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 없는 호이치 2

늑대의눈빛v 작성일 14.06.09 20:5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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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상대방은 조금 전보다 온화해진 말투로 대답했다.

 

"나는 이 근처 절에 숙박하고 있는 사람인데, 전언을 부탁받아 여기 왔다. 내가 현재 모시고 있는 주군은 신분이 매우 높으신 고귀한 분이신데, 지금 지체 높은 친구 분들 여럿과 함께 아카마가세키에 체류중이시다. 단노우라 전투의 옛 전장을 보고싶다 하셔서 오늘 그곳에 납시었다. 그 전투 광경을 노래하는 네 기예가 뛰어나다는 이야기를 들으시고는 꼭 한 곳 들려달라는 분부이시다. 사정이 이러하니 비파를 들고 나를 따라 나리를 비롯해 손님들이 기다리고 계시는 저택까지 지금 곧 와줘야겠다."

 

당시에는 사무라이의 명령을 가볍게 무시할 수 없었다. 호이치는 조리를 신은 뒤 비파를 집어들고는 낯선 사무라이와 함께 나섰다. 사무라이는 길을 잘 안내해주었지만, 걸음을 바삐 옮기도록 재촉했다. 호이치를 이끌고 가는 그의 손은 강철로 빚은 듯 단단했고 큰 보폭으로 걸을 때마다 금속성이 들려왔는데, 이를 통해 호이치는 사무라이가 갑옷과 투구로 무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틀립없이 어딘가에 있는 지체 높은 분의 처소를 경호하는 무사일 것이다. 호이치의 의구심은 사라졌따. 그는 이거 행운을 얻었구나 하고 남몰래 기뻐하기까지 했다. 사무라이가 '신분이 매우 높으신 고귀한 분'이라고 한 이상 자기 노래를 듣고 싶어한다는 나리가 가장 높은 다이묘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사무라이는 걸음을 멈췄다. 호이치는 그들이 커다란 문앞에 도착했음을 깨달았다. 아미다지의 산문을 제외하면 시모노세키의 이 근방에 이렇게 커다란 문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호이치가 희한하게 여기고 있는데 사무라이가 "문을 열라"하고 외쳤다. 그러자 빗장을 여는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은 문을 지나 넓은 정원을 가로질러 또 다른 입구 앞에 섰다. 여기서 사무라이는 커다란 소리로 불렀다.

 

"안에 계십니까? 지금 호이치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자 급한 발소리, 장지문 여는 소리, 덧문 밀어올리는 소리, 소곤거리는 여자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여자들의 말씨를 듣고 호이치는 어딘지 모를 지체 높은 집안을 모시는 이들이 분명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자신이 어디로 이끌려왔는지는 여전히 짐작도 가지 않았다.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는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돌계단을 몇 개 올라간 후 마지막 단에서 조리를 벗었다. 잘 닦은 마루가 깔린 끝도 없이 끝도 없이 긴 복도를 따라가며 시녀의 손이 호이치를 안내했다. 기둥이 있는 모퉁이를 몇 번이나 돌았는지 기억할 수도 없었다. 그들은 놀랄 만큼 넓은 다다미 방을 몇 칸이나 가로질러 널찍한 연회석 중간쯤에 나섰다. 여기에 수많은 높으신 분들이 모여 계시는구나 하고 호이치는 생각했다. 버스럭거리는 옷자락이 숲속의 잎사귀가 서로 스치는 듯한 소리를 내고 있다. 또 많은 사람들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소리도 들린다. 귀족들의 말투였다.

 

호이치는 마음을 편히 하라는 말을 들었다. 그를 위해 방석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 위에 앉아 악기의 상태를 바로잡고 있자니 시녀들을 관리하는 시녀장인 듯한 사람의 목소리가 호이치에게 이렇게 고했다.

 

"헤이케를 노래하고 비파를 타시오."

 

전곡을 부르려면 몇 날 밤이 걸린다. 그래서 호이치는 마음을 다잡고 물었다.

 

전곡은 금방 부를 수는 없으니 어떤 권을 불러드리면 좋겠습니까?"

 

시녀장이 대답했다.

 

"단노우라 전투 편이 특히 정취가 깊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 대목을 부르십시오."

