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나의 집시 11

풍경운영자즐 작성일 07.07.03 23: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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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

 

 

 


“명근이 녀석은 무시무시한 능력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초능력입니다. 보는 것만으로도 무거운 물체도 이동시킬 수가 있죠. 도플갱어는 지정된 사람의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사람의 기억과 능력 모두를 통째로 지니게 됩니다. 단지 그 사람과 다른 점이 있다면 괴이한 행동을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죠. 명근의 모습을 하고 있는 도플갱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진짜인 저를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었고, 초능력을 이용해 무수히 많은 돌덩이를 던졌으며 저는 필사적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막바지의 궁지에 몰리게 되었을 때, 제 앞에 저의 모습을 하고 있는 도플갱어를 보게 되었습니다…….”

 

 

 


진오는 사내에게 몇 번이고 명근의 초능력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리고 이야기는 자신의 도플갱어를 만난 부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제가 몸을 숨긴 곳은 수풀이 우거진 곳이었습니다. 그 안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졌었는데 알고 보니 저의 모습을 하고 있는 도플갱어더군요. 제가 상처를 입은 모습까지 쏙 빼 닳은 또 다른 저였습니다. 저의 도플갱어는 아직 의식을 찾지 못했는지 저를 보고 있음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죠. 이상하다 싶어 도플갱어를 손으로 툭툭 건드려 봤습니다. 마치 간지럼을 타는 듯 어리광을 부리며 히히 웃더군요.

 

이 때 가짜명근은 제가 몸을 숨긴 곳까지 따라왔습니다. 저는 망설일 필요도 없이 스턴건을 작동시켜 도플갱어를 기절시키고, 재빨리 그 스턴건을 도플갱어의 손에 쥐어줬습니다. 도플갱어가 쓰러지는 소리에 위치를 찾은 녀석은 재빨리 달려왔고, 놈은 너무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도플갱어와 저를 보고 매우 놀라더군요. 동료라면 처음부터 알아볼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었습니다. 가짜명근은 저와 도플갱어 중 누가 진짜 도플갱어인지 몰라 한참을 헤매더군요.

 

저는 살아서 진짜 명근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미친 척 연기를 하며 가짜명근을 속이기로 했습니다.

 

저의 머릿속에는 수봉산에서 실종되었다가 집으로 찾아온 사람들의 공통점이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사람으로서는 행할 수 없는 행동만 하게 되는 실종자들의 공통점은 바로 그것이었죠.

 

저는 아무 망설임도 없이 바닥에 떨어진 돌맹이를 주워 도플갱어의 얼굴이며, 팔이며, 목이며, 무자비하게 내리찍었습니다.

 

<죽어랏! 죽엇!>

 

난생처음으로 살아있는 생명체를 학살을 하는 것인데도 전 매우 침착했습니다. 살아야 한다는 일념 앞에서는 이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죠.

 

이때 도플갱어의 손에 쥐어져 있던 스턴건이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가짜명근이 녀석은 자신의 손을 상처 입혔던 스턴건을 보고 나서야 큰소리로 웃으며 저를 자신의 동료라고 굳게 믿기 시작하더군요.

 

그리고 가짜 명근은 큰소리로 웃다가 저의 모습을 한 도플갱어를 노려보며 소리쳤습니다.

 

<이 새끼가 이걸로 내 손을 병신 만들려고 했었어. 아무리 내가 배가 고프고, 사람살이 그립고, 피가 그립다지만 네 놈의 살은 결코 먹지 않을 테다. 대신 지옥으로 떨어지게 몇 번이고 죽여 줄 테다!>

 

진오의 말을 듣는 사내의 표정은 심각히 굳어져 있었다. 특히 ‘사람살이 그립고, 피가 그립다지만 네 놈의 살은 결코 먹지 않을 테다.’ 라는 이 부분에선 그의 온 몸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진오는 이야기를 멈추지 않고 계속했다.

 

“명근이 놈은 저의 모습을 하고 있는 도플갱어에게 폭력을 휘둘렀습니다. 시체가 구멍이 뚫리고, 내장이 흘러내리는 그 광경은……. 후……. 하지만 저는 살아야 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놈의 광적인 행동을 칭찬해야만 했죠. 이미 전 제 자신을 조금씩 도플갱어라며 스스로 최면(催眠)을 걸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놈은 맨손으로 도플갱어의 목을 비틀어서 뽑아내더군요. 그것만으로도 놈들의 심사는 일반 사람과는 매우 다르게 삐뚤어진 것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놈은 이제 진짜 명근만 죽이면 된다며 자리를 옮기려 했고, 놈이 등을 돌리는 그 순간을 이용해서 재빨리 바닥에 떨어진 스턴건을 호주머니에 챙겨 넣었습니다.

