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한의 죽음에 대한 설 1
김두한(1918∼1972) 죽음의 비밀은 무엇인가.
불세출의 협객인 김두한이 한창 나이인 54세에 돌연사한 것과 관련, 가 타살 의혹을 보도(11월8일자 1면 참조)하자 본지에 제보가 잇따르고 있다. 김두한의 가족도 그동안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으며, '두개골 함몰설' 등의 제보와 목격담이 설득력있게 제기되고 있다.
본지가 김두한의 사후 30년 만에 강북삼성병원(당시 고려병원)에서 단독 입수한 사망 당시 차트에는 사인이 '뇌출혈'로 돼 있다. 하지만 고인의 장남 경민씨(48)는 "아버지가 타살됐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버지가 테러를 당해 뇌출혈을 일으켜 돌아가셨는지, 약물에 의한 뇌출혈로 작고했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 자연사는 아니다"고 주장했다.
'후계자' 조일환씨(65)는 "형님이 작고하기 10여일 전 호남 사투리를 쓰던 가까운 사람이 정릉 집 부근에 몰래 숨어 기다리다가 느닷없이 형님의 뒤통수를 가격했던 일이 있다"고 전했다. 조씨는 "그 테러를 그 사람 혼자만의 판단으로 했겠느냐"며 "누군가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당시 그 테러를 파헤치려 했으나 배후인물이 권력층 인사라는 소문이 들렸고, 두한이형님의 만류로 결국 포기했다"고 말했다.
최근 본지에도 이와 유사한 제보가 잇따르고 있다. 원로 언론인 이모씨는 김두한의 시신을 인수했다는 당시 경찰 관계자의 말을 인용, "김두한의 뒤통수 두개골이 함몰된 것을 목격했다"는 말을 전했다. 아울러 이 경찰 관계자가 "김두한이는 억울하게 죽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또 다른 인사는 "작은아버지가 김두한 곁을 지켰다"며 "김두한을 지킨 대가로 작은아버지도 테러를 당한 적이 있다"고 귀띔했다. 조일환씨도 비슷한 증언을 했다. 조씨는 "두한이형님 곁을 떠나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협박까지 당했다"고 밝혔다.
'김두한의 여인' 박정인씨(69)는 "영감님이 독살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김두한은 사망하기 몇달 전부터 독살을 의식, 물 한모금도 조심했다는 것이다. 박씨는 아울러 김두한이 사망했다는 연락을 받고 사망 장소라는 센추럴호텔 301호에 도착했을 때 방에 있던 반쯤 비운 오렌지 주스잔에 '혹시 독약이 들어 있지 않았을까' 하고 당시를 회상했다. 적어도 김두한 정도의 역사(力士)를 테러하려면 먼저 약물을 썼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장남 경민씨는 "당시 의문사는 시대적 상황으로 어쩔 수 없이 가려져 있었다 하더라도 이제 더 늦기 전에 진상조사를 벌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두한의 죽음에 대한 설 2
그분은 살해당했습니다."
'김두한의 여인' 박정인씨(69)가 청천벽력 같은 증언을 했다. 협객 김두한(1918∼1972)이 타살됐다는 것이다. 김두한은 30년 전인 1972년 11월21일 사망했다. 당시 공식적인 사인은 뇌출혈. 약속장소에 나갔다 갑자기 쓰러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박씨는 이를 "절대 그럴 리 없다"고 부인했다.
"그분은 아침에 '임자, 오늘 예쁘게 하고 있어. 오후에 전화하면 나와요. 나와 영화나 봅시다' 하고 호탕하게 웃으며 나가셨어요. 그리고 몇 시간 후 쓰러졌고, 나흘 간 혼수상태에서 말 한마디 못한 채 떠나셨습니다."
김두한의 돌연한 사망은 오랫동안 미스터리였다. 시대의 협객이자 소문난 강골인 그가 왜 환갑을 한참 앞둔 54세 한창 나이에 쓰러졌는가. 김두한은 왜 전혀 발길을 하지 않던 센추럴호텔에서 그날 약속을 했고, 누구를 만난 것일까. 그의 사망을 알린 미지의 목소리는 누구인가. 시대를 풍미했던 이 사나이는 왜 하필 그 시기에 "무섭다" "나를 지켜 달라"고 측근들에게 긴밀히 말했던 것일까. 김두한의 당시 주치의였던 권도원씨(82·제선한의원 원장)조차 '뇌출혈설'에 동의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김두한의 사인이 의문시된다는 점은 박정인씨와 '후계자' 조일환씨(65) 등 최측근들끼리만 쉬쉬하고 있었다. 하지만 최근 TV드라마 <야인시대>를 계기로 김두한의 면모가 새롭게 조명되면서 그의 사인에 대해서도 '이제 밝힐 때'라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 박정인씨의 무거운 입을 열게 만들었다.
