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무덤

드헤 작성일 08.01.24 19: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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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삼국대륙설로 재탕 삼탕 사탕 우려먹으시는 백승길님과 그 측근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저 또한 삼국대륙설 문제는 확실한 증거를 확보하기 전까지는 다시 언급하지 않기로 몇 번을 말씀해 드렸는데 다시 꺼내시는 구려.

 

 

상대가 인정한 과거 또다시 꼬집어 내는 집념(?)

자기주장의 100%를 위해 불철주야 사서책을 넘기는 근성 ...찬사를 보냅니다.

 

 

 

제가 해담과의 논쟁 중 달게 된 리플 한 대목을 보시고 한 말씀 하신건가요?

아마 그때 제가 했던 말이

“일본사람들에 의해 마음대로 신라왕릉의 무덤주인이 정해졌다.(사서기록에 따랐겠지 일부분은!!)”

아마 이 말이 빌미가 되어 또 다시 강단쪽의 이론을 보충설명 하신 거 맞죠??

 

 

고조선 이야기를 앞에 두고 나또한 조금은 의문점이 가는 삼국대륙설 얘기 한다는게 구미가 땡기지 않지만

상대의 도전장을 그냥 무심히 보고 넘 길수 없기에

저 또한 눈으로 보고 느낀점을 몇 글자 적어보려 합니다.

 

 

역사라는 학문 자체가 100%를 추구 할 수 없기에 제 바램 또한 헛 된 게 될 수 있지만

아무리 사서기록에 따라 그 위치를 찾아 내었다고 해도

분명히 비석하나 없는 신라왕릉 무덤을 일본인들의 손에 의해 주인자리를 되찾게 된 현재의 역사또한

100% 확신 할 수 없고 믿음이 좀처럼 가지 않아 숨겨진 먼가가 있을 꺼 라는 점이 제 바램이었습니다.

 

 

1. 사서 기록으로 찾아본 옛 신라왕들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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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성대와 직선 거리로 200여미터 떨어져 있는 무덤이다.

'내물왕릉'이라는 네 글자가 비석에 새겨져 있다.

물론 신라시대 당시의 비석은 아니다. 아마도 경주시가 관광목적으로 세워둔 것일텐데...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런데도 비석이 없다.

신라시대 왕릉중 명확히 주인을 알 수 있는 릉은 무열왕릉뿐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본인들은 당췌 무엇을 기준으로 무덤주인을 찾았을까..

비석없는 무덤을 사서기록 하나만으로 주인찾기에 충분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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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는 무덤의 도시다.

크기로 봐서는 왕릉이 분명한데 어느 것 하나 누구 무덤인지 알려주는게 없다.

경주에 있는 왕릉 몇 개는 다닥다닥 공동묘지처럼 붙어 있는데, 정작 비석이 없다.

어느 왕의 묘인지도 모른다. 일반 백성들도 무덤을 만들어주는가??

아님 급조한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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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의 문화재 필수코스중 하나인 천마총사진이다.

이 또한 누구의 무덤인지 알수 없다. 지증왕 무덤이 아닐까 하는 추측만 나오고 있을 뿐

천마의 그림이 그러져 천마총 왕관이 출토되어 금관총으로 왕릉으로 추측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신라인들의 고유한 유물과 무덤의 웅장함을 관람하기 보단

왕릉의 무덤을 파헤친 일본의 만행과

그 유물들을 전시하는 현재의 한국의 모습이다.

 

 

 

백승길님이 내세운 신증동국여지승람 뿐만 아니라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등에

서도 신라인들의 옛 무덤의 위치를 묘사한 소절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인용해서 사서기록의 왕릉 위치 표현방법을 요약해 보자면

 

 

