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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의 해답을 얻다
명근이 진오를 부축하여 도착한 곳은 세 번째의 헝겊이 묶인 자리였다. 가시나무 덩굴로 이루어져 뱀이 덤벼올 걱정이 없는 안전지대이기도 했다.
진오는 한참동안 나무를 더듬으며 글자를 찾았다. 진오가 아, 하는 탄성을 터트리자 진오와 명근은 동시에 같은 단어를 말했다.
“24, 세 번째, 水!”
“24, 세 번째, 水!”
그러고는 서로의 얼굴을 보며 한바탕 큰 소리로 웃는 것이었다. 이제야 서로를 찾았다는 걸 실감할 수가 있었다.
“목이 마른걸.”
진오가 마른침을 삼키며 한마디하자, 명근이 벌떡 일어나 호숫가로 내려가려 했다.
“가지마. 난 괜찮으니까.”
이미 날이 어두워졌기 때문에 서로 떨어져 봐야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상처를 입은 진오를 데리고 호숫가로 내려가기에도 매우 벅찼다.
진오는 웃으며 말했다.
“아까 그 아저씨 말이 떠오르는데. 먹고 있어도 먹고 있다고 여기지를 말라.”
“하하. 그건 완전 헛소리지.”
“갑자기 초능력자 유리겔라가 떠오르는데.”
“유리겔라는 왜?”
“명근 너가 초능력자이니까 같은 초능력자로 알려진 유리겔라를 모를 리가 없겠구나. 그 사람은 초능력보다는 최면술이 강한데, 어느 여자에게 최면을 걸어 레몬을 먹였었어. 최면을 걸면서 아주 달고 맛있는 딸기라고 여기라니까 여자가 레몬 껍질도 벗기지 않고 우걱우걱 먹어대더군. 레몬을 말이야.”
“뜨아, 껍질도 벗기지 않고?”
“응. 여자가 너무 맛있게 먹어대니까 이상해서 그 상태로 엑스레이를 찍어 식도와 뇌 상태를 살펴봤어. 여자는 레몬이 아니라 달고 맛있는 딸기를 먹은 걸로 알던데? 그런 것을 보면 먹고 있어도 먹고 있다고 여기지 말라는 뜻은 우리가 최면이나, 환상 속에서 서로의 자아(自我)를 찾으라는 말 같아.”
명근은 입꼬리에 담배를 물며 말했다.
“자아? 얌마. 어려운 문자 쓰지마. 내 머리에 든 건 2 곱하기 2 밖에 없어.”
명근의 말에 진오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다른 사람이 명근의 이러한 말을 들으면 ‘참으로 무식하구나.’ 라면서 여기겠지만 진오는 달랐다. 명근의 입장을 헤아려본다면 그는 초등학교조차도 다니지 못한 것이다. 완벽하게 살아있는 신무기로 태어날 그에겐 군사교육 외의 지식이 존재하지 않았다.
담배를 물고 붕어처럼 뻐끔뻐끔 연기를 뱉어내는 명근을 보며 진오는 차츰 마음이 안정되었다.
‘그래, 저 녀석은 나의 유일한 보디가드야.’
진오는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며 명근의 어깨에 기대어 잠을 청하려 했다. 명근은 웃옷을 벗어 진오의 몸에 덮어줬다. 진오는 맨몸으로 몇 시간을 앉아 있어야 할 명근을 위해 괜찮다고 사양을 했지만 명근의 고집을 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너는 어쩌려고?”
“얌마, 난 너보다 피하지방이 많아서 거뜬해.”
진오가 어이없게 웃자 명근이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사실은 아까 그 아저씨랑 같이 뱀고기를 먹었거든. 이야, 몸에 좋은 뱀 아니랄까봐 온 몸에 불이 난다. 불이 나. 거기다가 맛은 또 얼마나 기가 막힌 데! 아, 잠깐 기다려봐 불 좀 피우자.”
