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번째입니다.
9
그러다가 부여는 모용씨의 침입을 받는다.
때마침 관구검 전쟁으로 위나라 영향권에 들어있던(당시는 위를 대체하여 사마씨의 진이 들어섰다.) 옥저로 대대적으로 피난 간다. 그것이 역사를 갈랐다.
그 세력의 일부는 다시 부여로 돌아왔지만 대부분은 백제를 접수하고 왜를 점령하고 변진한을 점령하며 신라를 먹어치우고 최종적으로는 마한을 점령한다. 그리고 마침내는 열도(규슈와 혼슈 서부)마저 정복해 버린다. 그것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마치 근세사에서 일본이 대동아공영권을 부르짖고 순식간에 아시아태평양일대를 먹어치운 것과 비슷하다. 한반도와 열도 남만주가 백제의 영향력 아래에 놓인 것이다.
그것은 불완전한 통일이기도 했다. 그런 백제는 요서의 부여와 합작으로 원수지간인 고리와 숙명의 한 판 대결을 펼친다. 바야흐로 동족상잔의 비극이 시작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고리와 백제가 충돌한 근본적인 원인이다.
9챕터, 시작부터 역사를 왜곡하고 있습니다.
모용씨와 관구검 중 선후 관계 따위는 전혀 모른 채 그냥 지껄이고 있네요.
관구검의 침입은 244년과 246년,
모용외의 침입은 293년
모용황의 침입은 342년
제가 보기에 이사람은 모용씨가 두 번에 걸쳐서 침공해 들어온 사실도 전혀 몰랐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모용을 성으로 하는 형제가 함께 쳐들어온 모양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죠.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50년의 간격을 가지는 두 가지 침략을 한꺼번에 서술해 버릴 수 있을까요.
게다가, 관구검에 대해서 자랑스럽게 괄호까지 쳐가면서 부연설명을 끄적였는데, 이를 어쩌면 좋을까요. 틀렸습니다. 사마염의 진(晉) 건국은 265년, 관구검은 255년에 죽었는데 말이죠. 무식하면 용감하다는데,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요?
객관적인 사실들은 그렇다 치고, 그 뒤에 이어진 주장은 어떨까요? 물론, 어떠한 근거도, 증빙 자료도 밝히지 않은 채 백제가 전부 먹어버렸다고 하네요. 일본의 대동아 공영권 운운하는 헛소리까지 첨언하는군요. 그렇게 1챕터에서 일본삼서, <화랑세기>, <상장돈장> 운운 하면서 여기에 엄청난 사실이 적혀있다고 하는데, 도대체 그런 기록들은 왜 보여주지 않는 것일까요? 참고로 아직까지 이사람이 그렇게 강조하던 <돈장>은 한번도 인용된 적 없습니다.
또한, 이사람의 기준으로 ‘순식간’이 얼마나 되는 기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앞서 살펴보았듯이, 관구검 때부터 모용황까지 100년입니다. 이사람은 100년이 ‘순식간’인 모양입니다.
어째서 백제가 북중국을 제치고 남중국의 동진과 먼저 교류했는지 그 이유가 드러난다.
bc 18년에 건국된 백제가 아무런 충돌 없이 고리와 잘 지내다가 근초고왕 때 마한을 정벌하고 북진하다가 고리와 충돌했다고? 무슨 블랙코미디인가? 350여년을 평화롭게 지내던 사이가 어느 날 갑자기 철천지원수가 되나? 주류 이론대로라면 남쪽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 백제가 무슨 수로 고리와 충돌하나?
현대 고고학으로 호남지방은 백제의 영향권도 아니었는데 겨우 한강유역만한 조그만 땅덩이를 가지고 고리와 맞짱 뜨나? 고리와 싸우면서 한편으로 남쪽에서 마한을 정벌하나?(고리 고국원왕과 최초로 충돌한 것은 369년, 그런데 주류들이 일본서기에서 따온 마한 정벌론은 369년이다.) 무슨 백제의 힘이 그리 남아도나?
