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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의 말대로 지금은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발을 동동 구르며 조급함을 감추지 못하는 명근의 표정은 극도로 어두워졌다.
명근은 망연한 기색을 띠면서 진오를 바라보았다.
“너가 우리 동료?”
“므히…히…힛!”
돌맹이를 든 진오의 손이 거세게 움직였다.
“죽어라, 죽어!”
진오는 쓰러진 진오의 몸을 돌맹이로 무자비하게 내리 찍으며 씨익 웃었다. 그 순간 쓰러진 진오의 손에서 스턴건이 떨어졌다. 스턴건을 보고나서야 명근은 눈앞의 진오가 도플갱어임을 확신하고 덩달아 크게 웃었다.
“크하하하!”
명근은 큰소리로 웃다가 바닥에 쓰러진 진오를 노려보았다.
“이 새끼가 이걸로 내 손을 병신 만들려고 했었어! 몇 번이고 죽여 버릴테다!”
명근은 이미 숨을 거둔 시신을 쉬지 않고 구타했다. 워낙 힘이 좋은 명근의 주먹질과 발길질로 인해 시체의 온 몸은 구멍이 뚫리고, 내장이 흘러내렸다.
잔인한 이 광경에 살아있는 진오는 오히려 잘한다고 박수를 치며 내장을 향해 발길질을 해댔다.
명근과 진오는 그렇게 웃으면서 시체를 산산조각 내버렸다.
“죽는다고 내가 가만히 내버려둘 줄 알았나? 끝까지 정 떨어지는 행동만 하는군. 재수 없는 놈. 아무리 내가 배가 고프다지만 네 놈의 더러운 살은 먹지 않는다. 죽어랏, 죽엇! 크하핫! 죽엇!”
사방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진오의 시체가 완전히 떡이 되어서야 명근은 휘두르던 주먹질을 멈추었다.
명근은 진오의 시신을 보자 기분이 개운해 졌다. 형용할 수 없는 희열을 느끼며 마무리로 진오의 목을 잡고 비틀었다.
― 두두둑.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그렇게 맨손으로 진오의 목을 비틀어서 절단을 냈다. 그것마저도 명근은 즐기고 있었다.
명근은 진오의 목을 들고 찾아간 곳이 있었다. 그 곳은 아침부터 그가 만들던 돌무덤이었다. 명근은 가운데 부분을 헤집어, 진오의 머리를 집어놓고 다시 돌덩이로 매웠다.
“이제 진오를 죽였으니 남은 것은 명근 놈 뿐이야.”
명근은 남겨진 빈 무덤을 보며 진오에게 물었다.
“혹시 명근 놈을 보지 않았나?”
진오는 말했다.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진오 놈이 내 옆에서 쓰러져 있었어. 온 몸에 상처 투성이였지. 아직 제대로 육체를 가지지 못한 탓에 나 또한 이렇게 상처투성이가 되어 버렸지만 만약 명근 놈이 있었다면 살아 숨쉬게 내버려두지 않았을 거야. 붉은 피와 고통. 이 두 가지는 너무 매력적이잖아.”
명근은 진오의 온몸이 상처투성이 임을 보자 찔끔해서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화가 치밀어 올랐기로서니 몇 안 되는 동료의 앞길을 막으려 하다니.’
명근은 진오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였다.
“그럼 명근 놈이 있는 곳은 여기가 아니군.”
명근은 종일토록 능력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기운이 많이 빠진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처를 입은 진오의 몸을 부축하여 텐트에서 쉬게 했다.
이제 날이 완전히 저물고 어둠이 찾아왔다.
명근은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리며 진오에게 말했다.
“놈만 죽이면 곧장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는 거다.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지. 나는 정부로 돌아가고, 너는 너가 하고 싶은 인생을 꾸리는 것이다. 너도 알다시피 지금 우리가 죽여야 할 놈(명근)은 이 근처에는 없어. 아마 ‘그 곳’에 있을 것이 틀림없어.”
갑자기 진오가 심하게 기침을 해 댔다. 그의 입에서 붉은 색의 피가 흘러나왔다.
명근은 말했다.
“머지않아 '그 곳' 으로 가는 입구의 문이 열리겠지. 8시간마다 열리는 문을 통해서 우리는 ‘그 곳’ 으로 들어가자. 그 동안 너는 여기서 쉬고 있어.”
진오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내 손으로 죽일 거야.”
“음?”
“너만 즐기려는 속셈은 아니겠지?”
명근은 진오의 눈빛에서 강한 살인본능을 읽어내고는 기쁜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료를 만났다는 것에 심한 동지애를 느낀 것이다.
“당연하지. 그럼 명근을 죽이는 것은 네 몫이다.”
“공간의 문은 하루에 3번 열린다면…….”
