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ss=바탕글>PART 1. 대구 성서초등학생 5명 실종,살해사건 (일명 개구리소년 사건)</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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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91년 3월 26일 대구 성서초등학교1학년 부터 6학년 어린이 5명이 동네 인근 와룡산 일대로 놀러 갔다가 실종되어 지난 2002년 9월말에 유골이 발견되어 경북대 의대 법의학팀으로부터 타살되었다는 결론만을 얻고 끝내 범인의 단서를 찿지못하고 지난 2006년 3월말 공소시효가 만료된 사건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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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금 생각해 보는 글이기에 옮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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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3월에 발생하고 지난 2002년 9월말에 발견되어 한동안 세상에 큰 관심사였던 대구 개구리소년 사건에 관한 글인데, 매우 설득력 있어 옮겨 봅니다. 사건 발생 당시 경찰은 아이들의 단순가출로 처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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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내용중 가장 주목할 부분은 왜 범인들이 아이들을 살해하고 땅에 묻은뒤 다시 "발각의 위험을 무릅쓰고" 최초 매장지에서 유골이 발견된 지점으로 옮겼을까 하는점입니다. 만약 언젠가 매장지가 발견된다면 그 매장지가 범인들의 신분이나 성격등을 알려줄 수 있는 지역이라면...또 실종어린이들 가운데 2명의 상의(윗옷)가 현장에서 발견되지 않은점도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경찰은 다른 어린이들의 옷가지에 총탄 자국이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총탄에 의한 사망 가능성은 없다고 했었죠. 이점에 가장 주목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필자 푸른하늘208 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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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점에 대한 추론을 재정리 해 봅니다. 2002-10-08 16:43:15 / 권정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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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추론해봐도 ①소년들 사체는 고의로 이장되었고 ②따라서 누군가에
의해 살해되었으며 ③범인은 일개인이 아니라 집단이다. 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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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골발굴장소에서 머리카락과 손,발톱, 이빨 등은 왜 발견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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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년들의 사체가 다른 곳에 묻혀 있다가 이장되었다는 증거다.
시체의 살이 부패한 연후(아마도 2-3년 정도)에 이장했다면 흙속에
섞여있는 머리카락과 손발톱까지 일일이 찾아서 이장할 수는 없다.
따라서 누군가에 의해 고의로 이장되었다면 어떤 방법으로든 소년
들은 "타살"된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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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당시 수만명의 경찰과 군이 동원되어 주변을 이 잡듯이 뒤졌는데,
왜 발견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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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해직후에는 수색이 불가능한 지역에 묻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소년들의 실종직후 경찰과 군이 거의 양팔간격으로 벌려 인근 산을
수색했다고 하는데, 매장흔적이 발견되지 않을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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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그 당시에는 수색할 수 없는 지역에 묻혀 있었다는 얘기다.
경찰과 군이 수색불가능한 지역, 애시당초 수색대상으로 포함시킬수
없었던 지역, 그게 어디일까? 사격장을 포함한 군부대 영내일 가능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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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처음 매장장소에서 다른 곳으로 이장해야만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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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통 살해후 암매장한 사체를 위험을 무릅쓰고 다른 곳으로 옮기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바로 "발각 위험"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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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암매장장소가 주택단지 개발예정지로 바뀌었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군부대의 이전때문일 가능성이 높다(당시 인근에 있었던 50사단과 미군이
현재는 다른곳으로 이전해 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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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개골에 난 일직선의 관통구멍은 총상일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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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견된 4구의 두개골 중 하나에 관자놀이 부근에서 반대편으로 일직선의
관통 구멍이 있다. 경북대법의학팀은 구멍의 크기가 비슷하여 총상이
아니라고 단정짓고 있다. 보통의 경우라면 맞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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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개골에 총상이
나면 탄두의 회전때문에 총알이 들어간 곳의 구멍은 작지만, 나온 곳의
구멍은 크고 또 두개골의 파손도 심하여 단순한 원형의 구멍이 아니라
불규칙적인 파손이 있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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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근접사격의 경우는 어떨까,
즉 총구를 머리에 가까이 대고 쏘는 경우 말이다. 총구를 막 떠난 탄두는
아직 회전력이 약하기 때문에 거의 같은 크기의 구멍만 생긴다.