첫 문장은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위에서 설명한 것은 백제가 짱이 되서 고구려와 철천지원수가 되었다는 내용인데 그것이 동진과의 통교에 이유가 된다구요? 허, 참.
아무튼, 백제가 아무런 충돌 없이 고구려와 잘 지냈는지 한번 살펴볼까요? <삼국사기>를 살펴보죠.
高句麗伐帶方 帶方請救於我 先是 王娶帶方王女寶菓爲夫人 故曰 “帶方我舅甥之國 不可不副其請” 遂出師救之 高句麗怨 王慮其侵寇 修阿且城· 蛇城備之(백제본기 권2 책계왕(責稽王) 원년)
고구려가 대방(帶方)을 정벌하자 대방이 우리에게 구원을 청했다. 이에 앞서 왕은 대방왕의 딸 보과(寶菓)를 맞이하여 부인(夫人)으로 삼았다. 때문에 말씀하시길 “대방과 우리는 장인과 사위의 나라이니 그 청에 응하지 않을 수 없다.”하고 마침내 군사를 내어 구원하니 고구려가 원망하였다. 왕은 그(고구려)의 침공과 노략질을 염려하여 아차성(阿且城)과 사성(蛇城)을 수축하여 이에 대비하였다.
책계왕은 근초고왕이 즉위하기 60년 전의 왕입니다. 350년을 평화롭다더니, 그 기간이 290년으로 확 줄어들었네요. 그럼 290년 동안은 왜 평화로웠을까요? 같은 왕 13년의 기록을 봅시다.
秋九月 漢與貊人來侵 王出禦爲敵兵所害薨
가을 9월, 한(漢)이 맥인(貊人)과 함께 쳐들어와 왕이 친히 나아가 막았으나 적의 군사에게 해를 입어 죽었다.
저기서 말하는 한나라는 낙랑군을 말하죠. 훗, 평화로운 이유가 나오네요. 낙랑군으로 가로막혀 있으니 고구려와 충돌하고 싶어도 충돌할 길이 없네요? 위에 인용한 고구려와의 충돌 기사도 마찬가지죠. 고구려가 대방을 쳐들어와서 도와줬답니다. 즉, 고구려-대방-백제 이렇게 영토가 배치되어 있다는 거죠. 그렇기에 직접 충돌이 아닌 간접 충돌의 형태로 나타나는 거죠. 아니, 설사 고구려와 백제가 직접 국경을 접하는 곳이 있다손 치더라도, 고구려에게 한사군이라는 절대적인 적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그리고 백제 역시 한사군과 그닥 사이가 좋을리 없는 상황에서 두 나라가 싸우겠습니까? 이런 유명한 말이 있죠. ‘적의 적은 친구다.’ 고구려와 백제가 모두 한사군이라는 공통의 적을 가지고 있는데 두 나라가 싸울 이유가 어디에 있죠?
고구려와 백제가 직접 충돌하는 첫 기사가 바로 근초고왕 24년, 서기 369년 입니다. 한사군이 313년 축출되고 난 후의 일이죠. 공통의 적이 사라졌으니 충돌할 이유는 충분합니다. 그리고, 과연 이사람 말대로 근초고왕이 369년에 마한을 정벌하면서 동시에 북진하여 고구려와 싸웠는지 한번 볼까요?
