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미스테리???

쓰읍... 작성일 07.12.28 02: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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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에 관해서 이런 저런글을 찾아서 읽다 보니 이런글이 나오더군요.

여기에 나오는 내용을 제 능력으로는 알아볼 수가 없어서 여기에 남겨 봅니다.

백제 대륙설 같은걸 주장할려고 올린게 아니라 원문 내용의 진실성이 궁금해서 올린거니 오해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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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n*er.com/kimdr00/80036603691

○ 백제멸망의 수수께끼ad 660년 사비성(泗沘城, 扶餘扶蘇山城) 함락, 그리고 663년 임존성(任存城) 함락. 우리가 알고 있는 백제의 존속은 여기까지이다. 물론 ad900년에 견훤(甄萱)에 의해 후백제가 건국되면서 백제라는 이름이 다시 한번 한국사의 전면에 등장하긴 하지만, 그 사이 24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백제는 우리 역사에서 잊혀진 이름이었다. 그리고 이후 1237년, 백제 부흥의 기치를 앞세우고 이연년(李延年)이 난을 일으키지만(소위 백적百賊의 난), 그 역시 얼마되지 않아 진압되면서 더 이상 백제는 우리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우리 역사에 있어 가장 강대했던 대국이었던 고구려 보다 많았던 76만여호의 호구수. 동남아에서부터 일본에까지 드넓게 등장하는 백제계의 지명들, 하지만 수백년에 걸쳐 백제의 수도였던 한성(漢城)의 존재 조차 아직 밝혀지지 않은 미지의 제국. 우리 역사에 있어서 빼놓고 얘기할 수 없는 존재이면서도, 여러 수수께끼와 같은 매듭들을 품고 있는 백제의 멸망에는 쉽게 납득할 수 없는 몇가지 수수께끼가 있다.승려 일연이 집필한 한국사의 양대 사서 중 하나인 삼국유사 진성여왕조를 보면, 언뜻 생각하기에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의 기사가 등장한다. 중국으로 사행가는 사신들을 백제의 해적들이 진도에서 가로막아, 왕이 궁사 50여명을 보내 사행길을 호위케 하였다. 신라 진성여왕은 887년에 왕위에 올라 897년에 태자에게 양위하고 사망할 때까지 10년 동안 재위했던 신라 제51대왕이다. 이 진성여왕이 재위한 887~897년은 백제 부흥군이 임존성에서 최후를 맞고도 무려 220여년이 지난 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서에 등장한 백제 해적들의 존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물론 진성여왕 대가 본격적인 통일신라 말기의 혼란으로 접어드는 시점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백제계 유민들을 중심으로 하거나, 혹은 백제계 유민들을 기반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가던 호족들을 지칭한 기록이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견훤이 본격적으로 후백제를 개국하기 전까지 백제를 공식적으로 지칭한 호족세력이 없었다는 점과, 설사 백제의 후신을 자처한 호족세력이 있다하더라도, 당시까지 통일왕조를 유지하고 있던 신라가 기껏해야 해안에 기반을 둔 지방의 호족세력을 백제로 칭하였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든 생각이다. 기껏해야 수적(水賊) 정도로 칭했어야 옳을 것이다. 그렇다면 진성여왕조에 등장한 백제의 해적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에 대해 백제사 연구에 일가견이 있는 이도학 교수는 백제 멸망 당시 잔존 세력이 서해의 도서 지방에 기반을 두고 그 명맥을 유지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를 내놓았는데,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 : 일본 구법승 엔닌의 저서)에 백제 멸??3명의 백제왕자가 흑산도로 대피하였다는 기사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하지만 이 역시 무려 200여년이 지나는 동안 그에 대한 단 한번의 접촉 사실조차 신라측 기사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다소 무리가 있는 견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백제와 고구려를 멸?