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식민지 시대에 우리나라 역사 왜곡의 주역이었던 병도(1896-1989)는 노론(老論) 유력 가문인 우봉(牛峰) 이씨이다. 열두 살인 1907년에 서울로 올라온 후 일인이 경영하는 불교고등학교를 찾아가 일어(日語)를 배웠다. 나라를 빼앗겨 대한독립을 위하여 수많은 청년 학도들이 목숨을 바쳤으나 병도의 뇌리에는 애초부터 항일 의지 따위는 없었다.
매국노 완용의 후손 병도는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의 장기적 계략에 포섭되어 일본 국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와세다대학 사학과를 1919년에 졸업했다.
이때 일인 학자 요시다(吉田東伍)가 이미 한국의 역사를 변조하여 저술한 일한고사단(日韓古史斷)을 독파하였다. 또한 우리나라 역사왜곡의 주역 일인 학자 동경제국대학의 이케노우치(池內宏)와 와세다대학의 강사 츠다(津田左右吉)로부터 문헌고증학, 즉 실증사학의 기초를 다지며 한국역사 왜곡에 대한 개인적인 세뇌 지도 교육을 받았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던 해 귀국한 병도는 이케노우치의 추천을 받아 1925년에 설치된 『조선 반도사』 편수회의 핵심위원으로 들어갔다. 이병도는 촉탁이기 때문에 무보수로 일했다고 변명하면서 이 시절 규장각 도서를 열람할 수 있었던 것이 자신의 학문적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합리화하곤 했다.
이 시절 그는 조선사편수회에서 발간하는 학술지 등에 한4군(漢四郡)의 강역을 한반도 내의 존재 설을 강력히 주장하고 고?척?풍수도참(風水圖讖) 사상, 그리고 조선시대 유학사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는데, 당연히(?) 일어(日語)로 쓴 것들이었다. 이때 쓴 논문들은 문헌고증학의 관점에서는 꽤 수준이 높은 것이었으나 일제식민지 치하에서 단제 신채호의 민족주의사학과는 서로 배치되는 논리들이었다.
1920년대 연희전문.보성전문.이화여전 등이 민립대학 건설 운동을 일으키자 일본은 경성제대의 문을 열어 이 운동을 좌절시켰는데, 경성제대는 이런 불순한 목적의 대학답게 식민사학을 맹렬히 전파하여 『조선 반도사』를 합리화 시켰다.
이외에도 호소이(細井肇)를 비롯해 아오야나기(靑柳南冥) 같은 일본 국수주의 국학자들도 조선사편수회와 경성제국대학과 함께 식민사학을 쏟아내어 조선국은 고대로부터 반도국가로서 미개한 민족이라고 역설하고 있었다.
일황의 칙령에 의하여 『조선 반도사』편찬에 착수한 일제는 우리나라는 고대부터 반도국가로 왜곡시킨 우리역사를 합리화하고 세뇌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어용 학술단체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1922년의 조선사편찬위원회와 1925년의 조선사편수회였다.
『조선 반도사』편찬의 고문에는 일인들과 한국인들이 함께 포함되었는데, 일본측은 경성대 교수인 로이타(黑板勝美).미우라(三浦周行) 같은 학자들인 반면 한국 측은 역사학자가 아니고 친일 정객 완용.영효.윤용, 중현 같은 역적으로, 임명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죽을 때까지 이 단체의 고문으로 있었다.
당시 초대조선총독은 취조국이 관장하던 업무를 1915년 중추원으로 이관하고, 『조선 반도사』"편찬과"를 설치하고 우리민족의 대 역적인 완용과 중현 등 역적들을 고문으로 앉히고 1916년 1월 조선총독부 중추원은 참의와 부참의 15명에게 『조선 반도사』 편집 업무를 맡기고, 일본 동경제국대학 구로이다 가쓰미(黑板勝美) 박사와 일본 경도제국대학 미우라(三浦周行) 교수, 경도제대 이마니시(今西龍) 등 3인에게 지도, 감독을 의뢰하였다.
1922년 12월 일황 훈령(訓令) 제64호를 공포하여 『조선 반도사』편찬위원회”를 설치하고,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위원장으로 한 15명의 위원회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완용, (권)중현 등 역적들과 일본인 어용학자들이 합작하여 한국인 학자들의 외면으로 『조선 반도사』 편찬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자 조선총독부 총독 사이토는 "『조선 반도사』편찬위원회"를 “ 조선사편수회 ”로 명칭을 바꾸고, 일황(日皇)의 칙령으로 설치근거의 격을 높이고 확대 개편하였다. 1925년 6월에는 "일황칙령" 제218호로 "조선사편수회" 관제를 제정 공포하고 조선총독부 총독이 직접 관할하는 "독립관청"으로 승격시켰다.
독립관청으로 승격된 총독부의 절대적인 지원을 받는 『조선 반도사』편수회는 막대한 인적.물적 역량을 동원해 삼한과 삼국은 고대부터 한반도 중부이남 지역에 위치한 부족국가로서 중국에서 설치한 한사군(漢四郡 : 낙랑군(樂浪郡).임둔군(臨屯郡). 현도군(玄菟郡).진번군(眞番郡)이 한반도 내에 있었다고 주장하며 고대부터 한국은 중국의 속국이라는 이론을 수없이 쏟아내 조선의 식민지화를 정당화시켰다.
1926년 문을 연 경성제국대학도 식민사학을 전파한 또 다른 기관을 만들었다. 1930년 5월 경성제대 교수와 조선사편수회원, 그리고 조선총독부 관리들이 총동원되어 청구학회(靑丘學會)라는 어용 학술단체를 조직하는데 이들 역시 조선총독부의 막대한 지원을 받았다.
