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 사학이 비판하는 사학은 크게 보아 두가지 계열입니다. 이른바 식민사학과 사대주의 사학이지요. 현대 사학을 두고 식민사학의 계승자라 매도하며 사대주의자들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이 두가지 계열의 학풍(?)은 사실 서로 이율배반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양립이 불가능한 것들이지요. 그래서 이번에는 민족사학자들이 말하는 식민사학과 사대주의를 비판해보겠습니다.
앞서도 말했다시피 식민사학과 사대주의 사학은 서로 양립이 불가능합니다. 내용의 결론 면에서 따지자면 결국 ‘우리나라는 찌질이(민족주의 사학의 입장에서)’ 인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두가지 사학을 비판함에 있어 민족사학은 서로 다른 이야기를 내놓기 때문이죠. 식민사학은 일본이 조선을 먹기 위해 찬란한 조선 역사를 왜곡했다는 것이고, 사대주의사학은 우리 윗대가리들이 중국에 동조되기 위해 찬란한 조선 역사를 은폐했다는 것입니다. 기본 전제부터가 틀린 것입니다. 뭐 그 결론은 결국 둘 다 ‘우리 고유의 것은 찌질해’라는 것으로 귀결되지만 어쨌거나 그 기본 전제는 다릅니다.
이렇게 기본 전제에서부터 차이를 보이는 두 사학에 대한 비판은 두 사학이 가진 시대적 차이 앞에서 와장창 무너져버립니다. 일단, 저는 사대주의를 비판하는 입장에 서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사대주의 사학에 대한 비판을 일부 긍정하는 입장에서 식민사학을 비판해보죠.
식민사학의 기본적인 목적은 어디까지나 조선을 먹고, 그렇게 먹은 조선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죠. 한 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땅을 지배하기 위해서 제일 먼저 비판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당연히 그 나라입니다. ‘집어삼킨 나라가 정치가 엉망이고 사회는 개판이고, 아무튼 찌질했다. 그래서 위대한 우리가 니네를 먹어버린거야.’ 그래야 지배를 당하는 백성들도 눈꼽만큼이나마 납득을 하겠지요. 여기서 말하는 ‘그 나라’는 바로 집어삼킨 정부-왕조를 말합니다. 그 이전의 정부-왕조를 깎아내려봤자 별반 이득이 없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사실 아니겠습니까? 물론 ‘옛날부터 니네는 찌질했어’라고 우긴다면 어느 정도의 소득은 있겠지만 당장에 관련있는 정부-왕조를 비판하는 것보다는 효과가 적을 것이 확실합니다.
이것은 저 조선왕조만 봐도 알 수 있죠. 고려사는 ‘고려는 찌질해’라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물론 그 이전의 삼국시대는 손도 대지 않았죠. 물론 당장에 소득이 없을 고려 초기에 대한 비판은 매우 적습니다. 조선 왕조의 고려 찌질화(?) 작업은 오로지 고려 후기-무신란, 원간섭기 시기-에 집중되어있지요.
일본 역시 우리 역사 전반에 대한 찌질화 작업보다는 가까운 왕조인 조선에 대한 비판이 더 쉽고 절실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현재 주류 사학계에서 말하는 식민사학의 잔재에서 여실하게 나타나고 있지요. 식민사학의 잔재는 다음과 같습니다.
정체성론 - 한반도는 삼국시대 이후로 조선시대까지 2,000년 동안 전혀 발전하지 않은 채 고대에 머물러 있었다.
타율성론 - 한반도는 고유의 문화가 없으며 모두 중국, 일본에서 건너온 문화-역사이다.
당파성론 - 조선은 당파 싸움으로 쓸데없이 국력을 낭비했을 뿐 제대로 된 정치가 없었다.