명근은 가시나무 덩굴의 나뭇가지와 자신이 만들었던 몽둥이를 이용해 불을 지폈다. 손목시계를 바라보니 아직 24시가 되려면 3시간이나 더 있어야 했다.
불을 지피자 명근은 아까 사내와 있었던 일이 생각나서 불쑥 진오를 깨웠다.
“진오야. 혹시 주역 할 줄 아냐?”
진오는 잠을 청하다 말고, 번쩍 눈을 뜨며 물었다.
“주역은 왜?”
“다름이 아니고 아까 그 양반이 주역을 알면 여길 빠져나갈 수가 있다고 해서. 헛소리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주역의 기초만 알아도 빠져나갈 수 있다네? 나도 언뜻 들었거든.”
진오는 벌떡 일어났다.
‘주역주역주역…….’
명근이 물었다.
“반응이 왜 그래? 뭐라도 떠올랐어?”
진오는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렸다.
“주역이라……. 아마도…….”
명근은 진오의 곁으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왜 그런데?”
“역시 그 아저씨는 여기의 나가는 입구를 알고 있어. 그것도 확실하게!”
“그 양반. 득의양양하게 큰 소리 칠 때부터 눈치 챘지만 우릴 도와 줄 마음이 전혀 없다잖아.”
진오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시나무 조각을 쥐고 땅 위에 커다란 원을 하나 그렸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해. 부디 내가 알고 있는 그대로이길 바랄 뿐이야.”
명근은 진오가 그리는 그림을 바라보며 말했다.
“뭔가 알아낸 거구나?!”
진오가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그는 명근에게 주역의 기초 지식을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진오는 원안에 십자를 그려 4등분으로 나눈 뒤, 북쪽에는 水, 왼쪽에는 木, 남쪽에는 火, 오른쪽에는 金이라는 글자를 썼다.
“이건 주역이 나타낸 우리가 사는 지구야. 지구의 수명을 주역에서는 이렇게 4가지로 나눠. 첫째는 水, 두 번째는 木, 세 번째는 火, 마지막 네 번째는 金이야. 그리고 이 네 개의 시대가 모두 만나는 정 가운데 지점, 이곳은 바로 土. 해(日)과 달(月)은 시간이 가면서 인간이 접하는 것이지. 그래서 우리가 사는 시간을 月火水木金土日이라고 정하게 된 거야.”
진오가 설명하기 무섭게 명근이 놀랍다는 표정을 지으며 소리쳤다.
“첫 번째! 그건 土였고, 두 번째는 木이었어. 세 번째는 水! 아, 그럼 여기 고스트하우스는 주역 방위를 토대로 만들어진 또 하나의 지구로군!”
“후훗. 이제야 말이 잘 통하는걸.”
진오가 농이 섞인 어조로 말을 하자, 명근은 신이 나서 말했다.
“맞어. 바로 그거야! 아침 새벽에 내가 볼일을 보다가 너와 갈라졌고, 이상한 곳으로 워프가 되었으니까……. 그리고 8시간 후에 또다시 워프가 되어서 이곳으로 왔고, 아까 전의 그 아저씨를 만날 수가 있었어. 또 8시간이 지나자 너를 만났었으니 확실히 8시간마다 워프가 일어났었지. 거기다가 土木水도 확실히 적혀 있었고 말야.”
“그래. 우리가 있는 고스트하우스는 8시간마다 워프의 눈이 지정된 자리에서 공간의 문을 확실하게 하고 있어. 마치 저승과 이승을 갈라놓는 입구처럼…….”
명근이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저승과 이승이라……. 말 되는데? 달하고 해가 음기와 양기를 뜻한다며? 저승과 이승도 음기와 양기에 따라 나뉘는 것이잖아. 이 상황에서 네 얘길 들으니까 으스스한데.”
명근은 몸서리를 쳤다.
“이 걸레조각을 찾다 찾다 가보면 수봉산을 빠져나올 수 있겠지?”