 

놈은 말했습니다.

 

<너도 알다시피 이 곳은 3개의 공간으로 나누어져 있어. 명근이 놈은 분명 두 번째나 세 번째 공간으로 간 것이 틀림없다. 머지않아 ‘그 곳.’ 으로 가는 입구의 문이 열리겠지. 8시간 마다 열리는 문을 통해서 우리는 ‘그 곳.’ 으로 들어가자. 그 동안 너는 여기서 쉬고 있어.>

 

저는 놈이 무얼 말하는지 알 리가 없었습니다. 다만 놈은 진짜 명근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는 확실하게 알고 있는 듯 했어요. 놈은 초능력을 많이 사용했기 때문에 제가 스턴건을 작동시킨다면 당장이라도 쓰러뜨릴 수가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저를 도플갱어라고 믿는 이상 손만 까딱하면 놈을 없앨 수가 있었죠. 그렇기에 명근이 녀석이 어디에 있는지 그 장소를 알아낸 뒤에 놈을 죽여도 늦지 않을 것이라 여기며 기회를 노리기 시작했습니다.”

 

진오는 갑자기 목구멍이 콱 막히는 것을 느끼며 기침을 해댔다. 입에서 핏조각이 나왔다. 그의 상처가 얼마나 심한지 알려주고 있었다. 진오의 피를 본 명근은 안절부절하며 속이 시커멓게 탔다. 그런 명근을 향해 진오는 미소를 지었다.

 

“난 괜찮아.”

 

진오는 다시 말을 이었다.

 

“전 상처가 너무 심한 탓인지 헛소리가 들리곤 했습니다. 그건 진짜 명근이 저를 찾는 양 제 이름을 부르는 헛소리였죠. 가끔 가짜 명근이 저를 동료로 알고 잘 대해 줄 때면 저마저도 진짜 명근이 아닌가 헷갈릴 정도였죠. 놈은 저를 푹 쉬게 했고, 시간이 좀 지난 후에 이제 곧 문이 열릴 것이라며 저를 깨웠습니다.

 

놈을 따라 간 곳은 붉은 색의 헝겊이 묶인 자리였습니다. 얼마 후 주변의 공기가 싸늘하게 식더니 하얀 안개가 저와 놈의 시야를 가렸습니다. 놈은 저의 손을 잡으며 말했습니다.

 

<문이 열렸다.>

 

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른 세상 즉, 차원의 문을 넘었죠. 방금 전의 풍경과는 달리 주변은 밀림이었습니다. 놈과 저는 한참을 걸어 다녔고, 놈은 주위를 샅샅이 살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붉은 색의 헝겊을 발견하고는 마침 잘 되었다는 듯 크게 기뻐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명근이 놈을 찾아 산 채로 여기에 끌고 오마. 그 동안 너는 여기서 꼼짝 말고 앉아 있어라. 너가 여기에 있다는 건 저 걸레조각을 통해서 알아볼 테니까. 여기에 지리는 내 손바닥이나 다름없어. 금방 올 테니 걱정 마라.>

 

저는 놈이 자리를 비우자 그 틈을 이용해서 헝겊이 묶인 나무를 더듬었습니다. ‘16, 두 번째, 木’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그 순간 제 머릿속을 스치는 것이 있었습니다. 3개로 이루어진 공간. 8시간마다 바뀌는 시간대를 헝겊이 묶인 나무마다 가르쳐 주고 있던 것이죠. 그리고 헝겊이 묶인 그 자리에 워프 현상이 일어나던 것이었죠. 몇 시간 후 놈은 진짜 명근을 찾지 못했는지 분개해 하며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놈이 말하길, <젠장! 이 곳에 없어! 빨리 찾아서 죽여버리고 싶었는데 젠장젠장젠장!> 저는 생각했습니다. 만약 이 나무에 적힌 대로라면 8시간마다 공간의 문이 열리는 것이고, 여기에 서 있는 다면 세 번째의 공간으로도 갈 수가 있다. 그러니 이제 가짜 명근, 즉 도플갱어는 쓸모가 없어진 것입니다.

