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기(檀紀)란 무엇인가??

백승길 작성일 08.04.17 14: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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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단군기원이란?

 

역사에 조금만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연대가 있습니다. 이른바 ‘개천(開天)’이라는 말로 불리는 단군기원이 바로 그것이죠.

 

기원전 2333년, 4대 문명이라 불리는 지역에서조차 이른바 ‘국가’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이집트의 제6왕조, 메소포타미아의 아카드 왕조 정도에 불과했던 시대입니다. 유럽을 비롯하여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은 아직 금속을 사용할 줄 모르던 신석기 시대의 미명 속에 있던 이 때, 우리나라는 역사의 첫 여명을 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참 궁금해집니다. 전 세계를 통틀어 기원전 2333년이라는 정확한 연대를 추산할 수 있는 근거를 가진 나라라고는 고작해야 이집트(제6왕조 테티 재위), 아카드 왕조(시조 사르곤1세 재위) 정도밖에 없는 시대인데, 우리는 어떻게 저렇게 정확한 연도를 알 수 있을까요??

 

여기서 기원전 2333년이라는 연도가 어떻게 등장하게 되었는지 한 번 살펴봅시다.

 

 

2. 단군에 관한 최초의 기록

 

단군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저 유명한 <삼국유사>의 기록, 또 하나는 그리 유명하지 않고 내용도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매우 중요한 가치를 가지는 <제왕운기>의 기록입니다.

 

먼저 <삼국유사>의 기록을 봅시다.

 

 

『위서(魏書)』에 이런 말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단군왕검(壇君王儉)이 계셔 아사달(阿斯達) ―경(經)에는 무엽산(無葉山)이라 했고, 또는 백악(白岳)이라고도 했는데, 백주(白州)에 있다. 혹 개성(開城) 동쪽에 있다고도 하는데 지금의 백악궁(白岳宮)이 바로 이것이다―에 도읍을 정하고 새로 나라를 세워 조선이라 불렀는데 요(堯)와 같은 때였다고 한다.

(중략)

왕검은 요임금이 왕위에 오른 지 50년인 경인년요임금의 즉위 원년은 무진이니 50년은 정사이지 경인은 아니다. 아마 그것은 사실이 아닌 것 같다―에 평양성(平壤城)에―지금의 서경(西京)―도읍을 정하고 비로소 조선(朝鮮)이라 불렀다. 또다시 도읍을 백악산(白岳山) 아사달(阿斯達)에 옮겼다. 그곳을 또는 궁(弓)―혹은 방(方)자로도 되어 있다―홀산(忽山) 또는 금미달(今彌達)이라 한다. 그는 1천5백 년 동안 여기서 나라를 다스렸다. 주나라 무왕(武王)이 왕위에 오른 기묘년에 무왕이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封)하니, 단군은 이에 장당경(藏唐京)으로 옮아갔다가 후에 돌아와 아사달에 숨어서 산신이 되었는데, 나이가 일천구백여덟 살이었다고 한다.

 

魏書云 乃往二千載 有壇君王儉 立都阿斯達(經云無葉山 亦云白岳 在白州地 或云在開城東 今白岳宮是) 開國號朝鮮 與高同時

(중략)

以唐高卽位五十年庚寅(唐高卽位元年戊辰 則五十年丁巳 非庚寅也 疑其未實) 都平壤城(今西京) 始稱朝鮮 又移都於白岳山阿斯達 又名弓(一作方) 忽山 又今彌達 御國一千五百年 周虎王卽位己卯 封箕子於朝鮮 壇君乃移於藏唐京 後還隱於阿斯達爲山神 壽一千九百八歲

 

 

<삼국유사>의 고조선 기록 첫머리는 위서에서 인용한 글로 시작합니다. 위서에 따르면,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한 연도는 중국 신화 속의 제왕 요(堯)와 같은 때라고 합니다. 그런데 정확한 연대는 나타나있지 않군요. 어차피 요와 동시에 즉위했다고 하니 요가 즉위한 연도를 알면 될 일이겠죠.

 

그런데 계속 읽어나가다 보면 갑자기 요가 즉위한지 50년에 즉위했다고 서술됩니다. 이게 뭘까요?

 

일반적으로 맨 첫머리의 짧은 기록은 위서로부터 인용한 것으로 보며, 그 뒤의 상세한 서술은 우리나라에서 전래되던 옛 기록을 인용한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국의 기록인 위서에는 요와 동시라고 적혀있지만, 우리 기록에는 요 50년으로 되어 있다고 보면 되겠죠. 슬슬 이상한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요 50년이라는 연대는 나왔는데, 경인년이라네요. 그런데 일연은 바로 그 뒤에 주석을 달았습니다. 요50년은 경인년이 아니라 정사년이라는 것이죠. 이렇게나 연대가 불분명해서야...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합니다.

