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던 장마철

옥수수맨 작성일 07.10.31 17:4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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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장마철 어느 날 밤이었다.

7월인지 8월인지 정확하게 기억 나지 않지만, 대충 그 무렵이었다.

중학생이던 난, 집에서 홀로 만화책도 보며 공부도 좀 하면서 그렇게 평범한 밤을 보내고 있었다. 어머니는 외출하신 상황.

그러다 지루해져서 책을 덮고, 가요나 듣자 싶어 카세트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턱을 손에 얹고 음악을 듣다, 책상에 엎드려 고개를 카세트 쪽으로 향한 채 노래를 흥얼흥얼 따라 불렀다.

그러던 어느 순간.

노래 사이로 왠지 이질적인 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다소 지지직 거리는 듯한 음향. (카세트 테잎이 또 씹힌건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카세트를 툭툭 치다 스톱 버튼을 누른 뒤 다시 플레이 시켰다. 이상은 없었다. 노래는 계속 흘러 나왔고, 다시 책상에 엎드려 눈을 게슴츠레 감은 채 노랠 흥얼거렸다. 노래를 좀 듣다 테잎을 스톱시키고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던 순간이었다.

『저벅... 저벅... 저벅...』

그랬다. 무슨 소리가 분명 들렸다.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였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소리는 분명 아니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아파트 복도 계단에서 누군가 왔다 갔다 하는 모양이려니 생각했던 탓이다. 볼륨을 다시 높였다. 어머니는 언제 오실까.. 라고 문득 생각하며.

비는 계속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은 빗발이었다. 라디오 DJ의 멘트와 빗소리 사이로 다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저벅... 저벅... 저벅...』

무덤덤하게 그 소리를 듣던 찰라, 문득 내 방문이 닫혀 있었단 사실을 알아챘다. 내 방과 아파트 현관까지는 3m 가량 떨어져 있다. 아파트 복도 계단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올 리가 없다는 걸 깨달은 것도 같은 시점이었다.

『저벅... 저벅...』

그 소리는 분명 내 방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베란다에서 들려오는 소리라는 걸 직감하던 순간, 발걸음 소리는 멈췄다. 빗소리는 계속 되고 있었다. 난 책상에 엎드려 있던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다.

다시 한 번 생각을 찬찬히 정리했다. 아파트 복도 계단에서 나는 소리가 내 방까지 들려온 것은 아닐까. 빗소리 사이로 발걸음 소리가 공명되서 내 귀에까지 들려온 것은 아닐까. 맞아. 그런걸꺼야. 내가 잘못 해석한거겠지. 아니야. 여긴 4층인데 그런 소리가 들릴리 없어. 머리속은 뒤죽박죽이다.

『저벅. 저벅. 저벅. 저벅....』

내 생각을 비웃기라도 한 듯, 발걸음 소리는 귓전을 후벼왔다. 바로 옆에서 걷는 것 처럼 말이다. 분명 그 소리는 '구둣발'이 내는 소리였다. 빠르고 경쾌하기까지 했다. 아파트 계단을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게 아닌, 평지에서 빠르게 걸어야만 들릴 수 있는 소리였다.

고개를 들고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베란다였다. 내 방과 창문 하나를 사이에 둔 베란다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확실했다. 창문은 두겹이라 열지 않는 이상 베란다 쪽이 보이진 않았다. 굳게 닫힌 창문이 드르륵 하고 열릴 것만 같았다. 공포가 엄습했다. 현관문을 잠그지 않았던 걸까. 누군가 들어와서 저러고 있는걸까. 차라리 그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 이미 난 공포감에 마비돼 있었다.

책상에 엎드렸다. 눈을 감았다. 라디오가 켜져 있음에도 라됴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신경은 온통 발걸음 소리로 향하고 있었다. 그 소리는 베란다에서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규칙적으로. 진땀이 흘렀다. 베란다로 가볼까 하는 생각도 잠시였다. 무언가를 보게 될까봐 무서웠던 까닭이다. 십대 소년의 담력은 미약하기만 했다.

『저벅.. 저벅.. 지지지직..』

발걸음은 다른 소리를 변주했다. 마치 담배 꽁초를 짓이기듯, 뭔가를 밟고 짓이기는 소리. 어서 빨리 이 상황에서 탈출하고 싶었다. 어머니는 왜 안 오는 걸까. 난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딩동..』

어머니다. 공포감에 경직돼 있었던 탓인지, 몸이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책상에서 일어서기가 힘들었다. 방문을 열고 현관으로 갔다. 현관은 분명 잠겨 있었다. 베란다 쪽을 향해 시선을 힐끗 보냈다. 저기에 뭔가가 있다.

『얼굴빛이 왜 그러냐? 뭔 일 있었냐?』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어머닌 흠칫하며 날 바라봤다. 사색이 되어 부들부들 떨고 있는 아들이 생경스러웠기 때문.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냥 싱긋 웃었을 뿐. 아파트 근처나 복도에 누가 있었냐는 내 물음에 어머닌 아무도 없었다고 말했다.

화장실에서 소변을 본 뒤, 베란다로 갔다. 침을 한 번 삼키고 문을 열었다. 비가 오면 누전이 된 탓인지 베란다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어두컴컴한 베란다는 언제 그랬냐는 듯 썰렁하기 그지 없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라디오에선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발걸음 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다시 소름이 돋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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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게 닫혀 있던 내 방 창문. 창문이 20cm 정도 열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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