 

저는 이제 도플갱어를 죽이기 위해 스턴건을 꺼냈습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놈은 애꿎은 나무에게 머리를 박고 있었죠. 그것이 저에겐 더 좋은 기회였습니다.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명근이 있는 장소도 알아내었으니 네 놈은 죽어줘야 겠다.>

 

스턴건을 쥔 손에서 진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는 그 순간 옛날에 명근의 말이 떠올렸습니다. 그것은 명근이가 지닌 초능력에 관계된 이야기였는데, 염력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 정부에서는 특히 염력이라는 것을 가장 관심 있어 했었어. 이 염력은 내가 노리는 것을 향해 정신을 집중하고, 생각하면 그것이 물체면 찌그러지거나 터지고, 생명체라면 목숨을 빼앗는 것까지 가능하지. 정부에서는 그 염력을 부리는 자가 다른 세계에서도 양육되고 있다는 것을 두려워했었어. 그래서 우리나라 정부는 최고의 병사를 양육(羊肉)하기 위해 거의 마루타와 같은 생체실험까지 했었지. 나도 그 중 하나였어. 염력을 사용하는 자와 염력을 사용하는 자를 붙여서 살아남게 하는 엄청난 실험이었지. 그 사이에서 내가 살아남았었어. 그 때의 내 나이는 고작 11살이었지. 후후…….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알아? 염력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날렵한 몸동작, 그리고 스피드가 중요해. 염력을 부리는 자의 약점은 바로 눈이거든.”

 

여기까지 말했을 때 사내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나도 예전에 텔레비전을 통해서 눈빛만으로 손가락을 구부리는 초능력을 본 적이 있네. 하지만 정말로 초능력이라는 것이 있을 줄이야. 거기다가 초능력자가 정부에게 끌려가서 군사로 사용되다니…….”

 

이번에는 명근이 나서며 말했다.

 

“진오 말이 맞아요. 저는 군사로 이용됐었고, 살기 위해 많은 초능력자를 죽였다고요. 어쩔 수 없었어요. 전 살고 싶었어요. 정말 살고 싶었으니까요…….”

 

명근은 아픈 과거가 떠오르는 지 고개를 숙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사내 역시 살기 위해 사람을 죽여본 경험이 있는지라 명근의 아픔을 이해하는 입장이었다. 사내는 진오에게 이야기를 계속할 것을 부탁했다.

 

“말해 보게.”

 

진오는 말했다.

 

“저는 스턴건으로 도플갱어의 등을 찔렀습니다. 치직, 거리는 스턴건의 소리와 함께 놈의 짧은 비명을 들을 수가 있었죠. 놈의 염력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날렵한 몸동작, 스피드가 중요했습니다. 염력의 약점은 바로 눈! 저는 이를 악물었습니다. 놈의 몸을 잡고 돌린 후 오른손의 검지와 중지를 펴서 놈의 두 눈을 향해 힘껏 내리찍었습니다.

 

<크아아아-악!>

 

놈이 심하게 몸부림을 쳤지만, 저 역시 필사적이었기 때문에 있는 힘을 다해 손가락을 눌렀습니다.

 

<하-아악! 네 이, 이 노-오옴! 넌 가짜-!>

 

끔찍한 감각이 손에서 느껴졌어요. 떠올리기도 싫을 만큼 역겨웠죠. 놈은 고통 때문인지 몸에 점점 힘이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저는 다시 스턴건을 쥐고 놈의 목덜미를 찔렀습니다. 이번에는 스턴건이 살상무기로 사용되는 순간이었죠. 놈의 목에서 분수 같은 피가 터져 나와 저의 손과 얼굴을 이렇게 젖어 놓았습니다. 놈은 컥, 소리와 함께 온 몸을 축 늘어뜨리더니 그제서야 숨을 거뒀습니다. 공포에 몸이 떨려왔습니다. 저는 괴물이긴 하지만 사람의 몸을 하고 있는 생명체를 두 명이나 죽이고 만 것이었죠. 그것도 철저하게 매우 잔인한 방법을 이용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자 다시 워프현상을 겪게 되었고, 이렇게 명근과 당신을 만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명근은 두 마리의 도플갱어를 물리친 진오가 대견스러웠다. 그는 진오의 몸을 부둥켜안고 중얼거렸다.“

 

“진오야,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명근은 진오의 몸만 보아도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 알 수가 있을 것 같았다. 살이 베이고, 물러터진 진오의 상처를 보자 눈물이 핑 돌았다. 핏물에 젖은 진오의 무테안경을 정성껏 소매로 닦아주었다.