명근의 기억 속에서 붉은 색의 너덜너덜한 헝겊조각이 떠올랐다. 헝겊조각이 묶인 그 자리에서 발견한 글자들을 조합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8. 두 번째 자리에는 16이 적혀 있었지. 그리고 아직 3번째 자리를 찾지 못했지만 분명히 24라고 적혀 있을 거야. 그럼 진오가 여길 찾아오려면 아침 8시에 찾아오겠군.’
명근은 사내의 말을 통해서 흩어진 퍼즐조각이 차근차근 맞춰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저씨. 그럼 아저씨께서 8. 16. 土. 木의 글자를 새겨놓으신 겁니까?”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조금이라도 자리를 찾기 위해 표시해 둔 것이지. 사람 눈에 띄지 않게 잘 새겨두었는데 용케 찾아내다니. 말하는 것과는 달리 자네 똑똑하군.”
“제가 찾은 건 아니고 제 친구녀석이 찾은 거죠.”
“아, 그 똑똑하다던 친구? 허허.”
명근은 물었다.
“아저씨가 적어놓은 것. 두 가지는 알 수 있을 것 같군요. 8하고 16은 공간의 문이 열리는 시간을 나타낸 것이고, 첫 번째와 두 번째는 공간이 이동되는 순서겠죠. 그럼 나머지 그 한자들은 무얼 뜻하는 겁니까?”
사내는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입을 열었다.
“자네 9)주역을 아나?”
“주역이요? 그 복잡한 것을 제가 알 리가 없죠. 대신 제 친구녀석은 잘 알텐데…….”
사내는 명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말을 가로채며 말했다.
“주역을 모르면 자네에게 설명 해봐야 소용없지.”
그의 이 한마디는 매우 단호했다.
‘어쩌면 그 한자가 이곳을 나가게 하는 열쇠일지도 모르건만. 나보고 영영 나가지 말라는 건가?’
명근은 화가 치밀어 올라 뭐라고 쏘아붙이려다가 그가 먼저 질문을 던지는 바람에 그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지금이 몇 신가?”
“아, 10시 넘었어요.”
“구생신들이 자네를 죽이기 위해 이리로 들이닥칠 테니 자정이 되기를 기다려야 겠군. 아직 멀었으니 눈이나 붙이도록 하지.”
이렇게 두 사람은 오후 4시가 되기를 기다리며 잠을 청했다. 그리고 날이 밝고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명근과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나 동굴을 나왔다.
명근은 사내의 뒤를 따라 달리다 말고 멈추어 서서 무언가를 찾았다. 사내도 덩달아 멈춰 그가 무얼 찾는지 구경했다. 명근은 두꺼운 두께의 나뭇가지를 찾았다. 그리고 사내의 손에 있는 대도를 낚아채면서 말했다.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숙련된 솜씨로 대도를 이용해 나뭇가지의 끝을 잘 다듬어 제법 쓸만한 몽둥이를 만들어냈다. 사내는 명근의 팔 힘이 매우 좋다는 것을 알고 칭찬했다.
사내를 따라 길을 걷던 명근은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놀래 헛바람 소리를 내었다. 붉은 색의 헝겊조각이 묶여 있던 것이다. 그곳은 명근이 워프되었을 때 누워서 낮잠을 잤었던 호숫가의 바로 윗 쪽 산 속이었다.
명근은 사내에게 물었다.
“여기엔 뭐라고 적혀 있죠?”
사내는 말했다.
“24. 세 번째. 물 수(水)가 적혀 있지.”
“이게 나가는 방법을 의미하고 있겠죠?”
사내는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아마 주역의 기본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풀 수가 있지.”
갑자기 하얀 안개가 호숫가 주위를 에워쌌다. 급한 마음에 명근은 안개로 몸을 던지려 했다. 그 순간 사내가 명근의 몸을 막아서며 말했다.
“내가 말하지 않았나. 괴물 놈이 이쪽으로 올 것이니 굳이 먼저 갈 필요가 없단 말이야!”
사내는 명근의 목덜미를 잡아 당겨 가시나무 덩굴로 몸을 숨겼다.
“여기라면 괴물이 우리를 발견할 수도 없고, 발견한다 해도 이 가시나무는 내가 만들었으며 길 또한 나만 알기 때문에 섭불리 덤비지 못할 것이다.”
“그럼 괴물 놈을 암살하자는 거군요?”
곧 하얀 안개가 흐트러지며 사라지기 시작했다.
“왔군.”
사내의 딱딱한 음성에 명근은 재빨리 아래로 고개를 돌렸다.
“엇?”
