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석정과 관련된이야기

드헤 작성일 07.12.20 08:4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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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사적1호...포석정...

 

통일신라시절 신라 마지막 왕 경애왕이 술자리를 벌이며 놀다가 후백제 견훤에게 살해된 곳

 

신라 천년의 역사가 종말을 고한 비극의 현장, 포석정.

포석정은 과연 술을 마시며 시를 짓는 신라왕들의 놀이터였을까요

 

이번 게시물은 제목 그대로 포석정과 연관된 많은 이야기를 펼쳐보려고 합니다.

 

제가 자료를 조사하는 동안 기존에 알고 있는 포석정과 가장 맞지 않는 의문점은 경애왕이 살해되었던 그 날의 계절이라고 할

 

수 있죠. 견훤에 의해 죽음을 맞았다던 경애왕이 대신들과 포석정에서 연회를 베풀던 시기는 기록대로라면 음력으로 11월이

 

고, 양력으로 치면 12월 하순에 1월에 해당하는 시기로 평균 기온이 영하를 오르내리는 시기입니다. 물론 , 술먹고 놀다보면

 

추운 줄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시는분도 계시겠지만 , 소위 황제라는 분이 추운 곳에서 술먹고 놀기에는 너무 춥습니다. 굳이

 

추운데, 밖에 나와서 연회를 할 이유가 없다는 얘기죠.

 

 그럼 신라천년의 역사가 막이내리는 그날 경애왕은 무엇을 했을것이며, 우리는 어떤 다른 방향으로 추측해 가야할까요??

 

여기서 우리는 포석정의 위치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왕들의 놀이터라는 포석정은 안압지처럼 왕궁근처에 있는게 아니라 남산서쪽자락에 위치해져 있습니다.

 

포석정이 있는 남산은 130여곳의 절터,200여개의 불상과 탑들이 들어서 있는 신라의 성지입니다.

 

따라는 우리는 포석정을 남산 성지의 일부로 이해해야 한다는 설도 있다고 합니다.

 

신라인들의 정신세계와 관련되 성소의 의미로 파악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포석정이 성지라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삼국사기에 대해 새로운 해석도 시도되고 있습니다.

 

"유포석정연오"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연회를 베풀고 놀았다'로 해석되고 있는 유포석정연오 유자를 놀았다(유)가 아니라 갔

 

다(유)의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록에서 유자는 다양하게 쓰이고 있습니다. 그중 경덕왕 유백률사 이야기에서는 "절에 갔다"이지 "놀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포석정에 그저 놀러갔다고 번역해서는 안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얽히고 설키고 얘기가 많은 포석정

 

 

 

 

 

 

그런데 저는 사실 다른자료들 보다 이 대목이 가장 궁금하더군요.

 

 

 

 

 

 

"지금의 역사대로라면 견훤이 음력 9월에 경북 영천지방을 점령하고,11월에 경주에 침입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경북 영천에서 경주까지 걸어도 3~4일 이면 갈 수 있는 거리인데, 후백제의 견훤이 기병이 주축인 그의 군대를 이끌고 2개월이나 결려서 지금의 경주를 공격한 이유가 따로 있는 걸까요?? 이것이 기병으로 하는 기습일까요??

2개월 동안  잠입이라도 했는 것일까요??

아무리 패망왕국 내라고 해도 2개월동안 잠입하는 동안 보급은 어떻게 해결했을까요??전쟁은 항상 전투와 보급이 유기적으로 이뤄져야 승리할수 있는 것은 많은 전쟁의 전례를 봐도 할수 있는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상식적으로 2개월동안 다른나라 내에 잠입한다는 것은 식량의 현지조달 때문이 아니라도 금새 소문이 퍼져 신라가 그렇게 허무하게 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반도로 국한시켜놓고는 생각하기 힘든 사실이다"

 

 

비슷한 사례로

 

 

 

1. 경순왕4년(A.D 930) 가을 9월에 나라 동쪽의 바닷가의 주 군  부락들이 태조왕건에게 항복하였다.이때의 태조세가에 의하면 신라의 동쪽 연해 주군과 부락이 와서 항복하니 명주로부터 흥례부까지 항복한 성이 1백 10성이다.

 한반도에 심어진 명주는 지금의 강원도 강릉쪽이 되고 흥례부는 지금의 경남 울산이라고 한다.  지금으로 말하면 한반도의 동쪽 태백산백 너머에 모든 주군이 항복하였는데, 이때의 고을부까지 즉 지금의 강릉에서 울산까지 항복한 성의 수가 100개??. 우리나라 태백산맥은 급경사 지역에 토지도 척박한 지역의 해안가라서  후삼국의 쟁패시기에 110개의 성이 있다는 것은 황당무계하게 느껴졌으며 , 그런 사실은 삼국사기와 고려사 태조세가에 쓰여 있다.

 

 

2.북경에서 상해까지 1300KM의 드넓은 평지엔 단하나의 산도 발견할 수 없다.벡재가 패망후 부흥운동시 회복한 200여성의 개념이 왠지 나도모르게 반도보다는 이 지역에서는 더 잘 들어맞는 느낌이다.3

 

 

 

3.헌덕왕은 희대의 악덕군주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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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기타

뉴스기사중에서---링크:http://kr.blog.yahoo.com/shim4ro/1529.html?p=1&t=2

포석정에서는 건물 흔적도 발견되었는데 1999년에는 ‘포석’이란 글자가 새겨진 기와조각도 발견되었다. 기와조각이 나온 곳은 포석정 모형전시관을 건립하려는 포석정 남쪽의 4,300㎡의 부지로 시굴 조사과정에서 가로 12cm, 가로 16cm의 기와에 나뭇가지 무늬와 함께 포석이란 글자가 새겨진 기와조각 6점이 출토된 것이다.
 기와에 새겨진 포자는 포석정을 뜻하는 포(鮑)자가 아니라 포(砲)자 인데 학자들은 포(鮑)자를 약자화해 쓴 것으로 추정한다 . 

 

백승길님 말씀대로라면 역사는 유물의 발견만으로 추측해서는 안되는 건데..거참..

백승길님 말씀대로라면 일단 포자 발견했어도 포석정으로 우겨서는 안되는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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