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와 신라 왕릉의 위치에 관하여...

백승길 작성일 08.01.25 18:2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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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심심함을 이기지 못하고 드헤 님의 증거를 대라는 추궁에 가뿐하게 응대하겠음.

 

 

 

아래는 '경주도회 (좌통지도)'에 대한 일반 설명

 

지도첩의 맨 앞쪽에 ‘慶州都會(左通地圖)[古4709-26]’라는 명칭이 붙어 있는데,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安東都會(左通地圖)’와 같은 형식으로 만들어져 있다.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동일 계통의 尙州都會(18군현), 晋州都會(12군현)의 지도첩이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본 지도책에는 경주를 비롯하여 18개 고을과 경상도의 전도가 수록되어 있다. 하천의 유로, 산줄기, 수록된 지명이라는 측면에서 본 지도첩의 지도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5책에 수록된 경상도 전도 및 각 군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게 그려져 있어 상관 관계가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해동지도』의 각 군현 지도는 지도의 제작 시기와 주기의 기록 시기가 다른 것으로 연구되고 있다. 또한 『해동지도』 6책의 충청도 군현 지도와 전체적인 구도가 동일하면서 주기가 적혀 있지 않은 지도의 일부가 본 사이트의 비변사인방안지도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에 수록되어 있기도 하다. 『호서지도』에 수록된 이런 종류의 지도들은 거리 정보가 기록된 주기가 없기 때문에 지도 위에 여러 지명과 사방 경계까지의 거리가 자세하게 적혀 있고, 도로도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이런 측면에서 『해동지도』의 각 군현 지도에 여러 지명과 사방 경계까지의 거리 정보가 기록되어 있고, 도로가 자세하게 표시된 것은 주기가 없는 원본 지도에 가깝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리고 『해동지도』의 주기 부분은 후대에 새로 기입하기 위해 지도의 여백 부분에 새로운 종이를 덧붙인 부분이 많다. 반면에 본 지도첩의 각 군현 지도의 지도 위에는 여러 지명과 사방 경계까지의 거리 정보가 기록되어 있지 않고, 도로도 생략되어 있다. 또한 본 지도첩의 각 군현 지도 여백에는 주기를 다시 기록하기 위해 종이를 덧붙인 경우가 전혀 없어 지도의 제작 시기와 주기의 기록 시기가 다르다고 보기 어렵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첩은 『해동지도』나 그 원본 계통의 지도를 바탕으로 하여 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판단에 도움이 되는 것이 대구부의 지도이다. 『해동지도』의 대구부 지도에 그려져 있지 않던 읍성이 본 지도첩의 대구부 지도에는 그려져 있다. 대구읍성은 1736년(영조 12)에 축조되기 때문에 『해동지도』는 그 이전의 상황을, 본 지도는 그 이후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읍성만 놓고 볼 때 본 지도첩의 대구부 지도는 『해동지도』 대구부의 지도를 바탕으로 제작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각 군현 지도에 수록된 지명이라는 측면에서 볼 대 본 지도첩의 것은 거의 대부분 『해동지도』의 것에 나오는 반면에 『해동지도』의 것에는 나오는데 본 지도첩의 것에는 나오지 않는 것이 많다. 이것 역시 본 지도첩의 지도가 『해동지도』나 그 원본 계통의 지도를 필사하면서 여러 지명을 생략했다고 볼 수 있게 된다. 주기에 기록된 내용은 거리나 성곽의 둘레 등 시기적 변화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 것은 『해동지도』의 주기와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호구 등 조세와 관련된 통계는 『해동지도』의 것과 전혀 다르게 되어 있다. 이것은 지도나 시기적으로 변하지 않는 정보는 그대로 두면서도 조세와 관련된 통계처럼 시기적 변화가 나타나는 정보는 지도 제작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려 했음을 의미한다. 범례라는 측면에서 본 지도첩의 지도들은 전부는 아니지만 대부분 面과 驛 등에서 『해동지도』의 것보다 더 세분화된 기호를 사용하고 있다. 지도의 크기는 세로와 가로가 95×73cm 내외이다. (이기봉)

 

 

아래는 경주도회의 경주부 부분의 스캔 사진과 경주 일대의 구글 어스 캡쳐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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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령이 거의 다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저 경주도회에는 여러 왕릉들이 표시되어 있는데...(이름은 안써있지만..)

 

물론, 현재 위치와 전부 일치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나마 경주도회에서 주인을 추정 가능한 왕릉의 캡쳐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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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보시다시피 조선 시대의 경주는 지금의 경주와 완벽하게 일치하며,

 

조선 시대에도 이미 경주의 왕릉들을 많이 알고 있었다.

 

 

이정도면 증거로 충분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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