옛 시조의 한 가락에서 흔적을 찾고, 무덤 주위의 풍경을 묘사하여 그 위치를 추측할 단서를 남겼고

조위(曹偉)의 시에, “길가 촌락 사이에 파란 보리가 이미 패었네. 우뚝 솟은 두어 길 산봉우리, 둥글기가 엎드린 짐승 같구나. 끊어진 비석이 거친 풀 속에 누웠는데, 높이 쳐든 귀두(龜頭)가 보이네. 질펀한 초원은 길게 뻗쳤고, 시내 언덕 구불구불 달렸네. 이것이 무열왕릉, 인산(因山)의 제도가 누추하지 않구나. 말에서 내리매 머리털 으쓱하니, 두 손 모아 잡고 두 소매 여미었네. 비문을 어루만지며 읽노라니, 이지러진 글자 많아 알아보기 어렵구나. 아득한 긴 세월에, 버려둔 채 지키는 이 없네. 생각하니, 옛날에 음(陰 여자)이 양(陽 왕) 되었으니, 덕만(德曼)과 승만(勝曼)은 참 임금이 아니었다. 강한 이웃 나라가 제멋대로 침노하여 사방 국경에 병란이 많더니, 무열왕 들어와서 왕통을 계승하매 우뚝히 공덕(功德)이 성하였네

 

신화나 전설의 한 단편, 혹은 역사적 사실에서 그 힌트를 찾을 수 있었으며

관(官)에서 전지(田地)의 개간이나 나무 베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혁거세왕이 하늘에 올라간 지 7일 뒤에 오체(五體)가 땅에 흩어져 떨어졌다. 나라 사람들이 합쳐서 장사지내려고 하였으나 요사스런 뱀의 방해로 인하여 각각 장사지내고, 드디어 오릉(五陵)이라 하였다.”

 

지역명이나 정확한 무덤위치의 명칭을 사용하여 풀어쓰기도 하구려.

진흥왕릉(眞興王陵) 모두 본부의 서쪽 악리(岳里)에 있다. 선덕왕릉(善德王陵) 낭산(狼山) 남령(南嶺)에 있다. 효소왕릉(孝昭王陵) 본부 동쪽 분남리(芬南里)에 있다. 성덕왕릉(聖德王陵) 본부 동쪽 도지곡리(都只谷里)에 있다. 헌덕왕릉(憲德王陵) 본부 동쪽 천림리(泉林里)에 있다. 흥덕왕릉(興德王陵) 안강현(安康縣) 북쪽에 있다. 김유신묘(金庾信墓) 본부 서쪽 서악리(西岳里)에 있다. 김인문묘(金仁問墓) 경서원(京西原)에 있다. 김양묘(金陽墓) 태종왕릉(太宗王陵)에 배장(陪葬) 하였다.

 

 

남산이나 낭산처럼 우리가 익숙하게 들어온 명칭이나 과거와 동일한 현재의 지역명이 남아 있기에

꼭 왜곡 되었다고 볼 수는 없고 무시 할 수도 없는 사안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서들의 기록들은 일본인에 의해 주인자리를 찾게 된 현재무덤의 위치와의 일치성을 증명하기엔 약간 빈약한 느끼며 들며, 비석하나 제대로 세워지지 않은 무덤의 주인을 찾을 때는 더욱 더 부족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진덕여왕이 왕위에 있은지 8년에 죽으니,시호를 진덕이라 하고 사량부에 장사지냈다”고 하였는데,이 사량부는 경주시의 남쪽 흥륜사터가 있는 일대로 추정되어 현 지점인 현곡면과는 정반대의 위치가 된다//

이처럼 해석의 차이에 따라 그 위치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점도 빼먹을수 없다.

 

 

그리고 역으로 이용하여 중국의 영토에서도 그 명칭과 지역명이 일치한 무덤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

 

앞으로 제시할 자료들로 신라대륙설을 주장하기 보단 이 같은 사서들로 우리조상의 무덤주인을 찾아준 일본인들의 행적에 역으로 모순점이 생길 수 있다는 점입니다

 

 

 

.1.진덕여왕의 석상 조각

 

당나라와 연합하며 삼국통일의 초석을 놓았던 신라 진덕여왕(?~645)의 석상 조각과 그의 직위를 새긴 명문 조각이 최근 중국 서완 근교 당나라 태종의 무덤 주변에서 출도된 것으로 밝혀졌다.