 

아무튼, 그 뒤를 계속 봅시다. 일단 나이와 재위 년 수가 조금 애매합니다. 나이는 1,908세인데 나라는 1,500년 동안 다스렸다는군요. 그럼 즉위할 때 나이가 400살?? 물론, 기록 상의 면면으로 살펴보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1,500년 동안 여기서 다스렸다고 되어 있군요. 백악산 아사달에서 통치한 시간만 1,500년이라는 것 같습니다. 그럼 평양성에서 다스리던 시기는 세지 않은 것이겠죠. 또 장당경으로 옮겨갔다가 돌아와 산신이 되었다고 하니 그 기간까지 합쳐서 1908년이겠죠.

 

그러나 저 나이는 물론이요 다스린 햇수까지도 참 이상합니다. 우리의 통념에 따라서 단군이 기원전 2333년에 나라를 세웠다고 칩시다. 그럼 아사달 통치기만 따져도 단군이 장당경으로 옮겨간 연대는 기원전830년 무렵이 됩니다.

 

그런데, 저 기록에는 단군이 옮겨간 연대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묘년, 서력으로 바꾸면 기원전 1122년입니다. (이는 20세기 초 무렵까지 대체적으로 공인되어 있었던 은나라 멸망의 연대입니다.)

 

이를 어쩔까요... 자그마치 300여 년의 차이가 나버립니다. 게다가 이것은 평양성 시기는 포함하지 않은 연대입니다. 대체 어느 연대를 믿어야 하는 걸까요?? 게다가 <삼국유사>에서 나타나는 경인년 또는 정사년은 둘 다 기원전 2333년이 아닙니다. 기원전 2333년은 무진년이거든요. 그렇다면 그 연대는 더 어긋나게 되는군요.

 

아무튼 넘어갑시다. (요가 즉위한 연도가 무진년이라는 점을 기억해 두세요.)

 

 

 

이번에는 <제왕운기>를 보죠. (<제왕운기>는 사실 역사책이 아닌 서사시입니다. 굵은 글씨는 시의 본문이고, 얇은 글씨는 그 시에 달린 주석입니다. 잘 구분해서 보세요.)

 

 

처음 누가 나라를 열고 풍운을 열었느냐, 제석의 손자니 이름하여 단군이라

(본기에 말하기를 상제 환인에게 서자가 있어 웅이라 하였다...삼위 태백으로 내려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겠다고 하였다. 웅이 천부인 3개를 받아 귀신 3천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 아래에 내려오니 이 분이 단웅천왕이다...손녀에게 약을 먹여 사람 몸이 되게 하여 단수의 신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다. 이름을 단군이라 하니 조선 땅에서 왕이 되었다. 따라서 시라, 고례, 남북옥저, 동북부여, 예맥 모두가 단군의 후손이다. 1038년을 다스리고 아사달 산에 들어가 신이 되니 죽지 않기 때문이다.)

제요와 함께 무진년에 흥하여 하왕조를 거치도록 궁궐에 계시다.

은나라 무정 8년 을미에 아사달 산에 들어가 신이 되었다

(지금의 구월산이다. 일명 궁홀 또는 삼위라고 한다. 사당이 아직 있다)

1028년간 나라를 향유하셨으나, 어쩔 수 없이 변화함은 환인의 부르심이라.

그 뒤 164년 후에 어진 분이 군신관계를 다시 열었다.

(혹은 그 후 164년은 부자는 있었지만 군신은 없었다고 한다.)

 

初誰開國啓風雲 釋帝之孫名檀君

(本紀曰 上帝桓因有庶子 曰雄云云 謂曰 下至三危太白 弘益人間歟故 雄受天符印三箇 率鬼三千而降太白山頂神檀水下 是謂桓雄天王也云云 令孫女飮藥 成人身 與檀樹神婚而生男 名檀君 據朝鮮之域爲王 故 尸羅高禮南北沃沮東北扶餘穢與貊 皆檀君之壽也 理一千三十八年 入阿斯達山爲神不死故也)

竝與帝高興戊辰 經虞歷夏居中宸

於殷虎丁八乙未 入阿斯達山爲神

(今九月山也 一名宮忽 又名三危 祠堂猶存)

亨國一千二十八 無奈變化傳桓因

却後一百六十四 仁人聊復開君臣

(一作 爾後一百六十四 雖有父子無君臣)

 

