 철학, 사회학 등등이 모두다. 그리고 예술과 미학까지도. 전체적이고 통사적인 관점을 키우게 해야만 한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냥 한 가지만의 전문가로는 이제 의미가 없는 시대가 오고 있다.
-칼 폴라니의 '민주적으로 조직된 노동자 정당의 내적 조망력'에 대한 생각은 현재의 자본주의 상황에서는 이상론에 불과할 따름이다. 군중심리, 프로파간다 등의 이론이 저변화된 지금에서는 특히 더. 프로파간다가 조직을 공격하기 시작할 때의 대처는 조직의 지도자로부터 파생되고 발전되는 것이다. 내적 조망의 정보 그 자체가 왜곡되고 불합리, 부조리에 바탕을 두는 상황이 되어버릴 때, 혹은 그렇게 보이도록 만들 때, 과학적 도구 따위는 무용지물이 된다. 지도자는 이렇게 되었을 때, 감정에의 호소와 이성의 판단을 적절히 혼합 또는 화합시켜 프로파간다의 프레임에 대항하는 더 강력한 프레임을 만들어내야만 한다. 전적인 지도자의 역량이 필요한 이런 부분에서는 '민주적인' 것도 '내적 조망'도 무의미해 지는 것이다.
- 가장 효율적인 경제생산집단이란, 수직적 관계와 수평적 관계가 적절히 조화를 이룬 관계조합적 기술이 발달된 조직이라 생각한다. 이를 위해서는 노조가 있어야 하고, 효율적인 노조가 있어야 하며, 그 노조와의 많은 협의 및 소통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일상적 행위가 되어야 한다. 이 때에만 비로소 칼 폴라니의 시각은 효과적이다. 수직적 관계는 생산의 속도 및 의사결정과 업무방향의 지향성 유지에 큰 장점을 가진 반면, 내적 조망을 집단논리 속에서 억압 왜곡하는 단점이 있다. 반면 수평적 관계는 구성원 전체의 리더쉽과 협조력이 일정 수준 이상을 이뤄야 하는 반면, 내적 조망에 충실해 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므로 사측은 사실 노조를 최대한 활용하여 생산성을 상승시키는 방안을 연구해야 하는 것이다. 종속적 혹은 억압적 관계로서 어용노조를 만들거나 노조와해 정책을 쓰는 것이 아닌, 파트너쉽으로서 노조를 이해하고 다가가야 하는 부분.
- 현실을 바꾸려면 현실을 잘 알아야만 한다. 수정주의냐 완전한 개편이냐의 갈림길, 소요비용 및 사회적 비용의 산출, 모든 면을 잘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 진보의 문제는, 대중을 계도하려 한다는 그 프레임의 이미지에 문제가 있다. 이 문제는 심지어 이성적으로 능히 통할 수 있는 이야기들에서조차 발현되어 장벽으로 기능한다. 진보는, 프레임을 이용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낡은 군사정권 시절의 프레임 정도로는 이제 대중을 끌어당길 수도, 보수층에 맞설 수도 없다. 그들이 가진 것이 힘과 돈이라면 진보 쪽은 진실과 다가감에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진실은 쓴 법이고 대중은 그걸 쉽게 삼키려 하지 않는다.
- 이로서 확실해진 기분이 든다. 칼 폴라니는 엄청난 이상주의자였다. 인간의 기제들에는 무관심하고, 언제나 큰 틀 자체만 바라보는 전형적인 이상주의자. 그게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그만큼 그의 학문적 업적도 무시못할 것이고, 경제와 사회의 관계를 그만큼 인상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도 없을 것이다. 다만, 그것이 이상주의적 토양에 안착할 때 항상 따라오는 부작용은 현실에 대한 오판, 그것이다. 실제로 그가 언급한 영국의 예나 스탈린주의에 관한 예에서 보듯, 결과는 그의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았고, 그가 생각한 가장 최악의 것만이 현실화되었다. 이런 오판은 종국에는 그가 보던 것 중 정말 건져야 할 것들까지 모두 질식시켜버리고 말게 될 것이다.
현실을 이상주의에 맞게 움직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쉽게 판단하지 않으며, 현실이 흘러가는 방향을 통합적으로 이해하고, 인간을 잘 알아야 하며, 정책적 기본 이념의 부분과 항상 씨름하며 방향성을 재고해야 한다는 것. 그가 가르쳐주는 교훈.
- 칼 폴라니의 이론을 접하다 보면, 중독성이 강하다는 기분이 든다. 어떤 세계를 보든 칼 폴라니의 기준으로 보게 될 법한 그런 식의. 사실 따지고 보면 어느 학문이든 마찬가지 부분이 있지만, 그 이상주의는 위험하다. 저잣거리의 힐링책들과 별반 다를바가 없는 마약이다. 차이가 있다면, 그런 말들보다 좀 더 중독성이 강하다는 것 뿐.
- 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다시 힘을 받을 수 있게 된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폴라니가 스스로 지적했던 그것, 모두가 같은 나라의 국민들로 간주된다고 말한 오류 부분이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아니면 해결되었다는 착각을 조장했거나)
그리고 이러한 해결의 이면에는 폴라니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발명품, 바로 인터넷 네트워크가 탄생한 데에 그 원인요소가 있다.
정보와 그 향유시간의 동시대성 및 단축은 그 오류 부분의 감정적 인식적 저항을 거의 없애거나 최소화했다. 마치 옆집 일처럼 바다 건너의 일을 그것도 실시간의 동영상으로 접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인식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친다. 그 결과 자본주의적 제도도 크게 영향받았고, 현실상의 문제 자체까지 점진적으로 변화시키는 상황이 된 것이다.
- 폴라니의 헛똑똑함적 예언은 되려 다른 효과를 불러 일으키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첫째로, 인간 자체를 다시 주목해야 한다는 점. 둘째로, 싸워야 할 대상 자체를 새롭게 규정할 필요를 느끼게 한다는 점.
첫번째는 그가 위험적 예언을 경고했음에도 왜 그런 방향으로 흘러갔는지를 분석할 필요가 있음을 시사하며, 두번째는 그렇다면 이렇게 거대해진 위험적 현실에서 먼저 접근, 그리고 최종적으로 도달해야 할 치유적 수준을 면밀하게 다시 상정해야 한다는 필요성의 존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