이건 군대 갔다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수 있는 상식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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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인근 마을에서는 총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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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부분이 지금까지의 추론에서 가장 풀기 어려운 부분이다. 지금까지의
추론을 모두 뒤엎을 수 있는 결정적 증거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권총사격이었다면 어떨까? 경험적으로 권총소리는 나즈막한 산등성이 하나만
넘어도 잘 들리지 않는다. 에서 추론한 두개골 관통구멍 역시 권총을
머리에 대고 쏜다면 더욱 가능성 높은 얘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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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교들의 자유로운 분위기
에서의 권총사격이라면 사고사와 은폐를 위한 교살 의문은 일반 병들의 소총
사격보다 가능성이 더욱 커진다. 다수가 참가하는 병들의 사격에서 사고가
났다면 11년간 은폐는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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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자의 매듭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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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견된 한소년의 사체에서 옷이 한일자의 매듭으로 묶여 있었다. 한일자의
매듭은 일반인들이 잘 사용하지 않는 매듭이다. 산악전문가, 보이스카웃,
군대 등에서만 사용하는 매듭이다. 사체를 처음 묻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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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면 이장할 때
그런 매듭을 사용했다면 살해 또는 이장한 범인들은 잘 훈련된 집단이라는
반증이다. 특히 미군의 경우 그런 점에 있어서는 교본에 있는대로, 배운대로
평소에 철저히 지킨다. 물론 그런 집단에는 무장공비나 간첩이 포함될 수도
있다.
그러나 무장공비나 간첩이 살해,암매장한 사체를 몇 년뒤에 다시 내려와서
다른 곳으로 이장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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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들은 당시 개구리 잡으러 갔을까? 아니면 탄피 줏으러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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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로서는 두 가지가 다 가능하다. 집에서는 개구리 잡으러 간다고 하였고,
와룡산 가는 중간에 만난 같은 초등학교 다른 친구에게는 총알(탄피) 줏으러
간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어쨌든 어느쪽이냐 하는 것은 사건의 진상
규명과 크게 상관없는 이야기다. 그당시 사격장 근처에 연못이 있었다고
하니 두가지가 다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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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50사단은 "당시 사격이 없었다"고 아주 신속하고도 단정적으로 보도
하고, 경찰에서 이미 신빙성 없다고 발표한 총살의문제보자를 고발까지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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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년전의 어느 특정일에 사격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아무리 군이라고 해도
그렇게 금방 알아낼 수 있을까? 11년전의 사격장 사용일지가 지금도 온전
히 보존되어 있을까? 공휴일에는 사격을 하지 않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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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에서도
교탄(교육용탄알)소모사격(기한내에 사용해야 되는 교육용 실탄이 사격연습용으로 소모
가 안될 경우 이를 소모하기 위해 몇 명만이 가서 하는 사격)은 일요일에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필자는 최전방에서 군생활을 한 사람으로 일요일날
기관총 교탄소모사격을 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미군은 어떨까? 우리만
선거공휴일이지 그네들은 공휴일이 아니었질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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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에서는 사건 발생 당일이 1991년 3월26일 지방선거일이어서 임시공휴일이므로 사격장 이용은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사격장 관리주체였던 육군 50사단은 기자회견에서 3월26일은 임시공휴일이어서 사격이 없었다고 확인했으나 인근에 있던 미군이 와서 사격장을 이용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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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총살의문제보자는 자신도 구두 닦아주다가 누구에겐가 들은 얘기라고
했다. 50사단에서 이사람을 군명예훼손죄로 고발한다? 50사단은 왜
이렇게 과잉반응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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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골발견 장소에서 왜 탄두가 다량으로 발견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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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유골발견장소에서 그렇게 많은 탄두가 발견될까? 우연히 군사격장
에서 유탄이 날라와 그곳에 쌓인 것일까?대답은 결코 "아니올시다"
이다.