일단 즉위에 대해서 이렇게 나타나는군요. ‘제요와 함께 무진년에 흥하여’, 일단 <삼국유사>와 살짝 일치합니다. 함께 흥했다고 하니 같이 즉위했다고 볼 수 있고, <삼국유사>와 같이 요 원년을 무진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단군이 왕위를 버리고 아사달로 들어가 신이 된 연대가 다르게 나타납니다. ‘은나라 무정 8년 을미’, 그 뒤에는 164년 후에 기자(어진 분)가 왔다고 적혀 있으니, 기묘년(BC1122년)으로부터 추산하면 BC 1286년입니다. 무진년(BC2333년)에서 을미년(BC1286년)을 빼면??? 1,048년이 나옵니다. 이런... ‘1028년간 나라를 향유하셨으나’... 또 틀려버립니다. 뭐, 이정도 사소한 것은 그냥 오타라고 봐줍시다.

 

 

2. 단군기원의 확정

 

국사교과서에는 ‘<삼국유사>와 <동국통감>의 기록에 따르면’이라고 하며 단군 관련 기록을 적고 있습니다.

 

국사교과서에도 나오는 <동국통감>을 살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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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東方)에는 최초에 군장(君長)이 없었는데, 신인(神人)이 단목(檀木) 아래로 내려오자 국인(國人)이 세워서 임금으로 삼았다. 이가 단군(檀君)이며 국호(國號)는 조선(朝鮮)이었는데, 바로 당요(唐堯) 무진년(戊辰年 ; 서기전 2333)이었다. 처음에는 평양(平壤)에 도읍을 정하였다가 뒤에는 백악(白岳)으로 도읍을 옮겼다. 상(商)나라 무정(武丁) 8년 을미(乙未 ;서기전 1286)에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 신(神)이 되었다.

[신등은 살펴보건대,]

“고기(古紀)에 이르기를, ‘단군이 요(堯)와 더불어 무진년(戊辰年)에 함께 즉위하여, 우(虞)나라와 하(夏)나라를 지나 상(商)나라 무정(武丁) 8년 을미(乙未)에 이르러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 신(神)이 되었는데, 1천48년의 수명을 누렸다.’고 하였으니, 이 말은 의심스럽습니다. 지금 살펴보건대, 요 임금이 즉위한 것은 상원 갑자(上元甲子)인 갑진년(甲辰年 ; 서기전 2357)에 있었는데, 단군의 즉위가 그 후 25년 무진년에 있었다면 ‘요와 더불어 함께 즉위하였다’라고 한 것은 잘못입니다.

 

東方初無君長有神人降于檀木下國人立爲君是爲檀君號朝鮮是唐堯戊辰歲也 初都平壤後徙都白岳至商武丁八年乙未入阿斯達山爲神

臣等按 古紀云檀君與堯竝立於戊辰歷虞夏至商武丁八年乙未入阿斯達山爲神享壽千四十八年此說可疑今按堯之立在上元甲子甲辰之歲而檀君之立在後二十五年戊辰則曰與堯竝立者非也

 

<동국통감>은 기본적으로 요 무진년이라는 연대는 신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삼국유사>와 <제왕운기>가 무진년을 요 즉위년으로 보는 것과 달리 <동국통감>은 요의 즉위년을 갑진년(BC2357년)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진년은 요 25년이 되는 것이죠.

 

이거야 원... 기록마다 다 천차만별이니 어느 기록을 믿어야 할까요...

 

 

 

대체적으로, 고려 말에서 조선 초 무렵에 이르면 단군의 연대가 확정됩니다. 그런데, 조선 초기, 그러니까 <동국통감>이 쓰여질 때, 단군의 연대가 참 미묘하게 설정되는 기이한 현상이 나타납니다.

 

일단, 요의 즉위가 몇 년인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죠. 말 그대로 신화 속의 인물일 뿐이며, 중국에서조차 요의 즉위년은 무진년, 병자년(죽서기년), 갑진년(황극경세서) 등등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고조선은 그 연도가 어느 정도 확립되어 있었습니다. 무진년.

 

여기서 우리가 추가로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중국의 명나라 건국 연도는 1368년, 조선의 건국 연도는 1392년, 둘 사이의 차이는 24년입니다.

 

고조선의 건국 연도는 무진년, 즉 BC 2333년. 여기서 24년이 더해진 연도는 BC 2357년, 바로 갑진년입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중국에서 명나라가 건국된 후 24년이 지나서 조선이 건국.

 

중국에서 요가 즉위한 후 24년이 지나서 단군이 즉위.

 

하!! 이렇게 맞아떨어질 수 있을까요??

