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는 흉노의 후손일까?? (1)

백승길 작성일 08.12.17 13: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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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투후 김일제의 후손이 흉노의 문화를 가질 수 있을까??

 

《한서(漢書)》 곽광김일제전(霍光金日磾傳)에 의하면, 투후(秺侯) 김일제(金日磾)는 흉노 휴도왕(休屠王)의 아들로, 한 무제의 부하 곽거병이 흉노를 토벌할 때 포로로 잡혀온 사람입니다.

 

《한서》에서 전하는 김일제의 생애는 어떠할까요?

 

김일제의 아버지 휴도왕은 동료인 곤야왕(昆邪王)이 배신하는 바람에 죽임을 당했으며, 김일제는 어머니, 동생 륜(倫)과 함께 포로로 끌려옵니다. 그런데, 그때 김일제의 나이는 14세에 불과했습니다. (日磾以父不降見殺,與母閼氏、弟倫俱沒入官,輸黃門養馬,時年十四矣。)

 

한나라에 끌려와 말구종 노예로 생활하던 김일제는 우연히 한 무제의 눈에 띄어 그의 시종과 비슷한 지위에 오르죠. 황제의 총애를 받게 된 김일제는 심지어 황제에게 불손했다는 이유로 아들을 죽여 버릴 정도로 충성(?)을 다했고, 한 무제를 암살하려 하였던 망하라(莽何羅)의 반란을 막은 공로로 투후에 봉해졌습니다.

 

김일제 자신은 물론이고 그의 동생, 그의 자식들은 무려 7대에 이르도록 한나라의 신하로 살아왔습니다. 김일제의 후손들이 한나라를 떠나 뿔뿔이 흩어지게 된 것도, 전한의 황위를 찬탈한 왕망과 인척관계였기 때문입니다.

 

자, 겨우 14세 때 한나라에 포로로 끌려와, 한나라 황실에 충성을 다했고 그 대가(?)로 열후의 반열에 올랐으며, 7대에 이르도록 한나라에서 살아왔던 사람에게 “흉노의 문화”가 전해 질 수 있을까요???

 

우리는 오히려 저것과 전혀 반대되는 증거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문명화된 국가에서 비문명 지역으로 망명한 사람들이 현지의 문화에 동화되어 그 후손들은 비문명적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 반대로 비문명 지역에서 문명 지역으로 잡혀와 문명화된 삶을 살게 된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알고 있죠.

 

김일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정말로 신라의 김씨들이 김일제의 후손이라면, 그에게 흉노의 문화가 전수되었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습니다. 즉, “문무왕릉비의 투후”와 “신라의 흉노 계열 문화”는 서로 배치되는 근거라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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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무왕릉비의 모습

 


2. 문무왕릉비의 투후는 신라 김씨의 시조일까??

 

저 자신이 문무왕릉비의 한문을 줄줄 읽을 만큼의 실력은 되지 않기에, 저는 문무왕릉비에 정말로 뭐라 적혀있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현재까지 문무왕릉비를 연구하고 분석한 많은 학자들의 자료가 있으므로, 그것을 참고하여 다음 논지를 전개할까 합니다.

 

저는 문무왕릉비문을 해석하고 연구한 많은 학자들의 논문들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런데, 극히 일부의 학자들은 저 투후를 문무왕의 선조로 해석하기도 했습니다만, 대다수의 논문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아래 논문은 그러한 논문들의 근원을 추적해서 제가 찾아낼 수 있는 한 가장 최초의 논문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秺侯祭天之胤傳七葉은 전한 무제의 총애를 받아 투후가 된 김일제의 고사를 말하니, 그는 곽거병의 흉노대토벌로 포로가 된 祭天金人의 休屠王子로서 인해서 金성을 무제로부터 하사받았다. 이래 그 자손 칠대가 한대의 내시로 혁혁한 번영을 전승한 것을 말하니, 그것은 문무왕의 선대의 칠대전승을 말한다.

문경현, 〈신라건국설화의 연구〉, 《대구사학》, 대구사학회, 1972
(원문의 한자는 필요한 부분을 제외하고 전부 발음으로 바꿨음)

 

 

어투가 조금 읽기 어렵습니다만, 그 내용을 풀이하자면 이렇습니다.

 

투후와 관련된 저 구절은 “투후 김일제의 고사”를 인용한 것으로서 문무왕의 선조 7대의 전승 과정을 고사에 빗대어서 표현한 것이다.

 

위 논문의 경우, 저 7대전승을 두고 지증왕-법흥왕-진흥왕-진지왕-용춘-무열왕-문무왕에 이르는 7대 선조의 전승을 연관 지어 풀이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외 기타 논문들 역시 7대전승이 무엇인가를 밝히는데 주력하고 있을 뿐, 투후가 신라 김씨의 선조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알게 되자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용비어천가〉. 용비어천가의 주요 내용들 역시 중국의 유명한 고사와 조선 건국 과정의 여러 사건들을 대구로 연결하여 배치하고 있죠. 아래는 그 예시입니다.