군에서도 그곳까지 유탄이 날아갈 리가 없다고 이미 밝힌바 있다.
이것은 사실일거다. 군에서 그렇게 민간인이 그렇게 자유롭게 다닐수
있는 곳에 유탄이 날아갈수 있도록 사격장을 만들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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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격장을
만들때 피탄지(거의 90도에 가까운 절개지)에 탄두가 땅에 잘 밖히도록
만듭니다. 만일 그곳에 거대한 암반 등이 있어 유탄이 발생할 가능성
(총알이 바위에 맞고 튀는 경우를 말한다)이 있다면 모래가마니 등을
쌓아 유탄이 발생하지 않도록 한다는 것 역시 군대 갔다온 사람이라면
다 아는 상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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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도대체 왜, 왜, 아이들 유골이 발견된 장소, 평소에 보통의
등산객들도 다닐수 있는 장소, 근처에 무덤도 있어 하시라도 성묘객이
올수도 있는 장소에 왜 탄두가 그렇게 많을까?
아이들의 유해가 처음 묻혀있었던 곳이 바로 사격장 피탄지 근처 아니
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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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사체를 옮긴다면 당연히 밤에 했을 것이고, 밤에 급히 작업하다
보면 피탄지의 탄두가 다량으로 섞여있는 흙도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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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면 아이들이 탄두를 수집해 주머니에 넣고 있다가 참변을 당한
것일까? 그렇다면 아이들이 사격장에 간건 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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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처에서 발견된 비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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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과 기자들이 근처에서 비트를 발견했다고 난리법석을 떨었다.
그러나 그 비트는 한마디로 이사건과 아무 관련이 없다고 보는게 맞다.
경찰이 괜히 비트를 정밀 감식하고 난리다. 나라면 이 비트는 아예
무시해 버린다. 괜히 시간낭비다. 범인이 사체를 유기하고 나서 비트
파놓고 지키기라도 했단 말인가? 상식적으로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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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수사가 진행되고 있어 무어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순
없다. 그러나 경찰은 불확실한 제보나 사건과 무관한 비트에나 신경쓰고,
엉터리 법의학팀을 믿기보다는 당시 사격장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여
정밀수색을 다시 해 보는게 낮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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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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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 물론 전화발신번호를 추적 중이겠지만 그가 말한 전문을 기억
해 내어 기사화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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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초도 아닌 3-4분 동안씩이나 제보를 했다면 그것은 긴 시간입니다.
문화일보 게시판을 보면서 개구리소년에 관한 기사는 왜 싣지 않느냐
고 묻던 40대 남자와 신문사에 제보를 했던 목소리의 주인공은 동일인
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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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개구리소년들에 대한 기사가 세상에 알려지
기를 원했던 사람, 직접 관련 당사자는 아니지만 한두다리 건너뛰어
알게 되었을 가능성이 많은 제보자에 대해서 꼭 신원확인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기사를 쓴 문화일보 기자도 제보자가 40대 중반임을 어떻게 알았는
지 상세히 설명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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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격장 더 있었다 (MBC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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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개구리소년 들의 유해와 함께 발견된 탄두의 실체가 무엇인지 수사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주민들은 군이 제시한 사격장 외에 유골 발굴현장 아래쪽에 사격장이 하나 더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윤영균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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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육군 54사단이 제시한 당시 군사격장은 신원저수지 부근이었습니다. 어린이 유골이 발견된 지점에서 왼쪽으로 250m 떨어진 거리고 과녁을 중심으로 80도 가량 비껴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 150m 높이의 능선이 가로막고 있어 유탄이 날아올 자리는 아니라고 연관성을 부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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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50사단 작전참모): 왜냐하면 여기에 능선이 이렇게 막혀있기 때문에 현장보시면 압니다. 현장 보시면 능선이 이렇게 싸서 바로 여기 이 계곡인데 계곡쪽으로 들어갈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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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하지만 마을 주민들은 마을쪽으로도 사격장이 하나 더 있었다고 증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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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주민 도종화씨): 길 있는 이쪽약간 높은데 거기가 권총사격장이고 본래 큰 사격장은 거기서 한 200m 가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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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마을 주민들이 기억하는 그 당시 사격장 위치입니다. 유골이 발견된 현장에서 아래쪽으로 200m 가량 떨어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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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들이 증언하는 사격장에서 유해발굴 지점은 각도가 크게 빗나가지 않아 유탄이 날아갈 가능성이 상당히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군도 유해발굴 지점에서 탄두가 예상 밖으로 많이 나오자 어디엔가 임시사격장이 있었을 수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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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본부는 정확한 사격장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해 당시 항공사진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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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뉴스 윤영균입니다.