秋九月 高句麗王斯由帥步騎二萬 來屯雉壤 分兵侵奪民戶 王遣太子以兵徑至雉壤 急擊破之 獲五千餘級 其虜獲分賜將士(백제본기 권2 근초고왕 24년)
가을 9월, 고구려왕 사유(斯由)가 보기 2만으로 치양(雉壤)에 와서 진을 치고는 군사를 나누어 민가를 약탈하였다. 왕이 태자를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지름길로 치양에 이르러 (고구려 군사를) 급히 쳐서 깨뜨리고 5천여 급을 얻었는데, 그 사로잡은 적[虜獲]들은 장수와 군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허! 고구려가 먼저 쳐들어 온거네요? 또, 근초고왕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태자’를 보내서 쳐부순 거네요? 이사람은 멀쩡하게 <삼국사기>에 써있는 기록을 자기 마음대로 왜곡합니다그려. 마한 정벌은 실제로 삼국사기에 나타나지 않으니 넘어간다 치더라도, 고구려의 침공에 태자를 보내 처리하게 했으니, 근초고왕은 마한을 정벌하고 있어도 상관없겠네요?
그리고 상식적으로 생각해봅시다. 1년이라는 시간은 꽤 긴 시간입니다. 고구려와 충돌한 때는 가을 9월이죠. 그럼 그 앞에 날씨 좋은 봄, 여름동안 마한을 정벌하고, 가을에는 고구려와 싸울 수 있지 않을까요? 이사람은 전쟁은 일년에 한번만 해야 하는 것인가 봅니다. 아, 그래서 백제가 남만주, 한반도, 일본 열도 먹는데 100년이나 걸렸나 보네요. 나 원 참.
실제 근초고왕이 고구려를 침공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케 한 사건은 그로부터 2년 뒤인 371년입니다. 그리고, 이해의 기사만 살펴봐도 전쟁을 두 번 치릅니다. 고구려가 먼저 쳐들어와 백제가 그걸 물리치고, 그런 후에 겨울에 고구려로 쳐들어가죠. 이것은 또 어떻게 해석하시려는지 모르겠습니다. 훗. 다음을 계속 보죠.
근초고왕이 친 평양은 바로 요서의 평양이었다. - 100% 확신해도 좋다. - 바로 훗날의 안시성이요 조선의 원래 왕검성이다.
백제는 언제나 부여의 후신임을 자처했다.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고리에서 갈라져 나왔다면 고리와 철천지원수가 되어 싸웠을 것 같은가?
평양이 요서요, 안시성이요, 왕검성이라는 주장, 100% 확신한다네요. 하지만, 그건 글쓴이의 생각이고,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 근거를 좀 보여줬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뜬금없이 왜 안시성일까요? 안시성이라면, 당 태종이 피터지게 싸운 곳인데, 기록상으로 아무리 찾아봐도, 안시성은 기껏해야 요동성을 지나서 바로 나타나는 국경 요새성입니다. 이 사람의 의견에 따르면, 고국원왕 때에는 바로 이 평양-안시성-이 수도라는데요, 후에 장안성으로 옮겨가긴 하지만요. 어쨌든, 그렇다면 고구려는 안시성을 지나 요동성에 이르면 끝나는 국경 바로 옆에 수도를 정했던 걸까요? 아니면, 요동성을 지나 엄청나게 넓은 영토가 원래 있었는데 다 상실하고 과거 수도였던 안시성 바로 옆에 국경이 생긴 걸까요. 이 의문이 과연 풀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계속 살펴보죠.
고구려에서 백제가 갈라져 나왔다면 피터지게 싸우지 않았을 거랍니다. 그럼 중국의 삼국시대 위,촉,오를 비롯하여 같은 국가가 분열해서 피터지게 싸운 것은 어떤 경우랍니까. 아무튼, 이사람의 논리는 이상할 뿐입니다.
그리고 백제가 부여의 후신임을 자처하였다는데요, 그것은 현재 학계에 두가지의 해석이 있습니다. 하나는, 한때 적국이었으며, 강력하게 존재하는 고구려의 후예를 자처하면 속국이나 제후국처럼 보일 수 있으니, 그보다 더 근원을 찾아 들어가 부여의 후예를 자처했다는 설, 다른 하나는 실제 백제는 부여계와 고구려계가 힘을 합쳐 건국하였기 때문에, 실제로 부여의 후신이라는 설. 이사람은 물론 모르고 있을 겁니다. 현재 학계에서 백제를 부여의 후신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죠. 이런 사람한테는 언제나 자기의 의견만 최초이자 최선일 뿐이죠.
