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드헤 님께서 우리 역사를 일제가 모조리 조작하였다는 주장을 하시는 가운데,
그 증거 가운데 하나로 내민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경주에 있는 왕릉들을 일제 시대에 돋우고(내포된 의미는 조작해서 만들었다는 것이라고 짐작됩니다.) 명칭을 정했다는 것이죠.
실상, 현재의 왕릉들에는 그 주인을 알려주는 명문이나 증거가 없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드헤 님의 주장은 일견 먹혀들어갈지도 모를 설득력을 가진 듯 보였죠.
그러나, 오늘 심심해서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둘러보던 도중 이러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자. 한 번 보시죠.
【능묘】 혁거세릉(赫居世陵) 담엄사(曇嚴寺) 곁에 있다. 관(官)에서 전지(田地)의 개간이나 나무 베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혁거세왕이 하늘에 올라간 지 7일 뒤에 오체(五體)가 땅에 흩어져 떨어졌다. 나라 사람들이 합쳐서 장사지내려고 하였으나 요사스런 뱀의 방해로 인하여 각각 장사지내고, 드디어 오릉(五陵)이라 하였다.” 한다. 사릉(蛇陵)이라고도 한다. 미추왕릉(味鄒王陵) 본부의 남쪽 황남리(皇南里)에 있다. 유리왕(儒理王) 때에 이서국(伊西國) 사람이 와서 금성(金城)을 침공하였다. 우리 군사가 방어하였으나 대항할 수 없더니, 홀연 이상한 군사가 와서 도와주는데, 모두 댓잎[竹葉]의 귀고리를 하고 있었다. 힘을 합쳐 적병을 쳐서 부수었다. 적군이 물러간 뒤에, 그 군사들은 간 곳을 알 수 없었고, 다만 미추왕릉(味鄒王陵) 앞에 쌓여 있는 댓잎이 보일 뿐이었다. 비로소 선왕(先王)이 음(陰)으로 도운 공(功)이 있었음을 알았다. 인하여 죽현릉(竹現陵)이라 불렀다. 또는 죽장릉(竹長陵)이라고도 한다. 법흥왕릉(法興王陵)ㆍ태종무열왕릉(太宗武烈王陵). 『신증』 조위(曹偉)의 시에, “길가 촌락 사이에 파란 보리가 이미 패었네. 우뚝 솟은 두어 길 산봉우리, 둥글기가 엎드린 짐승 같구나. 끊어진 비석이 거친 풀 속에 누웠는데, 높이 쳐든 귀두(龜頭)가 보이네. 질펀한 초원은 길게 뻗쳤고, 시내 언덕 구불구불 달렸네. 이것이 무열왕릉, 인산(因山)의 제도가 누추하지 않구나. 말에서 내리매 머리털 으쓱하니, 두 손 모아 잡고 두 소매 여미었네. 비문을 어루만지며 읽노라니, 이지러진 글자 많아 알아보기 어렵구나. 아득한 긴 세월에, 버려둔 채 지키는 이 없네. 생각하니, 옛날에 음(陰 여자)이 양(陽 왕) 되었으니, 덕만(德曼)과 승만(勝曼)은 참 임금이 아니었다. 강한 이웃 나라가 제멋대로 침노하여 사방 국경에 병란이 많더니, 무열왕 들어와서 왕통을 계승하매 우뚝히 공덕(功德)이 성하였네. 유신(庾信)으로 장수를 삼았으니, 무략(武略)은 하늘이 준 것이었네. 백제를 합병하여 패업(覇業)을 세워 백년 원수를 소탕했네. 당 나라 황제가 공훈을 가상히 여겨 비단을 무더기로 내려주었네. 큰 은명(恩命)을 주니, 영토(領土)를 열어 길고 넓게 뻗치었네. 준걸(俊傑)과 어진 이는 모두 등용되고, 창고는 날로 풍부해졌도다. 우물이 갑자기 핏빛으로 변하더니, 슬프다. 기울어지는 대운(大運)을 막을 수 없었네. 칼과 신발은 무덤 속에 들어가고 정령(精靈)은 묘수(昴宿)로 돌아갔네. 옛날 사기(史記)에서 대략 고증할 수 있으나, 기록의 소루(疏漏)함이 한스럽구나. 사람의 일이란 뜬구름과 같은 것이니, 누군들 능히 우주 끝까지 살 수 있으랴? 가성(佳城)은 만고에 닫혔는데 날이 저무니 족제비가 휘파람 부네.” 하였다. 진흥왕릉(眞興王陵) 모두 본부의 서쪽 악리(岳里)에 있다. 선덕왕릉(善德王陵) 낭산(狼山) 남령(南嶺)에 있다. 효소왕릉(孝昭王陵) 본부 동쪽 분남리(芬南里)에 있다. 성덕왕릉(聖德王陵) 본부 동쪽 도지곡리(都只谷里)에 있다. 헌덕왕릉(憲德王陵) 본부 동쪽 천림리(泉林里)에 있다. 흥덕왕릉(興德王陵) 안강현(安康縣) 북쪽에 있다. 김유신묘(金庾信墓) 본부 서쪽 서악리(西岳里)에 있다. 김인문묘(金仁問墓) 경서원(京西原)에 있다. 김양묘(金陽墓) 태종왕릉(太宗王陵)에 배장(陪葬) 하였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21권, 경주부 中
자....
일제가 경주의 무덤들의 주인을 마음대로 결정했다는 주장이 가능할까요???
ps.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은 1530년에 만들어진 조선시대 지리서입니다. 일제가 끼어들어갈 여지는 전혀 없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