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그날 밤 호이치가 절을 빠져나가려 하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하인들은 즉각 초롱을 들고 뒤를 밟았다. 그날 밤은 비가 내려 무척 어두웠다. 절 사람들이 한길로 나오기 전에 호이치는 벌써 모습을 감췄다. 아무리 봐도 그가 무척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길도 좋지 않았고, 호이치가 앞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기묘한 일이었다. 머슴들은 마을을 서둘러 둘러보고 호이치가 갈 법한 집을 죄다 찾아갔다. 그러나 그가 어디 있는지 아무도 몰랐다. 하인들은 결국 해변에서 발길을 돌렸는데, 이때 웬걸, 아미다지의 묘지에서 격렬한 비파소리가 들려오는 게 아닌가. 이곳은 캄캄한 밤이면 보통 도깨비불이 떠돌곤 했는데, 그 외에는 아무런 빛이 없어 칠흑같이 캄캄했다. 놀란 사람들은 곧장 초롱을 들고 묘지로 달려갔다. 그리고 빗속에 홀로 안토쿠 천황의 무덤 앞에 앉아 비파를 타며 단노우라 전투 대목을 큰 소리로 노래하는 호이치의 모습을 발견했다. 호이치의 등 뒤와 주위, 또 모든 무덤이란 무덤 위에 수많은 도깨비불이 흡사 촛불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일찍이 이렇게 많은 도깨비불이 사람 눈에 띈 적은 없는 듯했다.
"호이치 씨, 호이치 씨." 머슴들이 외쳤다. "당신은 귀신에 홀린 거요, 호이치 씨."
하지만 앞이 보이지 않는 호이치에게는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정신없이 비파를 울리며, 점점 더 광적으로 단노우라 전투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하인들은 호이치의 몸을 붙들고는 그의 귀에 대고 소리쳤다.
"호이치 씨, 빨리 같이 절로 돌아갑시다."
호이치는 나무라듯 대답했다.
"이처럼 송구스러운 곳에서 노래를 방해하다니, 용서받지 못할 겁니다."
이 말을 들으니 아무리 기묘한 상황이라고는 해도 하인들은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호이치가 귀신에 홀린게 분명하다고 생각한 하인들은 그를 붙잡고 억지로 일으켜 세운 뒤 서둘러 절로 끌고 갔다. 절에 도착한 그들은 주지의 명령으로 곧장 비에 젖은 호이치의 옷을 갈아입히고,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억지로나마 권하였다. 그러고 나서 주지는 호이치의 기막힌 거동에 관해 자초지종을 들려달라고 요구했다.
호이치는 오랫동안 입을 열까 말까 망설였다. 하지만 자신의 행동이 훌륭한 주지스님을 정말로 걱정시키고 화나게 했음을 깨닫자, 더이상 숨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사무라이가 처음에 찾아온 때부터 생긴 일을 전부 털어놓았다. 주지는 말했다.
"호이치, 불쌍하게도 자네는 지금 아주 위험한 상황에 처했네. 전에 나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지 않은 것이 잘못이었어. 뛰어난 음예를 타고난 것이 자네에게 이런 생각지도 못한 재난을 불러왔군. 이제는 자네도 알겠지만, 자네는 어딘가의 저택에 불려간 게 아닐세. 실은 매일 밤 묘지에서 헤이케의 무덤에 둘러싸여 밤을 지샌 것이야. 절 사람들이 오늘 밤 자네를 발견한 곳은 안토쿠 천황의 무덤 앞일세. 자네는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그곳에 앉아 있었어. 망자들에게 정말로 불려갔었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자네가 믿고 있던 것은 전부 다 환영이야. 일단 망자가 하라는 대로 한 이상 자네는 그들의 수중에 떨어지고 말았네. 이리 되었으니 만일 또 한 번 망자가 하라는 대로 하게 되면 자네는 그들에게 갈기갈기 찢길 게 분명하지. 어찌 되었건, 늦든 빠르든 간에 자네는 목숨을 잃었을 게야. 그러나 나는 오늘밤도 자네와 함께 있을 수가 없네. 다른 지체 높은 분의 법사로 부름을 받았다네. 허나 나가기 전에 자네 몸에 경문을 써서 자네 몸에 해가 없도록 해두지."