서울 명성여고 영어교사이던 인텔리 여성 박씨는 법적인 결혼은 하지 않았으나 김두한이 사망할 때까지 15년 동안 동고동락한 사실상의 부부였다. 김두한의 감옥살이를 수발하고 임종을 한 것도 그녀다. 박씨는 "이제 꼭 밝혀야 할 때"라며 마침내 말문을 열었다. 며칠 후면 김두한의 사망 30주기다.
의학적으로 뇌출혈은 뇌의 혈관이 파괴돼 출혈한 상태다. 그러나 김두한이 뇌출혈로 사망할 만한 이유가 없다는 것이 박씨의 주장이다. 일각에서는 김두한은 평소 고혈압이었기 때문에 뇌출혈로 사망했다고 하지만, 박씨에 따르면 김두한은 혈압이 그렇게 높지 않았다. 그가 혈압이 높다고 소문난 것은 교도소에서 병보석으로 풀려나기 위해 일부러 소금을 먹었기 때문이다. 의학계에서 '혈압과 소금은 상극'이라고 말한다. 실제 1966년 9월 국회 오물투척 파동으로 구속된 김두한은 소금을 먹고 혈압을 높이는 방법으로 병보석 처분을 받아냈다.
■ 중정요원 일주일전 찾아와 협박…사망일 21일 유신헌법 선포일
박씨의 증언은 김두한 사망 3일 전인 1972년 11월18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일 오전 9시쯤 김두한은 모 기관원으로 추정되는 사람의 전화를 받고 10시쯤 정릉 집을 나섰다. 그가 '영화 약속'을 하고 나간 후 오후 5시쯤 전화벨이 울렸다. 박씨는 '남편'의 전화인 줄 알고 기쁜 마음에 받았다. 청계천3가 센추럴호텔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신원을 밝히지 않은 낮은 목소리가 다짜고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했다. "김두한씨가 갑자기 쓰러져 호텔 302호에 누워 있다"는 것이었다. 박씨는 곧장 센추럴호텔로 정신없이 달려갔다. 그러나 김두한은 보이지 않았다. 호텔측은 몸상태가 좋지 않아 이미 서울 서대문 고려병원(현 삼성제일병원) 응급실로 옮겼다고 전했다.
박씨가 고려병원에 도착했을 때 김두한은 이미 혼수상태였다. 산소호흡기에 의존한 채 가쁜 숨만 몰아쉬었다. 그때가 오후 6시쯤이었다. 토요일 오후라 의사들은 모두 퇴근했다. 19일 일요일도 그렇게 병원에서 보냈다. 20일 월요일 오전 9시20분에서야 내과의사의 진료를 받았다. 혼수상태인 김두한의 몸을 엎드리게 한 후 큰 주삿바늘을 머리 뒤쪽에 쿡 꽂은 후 피를 뽑았다. 선지 같은 붉은 핏덩어리가 왈칼왈칵 쏟아졌다. 의사는 머리를 흔들었다. 가망이 없다는 것이었다. 김두한은 응급차에 실려 정릉 집에 도착했다. 여전히 혼수상태로 하루를 집에서 보낸 김두한은 21일 오전 9시5분 한많은 인생을 뒤로 한 채 눈을 감았다.
박씨는 김두한이 18일 외출하면서 21일 싸늘한 시신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면서 김두한이 사망하기 1주일 전 정릉 집으로 찾아온 모 기관 직원 2명을 미스터리 인물로 떠올렸다. 그들이 김두한 죽음의 배후라고 섣불리 단정할 수 없지만 박씨는 "그들이 영감님을 협박했다. 영감님은 '왜 나를 못살게 구느냐. 나는 편히 살고 싶다'면서 그들과 심한 말싸움을 벌였다"고 회상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당시의 상황이다. 1970년도로 접어들면서 박정희 정권은 유신체제에 관한 구상을 확고히 했다. 여당 인물이라도 유신에 회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으면 가차없이 보복했다. 79년 프랑스 파리에서 실종된 전중앙정보부장 김형욱과 1975년 경기도 포천군 약사봉에서 의문사한 재야지도자 장준하 선생 사건도 그 와중에서 터져나왔다. 1966년 국회 오물투척사건에서 보듯 김두한 역시 박정희 정권의 눈에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같은 존재였다. 박정희 정권의 발꿈치를 물고늘어지는 김두한은 분명 눈엣가시가 아닐 수 없었다.
