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로 간단히 정리
중국 ㅡ 전근대 시기에는 삼황이니 오제니 하는 것들을 역사로 인식하다가 의고(疑古)파의 등장 등으로 사료비판이 강화되어 고대전승의 신뢰성을 의심하게 됨 ㅡ> 근대사학의 시작 ㅡ> 현재는 적어도 문헌 / 유물로 확인된 상(商) 이 역사시대로 인정됨 (하상주 단대공정같은 걸 벌이지만 역시 하(夏)를 인정하기엔 좀 모자란 느낌)
일본 ㅡ 에도막부말기, 서양의 충격을 겪으면서 천황(天皇)을 중심으로 한 침략주의·황국사관이 성행. 만세일계나 신대문자, 팔굉일우 등 국민의 의식을 '민족적'으로 함양하고 고취시키며 침략을 정당화하고 날조도 서슴치않는 이념사학이 성행하다가 핵맞고 버로우.
그 후 '우리 그때 왜 그랬을까? OTL' 란 반성하에 사료비판이 강화됨. 그럼에도 똘아이들이 나와서 뻘짓함.
+ 덤 : 저 황국사관 주창자들은 결국 버로우를 탔으나 남은 잔당들은 한국의 재야와 손잡고 양국의 역사훼손 중.
일본똘아이들은 일본에 가서 '한국애들이 우리 고대사를 다 말살했거든? 우리는 사실 전 아시아를 지배한 위대한 민족이었어 ㅋㅋㅋ 한국똘아이들이 지들 입으로 그랬다니까? 환단고기 봐봐~'
한국똘아이들은 한국에 와서 '일본애들이 우리 고대사를 다 말살했거든? 우리는 사실 전 아시아를 지배한 위대한 민족이었어 ㅋㅋㅋ 일본의 양심적학자들(실제 : 일본똘아이들) 이 그랬다니까?'
둘은 얼핏보기에 극렬한 반일 - 혐한같지만 '자유' ㅡ '역사와 현대' 의 1970년대부터 공생관계.
아니다. 기실 일제시대부터 한패.
차이가 있다면 일본애들은 그쪽기준으로 '국수(國粹)', 우리는 포장만 '국수'인 친일파
한국 ㅡ 조선말, 실학자들의 등장으로 근대사학의 싹이 돋는가 했으나 일제의 강점으로 짓밟힘. 결국 '민족사'의 정립으로 일제에 저항하기 위한 민족사학이 등장. 학문적측면보다는 저항논리로써 작용. 결국 신화시대를 저항논리로 삼아 혈통적 민족주의 / 단군을 시조로 한 단일민족론으로 일제에 항거. 사료비판은 일본관학자들이 정말 터프하게 해 줌. (지들은 그러면서 신화를 역사라고 하고...) 그러다 일제가 나가자 민족사학 역시 같이 쇠퇴함. 더욱 불행한 것은 6.25가 터져서 정인보나 손진태 등이 납북되고 유물사학자들은 북쪽으로 가버리는 바람에 남쪽에서는 친일경력이 있는 자들과 신출내기들이 좌충우돌하며 사학의 기틀을 마련. 결국 1961년 이기백을 필두로 홍이섭 등이 '식민사학'의 개념을 정립하고 타파에 나서면서 궤도에 들어서게 됨.
...이었으나 산운 장도빈 선생이 1963년에 작고하시고 민세 안재홍이 1965년에 세상을 떠서 일제시대에 민족사학자라 불렸던 사람들의 맥이 끊어지자
1960년대 중후반부터 친일파 출신들이 슬그머니 나타나서 '사실은 우리가 민족사학의 정통임 ! '일본애들이 우리 고대사를 다 말살했거든? 우리는 사실 전 아시아를 지배한 위대한 민족이었어 ㅋㅋㅋ 일본의 양심적학자들(실제 : 일본똘아이들) 이 그랬다니까? 지금 학계애들은 다 친일파(의 제자)에 식민사학자들이야 ㅋㅋㅋ 우리가 애국자'
얘들덕에 이기백은 독립운동가 집안인데다가 '식민사학'의 타파에 가장 앞장섰으면서도 훗날 평생(그리고 사후에도) 식민사학자라는 비난을 받게 됨
덤.
북한 ㅡ 해방하자마자부터 식민사학의 척결에 앞장서고 고고학도 바로 궤도에 들어서는 듯 했으나 소위 주체사학 (실체는 수령님교시사학) 이 자리를 잡음으로써 학계의 논쟁이 명쾌하게 해결됨.
예를 들어 고조선 중심지 재평양설과 재요녕설의 대립 중 재요녕설이 정설로 자리잡았으나 수령님 교시로 「조국의 수도가 있는 세계 5대문명 '대동강 문명'의 중심지 평양」으로 변경. 반대파는 아오지.
고고학 유물의 연대를 1~2 세기 정도 올리는 건 약과.
요약 :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일본이 나쁘다. 강점으로 우리나라를 교란시켜놓은 건 둘째치고 싸질러놓은 사생아들을 버려두고 가는 바람에 얘들이 적반하장으로 날뛰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