진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명근은 이제야 수봉산이 왜 저주받은 산이라 불리는지, 그리고 수봉산에 들어갔다가 나온 사람들이 모두 엄청난 비극을 초래하게 됐는지 깨달을 수가 있었다. 이 모든 것은 도플갱어의 소행이며, 수봉산에 들어간 모든 사람들은 도플갱어의 손에 의해 살해를 당한 것이었다. 하마터면 명근과 진오 역시 생명의 위협을 받을 뻔했겠지만 이 모든 고난을 이겨내자 차츰 마음의 여유가 생기고, 긴장이 풀렸다.
이제 진오와 명근에게 남은 것은 단 한가지.
살아 있는 지옥의 미로, 수봉산을 빠져나가는 것뿐이었다.
이미 곯아떨어진 진오의 숨결을 느끼며 명근은 24시가 되기를 기다렸다.
‘土의 공간. 다음에는 木. 木의 공간에는 나무 밖에 없었어. 그리고 水의 공간인 여기에서 겨우 물을 구할 수가 있었지.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만약 이곳 고스트하우스가 주역으로 이루어진 지구라면…다음 곳은 金의 공간으로 가겠군. 金이라……. 설마 진짜 金만 있는 곳은 아니겠지?’
그때였다. 명근은 엉겁결에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미세하게 느껴지지만 기분 나쁠 정도로 미지근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숨을 몰아쉬는 것처럼.
‘이상한데?’
다시 고개를 돌리며 바람의 기운을 느껴보려 하였다. 역시 일정하게 바람이 불고 있었다. 명근은 이 이상한 기운을 말해하기 위해 진오의 어깨를 흔들었다.
“진오야. 진오야?”
그러나 엄청난 육체의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진오는 잠에서 헤어 나오질 못했다.
“진오야? 잠깐만 일어나 봐. 임마?”
명근이 몇 차례 깨워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하긴 도플갱어를 없애느니라 얼마나 고생을 했겠어, 명근은 그렇게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진오가 깨어난 후에 말해도 괜찮으리라 여기며 그렇게 그도 진오와 함께 잠의 세계로 곯아 떨어졌다.
먼저 깨어난 것은 명근이었다. 그는 깨어난 즉시 시계를 바라보았다. 곧 있으면 날이 밝아올 만큼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길게 늘어지는 하품을 하며 주변을 살펴보자 그의 눈이 번쩍 떠졌다. 기대도 하지 못한 뜻밖의 사실에 황당해하며 황급히 진오를 깨웠다.
“임마, 야. 일어나! 일어나 봐!”
“으…음…….”
진오는 아직도 눈이 떠지지 않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한참 동안 고개를 저으며 몇 분 가량을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한 뒤에야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우선 뿌옇게 서리가 낀 렌즈를 닦으며 명근에게 물었다.
“왜? 워프된 것 때문에 그러는 거냐?”
“네 눈으로 보고 물어봐라. 얼마나 골치 아픈지!”
“흠!”
진오는 대충 렌즈에 낀 서리를 닦은 뒤 안경을 쓰고 주위를 훑어보았다.
그의 입에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맙소사!”
바닥에는 빈 사발더미가 굴러다녔다. 심하게 박살이 난 PDA와 노트북이 보였고, 피가 묻은 돌무덤과 3인용 텐트도 보였다.
‘예상대로라면 여기가 아니라 다른 공간이어야 하는데…….’
진오가 예기치 못한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난감해 할 때 명근은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왜 또… 土 공간이지?! 네 말대로 주역 방위표라면 金이나 火 공간으로 가야 하는 거 아냐? 그런데 대체 이건 어떻게 된 거냐? 대체 어떻게 된 거냐고?”
진오가 할말을 잃고 멍청히 서있자 명근은 가슴속의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나무에 머리를 박으며 울부짖었다.
“젠장할, 빌어먹을! 갇힌 거야. 우리는 완벽하게 갇힌 거라고!”
허무에 찬 명근의 외침이 메아리가 되어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이 망할 놈의 고스트하우스에 갇혀 버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