일제의 한반도 및 대륙침략 의도에 발맞춰 조선과 만주를 중심으로 한 극동문화 연구와 보급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이 어용 단체는 저술 출판.강연 등의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이 단체의 회무감독은 경성제대 교수인 일인 쇼우다(小田省吾)였고, 서기는 조선사편수회 서기인 마에다(前田耕造)였는데, 병도는 신석호와 함께 이 단체의 핵심위원이었다.
또한 병도는 이나바(稻葉岩吉)쇼우다 등의 일본인 및 손진태. 홍 희.유홍렬 등 한국인들과 함께 이 어용 학술단체의 기관지인 청구학총(靑丘學叢)의 주요 필자이며 또 다른 식민사학의 학술지인 조선사학의 주요필자 였다. 당시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1933년 불교전문학교 강사 시절이었다.
일본인 학자들과 함께한 청구학총이 어용단체로 밝혀지자 이를 두려워한 일제와 병도는 일인을 배제하고 순수 민간 학술단체로 위장하여 1934년 5월에 진단학회(震檀學會)를 설립하였다.
즉 일인을 배제하고 순수 민간 학술단체로 위장하여 국내 및 주변 지역에 대한 역사.언어.문학 등 인문학에 관한 연구를 목적으로 한국 학자의 힘으로 연구하고, 그 결과를 국어로 발표하려는 의도 하에 창립되었다.
초대 편집 겸 발행인 병도(丙燾)는 이화여자전문학교에 출강하면서 기관지인 진단학보(震檀學報)를 발행하고 일제강점기 1941년 6월 제14호로 종간하고 해산됐다. 그 후 1945년 8.15광복 후 다시 진단학회가 발족된다.
일제가 조선사편수회를 통해 유포시킨 식민사학의 핵심은 크게 두 가지 인데, 그 하나는 사대성이론이며 다른 하나는 정체성이론이다.
한국 역사는 고대부터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의 역사이자, 고대 이래로 발전하지 못한 정체된 사회라는 것이 두 이론의 논리였다. 따라서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은 역사의 퇴보가 아니라 진보라는 것이 이들의 식민지 지배논리였다.
『조선 반도사』 편찬 실무자 스에마쓰(末松保和) 등 20여명의 일인 학자들과 한민족의 반역자 이완용의 후손 두계(斗溪) 병도(李丙燾).신석호(申奭鎬).홍희(洪憙) 같은 한인학자들이 참여하여 드디어 24,409쪽에 달하는 반도 조선사 34권이 완간 했던 것이다.
민족반역자 병도는 1922년 12월 일황의 칙령에 따라"조선사편찬위원회" 설치 때부터 1938년 3월까지 만 16년 동안 24,409쪽에 달하는 .반도 조선사. 34권을 완간하였다. 일본의 계략대로 우리 역사를 왜곡한 병도는 일본의 제 1등 공신으로 인정받아 일본천왕으로부터 거액의 포상 금과 금시계를 받았다.
1945년의 8.15 해방을 맞아 진단학회의 자진해산 후에도 조선사편수회에는 꾸준히 나가던 병도는 해방 후 경성대학과 그 뒤를 이은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로 취임하고 곧이어 서울대학 대학원장에 취임했다.
그때 김상기.이상백.이인영.유홍렬.손진태 등 사학자들과 조윤제.이숭녕 등 국문학자들이 서울대 교수로 취임해 진단학회는 친일 학자들이 완전히 장악했다. 그러나 병도의 해방은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해방 다음날 경제사학 계열의 백남운을 중심으로 조선학술원이 결성되고, 같은 날 진단학회도 재건되었으나 진단학회가 곧 “ 친일파 제명운동 ”에 들어간 것이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구속되었던 조윤제가 주도한 이 운동의 제명 범주에 병도가 들어간 사실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결국 병도는 재건된 진단학회를 주도할 수 없었고 송석하와 조윤제가 위원장과 총무를 맡고, 송석하가 사망하자 1948년 8월 이상백이 그 뒤를 이었다.
병도의 일제시대 행보는 떳떳할 수 없는 경력이었다. 그러나 친일파 식민사학자 병도가 남한 학계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는 1950년 6.25전쟁이었다. 6.25전쟁은 많은 민족주의 인사들이 납북됨으로써 남한 학계를 가짜 실증사학의 병도 독무대로 만들었던 것이다.
남북휴전 다음해인 1954년에 병도가 진단학회의 이사장으로 취임 할 수 있었다. 6.25전쟁을 계기로 병도는 친일파 청산 제 1호에서 벗어나 국사학계를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같은 해 병도는 식민사학을 유포하던 경성제대의 후신인 서울대학교 대학원장과 학술원 부원장을 맡아 역사학계의 최고 원로로 부상했다.
병도는 1960년 문교부장관에 등용되고 같은 해 학술원 회장에 선임됐다. 1962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1965년 동구학원(東丘學園) 이사장, 1966년 성균관대학교 교수 겸 대동문화연구원장에 취임했으며 1969년 국토통일원 고문에 추대됐다.
1976년 동도학원(東都學院) 이사장에 선임됐고 1980년 85세의 고령으로 국정자문위원(國政諮問委員)에 위촉됐다. 그 동안 문화훈장 대한민국장, 학술원 공로상, 서울특별시 문화상, 5.16민족상 등을 수상했다.
1986년 10월 9일(목)자 조선일보에 단군은 신화가 아니고 우리나라 국조이며 "역대왕조의 단군제사는 일제 때 끊겼다" 라는 제목으로 특별기고 하여 우리나라 고대역사 왜곡의 사실을 발표하고 1989년에 죽었다. 또한 병도의 저서에 《한국사대관, 한국사(고대편, 중세편) 《고?척?연구》등이 있다./ 박선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