날이 저물기 전에 주지와 동자승은 호이치를 발가벗기고는 붓으로 그의 가슴과 등, 얼굴, 목, 손발과 발바닥 등 전신에 반야심경 문구를 써넣었다. 일이 끝나자 주지는 호이치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늘밤, 내가 나가면 자네는 툇마루에 앉아 가만히 기다리도록 하게. 누군가 자네 이름을 부르면 무슨 일이 일어나도 대답을 해서는 안 되네. 움직여서도 안 되고. 아무 말도 말고 잠자코 명상하듯 앉아 있게. 만일 움직이거나 소리를 내면 자네는 갈기갈기 찢기고 말 게야. 당황해서 도움을 청하거나 해서도 결코 안 되네. 도움을 청해도 소용없기 때문이지. 허나 지금 말한 것처럼만 하면 위험할 게 없네. 그리고 그걸로 두번 다시는 걱정할 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게 될 게야."
날이 저물자 주지와 어린 중은 절을 나섰다. 호이치는 주지가 시킨 대로 툇마루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비파를 마루위에 올려두고는 참선하는 듯한 자세로 가만히 있었다. 기침을 하거나 숨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조심했다. 그렇게 몇 시간이고 앉아 있었다.
그러자 길에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소리는 문을 지나, 마당을 가로질러, 툇마루로 다가와, 호이치 바로 앞에서 멈췄다.
"호이치."
깊숙한 목소리가 불렀다. 그러나 눈이 보이지 않는 호이치는 숨을 죽이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호이치."
목소리가 한 번 더 퉁명스레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다시 세 번째로 거칠게 "호이치"하고 소리쳤다.
호이치는 돌처럼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자 목소리가 중얼거렸다.
"대답이 없군. 곤란한 걸. 이놈이 어디 있는가 찾아봐야겠어."
무거운 발이 툇마루를 딛고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발길은 천천히 다가와서 호이치 곁에서 멈추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그동안 호이치는 전신이 심장 고동에 맞춰 와들와들 떨리는 것을 느꼈다-죽음과 같은 침묵이 계속되었다.
마침내 거친 목소리가 호이치 곁에서 중얼댔다.
"비파가 여기 있군. 허나 비파법사는 두 귀만 보일 뿐이다. 과연 이래서는 대답을 할 수 없는 게 당연하군. 대답하려 해도 대답할 입이 없는 게다. 이 자에게 남아 있는 것은 두 귀뿐이야. 그렇다면 가능한 한 말씀에 따랐다는 증거로 주군에게 이 두 귀를 가져가도록 하자."
그 순간 호이치는 좌우의 귀가 강철 같은 손가락에 붙잡혀 뜯겨나가는 것을 느꼈다. 고통은 끔찍했지만 그래도 호이치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묵직한 발걸음은 툇마루를 따라 사라져갔고 마당에 내려서더니 한길로 접어들어 들리지 않게 되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 호이치는 머리 양 옆에서 진하고 뜨끈한 것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느꼈지만, 까딱할 기력조차 없었다.
주지는 동이 트기 전에 돌아왔다. 절 뒤편으로 서둘러 돌아가 툇마루에 오르던 그는 뭔가 끈적끈적한 것을 밟고 미끄러졌다. 그러고는 오싹해져서 비명을 질렀다. 손에 든 초롱불빛으로 끈적끈적한 것이 피임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호이치는 명상에 빠진 자세 그대로 거기 앉아 있었다. 상처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오오. 호이치, 이렇게 가여울 데가."
주지는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이는 또 무슨 일인가. 자네, 부상을 입었나"
주지의 목소리에 눈이 보이지 않는 호이치는 비로소 살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갑자기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울면서 밤중에 일어난 일을 이야기했다.
"호이치, 미안하게 되었다. 호이치. 미안하네. 내 잘못이네. 내 불찰이야. 자네 온몸에 빠짐없이 경문을 적었다고 생각했는데, 귀에도 쓰는 것을 잊어버렸군. 그부분은 동자승에게 맡겨두었는데 제대로 썼는지 확인하지 않은 것은, 미안하네. 내 실수였네. 허나 이제는 도리가 없네. 가능한 한 빨리 자네 상처를 치료하는 수밖에... 자, 기운을 내게. 이제 위험한 일을 당할 일은 없을 거야. 두 번 다시 그런 망자들에게 불려갈 일은 없을 테니."
훌륭한 의사의 치료 덕분에 호이치의 상처는 머잖아 차도를 보였다. 호이치가 당한 희한한 사건은 사방팔방에 퍼졌고 그는 대단히 유명해졌다. 고귀하고 지체 높은 분들이 몇 사람이나 호이치의 노래를 들으러 아카마가세키에 찾아왔다. 대단한 액수의 보답을 받은 호이치는 부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 사건 이후 호이치는 오로지 '귀 없는 호이치'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졌다는 이야기다.