 

 

周國大王이 豳谷애 사라샤 帝業을 여르시니.
우리 始祖ㅣ 慶興에 사라샤 王業을 여르시니.

 

 

중국의 주나라 시절의 고사와 전주 이씨의 경흥 이주를 연결시켜서 칭송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이렇듯이 전근대시대, 특히 중국 문물을 숭상하였던 시기에는 중국의 고사를 인용해서 사용하는 예가 빈번했습니다. 문무왕릉비에서도 화관(火官 : 염제 신농씨?), 요(堯), 순(舜), 주나라의 고사 등이 인용된 부분을 곳곳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투후 김일제의 경우에는 그 고사 자체에도 상당한 의미가 숨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어, 선조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고사로 인용된 것이라는 것을 증명해줍니다.

 

김일제의 고사 속에는 祭天金人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실제 여부는 차치하고 전근대시대에는 이것을 불상이라 여겼습니다. 즉, 김일제는 고대에 불교를 신앙한 최초의 인물 가운데 하나라는 의미죠. 불교적인 색체가 많이 가미된 고사인 셈입니다. 또한 김일제전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부분에는 七世동안 번영을 누렸다는 표현이 등장하기 때문에, 문무왕의 선대 7대 또는 성한왕(문무왕릉비에 등장하는 김씨의 선조 중 하나)의 선대 7대를 가리키기에 적합한 내용이 됩니다. 더불어 같은 김씨라는 메리트도 있죠.

 

조선시대의 문헌들을 살펴보면 투후 김일제는 상당히 널리 알려진 고사 속의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 김일제로 검색을 해보면 100여 건에 달하는 검색 결과가 나옵니다. 물론 모두 중국의 고사를 인용하는 개념으로 사용된 것들입니다. 이렇듯, 투후 김일제는 옛 시대에 널리 알려져 있던 중국의 고사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이상의 요소들을 종합해보자면, 투후가 문무왕릉비에 등장하는 이유는 “조상”이기 때문이 아니라 “고사의 인용”이라는 결론이 도출 가능합니다. 물론 이것이 진실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투후 기사의 뒤에는 최대 15자에 달하는 글자가 마멸되었고, 그 뒤에 비로소 十五代祖星漢王의 기사가 나옵니다. 마멸된 글자가 무슨 내용인지 모르는 한 완벽한 진실을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위와 같은 해석도 존재하며, 역사학계에서 위의 해석이 대세임은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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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무왕릉비 탁본

 

그리고 1번에서 이미 말했다시피, 설사 투후가 김씨의 조상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해도 그것을 흉노 문화와 연결 짓는 태도는 분명히 문제가 있습니다.

 

발굴된 유물의 유사성에 대한 내용은 글이 길어지므로 다음 기회를 기약하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신라의 유물이 보여주는 북방민족적 속성은 “흉노” 계열의 문화가 아닙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흉노를 정확하게 지적해서 관계를 엮어낼 수 있는 것은 적어도 유물-유적들 속에서는 전혀 없습니다. 신라의 유물은 “북방민족”과의 유사성을 가지는 것입니다. “흉노”는 수많은 북방민족 가운데 하나였으며, 신라의 유물 가운데 흉노과 관련된 것도 있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부분에서 흉노를 포함한 북방민족 전체와 관련된 유물들이 나타납니다.

 

즉, 신라와 흉노를 연관지어 볼 수 있는 근거는 오로지 “투후 김일제” 뿐이며, 저는 저 투후 김일제의 기록 자체를 분석하여 그 연관성마저 근거가 없음을 증명하고자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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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의 역사추적에서 방송한 내용은 엄밀하게 말해서 “새롭게 밝혀진 놀라운 사실”은 아닙니다. 신라와 북방민족과의 유사성은 이미 일제시대부터 언급되던 의문이며, 그것을 구태여 흉노와 투후 김일제에 연결시키려는 주장에 대해서 학계에서는 그저 참고할만한 의견이라는 것이 대세입니다. 참고할만한 의견이라는 것은, 아주 무시해버리기에는 껄적지근하지만, 그렇다고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증거가 부족하다는 말 밖에는 안됩니다.

 

게다가, 과문한 제가 알게 된 바로는, 저러한 주장을 처음으로 한 사람은 문정창이라는 자입니다. 문정창은 1978년, 《가야사》라는 괴작에서 처음으로 흉노와 신라를 연결시키는 무리수를 두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아시는 분은 다 아시겠지만, 문정창이라는 작자는 친일파 출신에 현존하는 거의 모든 재야의 유사역사학을 설계했던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처음 제기하고, 그를 추종하는 무리들 및 일부 설레발치기 좋아하는 자들이 공론화시킨 것이 바로 신라-흉노설입니다.

 

과연, 신라-흉노 설이 다큐멘터리에서 당당하게 제기할 수 있는 그러한 학설일지... 그렇기에 저는 저러한 괴설을 마치 당당한 진실인양 방송한 KBS의 역사추적을 규탄합니다. (물론 저 같은 키워가 이렇게 규탄해봤자 별 관계는 없겠지만...)

 

유물-유적에 대한 내용은 추후에 더 공부를 한 후에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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