김두한의 타살 흔적은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박씨는 김두한 사망 2개월 전 "그분은 무교동 맘모스호텔에서 누군가로부터 뒤통수를 가격당한 후 피를 흘린 채 집으로 들어왔다"고 밝혔다. 조일환씨도 이와 비슷한 증언을 했다. 조씨는 "형님은 수차례 뒤통수만 맞는 테러를 당했다"면서 "형님은 내게 '조동지, 사람들이 무서워. 나를 테러해. 곁에서 지켜주게'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조씨는 "누가 형님의 뒤통수를 때렸는지 알지만 지금은 입을 다물겠다"고 덧붙였다. 김두한은 여러차례 뒤통수를 가격당한 후유증으로 72년 6월에도 성모병원에 입원했다.
이런 과정에서 김두한은 죽음의 그림자를 예견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박씨는 "그분은 '유명인사 중 제명대로 산 사람은 없다. 조병옥 박사는 약을 먹여 죽였고, 김구 선생은 암살됐다. 나도 그렇게 죽을 수 있다'고 말했다"고 회상했다. 박씨는 김두한이 집에 있을 때는 물 한모금이라도 남편보다 먼저 마셔 그를 안심시켰다. 그는 '독살' 등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었다는 것이다.
박씨는 "그분은 평소 센추럴호텔은 싫어해 가지 않는다. 왜 그날 그곳을 약속장소로 정했는지 이상하다"고 말했다. 또 "18일 응급실에 도착했는데 건장한 사람 서너명이 응급실 주변을 배회하며 영감님의 상태를 지켜보았다"고 회고했다. 그들은 누구였을까?
김두한이 사망했던 72년 11월21일에는 박정희 정권의 '유신헌법안'이 확정, 공표됐다. 그것이 어떤 연관선상에 있을까. '김두한 의문사'에 관한 질문은 이제 시작됐다.
김두한의 주치의였던 한의사 권도원씨는 이렇게 말했다. "김두한씨는 병으로 돌아가신 게 아닌 것 같다. 만약 병이 있었다면 당시 주치의인 내게 연락을 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김두한의 죽음에 대한 설 3
김두한은 1972년 11월19일 서울 서대문 고려병원(현 강북삼성병원)에 입원해 20일 퇴원했고, 이튿날인 21일 오전 9시5분에 사망했다.
본지는 김두한이 실려 왔던 고려병원 응급실의 차트를 긴급 입수했다. 고려병원이 작성한 이 30년 전 '응급실 기록 일지'(A4용지 13장 분량)에 따르면 '19일 오후 김두한이 머리가 심하게 아프고 토한 뒤 갑자기 쓰러진 후 혼수상태가 돼 병원으로 이송됐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김두한이 외부적 충격 혹은 약물 등 다른 요인으로 인해 쓰러졌는지에 대해서는 기록돼 있지 않다. 외상도 마찬가지다. 병원측이 부주의로 기록을 빠뜨린 것인지, 외상이 없었기 때문에 기록을 안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또 김두한의 신체적 검사와 약물 검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 차트를 검토한 신경과 전문의 이태규 교수(경희대)는 "응급 일지만을 놓고 볼 때 김두한은 뇌출혈에 의해 사망했다"고 밝혔다. 이교수는 그러나 "고혈압에 의해 뇌출혈이 일어났는지, 아니면 뇌의 혈관이 터지면서 일어났는지, 혹은 외부적인 충격에 의한 뇌출혈인지는 차트 하나만으로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이 차트는 병원에 실려왔을 때의 상황만 기록했을 뿐"이라면서 "CT 촬영 등 세부적인 뇌검사 기록을 했으면 더 자세히 알 수 있었을 텐데 조금 아쉽다"고 말했다. 그는 "병원측이 정밀진단을 하지 않았던 것은 상태가 너무 악화돼 가망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교수는 차트에는 혈압이 계속 올라간 것으로 기록된 것과 관련, "뇌출혈이 오면 혈압이 올라가기 때문에 혼수상태에서 잰 혈압만으로 고혈압인지 아닌지 여부를 단정지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전에도 고혈압 치료를 받은 전력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기 때문에 고혈압 환자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진단했다.
