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름 피서철만 되면 산이나 계곡으로 휴가를 떠난다. 해수욕장으로 놀러가자는 여자친구의 보챔에도 나는 계곡을 더 선호한다. 왜냐하면 몇 년 전 나는 해수욕장에서 너무도 이상하고 생생한 체험을 했기 때문이다.
그 때도 지금처럼 더웠다. 강렬한 태양은 내 피부를 건강한 구릿빛으로 물들였고, 동네 선후배들과 함께 안면도로 여행을 갔었다. 그 중 한 명이 승합차를 가지고 왔던 덕분에 우리 여섯은 편안하게 안면도에 있는 펜션까지 도착할 수 있었고, 시원한 갈매기 울음소리와 함께 목청이 터져라 소리를 질러댔다. 그래도 창피하지 않았다. 모두가 들떴었기 때문에.
우리가 묵었던 펜션 근처에는 두 개의 해수욕장이 있었다. 사람도 많고 조개구이 집도 많은 큰 해수욕장과 사람도 적고 펜션 하나와 텐트촌밖에 없는 작은 해수욕장이 가운데 낮은 바위산으로 갈라져 있었다. 우리 펜션은 작은 해수욕장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곳에 위치했고 우리 방에서는 바다가 바로 보였기 때문에 경치도 아름다웠다. 싼 가격에 펜션을 알아본 한 동생에게 칭찬이 쏟아졌다. 옆의 큰 해수욕장으로 가려면 오분가량 걸어야했지만 우리는 너무 붐비지도 시끄럽지도 않은 그 곳이 좋았다.
짐을 풀고 한바탕 바닷물에 몸도 담갔던 우리는 허기가 져서 바베큐파티를 열기 위해 펜션으로 돌아왔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가득 배를 채운 우리는 술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껄껄대고 뒹굴고 시간을 보냈다.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각. 하루를 급하게 달렸던 우리는 하나같이 피로감을 느꼈다. 하나 둘 방으로 들어가고 나와 막내만이 거실에 남아서 아쉬운 듯 다 식은 고기로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때 창밖으로 뭔가 이상한 모습을 발견했다. 어둡기도 했지만 밤이 늦어서 불꽃놀이족들도 모두 집으로 돌아갔을 시간에 검은 사람 실루엣 하나가 해수욕장에 서 있는 것이었다. 나는 막내에게 '야 쟤는 아직도 힘이 나는갑다'라고 말했다. 막내는 내 말을 듣고 그쪽을 한참 주시하더니 '아 진짜네요. 이 밤에 혼자서 뭐하는 거지?' 우리 둘은 다시 술을 한 잔 했다.
그러다가 다시 해수욕장 쪽으로 눈길이 갔다. 그런데 아까 그 실루엣이 바다에 몸을 담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미 허리까지 찬 듯했다. 나는 노파심에 '뭐지? 자살하려는 건 아니겠지?'라고 하며 막내의 표정을 살폈다. 막내는 내 말을 듣고 시선을 해수욕장으로 돌렸다. 잠시 후. '어, 형님! 계속 천천히 들어가고 있어요! 어떡하죠?' 나는 막내의 말에 확신을 가질 수 없었으나 가슴까지 물에 잠긴 실루엣을 보고 우선 나가서 동태를 살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앞장서서 핸드폰으로 라이트를 켜고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혹시 몰라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리고 해수욕장에 다다랐을 때 그 실루엣이 조금 더 분명하게 보였다. 가늘고 마른 듯한 체형에 꽤 긴 생머리를 가진 걸로 봐서 여자임이 분명했다. 뒤따라온 막내가 소리쳤다. '저기요! 밤이라 위험하니까 빨리 나오세요!' 그러나 실루엣은 반응이 없었다. 그래서 이번엔 내가 외쳤다. '빨리 안나오면 가서 끌고나올겁니다!' 동시에 슬리퍼를 신은 발을 물에 담갔다. 그러자 실루엣이 반응을 보였다.
살짝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는 그 실루엣의 얼굴은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순간 흠칫 놀란 나는 한걸음 뒷걸음질 치고말았다. 그리고 예감이 들었다. 사람이 아니라는 예감. 그래서 막내에게 물러서라고 말하고 정체모를 그 실루엣에게 말을 건넸다.
"사람이면 뒤돌아 나오고 귀신이면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아라!"
자신을 알아차렸다는 것을 깨달은 것일까? 그 실루엣은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나는 깨달았다. 그 실루엣이 회전하고 있지만 물결은 잔잔하다는 것을. 실루엣은 제자리에서 도는 걸 결코 멈추지 않았다. 아침 해가 밝을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