 

사내와 명근은 진오가 겪은 일이 무섭기도 하고, 또 그의 뛰어난 상황판단력에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특히 도플갱어를 속인 부분에서는 사내마저도 진오의 뛰어난 상황판단력을 인정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명근은 자신의 일인양 뽐내며 사내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거봐요. 제 친구는 살아남는다니 까요. 얼마나 기특한 녀석입니까.”

 

그러곤 즉시 고개를 돌려 진오에게 말했다.

 

“인사해. 이 분 아니었으면 여기서 널 만나지 못했을 거다.”

 

진오는 불편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예의를 갖추어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친구녀석과 제가 공연히 신세를 진 듯하군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내는 진오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나자, 진오가 도플갱어가 아니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사내는 말했다.

 

“이제 자네들은 무사히 이 곳을 빠져나가는 일만 남았군.”

 

명근은 사내의 말에 크게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이 곳을 빠져나가는 일만 남은 것이죠. 다행히 아저씨께서 나가는 법을 알고 계신다고 하니까 그건 식은 죽 먹기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아저씨만 믿어야죠!”

 

사내는 명근이 표현한 '우리의 아저씨.'라는 말을 듣고 반가운 마음이 일어 껄껄 웃으며 말하였다.

 

“그렇게 날 믿고 따라준 자네를 위해 나가는 방법을 가르켜 주지 않을 수가 없군.”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나 대도를 쥐고, 진오의 허벅지를 향해 내리쳤다.

 

“악! 무슨 짓입니까?!”

 

명근은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매우 놀라며 몽둥이를 아무렇게나 팽개치고, 두 손으로 대도를 움켜잡았다.

 

“아저씨. 대체……. 무슨 짓입니까? 그러잖아도, 상처를 입은 녀석인데 왜, 왜, 대체……!”

 

너무 흥분한 나머지 말까지 더듬었다.

 

반면 진오는 사내가 역날(易捺)로 칼을 내리쳤음을 알았다. 사내에게 무언가 깊은 뜻이 있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생각이 짧은 명근은 그러한 사실을 모른 채 화를 냈다.

 

“아직도 진오가 도플갱어인 것 같습니까?”

 

사내는 시종 일관(始終一貫) 대꾸가 없었다. 명근은 답답한 마음에 그의 어깨를 잡고 소리를 질렀다.

 

“말씀을 하세요! 아직도 진오가 도플갱어인 것 같냐고요!”

 

명근은 매우 화가 나서 사내의 얼굴을 정면으로 노려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진오를 건드리신다면 아저씨가 무슨 의도로 그러하셨든 전 당신을 살려두지 않겠습니다.”

 

사내는 느닷없이 웃었다.

 

“크하하!”

 

명근은 멍청히 그를 바라보았다. 사내는 명근의 양손을 뿌리치고, 정강이를 걷어차 버렸다.

 

명근은 분을 참지 못해서,

 

“절 화나게 하시는 군요.”

 

라고, 말한 후 주먹을 쥐고 그에게 덤벼들었다.

 

사내는 능숙한 솜씨로 대도를 휘둘러 명근의 목덜미를 살짝 베어버렸다. 명근은 목덜미로부터 흐르는 피를 보고 깜짝 놀랬다.

 

“이, 이거……. 장난이 아닌데?”

 

“이곳에서 3년 동안 구렁이를 사냥했네. 그동안 칼질하나 못 익힐 리가 없지.”

 

사내는 대도로 명근의 목을 겨누었다.

 

“아픈가?”

 

명근은 이미 사내에게 정이 떨어져서 막무가내로 말을 퍼부었다.

 

“아프라고 때리셨는데 안 아프길 바랍니까? 제정신이 아니시군요. 처음부터 살인을 하는 괴물 놈이나, 도와주는 척 느긋하게 살인하는 놈이나 모두 똑같아요. 당신도 괴물과 다를 것이 없단 말입니다. 시궁창에 떨어져서 똥물이나 드시죠! 저와 진오를 죽이고 싶으시다면 질질 시간을 끄시면서 즐기시지 말고, 빨리 그 칼을 내리쳐요! 그 칼로 친딸을 죽이고, 우리 둘마저도 죽여 보시지!"

 

진오는 명근의 말에 소스라치게 놀랬다.

 

‘친딸을 죽였다고?!’

 

진오는 3년 전의 기사가 떠올랐다.

 

― 난 내 딸을 죽인 범인을 죽였을 뿐이다!

 

‘그 일이 일어난 지 어언 3년째다. 저 사내는 여기에 3년을 지냈다고 했고, 친딸을 죽였다고 했으니……. 분명 그 사건의 장본인이 틀림없다. 저 사람이야.’