이교수는 또 "김두한이 뇌출혈로 쓰러졌는데 왜 내과 전문의가 치료를 맡았는지 조금 이해되지 않는다"면서 "당시 의료계에서는 있을 수 있었지만, 신경외과 전문의가 보았다면 좋았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덧붙였다.
한편 차트 작성 앞뒤 상황과 관련된 몇 가지 미스터리가 있다. 우선 김두한이 쓰러진 19일 왜 곧바로 병원으로 옮기지 않고 센추럴호텔 301호실에 있었느냐는 것이다. 그가 이곳에서 '특별한 사람'을 만났는지, 아니면 호텔 다른 곳에서 쓰러져 이 방으로 옮겨졌기 때문에 거기에 있었는지 좀처럼 풀리지 않은 의문이다.
또 19일 센추럴호텔에서 응급실로 이송됐을 때 병원측에 김두한이 쓰러졌던 상황을 진술한 인물이 누구인지도 의문이다. 박정인씨에 따르면 "당시 병원에 도착했을 때 건장한 청년 서너명이 있었다"고 말했다. 박씨보다 먼저 병원에 도착한 이 서너명 중 한사람이 병원측에 쓰러졌던 상황을 설명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누구일까.
김두한의 죽음에 대한 설 4
김두한의 응급실 진료차트에는 왜 의사의 사인이 빠졌을까.
30년 동안 베일에 가려진 김두한(1918∼1972)의 돌연사를 둘러싼 미스터리가 증폭된 가운데 1972년 11월19일 당시 고려병원(현재 강북삼성병원) 중환자실에서 김두한을 최초로 진료했던 의사 손관수씨(60·현 손내과 원장)가 진료차트에 대해 의구심을 나타냈다.
당시 고려병원 레지던트 1년차이던 손원장은 12일 본지와의 단독 인터뷰를 통해 "고 김두한 의원의 중환자실 진료차트는 당시 내가 작성했다. 하지만 응급실에서 작성된 한장의 진료차트는 다른 인턴이 쓴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이 응급실 진료차트에 간호사까지 사인을 했는데 인턴의 사인은 없다. 그가 실수로 안했는지, 아니면 경황이 없어 그랬는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손원장은 "진료차트에는 인턴이라도 반드시 사인을 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덧붙였다.
손원장은 또 "19일 오후 김두한이 응급실에 실려 왔을 때 진료차트에는 그가 어떻게, 왜 쓰러졌는지 진술돼 있지만 누가 이를 진술했는지에 관해서는 언급이 없다"고 말했다.
손원장은 "차트만으로 볼 때는 '부인'이라고 기재돼 있는 '박혜원'으로부터 들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박씨가 '전혀 그런 사실이 없다'고 밝혀 누가 김두한의 몸상태를 진술해 줬는지 의심받을 수 있는 대목"이라고 말했다.
손원장은 "당시 응급실로부터 혼수상태 환자가 들어왔다는 연락을 받고 내려갔다"면서 "환자의 상태가 좋지 않아 중환자실로 옮겼던 것으로 기억된다"고 회상했다. 그는 1시간 후 누군가로부터 혼수상태 환자가 김두한임을 전해들었다고 말했다. 손원장은 "당시 김두한 살리기에 전력을 기울이다 보니 환자 주변에 누가 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다만 젊은 여성 한명이 김두한 곁에 있기에 '누구냐'고 물었더니 그가 '부인'이라는 말을 했던 것 같다"고 밝혔다.
손원장은 최후 진찰 소견에서 차트에 뇌출혈로 기록한 것과 관련, "환자의 몸상태 등을 감안하고, 당시 척추에서 피를 뽑았는데 피가 나오면 90%는 뇌출혈로 봐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진단한 것으로 기억된다"고 말했다. 손원장은 "당시 국내 병원에는 CT촬영기가 없어 정밀검사는 하지 못했다"면서 "그러나 뇌출혈이 확실했고, 더 이상 살 가망이 없다고 판단돼 보호자와 상의해 퇴원시켰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손원장은 "김두한 의원은 시대의 협객답게 몸에 칼자국과 상처 등이 많았다"고 회고했다. 김두한은 1972년 11월19일 갑자기 쓰러진 후 고려병원으로 이송됐고, 20일 오전 퇴원 후 21일 서울 정릉 자택에서 만 5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