바로 온조왕으로 포장된(?) 세력은 마한이었다. 그대로 한씨 마한만 해씨 마한으로 대체했지 마한이란 이름을 바꾼 것은 아니었다. 백제라고 한 것은 신라김씨다.
왜? 훗날 그것이 백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신라본기에도 그대로 통용된다. 왜에도 그대로 통용된다. 그러기에 고리 태조왕기에 마한이 등장한 것이다. 바로 해씨의 마한인 것이다. 김부식이 눈이 둥그레졌다. 마한이 망했는데 나왔다고. 하지만 <삼국지>를 보라. 한씨를 대체한 그들도 계속 마한이었다. 바로 신라김씨의 농간을 김부식 그가 알 리 없었다. 그러기에 마한과 고구려는 몇 백 년을 사이좋게 지냈던 것이다.
역시 무슨 소리인지 해석 불가입니다. 백제가 갑자기 신라 김씨니, 온조가 마한이라니, 물론, 근거 따위 전혀 대지 않으시는군요. 신라본기, 왜, 고구려 태조왕기, <삼국지> 등등 여러 출처를 대기는 하는데 어느 부분인지, 인용도 없고 출전(出典)도 없습니다. 이걸 근거라고 볼 수 있을까요? 아무튼, 하나씩 추적해 보겠습니다. 신라본기, 왜는 출처는 얼추 있으되 내용이 전혀 나와있지 않으니 추적 불가. 그러나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권3 태조대왕 70년에 다음과 같은 김부식의 주석이 있군요.
馬韓以百濟溫祚王二十七年滅 今與麗王行兵者 盖滅而復興者歟
마한은 백제 온조왕 27년(서기 9)에 멸망하였다. 지금 고구려왕과 함께 군사를 보낸 것은 아마 멸망한 후 다시 흥한 것인가?
글쓴이 말대로 김부식의 눈이 휘둥그레졌겠습니다. 그러나, 글쓴이 말대로 마한은 <삼국지>에도 그 모습을 멀쩡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삼국지>는 관구검의 침공 당시의 기록을 토대로 작성되었으므로, 적어도 3세기까지 마한은 멀쩡하게 남아있었다는 것이죠. 즉, <삼국사기>의 온조왕 27년의 기록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글쓴이는 이것이 충격적인 사실인 것처럼 포장했지만, 이것은 우리 학계에서 정말 기초적인 정설입니다. 근초고왕 24년(369년)에 마한을 정벌했다니깐요? 물론, 글쓴이는 자기가 주류 학계의 학설(369년 마한 정복)을 언급했다는 사실조차 까먹은 것이 분명합니다. 어이 상실.
다음 문장에는 고구려와 마한이 몇 백년간 사이좋게 지냈다네요. 마한은 고구려와 관련된 기록에서 딱 2번, 태조왕 대에 나타날 뿐인데요. 몇 백년간 사이가 좋았다는 것은 무엇을 근거로 한 말일까요. 역시 근거 따위 안중에도 없습니다.
각설하고 해씨는 훗날 백제의 8대성이 된다. 어느 날 갑자기 부여씨에게 정복당했지만 그들도 역시 부여의 핏줄이었다. 그리고 한동안 동명의 제사도 계속된다. 바로 부여씨의 포용정책이다.
갑자기 부여씨가 튀어나오는군요. 부여의 후손이니까 부여씨인가요? 그런데 이를 어쩌나. 부여의 왕성(王姓)은 해(解)씨인데요. 도대체 이 부여씨는 어디서 나온 걸까요. 정답은 <삼국사기>, 온조왕 원년에 왕성을 부여씨라 했다는 기록이 있군요. 앞서 이야기했다시피, 주류 학계에서는 백제를 부여계와 고구려계가 함께 건국한 나라라 보고 있습니다. 물론, 해씨와 부여씨를 각각 부여계와 고구려계로 보고 있는 것도 포함해서 말하는 것이죠. 즉, 글쓴이가 자기 주장인 것처럼 자랑스레 펼쳐놓는 이 주장도 역시 주류 학계에서 논의되고 있는 것이라는 말씀.