[윤영균 기자]
www.imbc.com-뉴스 다시보기 10월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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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2. 군사격장 관련성과 관련한 당시 와룡산 사격장 괁리주체 육군 50사단의 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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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소년 실종사건 관련-50사단의 해명을 보고 (200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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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역 중위로서 실무부대에서 소대병력을 통솔해서 자주 사격장을 이용해보았던 사람으로서 10월1일 와룡산 인근사격장의 관리부대인 육군50사단측 발표내용에 다소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고 또 제보 및 언론보도등에서 제기되는 사격장 관련 사항에 대해 본인의 경험을 피력하고자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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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개구리 소년 사망사고와 관련해서 군부대사격장 주변인점, 유골주변에서 다량의 실탄이 발견된점. 사망자의 일부 두개골에서 실탄 관통흔적이 있는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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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1)대구지방경찰청에서 그간 언론과 경찰측이 제기한 사격장 관련 문제에 대해 50사단측에서 해명한 발표내용을 보면, 수년전 소대장으로서 병사들을 통솔하여 사격장을 이용해본 본인이 보기에는 헛점 내지는 확인해야할 사항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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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사단측은 오늘 발표내용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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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사건당일(1991. 3.26)은 지방선거로 인한 임시 공휴일이어서 당시 사격장 관리를 맡았던 주임 원사가 당일은 사격이 없었다고 진술했다는 내용
- 본인이 전방(21사단)에서 소대원을 통솔하여 사격해본 경험과 관행적으로 사격장을 이용하는 행태를 보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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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상 부대에서 상급부대의 전투력측정(검열) 혹은 상급부대에서 예하부대들간에 사격측정(경쟁)을 위해 측정 일정이 잡히면 수검을 받는 예하부대들은 측정에서 좋은 성적(결과)를 얻기 위해 노력하고 특히 측정 항목중 사격에 대한 비중이 가장 크므로 다른부대 보다 더 많은 사격 연습 기회를 갖기위해 사격을 시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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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에서 사격장 이용은 평일은 물론 공휴일에도 이용하는 경우가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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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50사단발표중 91년 당시 비공식적,개별적 사격은 없었던 걸로 파악 됐다는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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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대 규정이나 기타 공식적으로는 사격장 이용시에는 사단 교육과(작전처)나 연대 혹은 기타 상급부대 및 사격장 관리부대에 사격장 출입 및 이용시에는 통보하고 또 기록에 남겨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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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일선 부대중 일부에서는 상급관련부대(부서)로의 통보나 해당 관리부대의 기록이 부실하게 정리 혹은 누락 되는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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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들어 사단예하 여러 단위부대가 상급부대 사격측정등을 받게되면, 수검 부대에서는 한정된 사격장 이용 공간과 횟수가 부족하다며, 사격장 관리부대측에 구두로 사정하거나 부탁해오면 (사격장)관리 부대측은 이에 응해서 비공식적,개별적 사격이 이루어 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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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히 이런 경우 비공식적,개별적 사격이 이루어 지며, 공휴일등에도 이루어 지므로 사격장 관리부대 담당자(주로 영외 거주 부사관,하사관)등이 출근하지 않은 상태에서 부대 일직간부 혹은 선임병등에 의해서 사격장이 통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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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격장 관리는 당시 사격장 출입을 통제할 수 있는 직접수단인 철책선은 설치가 안되고 표식주와 경고 안내판이 있었고 군데 군데 경계병을 두었다는 50사단측 발표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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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부인들의 사격장 주변 