그러나 사내와 명근의 예상과는 달리 사라지고 있는 안개 속에서 힘없이 서 있는 사람은 두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이었다. 분명 진짜 명근이 여기에 있으니 두 사람의 예상대로라면 가짜명근과 가짜진오가 있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 서 있는 사람은 진오 한 사람 뿐이었다. 온 몸은 피투성이였고, 상처투성이였다. 거기다가 오른손과 얼굴은 마치 핏물로 세수를 한 듯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사내와 명근은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저건 진짜 진오일까? 아니면 가짜? 그런데 가짜 명근은 왜 없는 거지? 애초부터 도플갱어가 없던 건 아니었을까. 하지만 저렇게 피투성이인 것을 보면 혈전을 치룬 것이 틀림없어. 도플갱어가 없다고 하기에는 힘들겠고……. 그런데 저건 가짜일까? 진짜일까? 만약 가짜라면……?’
명근이 어지럽게 생각에 잠겼을 때 사내는 벌떡 일어서서 아래로 몸을 던졌다.
“꼼짝마라!”
사내는 진오에게 대도를 겨누며 큰소리로 말했다. 진오는 대도를 보고 움찔거렸다. 사내와 대도를 번갈아 바라본 후 모든 것을 체념하듯 두 눈을 꼬옥 감았다.
“자네는 누군가?”
진오는 두 눈을 감은 채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에는 두 줄기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진오는 대답할 힘도 없고 마음도 없는지 두 팔을 흐느적거리며 바닥에 쓰러지고 마는 것이었다.
명근은 그가 어쩌면 진짜 진오일지도 모른다는 직감을 받았다.
진오의 상처와 그동안 겪었을 고생을 생각하면 저도 모르게 가슴이 아려왔다. 분명 진오는 살기 위해 도플갱어 두 마리를 죽이고 진짜 명근을 찾아 여기까지 온 것이리라.
명근은 진오에게 몸을 던지며 소리쳤다.
“진오야!”
명근이 진오의 몸을 부축하기 위해 다가갔을 때 사내의 대도가 명근의 앞길을 막아 세웠다.
“뒤로 물러섯!”
명근은 고개를 저었다.
“진짜 진오일수도 있잖아요! 무턱대고 사람을 몰아세우지 말자고요.”
“목숨이 걸린 일이야. 이깟 일로 자네는 목숨을 잃고 싶은 겐가?!”
“아저씨!”
명근이 아무리 부탁을 해보았지만 그는 완강하게 버티며 진오와 명근 사이를 갈라놓았다. 만약 명근이 진오를 살린다면 그는 명근과 진오 두 사람 모두를 죽일 태세였다.
이 때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조차 없던 진오가 신음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명근은 놀래서 진오를 불렀다.
“진오야!”
진오는 가까스로 힘겹게 눈을 뜨며 자신을 부르는 명근에게 고개를 돌렸다. 명근이 애처로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자 저 녀석이 살았나 죽었나 걱정을 안고 있던 진오로서는 안심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명…근아….”
“진오야!”
두 사람은 누가 뭐랄 것도 없이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사내가 명근에게 떨어지라며 소리쳤지만 명근에게는 진오 목소리 외에다른 목소리는 들리지가 않았다. 사내는 암만 생각해도 진오를 믿을 수가 없어서 극단적인 결심을 했다. 진오를 죽이기로 한 것이다. 그가 대도를 움켜쥐고 진오에게 내리치려는 그 찰나 명근이 온 몸을 던지며 사내의 공격을 막아냈다.
“무슨 짓입니까!”
챙, 소리와 함께 대도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 순간 명근과 사내의 몸은 하나로 엉키며 바닥을 뒹굴었다. 사내는 계속해서 “죽여야 돼! 저 녀석은 가짜란 말이야! 우리를 죽일 것이야!” 라고, 외쳐댔고, 명근은 “그렇다고 무턱대고 죽이려고 하다니, 제가 사람을 잘못 봤군요!” 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진오는 사내가 떨어뜨린 대도를 바라보았다.
‘날 가짜라고 오해할 만도 하지.’
그의 입가에는 씁쓸한 미소가 드리웠다.
두 사람이 한참 동안 바닥에 뒹굴며 싸우고 있자 진오는 온 힘을 다해 소리쳤다.
“그만하십시오! 제 말을 들으세요!”
그러나 두 사람의 몸싸움은 멈출 줄 몰랐다. 진오는 다시 소리쳤다.
“제가 어떻게 도플갱어를 죽이고, 여기까지 찾아왔는지 상세하게 말할 테니 제 말을 들으신 후 저를 죽여도 늦지 않을 겁니다!”
그제서야 두 사람의 시선이 진오에게로 향했다.
진오는 어떻게 해서 이런 몰골이 되었고, 도플갱어를 죽였는지 명근과 사내에게 그 경위를 설명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