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장보고가 신라백성이 노예로 팔려나가는 현실을 보고,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반도의 남쪽 완도에 설치했다는 진입니다. 그러면서, 완를 파헤쳐 기와장 몇 개 나오는 것을 보고 그 유물이라고 합니다. 이것도 역시 신라의 위치를 먼저 마음대로 반도에 확정한 다음에 청해진의 위치를 만들어다 놓은 결과입니다. 신라의 위치가 엉망이니, 진짜 청해진의 위치는 무시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장보고는 흥덕왕3년(서기828년) 군사 1만명을 거느리고 청해(淸海)를 지키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보고 "청해"는 바다이니 바닷가 근처에 있을 것이고, 다른 나라에 노예로 팔려가는 것을 막기위해서라니 남쪽해안을 설정하고 그중 큰 섬을 고르다보니 완도가 걸린 것입니다. 하지만, 완도 어느 곳에서 청해진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자료는 없습니다. 돌조각 몇 개를 가지고 주장하는 것 이외에는..
역사적인 기록을 보면, 중앙권력싸움에서 밀려난 "김양"이라는 사람이 "장보고"에게 군사를 요청하여, 장보고가 "정년"이라는 그의 친구에게 군사 5천을 주어 반정을 도운 기록이 있습니다. 단지 역사가들은 우리에게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단지, 장보고가 중앙권력에 야욕을 보인 것으로만 기술합니다. 물론, 장보고가 잘했고 못했고를 따져보자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숨은 역사적 진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지만, 그 기록을 자세하게 살피면, 1만명이라는 대군이 완도라는 좁은 곳에 주둔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인데,, 완도는 가* 못했지만, 1만명이 주둔하고 있었고, 그의 가족들과 많은 주변인들(장사꾼등)과 많은 주거지, 훈련장, 군사시설은 다 어디에 있었다는 것인가요? 또, 해상무역을 장악했다면 단지 군대만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상인, 교역소도 있었을텐데, 그것은 다 어디로 가고 지금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나요?
또, 청해진에서 군사5천을 얻은 "김양"이 신라의 서울을 공격하려고 할 때, "무주"(지금의 광주라고함)에서 일차로 전투를 하고, 밤낮으로 행군하여 "달벌"(지금의 대구라고함)에 이른다. 김양에게 준 군대가 기병이라고 하는데, 완도에 왠 기병입니까? 당연히 수군(水軍 )이 주축을 이뤄야 하는데, 기병이 주력으로 역사에는 적혀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청해라는 것은 바다를 의미할까요? 정말로, 청해가 바다를 의미하고, 장보고가 바다를 지배했던 강력한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있었다면, 당연히 수군(水軍)을 김양에게 지원하였을 테이고, 당연히 지리를 잘 아는 바다를 돌아서 바닷가에서 가까운 지금의 경주로 돌아들어갔을 것입니다. 그것이 더 확률이 높은 기습이 될 것이었을 것이고 막을 세력이 없었을 것입니다. 장보고가 바다를 장악했다고 가르치니 하는 말입니다. 자신의 직할군대의 반을 떼어준이상 장보고도 모든 운명을 걸었던 것이고, 이 반정의 성사여부에 따라서 자신의 운명이 걸린 만큼 치밀한 준비를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역사대로라면 자신의 주력인 수군(水軍)을 버리고, 굳이 기병을 택해, 경비가 삼엄한 내륙으로 침임한 것은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반정이라면 어디까지나 기습적으로 이루워져야 하는데, 당시 신라의 서울이 지금의 경주라면 수군으로 돌아가서 들이치는 것이 정상적인 작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역사책에서 가르치는 편견을 벗어난다면, 당시 신라의 서울은 바닷가에 있던 것이 아니었던가, 아니면, 장보고가 주둔한 곳과 신라의 서울은 수군이 아닌, 기병으로 신속하게 접근하는 것이 더 유리한 지역에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장보고는 바다를 지배한 장군이 아니라, 기병으로 내륙변방을 지키던 장군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부은 장보고가 청해진으로 바다를 장악했는데, 모함을 받아서 암살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자세한 것을 알려면, 위의 사실이 설명되어야 하는데, 단지 설명이 어렵다는 이유로 가르치지 않고 넘어가고 있습니다. 설명이 안 되는 것을 다 빼고, 설명이 되는 것을 맞추다보니 이상한 역사가 만든어진 것입니다.
위와 같은 오해는 모두 "청해(靑海)"를 바다로 생각하고 신라를 반도에서 생각하려다보니 일어난 현상입니다. 대륙의 지도를 보면 서북쪽에 크게 청해성(淸海省)이라고 있습니다. 우리가 청해진이 있었던 청해와 우연히도(? ) 글자가 같습니다. 이곳은 이민족의 침임이 빈번한 곳으로 지금도 여러 민족이 사는 만큼 과거에 많은 전란을 거친 변방이었던 곳입니다. 또한, 초원지대로 기병이 활약하기 좋은 곳입니다. 여기서 "해(海")"라는 의미는 바다의 의미가 아니라, "초원"의 의미입니다. "해(海)"를 바다로만 해석한다면 과연 역사학자로서의 자격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과연 장보고의 청해진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학교에서 많이 배우는 단어로 "사해평등(四海平等)"이라고 할 때, "사해"를 "네 개의 바다"로 해석하나요? 아니면 단순히 지역을 의미하나요? 더군다나, 대륙의 네 면이 모두 바다로 둘러싸인 것도 아니고, 당시의 영역은 지금의 중국과는 크기도 다르지 않습니까?
장보고가 기병으로 신라의 서울을 공격하게 한 것은 그의 군대의 주력은 기병이고, 신라의 수도와는 내륙으로 연결되어 바다가 없어 기병으로 최단거리로 기습을 하게 된 곳에 위치하였을 것입니다. 장보고는 대륙의 청해성(지금은 또 중국식으로 발음한다고 칭하이성이라고 합니다만)에 진을 건설하고 그곳을 지켰던 장군으로 지금의 반도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또한, 신라도 반도와는 별로 관련이 없었던 대륙의 왕조였던 것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반도에 국한 하지 말고, 지금이라도 처음으로 역사를 다시 연구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