출입을 직접적,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철책건조물등이 없으므로 비록 경고표지등이 있다해도 장난기 많은 어린이들에겐 계고(戒告) 및 통제 수단이 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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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룡산 주변이 민간인 주거,도로시설등이 있는데 사격장주변에 외부인 출입을 통제하는 철책선이 설치 안됐다는 것은 사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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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공식 관리,통제하는 사격장 이외에도 비공식적,변칙적인 사격장 존재유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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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번 사항에서도 언급했듯이 통상 상급부대에 의한 예하부대들에 대한 사격측정은 나누어 실시하는 것이 아니고 측정의 공정성,편의성 등을 이유로 동일한 일시에 동시에 실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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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측정받는(수검대상)예하 부대들은 다른 부대와의 측정에서 상급부대로부터 좋은 평가(결과)를 얻기 위해 경쟁적으로 사격장을 이용해서 측정에 대비한 사격연습을 하게되는데, 여러 많은 부대가 한 개의 사격장을 동시에 이용하다 보면 공간부족,이용횟수 등이 부족하므로 공휴일은 물론 공식 사격장이 아닌 비공식,변칙적 사격장을 개설(開設)하여 이용했을 가능성도 배제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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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사격측정 인원중 사격실력이 떨어져 부대측정에 누가 될 것을 염려하여 사격이 부족한 병사들만 따로 모아 놓고 소규모로 정규사격장이 아닌 소규모,비공식적인 공간에서 영점사격훈련,사격자세(PRI)등을 실시하므로 실탄을 주으러 갔던 소년들이 현재의 공식사격장이 아닌 유골등이 발견된 가까운곳에서 피격(被擊)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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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미화원인 어느 분이 제보한 지난 7월경 어느30대 남자가 와서 자신이 군복무중 사격을 하는데 소년들이 갑자기 나타나 사격한 실탄이 2명에게 맞고 이를 은폐하기 위해 다른소년들도 타살했다는 내용은 위의 내용처럼 본인의 실무부대에서 사격장 이용 경험이나 관행에 비추어 보면 전혀 근거 없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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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오늘 50사단측에서 경찰측이 요청한 자료에 대한 답변과 제보,언론등에서 제기하는 문제점을 반박하는 내용발표는 짚고 넘어가야할 부분이 많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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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앞서 언급한 바 처럼 실종 당시인 91년 3월26일 전후로 와룡산 군부대 사격장을 이용했다면 시기적으로 봄철 과 가을철에 보통 부대 단위 사격이나 전투력측정이 있으므로 평소 와룡산 사격장을 이용하는 50사단 예하 직할부대 및 인근 보병부대의 당시(91년전후) 근무했던 병사,하사관,장교들을 상대로 각종 사격 및 전투력 측정이 있었을 때 현 와룡산 군부대 사격장만을 이용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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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아니면 경우에 따라서 당해 사격장이 사용부대 과다로 혹은 기타사유(시설물 교체, 시설물 고장 등)로 이용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 대체 사격장으로 인근 다른 사격장(군부대 발표로는 용산동 일대에 40여년간 군부대가 주둔해 있었으므로 91년 당시 주사격장 이외에도 당시 주로 사용하는 주사격장 이외의 훨씬 오래전에 조성(造成)되어 당시에는 거의 사용은 않는 비공식(廢) 사격장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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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사격장의 수용인원 초과 기타사유로 사용 못하게 되는 경우, 간헐적으로 혹은 임시로 사용되는 예전 사격장)을 이용했었는가 하는점. 또 정규사격장 이외에 별도로 조성된 비공식 사격 연습장등이 있었지도 확인 해보아야 할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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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항은 50사단측의 공식답변에 전적으로 의존하다 보면 50사단측의 고의 혹은 보유정보,기록등의 미비로 제대로 밝힐 수 없을 수 도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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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91년 전후) 와룡산 사격장을 이용했던 50사단 예하 단위부대와 그 부대들에서 근무했던 인원들에 대해 탐문(探問)을 통해 이번에 50사단측에서 공식적으로 넘겨준 자료와 비교하고 또 자체적으로 활용해야 할 것으로 판단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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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만약 91년 당시 주사격장이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 이용했던 임시(廢)사격장의 위치가 현재 소년들의 유골(遺骨)들이 발견된 지역과 인접하지는 않았 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도 확인되어야 한다.