쳔같? 당군과의 전쟁에서까지 승리를 거두면서 욱일승천의 기세를 올리던 삼국통일기의 신라가, 그런 백제의 잔존 세력(그것도 왕족을 포함한)을 그대로 두었다는 것도 이해하기 힘든 일이거니와, 만일 서해 도서 지방에 그런 백제의 유민세력이 있었다면, 어떤 방법으로든 일본의 백제계 유민들과의 접촉이 있었을텐데, 그 마저도 어디에서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는 얘기이다.백제의 흔적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백제사를 연구하거나 고려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가장 이상한 사료 중 하나로 알려진 중국 원나라의 역사서인 원사(元史)의 기록이 그것이다. 때는 1267년, 고려 원종 8년 때의 기사. "백제가 사신 양호를 파견하여 황제를 조알하고 비단을 하사받았다." 이에 대해 사학계 일각에서는 사서의 기록이 고려와 백제를 혼동해서 그리 기록한 것이라고 하기도 하고, 또 고려가 백제의 옛 강역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 기록했다는 견해가 나오기도 했지만, 모두 납득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고려측에서도 양호라는 사신을 파견하여 황제를 조알하고 비단을 하사받은 사실에 대한 기사가 등장하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뿐더러, 양호라는 사람의 존재조차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일각에서는 이에 대해 도서 지방에 근거하거나 혹은 일본으로 흘러들어간 유민세력이 보낸 사신이 아닌가하는 견해를 내기도 하지만, 이 역시 이해하기 힘들다. 일반적으로 생각해볼 때, 사신이란 정상적인 국가체계를 갖춘 세력이 보낼 수 있음은 물론이거니와, 황제를 직접 조알하기 위해서는(게다가 당시 원(元)은 문명 세계 대부분을 제패한 대제국이었다.) 그만한 가치 혹은 세력을 가진 국가여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신이라 해서 아무나 황제를 만날 수 있는건 아니라는 얘기이다. 그렇다면 이 원사(元史)에 등장하는 백제는 대체 무엇일까.이 외에도 백제의 존재는 백제가 멸망하고, 후백제 마저 멸망한 뒤에도 백제와 관련된 이해할 수 없는 흔적들은 곳곳에서 등장하고 있다. 983년 고려 성종 2년에 성종이 송황제로부터 받은 책봉문을 보면, "삼한의 옛 땅과 백제가 남긴 봉지(封地)를 가지고 있다."는 구절이 등장하고, 이어 985년에 내려진 송황제의 조서를 보면, "항상 백제의 백성들과 장회(壯回)의 족속들을 평안케 하여라."는 구절이 등장하는 것이 그것이다. 우선 책봉문에서 가장 먼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백제가 남긴 봉지를 가지고 있다는 표현이다. 봉지가 무엇인가. 봉지는 본국이 본국 외에 경영하는 영토로서 제후에게 봉한 지역을 얘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대로라면 백제의 강역 모두를 차지하고 있어야 할 고려가 삼한의 옛 땅과 백제가 남긴 봉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구절이 되는 것이다. 이는 백제의 강역이 한반도에만 머무르지 않았을 가능성을 다분히 내포하고 있다. 여기에 이듬해에 내려진 조서에 등장하는 구절은 더욱 우리를 혼란케 한다. 백제의 백성이야 유민들을 일컫는 말이니 그러려니 하더라도 장회의 족속이라니. 장회의 족속이라면 일반적으로 장족(壯族)과 회족(回族)을 일컫는 말로 그 근거지는 양자강 하류, 특히 현대의 장족자치지구가 위치해 있는 광서성 지역인데, 이는 지금까지 우리가 아는대로라면 고려와는 전혀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뜬금없는 얘기가 등장한 셈이다.그리고 백제의 흔적은 그 후대에도 또 다시 등장한다. 