 

그래서 호이치는 소리를 드높여 괴로운 전투를 노래하기 시작했다. 울리는 비파의 음색은 노가 삐걱거리는 듯, 흡사 배와 배가 서로 돌진하는 듯, 또 활이 윙윙거리면서 어지러이 나는 듯했고, 무사의 우렁찬 부르짖음이나 뱃전을 구르는 소리, 철모에 강철이 부서지는 소리, 나아가서는 찔려 죽은이가 허망하게 파도 사이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러자 호이치의 좌우에서 감동하여 칭찬하는 소리가 숨을 돌릴 때마다 들려왔다.

 

"이 얼마나 훌륭한 기예인가."

 

"우리들 고장에서는 이같은 노래를 들은 적이 없소."

 

"아니 일본을 다 뒤져도 호이치와 같은 헤이케 이야기꾼은 없을 것이오."

 

점점 더 신이 난 호이치는 전보다 더 솜씨 좋게 노래하고 연기했다. 주위에서는 감탄의 침묵이 깊어갔다. 하지만 마침내 아름답고도 무력한 이의 운명을 노래하는 대목에 이르렀을 때-여자들의 애처로운 최후와 팔에 어린 천황을 안은 채 바다에 뛰어든 니이노아마의 투신을 노래하는 대목에 이르렀을 때, 듣던 이들은 모두 일제히 비통한 탄실을 길게 내질렀다. 그리고 미친듯이 커다란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 호이치는 자신의 소리가 이끌어낸 비애의 격렬함에 저도 모르게 겁을 먹고 말았다. 오랫동안 오열과 흐느낌이 계속되었지만 이윽고 한탄하는 소리는 사라졌고, 이어지는 침묵 속에 시녀장임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던 여자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비파를 타고 헤이케를 노래하는 데는 그대에게 견줄 자가 없을 만큼 능하다고 들었으나, 오늘밤 노래해 보인 만큼 기예가 뛰어난 사람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주군께서는 그대에게 마땅한 사례를 하고 싶어하십니다. 오늘은 분명 돌아가야만 하시겠지요. 그러니 내일 밤도 오늘밤과 같은 시간에 오셨으면 합니다. 오늘밤 그대를 안내한 사무라이가 데리러 갈 겁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려야만 할 일이 있습니다. 주군이 아카마가세키에 체류하시는 동안 그대가 이곳을 방문했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알려서는 안 됩니다. 지체 높으신 분의 미행인 까닭에 이 일에 관해 발설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십니다. 이제 절로 돌아가셔도 됩니다."

 

 

 

호이치가 감사의 인사를 마치자 여자의 손이 호이치를 저택 현관으로 안내했다. 거기에는 조금 전에 자신을 데리고 온 사무라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사무라이는 호이치를 절 뒤편 툇마루까지 데려온 후 거기서 발길을 돌렸다.

 

호이치가 돌아왔을 때는 벌써 동 틀 무렵이었다. 아무도 그가 절을 비웠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다. 주지는 밤이 깊어 돌아왔기에 호이치가 자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낮동안 호이치는 좀 쉴 수 있었다. 이 희한한 일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날 밤이 되자 또 사무라이가 데리러 와서 높은 사람들의 모임에 데리고 갔다. 호이치는 전날 밤과 똑같이 갈채를 받았다. 그러나 이 두 번째 외출로 절을 비웠던 것이 뜻밖의 일로 들통나버렸다. 다음날 아침 돌아왔을 때 호이치는 주지 앞에 불려나갔다. 주지는 부드럽게 타이르듯이 말했다.

 

"호이치, 자네 때문에 안절부절못했다. 눈이 안 보이는 자네가 혼자서 이렇게 늦은 밤에 외출한다는 건 영 불안한 일이야. 왜 아무 말도 하지않고 외출을 했는가? 나간다면 하인이라도 아무나 같이 보냈을텐데. 대체 어디를 갔었나?"

 

호이치는 얼버무리듯이 대답했다.

 

"주지스님 용서하십시오. 조금 사사로운 볼일이 있어서요. 다른 시간에는 하기 힘든 일이었기에 그리 되었습니다."

 

호이치의 머뭇거림에 주지는 기분이 상했다기보다는 놀랐다. 그는 호이치의 대답에서 어딘가 어색한 솔직하지 못함을 느끼고 좋지 못한 일이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이 젊은이가 귀신에라도 홀린 것은 아닌가 생각한 것이다. 그 이상 캐묻지는 않았지만 주지는 호이치의 동정을 지켜보라고 일꾼들에게 슬쩍 일러두었다. 그리고 밤이 되어 또 절을 빠져나가기라도 하면 뒤를 밟도록 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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