일선동조론 - 임나일본부설, 기마민족설 등을 통해 일본과 조선은 원래 한민족임을 강조
이 가운데 일선동조론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비판은 조선을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조선은 삼국시대 수준에서 전혀 발전하지 못한 나라이며(정체성론), 조선의 문화는 중국, 일본에서 전래된 것들뿐이고(타율성론) 당파 싸움이나 하면서 나라를 망쳤다(당파성론). 그 외에도 많지만 잘 생각나지 않아서 패스하겠습니다. 어쨌거나 일본은 우리 상고사를 왜곡하기보다는 조선을 깔아뭉개기 바빴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물론 장기적인 안목으로 보자면 상고사부터 체계적으로 왜곡해 두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은 당연한 노릇. 그러므로 일본도 고대사 부분에 대한 왜곡의 손길을 결코 늦추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왜곡이라는 것도 살펴보면 임나일본부, 기마민족설, 정체성론 등에서 간간히 나올 뿐, 현재는 99% 이상이 완벽하게 논파되고 개구라로 드러난 것들뿐입니다.(현대 주류 사학계의 입장) 민족사학의 입장은 그런 개구라는 원래부터 뻥이었고 그런 뻔한 뻥에 속아서 본질적인 왜곡을 보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지요.
일단 여기서 사대주의로 넘어가보죠. 민족사학의 주장대로 사대주의가 역사를 왜곡했다고 보는 겁니다.(사실 저도 일부 이 주장에 동조하고 있는 편입니다) 현재 고대사 부분에서 전근대 시대에 쓰여진 역사책은 대부분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근간으로 삼고 있습니다. 당연히 두 사서는 민족사학의 샌드백이 되었지요. 그런데 여기에는 몇가지 민족사학의 오류가 발생합니다.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여지는 것입니다. 당연한 이야기지요. 그리고 우리의 역사에서 승자는 사대주의자들입니다. 그렇기에 현재 남아있는 거의 모든 사료가 사대주의자에 의해서 서술된 것들이지요.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사대주의자가 아닌 사람들, 즉 패자가 서술한 역사는 전해지기가 극히 어렵다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현재까지 전해졌다고 알려져 있는 패자의 역사는 18세기 숙종 대의 <규원사화>와 20세기 <한단고기>가 전부라는 의미지요.
그런데 민족사학자들은 여기서 갑자기 또 다시 일제 식민사학에 의해 우리 고대사가 왜곡 날조 파괴되었다고 소리높여 외칩니다. 엥? 이미 사대주의자들에 의해서 패자의 역사로 전락한 비사대주의 계열 역사가 또 다시 일제가 대대적으로 까부셨다고? 이해가 되십니까?
승자의 역사가 역사의 주류가 되는 것은 현대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현대의 역사 역시 전근대의 사대주의 사학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지요. 물론 근대적인 연구법을 통해 극복할 것은 극복하고 바뀔 것은 바뀌었지만 그 근본은 사대주의 사학과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역사는 승자의 역사, 즉 일본이 우리 상고사에 대한 왜곡을 굳이 힘겹게 찌끄려대지 않아도 어차피 승자인 사대주의자들은 패자인 비사대주의 역사를 뭉개버린다는 것입니다. 민족주의사학의 주장대로라면 결국 식민지사학은 수십년동안 헛수고만 해온 셈이 되지요. 일제가 신경쓰지 않아도 어차피 뭉개질 것이었는데 말이죠.
물론 일제와 식민사학은 어쩌면 그런 헛수고를 실제로 수십년간 해왔을지도 모릅니다. 또 사대주의 사학과 식민사학이 반반씩 협력해서 우리의 영광스러운 고대사를 말아먹은 것일지도 모르고요. 하지만 역사를 배우고 그 역사의 역사, 즉 사학사(史學史)를 배워본 결과 저는 가능성이 희박한 위의 두 가정 보다는 이미 천년 동안 사대주의자들이 거의다 말아먹었고 식민사학은 그냥 냅뒀다는 상식적이고 현실적인 가정을 더 믿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것을 믿으시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