 

사내는 명근이 무슨 말을 하든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진오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 눈이 빛나고 있는 것을 보니 무언가 짐작을 하고 있는 모양이군.”

 

진오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을 더듬는지 또다시 참담한 표정이 되었다.

 

그는 명근에게 겨누었던 대도를 거둬들이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미 날은 어둑해져 있었다. 여러 개의 별들이 어둠 속에 박힌 보석처럼 찬란한 빛을 뿜어냈다. 이 두 사람을 보내면 혼자가 될 자신을 생각하자 심한 적막감을 느꼈다. 그와 더불어 죽은 가족들, 목숨보다도 소중히 여겼던 딸이 떠올라 가슴속에 무엇인가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라서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명근은 두 눈이 휘둥그래지며 대체 사내가 무슨 속셈을 지니고 이러는지 몰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사내는 천천히 말하였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 한기(寒氣)를 느낄 때마다 나는 내 딸자식을 생각하지. 나는 영원히 딸자식만을 찾아 헤매기로 녀석이 준 이 목걸이에 맹세를 했어."

 

진오는 그의 목에 걸린 목걸이가 바로 가넷(Garnet), 1월달의 상징을 나타내는 10)탄생석임을 알 수 있었다.

 

“난 자네들을 도와주고 싶네. 내 딸과 나처럼 이곳에서 헤매게 할 마음이 없어.”

 

그는 돌연 진오에게 대도를 겨누면서 물었다.

 

“내가 이 칼로 자네를 내리친다면 자네는 아프겠지?”

 

진오가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사내는 다시 말을 이었다.

 

“암, 아프겠지. 맞는다고 여기고 있는데 아프지 않을 리가 없지!”

 

진오는 그의 말에 무슨 깊은 뜻이 있음을 알았다.

 

‘아프다고 여기기 때문에 아프지 않을 수가 없다?’

 

“자네들은 스스로의 기억 속에서 헤매고 있는 거네. 내가 도와줄 것은 깨어나라는 말 밖에 해줄 것이 없어. 우선 괴물을 죽였으니 살 수 있는 자격은 이미 얻어 놓았네. 이젠 자신과의 싸움이 남은 것 뿐이야.”

 

진오가 말했다.

 

“즉, 아저씨께서는 직접적으로 도와주는 것이 불가능하다라는 말씀이시군요.”

 

“역시 자네는 똑똑하구만. 스스로의 싸움이니만큼 다른 사람의 도움은 불가능하지. 다만 눈을 뜨고 있다고 여기지를 말 것이며, 먹고 있어도 먹고 있다고 여기지를 말고, 물이 흘러도 흐른다고 느끼지를 말게.”

 

“그 말은 이 모든 것이 환상(幻想)이라는 말씀이십니까?”

 

사내는 진오의 질문을 들은 척도 않고 단지 하늘을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이 이상 자네들을 도와줄 수가 없네. 괴물을 처치한 이상 이제 남은 과제는 자네들이 알아서 헤쳐야 할 것이야. 무시무시한 괴물을 없앴는데 설령 남은 과제도 못 풀어내라고? 허허, 난 자네들의 능력을 시험 겸 믿어보고 싶네. 내가 말해줄 것은 빨간 헝겊이 묶인 나무의 의미를 밝혀내라는 거네. 그럼 난 가겠네.”

 

명근은 그의 앞길을 막아서려 했다.

 

“가긴 어딜 가신다는 겁니까? 갈려면 나를 밟고 가란 말이오!”

 

진오가 말했다.

 

“보내드려. 저 분은 충분히 우리를 도우셨어.”

 

“도와주긴 뭘 도와줘? 횡설수설 이상한 말만 해놓고선. 이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냐? 깨어나라고? 허, 우리가 무슨 개꿈 꾸는 것도 아닌데 뭘 깨어나라는 거야? 통 알 수가 없다고, 더 복잡해졌다고! 젠장할!”

 

명근이 노발대발하는 사이에 사내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잠시 후, 진오가 말했다.

 

“저 분은 이미 우리에게 나가는 방법을 가르쳐 줬어. 우리는 스스로의 과제가 남은 거야.”

 

명근은 씩씩거리며 날카롭게 외쳤다.

 

“도와주려면 끝까지 도와줄 것이지, 치사하게……. 빌어먹을!”

 

진오는 명근에게 몸을 부추겨 줄 것을 부탁하며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자, 이제 세 번째 열쇠를 찾아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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