 

중국의 신라사 연구자인 바사 중국 산시 사범대 역사문화학원 교수가 지난 20~21일 열린 일연학연구원 국제학술대회“일연선사와 삼국유사”(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이 같은 사실을 명문 사진과 함께 공개했다.

그는 <삼국유사>에 보이는 나당관계 내용의 새로운 검토라는 논문을 통해 82년과 2002~2003년 시안 근교인 산시성 리취앤 현 동북쪽의 당 태종 이세민(재위 626~649)의 소릉 주위에서 “신라...군”,“덕”등의 명문이

새겨진 진덕여왕 석상 좌대와 그의 것으로 보이는 석상머리와 하반신 부분 조각들이 발굴됐다고 소개했다. 논문에 따르면 진덕여왕의 석상 유물은 태종의 소릉 주위에 도열했던 14개 나라 번왕(조공한 나라의 왕들)들의 좌상드 가운데 일부다.바이 교수는 84년 나온 현지 연구보고서의 내용을 빌어 여왕의 머리와 하반신 조각은 82년 소룽 박물관의 제단 정비과정에서 처음 발견되었다고 전했다. 석상 머리 부분은 “두발이 정수리 부분에서 머리 뒤쪽으로 갈라져 내려와 뒤로 땋아 묶어 상투 같은 흔적이 있는” 얼개이며 , 같은 시기 산문 밖 동북쪽 약 1000미터 부근에서도 둘로 쪼개졌으나,합치면 온전한 하반신이 되며 삼중으로 된 장포를 입고 있는 석상 조각이 바견되었다는 것이다. 배교수는 현지 학계에서 이들 석상 조각을 <장안지>에 소개된 “신라낙랑군왕긴직던”상의 남은 부분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또 2002년 7월부터 산시성 고고연구소가 솔ㅇ 북쪽 북사마문 유적을 전면 발굴한 결과 “신라...군왕..”명문이 새겨진 석상 좌대의 잔해를 발견했다고 소개했다. 이는 후대인 송나라 때 당나라 장안 서적을 기록한 <장안지>에 적은 기록과도 일치하는 것이라는 설명이다.<장안지>는 태종릉에 도열한 14번군장상의 사적을 언급하면서 그 중 하나의 석상 좌대에 “신라낙랑군왕긴진덕”이라는 명문이 새겨져있었다고 적고있다.“낙랑군왕”은 당나라가 신라 임금을 책봉하며 내린 제후의 명칭이다.(책봉이란 자기힘으로 감당할수 없는 나라에 대해 쌍무적 선린외교관계를 정하는 것이다)

당 태종의 무덤 주변에서 “신라낙랑군왕”명문 조각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2004년 국내 학계에 일부 소개된 바 있으나,명문의 주인이 진덕여왕을 뜻한다는 사실은 이번에 처음 확인된 것이다. 이한상 동양대 교수는 “새로 발견된 진덕여왕 석상 명문 조각들은 신라 복식에 대해 희귀 실물자료일 뿐 아니라, 다른 신라 유물들의 연대 추정에 큰 도움을 주는 절대 연대 유물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평가했다.

 

-한겨레 노형석기자-

 

 

2.배총의 행방??

 

또한, 당시는 왕릉주위에 배총이라고 해서, 당시의 신하나 공주,왕자의 무덤을 만들어 놓는데, 경주의 고분에는 이것이 없고, 왕릉옆에 바로 왕릉이 있다고 합니다. 학계에서는 옆의 배총은 아마 도굴이 되어서 없어졌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왕릉과 비교해서 값이 될 만한 것은 왕릉에 있지 배총에 있으면 얼마나 있겠습니까. 돈이 되는 왕릉은 도굴하지 않고, 장상(將相)의

고분만 도굴했다는 설명도 어설프게 보입니다..

 

3.신라의 풍습이 중국에 남아있다??

 

신라풍습중에

 

- 가배(8월 15일)

[삼국사기]에도 있지만 [입당구법순례행기]에서

8월15일 명절이 당나라나 일본에는 없는 신라의 고유명절이라고 하였고

 

- 중국 [오대사]에는

9월 9일이 중구일이라하여 신라의 명절이라 하였는데

 

당나라 이후 위 두명절을 중국에서 시작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으나

현재 중국에는 두명절을 지키고 있다.