명사(明史)를 보면 명나라를 건국한 홍무제 주원장(朱元璋)의 해금정책(海禁政策 : 사무역을 봉쇄하는 정책)에 따라, 명나라의 군대가 무려 300년에 걸쳐 주산군도(舟山群島 : 양자강 하류에 있는 도서지역으로 황해로 나가는 관문지역) 지역의 해상세력과 전쟁을 벌인 기록이 나오는데, 이후 동남아 등지로 쫓겨나며 흩어진 이 주산군도의 해상세력이 남긴 항해관련 서적들을 정리하면서, 항해 관련 서적들이 모두 오랑캐 말로 되어 있어 본토인들이 뜻을 알 수 없으므로, 이를 모두 새로 번역하였다고 하였다. 문제는 이 해상세력들의 이후 거취인데, 동남아 등지로 흩어지면서 그곳에서 다시 무역을 독점하고 경제력을 쌓던 이 주산군도의 후예들은 이후, 등소평(鄧小平) 집권기에 와서야 해외 화교자본 유치정책에 따라 중국으로 들어오게 되는데, 중국에 들어온 이들의 후예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이 주산군도와 광서성 지역의 백제인들의 옛 절들을 복원하고 제사를 지냈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백제는 분명히 우리 역사에 있어서 1237년에 일어난 이연년의 백제 부흥 운동을 끝으로 반란의 형태로 조차 전면에 등장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타국의 사서와 기록을 통해 길게는 현대사의 전면에까지 끊임없이 등장하고 있다.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중국 동남부 광서성 장족자치지구에 가면, 한국인들이라면 누구나 놀랄 수 밖에 없는 경험을 하게 된다. 거리 곳곳에 남아있는 백제라는 이름의 지명들, 길거리의 간판이나 버스 광고판에서조차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백제라는 단어들, 그리고 엄마를 엄마라 부르고 아빠를 아빠라 부르는 장족 아이들과 우리 민족에게 밖에 없다는 맷돌, 지게, 그리고 강강수월래의 문화가 그곳 장족자치지구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전주와 완산 그리고 기린봉이 지도에 존재하고 있는 이 지역의 장족들은 중국인들이 백제허(百濟墟)라고 부르는 그 지역을 대백제라고 발음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고대사 연구가인 이도학 교수는 자신의 논문을 통해, 중국 양서와 송서에 등장하는 기사를 참조하여 백제의 대륙진출설(大陸進出說)을 주장하고 있다. 남북조시대의 남조(南朝)에 해당하는 이 두 국가의 역사서에, 하나같이 백제(낙랑)가 요서(遼西)와 진평(陳平)에 군을 설치하고 통치하였다는 기사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요서지역이라면 지금의 요하 서쪽지역을 뜻한다. 그리고 이 지역은 고대로부터 중국인들인 화하족(華夏族)보다는 동이족들이 모여 있던 근거지라는 점에서, 그간 이런 남조 사서들의 기사가 아니더라도 꾸준히 백제 진출의 가능성을 인정받고 있던 지역이다. 하지만 진평군은 어떨까. 중국 사서에 등장하는 진평군은 지금의 산동성 근방부터 시작해서, 광서성 근방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지역에 걸쳐 등장하는 지명이다. 따라서 쉽게 예측하기 힘든데, 그동안은 요서에 가깝다는 이유로 산동설이 지지를 받아 왔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마찬가지로 대륙 백제사를 연구하는 소진철 교수는 양직공도(梁職貢圖 : 6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당대 각국의 사신들의 모습을 그려 놓았는데, 백제의 요서 진출 사실과 분국에 관한 사실을 기록해 놓아 많은 논란이 되는 자료)를 바탕으로, 중국 지리학자들과 공동 연구를 거쳐 현재의 광서성 장족자치지구를 진평군으로 비정한 바가 있는데, 최근 그 지역에서 백제계 지명이나 풍습의 발견이 잦아지고 있는데다가, 당(唐) 초기 역사가로서 진서(晉書)를 초안한 저명한 역사가인 이연수의 기록에서도 백제는 양자강의 좌우에 있었다는 기록이 발견되는 등 주장의 설득력이 높아지고 있는 형편이다. 사실 이 지역에 백제가 진출했을 가능성은 사서의 여러 기록들이나 현재의 풍습, 지명 등을 고려할 때 그 가능성이 높은 편이다. 물론 그 형태는 반드시 영토의 형태만이 아니라, 유민들의 이동이라던가 하는 식으로 다양할 수 있겠지만, 그냥 지나치기에는 그 흔적들이 너무 많이, 또 광범위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에게 다시 혼란을 주는건 견훤이 세운 후백제가 멸망한 뒤의 몇가지 기록들이다. 우선 지명과 관련된 문제이다. 