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먹을 각오하고 쓰는 민족사학 비판(1) - 창세신화

백승길 작성일 06.12.26 04:5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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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금 모 대학교 국사학과를 다니는 학부생입니다. 대학에 입학하기 전부터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이것 저것 별의별 책을 다 읽어보고 나름대로 연구랍시고 설쳐댄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흔히 민족 사학이라고 부르는 계열의 책이나 역사도 나름으로 섭렵했었죠. 한때는 한단고기를 읽고 이게 진짜다라고 생각하며 살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좀더 여러가지를 공부하고 역사에 대한 현실을 인식하면서부터 민족 사학 계열의 역사를 조금 더 비판적으로 보게 되었지요. 그래서 욕 좀 먹을 각오하고 민족 사학을 한번 비판해 보렵니다. 별볼일없는 짧은 지식으로 하는 비판인 만큼 오류도 많을 수 있고 사실과 어긋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해보겠습니다.

민족 사학이 흔히 강단 사학이라고 부르며 비판하는 현재 주류 사학계와 충돌하는 가장 큰 부분은 당연히 고대사 부문입니다. 특히 상고사라고 하는, 삼국 이전의 역사에서 주로 충돌하지요. 그래서 그 상고사에 대해서 먼저 하나씩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조금 과격한 민족 사학계에서는 인류의 조상을 우리 민족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많은데요. 일단 이렇게까지 과격한 부분은 국수주의를 넘어서 독일의 게르만 제일주의에 가까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저로써는 일단 제외하겠습니다.

인류의 탄생이나 천지 창조의 신화는 적어도 현재 인정되는 것으로는 우리나라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부분은 우리 학계의 문제점이자 한계라고 말해도 결코 과언은 아닐겁니다. 가까운 중국이나 일본은 물론 거의 세계의 모든 국가 혹은 민족이 천지 창조나, 아니면 적어도 최초의 인류 탄생을 신화로써 가지고 있는데 유독 우리나라만 없는 것입니다.

신화는 동서양 - 정확하게는 동아시아(일본 제외)와 세계 - 이 그 기본 틀에서 상당히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동아시아에서만 나타난 독특한 사상 및 철학 체계에 의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서양의 신화는 말 그대로 神의 이야기입니다. 심지어 신이 직접적으로 등장하거나 묘사되는 부분이 드문 유대교(기독교 및 이슬람교)의 신화조차도 궁극적으로는 신이 신화의 주체입니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신화는 신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절대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신에 해당하는 위대한 초월적 존재는 등장하나 다른 신화의 신처럼 전능하지는 않습니다.

이는 아마도 중국에서 고도로 발달하여 동아시아 전체에 퍼진, 유교로 대표되는 도덕적 예학 때문일 것입니다. 유교는 세계에서 유래가 없을만큼 고도의 정신적 성찰과 도덕적 행동규범, 합리적 사고방식을 가진 학문 혹은 종교입니다. 유교는 철저한 인간 중심의 정신적 학문이고 국가 및 사회 중심의 도덕적 학문입니다. 그렇기에 인간을 초월하는 절대적 존재에게 기대기보다 철저한 사회제도, 철학을 통해 인간 중심의 합리적 안정을 추구하는 측면이 강합니다.

그렇기에 한문에서는 영어의 god 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습니다. 神이라는 단어는 귀신, 즉 인간의 혼령 혹은 사물의 정령에 해당하는 것일 뿐 전지전능한 절대자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독특한 학문, 종교가 철저하게 퍼져나간 동아시아에서 신으로 대표되는 절대자가 등장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중국의 신화는 천지 창조를 이룩한 절대자조차도 늙어 죽도록 만들었습니다. 서양에서처럼 화신 혹은 신의 아들이 왕이 되는 것이 아닌 신 자신이 왕이 됩니다. 중국의 삼황 오제는 신이지 결코 화신이나 신의 아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들 신들은 수명이 다하면 죽어버립니다. 불노불사에 전지전능한 절대자가 아닌 것입니다.

이러한 형태로 신화를 변화시킬 수 있는 '위대한(!)' 학문인 유교를 받아들인 우리나라로서는 기존의 신화를 유지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원래 절대자에 의한 천지창조, 절대자에 의한 인류의 탄생 등이 분명 신화의 형태로 남아 있었을 테지만 유교의 영향으로 원형을 유지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교의 영향은 이러한 상황에 더 크나큰 타격을 입힙니다. 유교의 영향으로 중국을 추앙하는 존화사상이 생겨나더니 마침내는 스스로 중국의 속국임을 자처하는 모화사상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모화사상의 핵심은 우리나라가 중국의 일부 혹은 중국에 버금가는 - 그러나 동일시되게 버금가는 - 문명국임을 자처하는 것입니다. 중국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문명국에게 중국과 대립되는 독자적인 천지창조, 인류탄생의 신화가 존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 고유의 천지창조, 인류탄생 신화는 인멸되었을 것입니다. 바로 우리들 자신의 손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민족사학 - 한단고기를 중심으로 - 에서 말하는 우리나라의 창세신화는 동양적인 요소가 많이 거세된 신화입니다. 어떻게 보자면 그래서 오히려 시원적인 신화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렇게 보기에는 어폐가 있습니다. 창세 신화는 유교적 요소가 매우 희박한데 반해 그 이외의 신화나 역사 체계는 철저하게 유교적이기 때문입니다. 중국처럼 신화조차도 유교적으로 변형되었다면 모르겠거니와 창세신화에서만 유교적 요소가 배제된 것에는 어느정도의 조작 가능성을 엿볼 수 있겠지요. 그 신화의 형태나 고유명사들이 기독교 신화와 흡사한 것도 의심해볼만 합니다. 에덴 동산을 연상시키는 아이사타 언덕, 아담과 하와를 연상시키는 최초의 인류 '나반'과 '아만' 등등... 어떤 과격파는 이러한 유사성을 우리나라가 세계 문명의 중심이다!! 라고 주장하는 근거로 사용할지도 모르겠지만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그렇게 해석하기보다는 우리 신화가 표절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창세신화를 거세시킨 것이 어느 누구인지는 알 수 없겠지만 그렇게 거세되었다고 해서 아예 역사로부터 빼버린 것은 명백한 현대 사학의 실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민족사학에서 말하는 창세신화를 우리 신화로 보기에는 의심스러운 모습인 것이 사실입니다. 결국 우리나라는 창세를 잃어버린 민족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쉽지만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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