 

 

4.박창범 교수님이 쓴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

 

박창범 교수님의 글이 어쩌면 가장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사실이지만 그만큼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논문에도 해당한다. 그의  저서에서 “삼국사기의 일식 관측지는 한반도가 아니다”라는 주장을 했기에 많은 강단학자들에게 충격을 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일신상 이유로 서울대학교 천문학과 교수를 그만두고 한국 고등과학원으로 옮겼다.

인터넷 상으로 무성한 말이 오가고 있는 걸 알고 ,수많은 반론을 예상하지만 다시 한번 언급 해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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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헌덕왕은 희대의 악덕군주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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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료는 예전에도 올렸던 전적이 있고 아직도 궁금하게 여기는 글이라서...

그때 반박의 주 내용은

 

바컁님의 의견

,

신라 사람이 왜 절강성에 가서 구걸을 했느냐... 그건 당시 가까운 산동 일대에 당나라와는 다른 세력이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해상왕 장보고"에도 나오는 이사도의 가문으로부터 시작된... 당나라에 강제이주된 고구려 유민 이정기 일족이 당의 절도사 작위를 받아 출세하자... 자신의 영지를 아예 사유지화하고 당나라 중앙정부와 대립... 결국 독자적 연호를 선포하고 제나라를 세워 독립국이 되어버렸고, 이를 일컬어 "이사도의 난"이라고 하지요. 산동을 포함한 16개주의 꽤 넓은 영토였으며, 신라나 발해와의 교역 독점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불과 60년만에 패망하게 되지만...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상당한 독립 군사력을 가진 절도사들에 의해 통치되었으며, 당 중앙정부와 신라에 대해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습니다. 그 절도사들이 대부분 당에 의해 멸망한 국가들의 유민출신인 경우가 많아서... 이이제이 차원에서 그들의 군사력을 활용할 수밖에 없었지만, 당나라는 절도사 때문에 흥하고 절도사 때문에 망한 나라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요.

 

 

좀 간단하게 풀어 말하자면 그때는 "이사도의 난"과 같은  난세였고 그러기에 산동성을 피해 절강성으로 갔다고 하셨는데..

 

제가 생각하는 방향은 좀 다릅니다.

 

구지 배를 타고 먼 여정을 통해 중국까지 갈 이유가 있었는지가 제일 궁금했었고

배를 타고 대륙을 건너는 여비와 식량이 오히려 구걸로 벌어들이는 식량보다 더 벅찼을텐데 .

 

 

 

 

 

 

물론 도발적인 언행과 신라대륙설의 근거를 꺼내어 게시물을 작성했지만

내가 오늘 정말로 하고싶었던 말은

 

사서기록에 남아 있다고 현재의 무덤주인 자리가 바르게 꿰차고 있다고 할수 있는가!!

 

결국 사서의 기록을 판독하고 위치를 가늠한 작자도 일본인들일텐데..

 

그럼으로 백승길님의 옛 사서를 바탕으로 내세운 증거로는 신라무덤의 의문점을 파헤쳐 나가기엔 부족하지 않나 싶습니다.

 

신라무덤얘기중 비석얘기가 나오면

여러분들이 무슨얘기 할지 충분히 알고 있으니 구지 다시 언급하지 않아도 ?윱求?

그떄는 전국이 전쟁터라서 적나라의 왕무덤을 파헤치는 경우가 많아 비석을 세우지 않았다

이런식으로 말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신라대륙설 주장이 아니라 신라무덤의 의문점을 중점적으로 얘기했다고 이해해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신라대륙설은 다시한번 말하지만 저로서도 확신이 서지 않는 얘기이기 때문입니다.

 신라가 반도라서 생기는 의문점도 있겠지만

신라가 대륙일때 생기는 의문점도 한두가지가 아니기 떄문입니다.

 오재성님이 그 모순점을 동신라서신라의 뿌리로 설명해 주신 글이 있긴 있던데, 아직 읽어* 못했고 납득도 가지 않아 그런 설도 있다는 말 해 드리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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