다음을 볼까요?
마한이 소국으로 이루어진 부족국가였다고? <삼국지>를 봐라! 분명히 진왕이 다 통제한다고 되어있지 않은가? 주나라가 분봉한 제, 진, 노, 허, 정 등의 나라가 다 독립국이었나? 간단히 말하면 행정구역 아닌가? 일본서기에 나오는 출운국, 축자국, 근강국, 대화국 등이 다 독립국이었나? 바로 마한의 행정구역이 국인 것이다. 오늘날, 도, 군 등과 같은 것이다. 왜 문헌을 저희들 편의대로 해석하는가? 어떻게든 한국고대사를 우매하게 만들기 위한 작태다. 상식적으로 따져봐라. 바로 옆에 중원은 그리 강대한데 바로 옆의 모든 기후조건이나 문화조건도 비슷한 동이국가들은 언제나 비실비실한가?
역시 이사람은 저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뜬금없이 딴소리하기에 천부적인 소질을 유감없이 발휘하는군요. 갑자기 소국을 행정구역이라고 어이없이 들먹이는군요. 이 사람이 근거랍시고 제시해놓은 주나라의 제후국을 살펴볼까요?
及周成王少時, 管蔡作亂, 淮夷畔周, 乃使召康公命太公曰, 東至海, 西至河, 南至穆陵, 北至無棣, 五侯九伯, 実得征之, 齊由此得征伐, 為大國(<사기> 권32 제태공세가 태공조)
주 성왕이 아직 어렸을 때 관숙과 채숙이 난을 일으키고 회이(淮夷)가 반역하자 소강공을 보내 태공에게 말하였다. 동으로 바다까지, 서로 황하까지, 남으로 목릉까지, 북으로 무체까지 오등급의 제후와 구주의 백(伯)이 잘못을 하면 그것을 정벌해라. 제나라는 이리하여 정벌의 권한을 얻어 대국이 되었다.
행정구역에 군주가 존재하고, 다른 제후들을 정벌할 권한을 줍니까? 혼자 힘으로 다른 제후를 정벌할 '권한'과 '힘'을 가지고 있는 ‘군주’가 있는 나라가 행정구역이랍니다. 참나. 이사람은 에도 막부가 시행한 막번체제도 행정구역으로 보겠군요. 어쨌든, 다 집어치우고, <삼국지>를 봅시다.
其十二國屬辰王. 辰王常用馬韓人作之, 世世相繼. 辰王不得自立爲王. (<삼국지> 위서30 오환선비동이전 변진(弁辰) 조)
그 12국은 진왕에 속한다. 진왕은 항상 마한사람을 써서 농사를 지어 대대로 서로 이어간다. 그러나 진왕은 자립하여 왕을 하지 못하였다.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진왕이 다 통제한다는 말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진왕에게는 고작 12국만 속해있군요. 참고로 마한만 54국, 진한, 변한이 각각 12국입니다. 그나마도 진왕은 스스로 왕노릇을 못한다는데요? 문헌을 자기 편한대로 해석하는 것은 글쓴이 아닌가요?
그 아래 써 있는 말은 무시하도록 하죠. 그저 투정일 뿐입니다. ‘옆나라는 저렇게 쎈데 우린 뭐야’라는 투정일 뿐이며, 역사와 지리를 전혀 모르는 자의 광태일 뿐입니다.
9챕터, 생각보다 상당히 깁니다. 그러므로, 일단 이정도에서 마무리하고, 나머지는 다음 기회를 기약하도록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