10월 1일 대구지방 경찰청에서 있었던 문제의 와룡산 소재 사격장 관리부대인 육군 50사단측의 작전참모가 기자회견시 이렇게 힘주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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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당시 소년들이 총기로 총살돼 타살됐다면 어떻게 10여 년이 지난 지금 까지 밝혀지지 않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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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경찰측 이나 다수 언론은 최근 주목되고 의혹이 큰 사격장관련 유탄(流彈)에 의한 사망 가능성에 대해 의심은 들지만, 5명이나 되는 아이들에게 우발적으로 총기오발이나 유탄을 맞고 쓰러진 아이들을 현장에서 추가 타살하고 암매장(暗埋葬)까지 했다면 사격장 이라는 장소의 특성상 주변에 많은 인원들이 함께 있었을텐데,소년들을 타살하고 사체를 유기,매장 까지 할 수 있었 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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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생각하면 군병력이나 사격장에서의 유탄에 의한 사망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판단하는 경향이 있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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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격장을 이용해본 사람이라면 위와 같은 생각이 지극히 단순한 판단임을 알 수 있다.
즉, 통상 사격장에서 군부대가 사격할 때 가장 경계하는 것이 두 가지인데 첫째는 사격간 총기오발등에 의한 안전사고 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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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는 사격후 발생하는 탄피(彈皮)수거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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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격훈련이나 사격측정이 끝나고 단위부대는 탄피 갯수를 확인한다. 교육훈련용탄(교탄)을 쓰고 당초 부대에서 수령해서 가져온 탄알 갯수와 탄피숫자가 정확히 일치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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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피가 부족하면, 부대는 사격장을 떠나지 못하고 함께 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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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탄피 부족한 수량이 그렇게 많지 않으면, 부대인원 다수는 사격장에서 철수해 부대로 복귀하고, 일부 적은 수의 간부나 병사들만 남아 추가로 탄피를 찿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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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는 탄피가 부족하지 않아도 부대에서 가져온 교탄이 남는 경우에는 그걸 현장에서 소모하고 가려고 대부분의 병력은 철수하고, 극히 적은 간부등이 남아, 정식 사격 과녘이 아닌 그 사격장 이나 그주변 등에 단발(單發) 혹은 점사,자동사 형식으로 사격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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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사격장엔 탄피수거를 위해 남았던 몇 명 혹은 잉여(남는) 교탄을 다 소비하고 가려고 남은 역시 극소수의 몇 명이 남아 있는 상태라고 가정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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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넓은 사격장엔 이들 몇 명밖엔 없다. 사격장 관리 부대측 통제요원들도 철수한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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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사격장 목표 과녘이 아닌 주변일대 특정 목표물을 정하고, 부주의하게 혹은 장난 삼아 부담 없이 쏘았는데, 마침 부대 사격이 끝나면 사격장으로 들어가 탄피와 탄알을 수집하려고 사격장 가까이에 근접해 있던 소년들중 일부가 피격(被擊)될 가능성은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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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격간 지켜야할 기본적인 안전수칙 및 규범을 무시하고 사격하던 인원들이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 즉 무심코 사격한 것이 갑자기 나타난 민간 소년들이 맞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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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 있던 극히 적은 사격자들은 어떤 행동을 취할 것 같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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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엔 이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은 자기들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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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격간 기본안전수칙을 지키지 않고 총기오남용(銃器-誤濫用)을 한 이 사격자들의 선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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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속히 부대나 인근 병원으로 부상자 등을 