이미 kbs 역사 스페셜에서 몇차례 다룬 문제이지만, 후백제가 멸망한 뒤 3년 후 중국 광서성 지역에 대거 한국계 지명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전주를 비롯하여 완산, 기린봉 그리고 금산사 등 후백제의 중심 지역에 있던 지명과 유적의 명칭이 후백제가 멸망한 뒤 대거 이곳에서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한반도 내에서 중국계 지명과 일치하는 대부분의 지명이 신라 시대에 중국에서 들여왔기 때문이라는 기존 학설과는 정반대로 대치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후삼국 시대를 통일한 고려 왕조와의 긴밀한 관계 역시 쉽게 간과하고 넘어갈 수 없는 일이다. 이 지역 일대에서 가장 큰 사찰인 상산사(湘山寺)의 역사를 기록한 상산지(전10권) 8권에 보면 1311년, 이 절의 주지인 철산장로가 고려국왕에게 선물을 요청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데, 뜬금없이 한낱 사찰의 주지가 멀리 떨어진 고려국왕에게 선물을 요청하는 것도 그렇지만, 그에 대한 고려의 답이 화려하다는데에 의문점이 더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철산장로의 요청에 대해 고려국왕은 기록에 따르면 세상을 밝히는 여명주, 금으로 새긴 불경, 봉의 깃털로 만든 모자, 금실로 사람 천명을 새긴 옷, 금 밥그릇, 여덟가지 진귀한 보물로 만든 부처상 등을 선물한 것으로 되어 있다. 결국 이런 기록들은 광서성 일대에 남아있는 무수한 백제계 지명들과 맞물려, 그리고 그 지역에서 수백년간 살고 있는 장족들의 풍습과 맞물려, 이 지역이 어떠한 형태로든 백제 멸망 이후에도 계속해서 우리 역사와 연관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자료들이 될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 생각해 볼때 이는 결국 그 이전부터 이 지역이 이미 백제와 관련된 지역이었음을 암시하는 예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중국 남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백제의 망명장군인 흑치상지(黑齒常之)의 묘비명을 보면 더욱 그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 묘비에는 흑치씨는 원래 그 선조가 백제의 왕성인 부여씨(扶餘氏)에서 나왔으나, 흑치에 봉해졌으므로 흑치로 이어지고 있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는데, 여기서 흑치지역이란 당시 일종의 열대열매를 섭취함으로써 이가 검어진 사람들이 살고있는 지역을 일컫는 말로, 현대에 들어서 광서성 일대인 중국의 월주(越州)지역, 특히 필리핀지역 등으로 비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신라 시대 당대 최고의 석학이었던 최치원이 자신의 저서에서 고구려와 백제는 전성 시절에 강병 100만으로 오월(吳越)을 침공하여 중국의 근심거리가 되었다는 내용을 담고있어, 더욱 그 연관성에 대한 끈질긴 의혹을 낳고 있는 부분이다. 여기서 월주는 지금의 광서성지역이 되기 때문에 빼놓을 수 없는 관련성을 갖고 있다는 얘기이다.여기에 또 한가지 더 언급한다면, 비록 그 사실 하나만으로 연관성을 입증하기는 힘들지만, 지금의 오키나와 군도로 비정되고 있는 유구국(琉球國)이 고?척肉?조선시대에 걸쳐 끝없이 우리와 조공관계로 이어져 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는 흔적일 것이다. 지금도 유구국이 존재했던 오키나와 지역에서는 한반도식 유물들과 소위 조선식 축성술이 적용된 성들의 흔적이 발견되고 있어, 아직 구체적인 연관성을 입증하기는 힘들지만 쉽게 간과하기 힘든 연관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처럼 백제 멸망 이후에도 꾸준히 등장하는 알 수 없는 백제의 흔적들은 그 이전부터 등장하고 있는 백제와 백제의 해외경영의 흔적들과 분리해서 생각하기 힘든 문제라는 것이다. 애써 백제의 흔적을 한반도 내에서만 찾으려 하다 보니 계속해서 그 흔적들을 기껏해야 백제계 유민의 흔적 정도로 이해하려 하고 있지만, 이는 앞서서도 언급해 왔듯이 여러가지로 무리가 많은 이해방식들이다. 어쩌면 이 백제 멸망의 수수께끼에는 우리가 스스로 외면해 왔고, 지금도 애써 부인하고 있는 우리 역사의 잃어버린 조각들을 찾을 수 있는 열쇠가 들어있는 것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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