 

여기서 “명-조선의 건국과 요-단군의 즉위가 신비로운 우연의 일치로 맞아 떨어지다니... 이것이야 말로 조선의 건국이 신비로운 우주적 합법칙성의 결과이며, 천명 조화라는 뜻이니, 천세 천세 천천세로다!!!”라는 것을 연상하실 수 있다면 당신은 조선의 위대한 성리학자들과 같은 사고를 하시고 계신 겁니다.

 

당연히, 이런 결과에서 우리가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요의 즉위년은 물론이요, 고조선의 건국 연도조차 엄청난 명분론에 의해서 결정되었다는 것입니다.

 

 

 

3. 요와 단군

 

요는 누구일까요?? 중국 역사에 조금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은 들어 봤을 인물인 요임금. 그는 전설적인 성군(聖君)이며, 뒤의 순(舜)과 함께 중국 역사상 최고의 왕으로 칭송받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요나 순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습니다. 사실, 요나 순의 일대기를 살펴보면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순이 일개 평민에서 왕위 후계자로 결정되는 등의 비현실적이고 이상주의적인 내용은 넘어간다손 치더라도, <사기(史記)>의 기록대로라면, 요는 왕위에 오른 지 70년 만에 순을 후계자로 결정하고, 20년 동안 섭정을 시켰다고 하니 요의 재위만 90년에 달하거나, 순이 61세에 즉위해서 39년 동안 재위하는 엄청난 장수를 누렸다는 것을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은 없을 겁니다.

 

즉, ‘요 임금이 즉위한지 몇 년 후에 단군이 즉위했다’는 말은, 곧 ‘헤라클레스가 하늘의 신이 된지 100년 후에 즉위했다’는 말 만큼이나 허무맹랑한 말이라는 의미입니다. 전설적인 존재 요와 그보다 더 전설적인 존재 단군의 실존 여부를 따지는 것만큼 무의미한 것이 어디 있을까요....

 

 

 

4. 단군 기원의 의미

 

단군이라는 존재가 우리 민족-국가의 기원이라는 점은 그 누구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 민족의 기원은 고조선이며, 그 고조선의 지배자 또는 시조는 단군 왕검 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단군 왕검이라는 사람이 실제로 존재했는지, 그가 살았던 시대가 정말 기원전 2333년이라는 엄청난 고대인지에 대해서는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트로이 전쟁은 호메로스가 지은 서사시를 통해서 수천년 동안 이어져 왔습니다. 그리고 트로이 신화에 관심을 가진 슐레이만에 의해서 트로이가 실제로 발굴되는 쾌거를 이뤄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트로이 신화가 사실이라는 의미는 될 수 없습니다.

 

슐레이만이 발굴한 트로이는 일리아드에 기록된 것처럼 거대한 성도 아니었고, 몇 만 명의 군대가 10년이 넘게 싸울 수 있는 장소도 아닙니다. 물론, 파리스 왕자가 헬레네를 꼬신 것이 증명된 것도 아니며, 아킬레우스가 테티스 여신의 아들이라는 증거도 없습니다.

 

슐레이만의 발굴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트로이와 그리스 연합군(미케네 문명)이 전쟁을 벌였다는 사실 뿐입니다.

 

신화가 역사로 되는 것이 아니라, 신화에서 역사의 흔적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단군 신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단군 신화 속에서 우리가 찾아낼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은

 

고조선이라는 국가가 있었다.

고조선의 왕 또는 시조는 단군이다.

고조선은 하늘의 후손을 자칭하는 환웅(족)과 웅녀(족)이 결합해서 건국되었다.

각종 신화적 코드를 통해서 볼 때, 고조선은 농경 사회, 제정일치, 청동기 시대이다.

 

이런 것들입니다.

 

결코 단군 신화를 곧이곧대로 믿어서 단군은 환인의 손자, 환웅의 아들이고, 환웅은 하늘에서 내려온 신이며, 사람으로 변신한 곰과 환웅이 결혼해서 단군이 태어났다고 해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것들은 신화적 사실이며, 신화란 기본적으로 과장과 허무맹랑한 것이므로, 신화 속에서 역사를 찾아낼 수는 있어도, 신화가 곧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점을 명백하게 인식한다면, 단군 기원의 의미도 그렇게 받아들이면 됩니다.

 

조선 시대의 사람들이라면, 단군이 요임금만큼 오래되었다. 즉, 우리 역사는 중국 역사만큼 오래되었다 고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리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고, 단군 기원의 연도보다는 그 연도가 가지는 상징적인 의미를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단군이 조선을 세운 연도가 아니라, 우리 민족의 상징적인 기점이라는 의미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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