후송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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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 현장을 목격한 사람은 자신들 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은페 하려는 내면의 유혹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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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사격장에 많은 사람들이 있다면 이들은 당연히 1)번의 행동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다수의 목격자들이 있기 때문에 당시는 모면해도 언젠가는 탄로 날것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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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위의 상황처럼 자신들 사격자 소수인원 몇 명 밖에 없다면 사정은 달라질 개연성이 크다. 더구나 이들은 사격장 안전수칙 및 규범을 지키지 않은 상태로 사격하다 사고가 난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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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그들은 형법상 정범(正犯)과 방조범의 관계가 된 이들은 이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길 극히 꺼릴 것이고 그렇다면 이들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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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에서 가정한 상황은 물론 최악의 보통 이성을 가진 인간이라면 생각할 수 도 생각하기도 싫은 최악의 선택이요, 행동일 것이다. 도덕적으로나 당위적으로는 도저히 있어서는 안될 일인 것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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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발적(偶發的)인 상황하에서 발생한 사고에 평상시의 이성과 양심으로 행동하긴 쉽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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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이 이런 극히 비극적인 상황을 가정한 것은 ,군측이나 일반인들,수사하는 경찰측도 사망한 소년들이 타살인 것으로 보고 유골주변이나 유골에서 탄환(彈丸)등이 발견 된 점을 미루어 보아 인근 사격장이나 군 병력에 의한 사고일 수도 있다고 강한 추정이나 의심을 하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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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격장이라는 장소적 특성을 떠올리며, 다수의 많은 인원들이 함께 있었을 것인데 만일 우발적으로 유탄 등에 의해 피격(被擊)됐더라도 사체유기 및 매장등의 증거인멸,은폐시도를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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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제껏 본인이 가정한 군관련, 사격장 관련 가정(假定)이 아니고 이번 사망사건이 민간인에 의해 와룡산 일대 혹은 제3의 장소에서 타살되고 유기(遺棄),매장(埋葬) 되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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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현재까지 언론 등을 통해 당시의 정황(情況)등을 보았을 때, 그것이 군사격장과 깊은 연관성(聯關性)이 있다고 본다면, 위에서 본인이 기술(記述)한 상황설정이 결코 허황되거나 실현성이 떨어지는 것이 아님을 밝혀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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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단순한 사격장에 대한 고정관념(다수인원이 항상 함께 한다는것)으로 사건발생과 연관성이 큰 수사대상을 간과(看過)하여 91년 사건당시의 초동수사에서의 실패(모든 발생 가능한 상황을 배제한 채 단순한 아동 가출,실종으로 보고 수사력을 집중한 점)를 되풀이 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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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유골과 발견된 옷가지에서 총알이 관통한 흔적이 없다고 하나, 유가족들의 증언도 그러하지만 소년들 상의와 일부 옷가지가 아직도 발견되지 않은점을 보아 경찰이 추정하는 옷가지에 탄환(彈丸)관통 흔적은 없다는 말은 부적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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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1일 50사단측의 해명가운데 사건당일인 1991년 3월26일은 지방자치 의원 선거일 이어서 사격은 일체 없었다고 확언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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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대구등지에 주둔하는 미군부대의 사격이 당일에는 없었는지 확인할 수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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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당일 사격장 이용은 일체 없었다고 확언하면서 평소 이용했던 미군사격이 당일에 있었는지 없었는지 확인을 못한다는게 말이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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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범인은 일단 군인이고~ 해당지역의 군인이 아닌 타지역의 장교 훈련병(?)
내지 미군일 가능성이 높네요...
2002년도 유골 발견했을 당시 뉴스보도보고 군인이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흠.. 영화 내용이 거의 사실에 치중되어 전개되게 만든것 같습니다. 꼭 봐야겠네요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